피터 (Pe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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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잠을 자다가 누군가 말없이 얼굴을 바라보는 느낌이 있어 살며시 눈을 떠 보았다. 피터는 나와 눈길이 마주치자 방그레 웃어 보였다. 나는 눈을 다시 감으며 환한 표정을 지었다. 피터는 내가 눈을 뜨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켜 세우며 엄마처럼 말했다.
"자는 모습이 이쁘네."
"언제 왔어?"
피터는 늘 붙어 있는데 새삼스레 묻는다며 주섬주섬 옷을 갖다 주었다.
"그만 인나 옷 입어."
"오 분만 더 자고."
나는 세상만사가 귀찮아 하품하며 기지개를 켰다. 피터는 다독이며 나에게 옷을 입혀 주고 외출을 서둘렀다.
"안 돼. 늦었어."
"피터는 잠도 없나 봐."
피터는 다 큰 녀석이 웬 어리광이냐고 이제 그만 나가 보자고 했다. 나는 그렇게 해서 피터와 같이 하루가 시작되었다. 피터는 내가 안 보면 몰래 딴전을 피우고, 관심을 안 가진다 싶으면 장난치고, 하루를 같이 보내더니 해질녘에 말도 없이 어디론가 훌쩍 가 버렸다.
나는 승용차를 살살 몰고 나만 아는 사람의 집 근처에 멈추었다. 승용차에서 내려 불이 켜진 창문을 쳐다보고 있는데, 피터가 그의 집에서 나왔다. 나는 소리 없이 빙그레 미소지으며 피터에게 말을 걸었다.
"어디 갔나 했더니 날 앞질러 왔구나."
"나랑 함께 들어가자."
피터는 내 손을 꼭 잡고 그 사람에게 가자고 했지만 나는 뒤로 몸을 버텨 내었다. 나는 피터와 몸싸움을 벌이는 게 싫어서 왔던 길을 돌아갔다. 피터는 성이 났는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차창 밖을 보고 있었다. 나는 승용차를 운전하며 속내를 털어놓았다.
"사실 나도 그 사람을 만나고 싶어서 갔는데 내 맘을 받아 줄지 몰라, 아니 용기가 나지 않아 그랬어."
"나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일단 부딪쳐 보는 게 좋잖아."
피터는 나와 늘 함께 어울려 지내는데 그 문제를 너무 쉽게 생각하고 내 속을 조금도 몰라주다니 못내 서운했다. 그리고 정말 섭섭한 생각이 들어 흥분한 목소리로 반박하고 나섰다.
"피터, 그거 알아? 그 사람이 나와 사귀기 싫다고 하면 돌아서서 오는 모습이 얼마나 비참한지?"
"그렇다고 언제까지 마음속에 담아 두고 지켜보고만 있을 거야?"
피터가 말대꾸를 또박또박하는 바람에 나는 말문이 막혀 할말을 잊었다. 나와 피터는 아무 말도 없이 잠잠히 있었다.
나는 피터와 함께 집에 돌아와 이부자리를 펴고 불을 끈 후에 잠자리에 들었다. 피터는 나와 얼굴을 마주하고 누었다. 나는 피터를 살포시 껴안으며 인사말했다.
"피터, 잘 자. 좋은 꿈 꾸고."
"어떤 게 좋은 꿈인데?"
내가 대답하면 피터가 말꼬리를 물고 늘어질까 봐 말없이 잠을 청했다. 주위에 무거운 정적이 흐르고, 피터는 내가 잠든 틈에 슬며시 밖으로 나갔다.
사실 피터는 나에 대하여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남자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내가 잠을 잘 때마다 텔레파시를 전해 주려고 피터는 그 사람을 찾아갔다. 나는 꿈을 꾸며 잠꼬대로 피터에게 감사의 뜻을 표했다.
"피터, 고마워!"
나는 늦잠을 자다가 누군가 말없이 얼굴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아 눈을 떠 보았다. 피터는 봄비가 온다고 이야기나 하면서 놀자고 했다. 나는 피터에게 궁금한 것을 물어 보고 싶어서 좋아했다. 피터가 나를 바라보고 눈을 맞출 때 질문했다.
"피터는 나 좋아하니?"
"그림자는 친구가 좋든 싫든 죽을 때까지 함께 해야 돼."
나는 피터의 모호한 대답을 듣고 확실한 것을 재촉했다.
"내가 좋다는 거니? 싫다는 거니?"
"솔직히 싫어."
나는 내심 속이 상했지만 겉으로는 담담한 체했다. 그래서 반격의 일환으로 피터에게 색깔에 대하여 물어 보았다.
"피터는 왜 검은색이지?"
"사람이 태어나면 그림자가 붙어서 나오는데 처음엔 투명해서 안 보이다가 세상에 찌든 때가 타면서 검게 변하는 거야."
피터는 덧붙여서 차근차근 자세히 설명했다.
"예를 들어 아이와 어른을 세워 놓고 그림자를 살펴보면 아이의 그림자가 덜 검다는 것을 알 수 있어."
나는 절호의 기회를 노리고 피터의 건방진 태도를 공박했다.
"그럼 깨끗이 씻으면 되잖아?"
"친구가 더러우니까 그림자도 검은 거지."
피터는 나를 보고 친구라고 하지만 나보다 피터가 말발이 세다. 나는 마음이 아픈 질문을 안 할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는 것이 나을 것 같아 피터에게 질문을 던졌다.
"나는 세월이 흐르면서 몸과 마음이 변해 가는데 피터는 왜, 한결같은 모습이지?"
"그러니까 영원히 늙지 않는 피터지."
"피터 넌 좋겠다."
비가 오면 내 마음도 젖어서 그런가. 내가 싫다는 피터에게 사랑한다고 말했다. 피터는 뜻하지 않은 말에 당황해서 몸 둘 바를 몰랐다. 나도 사랑한다고 말해 놓고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피터는 상기된 표정을 지으며 따지고 들었다.
"남자끼리 사랑이라는 말을 함부로 말하니?"
"난 피터가 좋아서 그랬는데 뭐가 잘못됐어?"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고 반문하니까 피터는 눈길을 한 곳에 고정하고 태연한 척했다. 나의 눈길이 피터를 주시하고 있자 참다못해 쓱 없어졌다.
그 이후 피터는 내 곁에 돌아오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림자에 관심을 가지지 않아서 내 것이 없어진 줄 모르고 있었다. 나는 피터가 없어지니까 왠지 마음 한구석이 허전하기 짝이 없었다. 그리고 자꾸 무엇을 빠뜨린 것 같았다. 피터가 없느니 차라리 마음속에 담아 두고 지낼 걸 이제 와서 후회되었다.
피터에 대하여 그릇된 일이 내 잘못으로 생긴 일인데 누구를 원망하랴. 나는 심하게 자책할 때쯤 피터는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엷은 미소를 지으며 나타났다. 나는 흥분을 감추고 피터의 본심을 알고 싶었다.
"전에 나보고 싫다고 했는데 정말로 싫은 거니?"
피터는 대답을 대신해서 머리를 가로 저었다.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피터에게 다시 질문했다.
"나를 얼마큼 좋아하니?"
"그걸 꼭 표현해야 아니? 나도 친구 맘 다 알아."
피터는 말하지 않았지만 내가 다른 사람을 더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피터는 내가 잠을 잘 때마다 그 사람을 찾아가서 텔레파시를 전해 주었다. 나는 피터를 힘껏 껴안으며 흥에 겨워 춤을 추었다.
"피터가 돌아오니까 기분이 째진다!"
"그럼 터진데 꿰매야겠네."
"으하하-."
나는 배가 고프지 않았지만 피터를 생각해서 맛있는 음식을 먹자고 했다. 피터는 나의 말에 맞장구치며 무엇을 먹을 것인지 물어 보았다. 나는 사이 좋은 친구에게는 제일 먼저 맛난 음식을 대접하는 거라면서 피터의 의향을 물어 보았다.
"내가 요리한 음식이 맛이 없는데도 피터는 맛있게 먹으니까 그걸 먹자."
"좋아! 오래간만에 먹으면 맛있을걸."
나는 피터가 환하게 웃는 모습을 바라보며 입맞춤하고 싶었지만 용기가 나지 않아 꾹 참았다.
나는 피터와 같이 음식을 먹은 후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피터는 나에게 좋아하는 사람에 대하여 조심스레 질문했다.
"그 사람은 어떻게 할 거야?"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마음대로 할 수 없지만 피터는 날 좋아하니까 어울려 다닐 수 있잖아."
피터는 입가에 미소를 띠고 나에게 한 방 먹였다.
"그럼 대체 사랑이네!"
피터하고의 일상생활은 활력이 넘쳤다. 나를 앞질러 걷다가 힘에 부치면 뒤로 처지고 그러다가 내 몸에 숨기도 했다. 가끔 기분이 언짢으면 나를 웃기려고 오른손을 들면 피터는 그 반대로 왼손을 들었다. 그래도 내가 웃지 않으면 발바닥에 붙어 있는 피터의 몸을 떼어서 어릿광대 짓을 했다. 그럴 때마다 피터 모습이 귀여워서 그 곳은 어떻게 생겼을까 궁금증이 일었다. 나는 피터의 옷을 벗기고 싶은 충동을 느껴 공연히 심술을 부렸다.
"너는 붙어만 있지 왜, 한 번도 마음을 열지 않니?"
"하나 밖에 없는 옷을 벗으면 친구와 영원히 함께 할 수가 없어."
피터는 하던 짓을 멈추고 서서 내가 철이 없다는 투로 자세히 설명했다. 피터가 하는 말을 허투루 듣고 나는 자기 욕심만 차렸다.
"나는 내 모든 것을 받아 주는 이가 간절히 필요해."
"후유-, 나도 친구의 모든 것을 받아 주고 싶어. 그렇게 못하는 내 마음을 조금이라도 이해한다면 친구를 잘못 만나지 않은 거야."
피터는 난감한 표정을 짓고 하늘을 쳐다보더니 땅이 꺼지게 한숨을 쉬며 괴로운 심정을 털어놓았다. 나는 피터와 달라서 욕망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이 필요했다. 그래서 피터에게 은근히 암시를 주었다.
"나, 누구든지 찾아 떠날래."
"친구 맘대로 해."
피터는 눈을 흘기고 공연히 헛수고하였다며 자신을 포기했다. 나는 피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본색을 드러냈다.
"피터 옷을 벗기고 싶어."
피터는 아무리 노력하여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고 모든 것을 포기한 채 눈을 감고 가만히 서 있었다. 나는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주저하지 않고 행했다.
"피터, 눈을 떠. 꼴 보기 싫은 것을 억지로 받아 주는 것처럼 하지 말고."
"친구야 이 감정이 ‥‥."
피터는 솟구쳐 오르는 슬픔을 지그시 참느라 목이 메어 말끝을 맺지 못했다. 나는 욕망이 일어 피터의 말을 귀여겨듣지 않았다. 피터의 웃옷을 벗기고 아래옷을 벗기며 궁금히 여겼다.
"피터, 너는 속옷이 없네!"
나는 고개를 들어 위를 보려는 순간 피터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나는 깜짝 놀라 정신을 잃고 있다가 한참 만에 제정신으로 돌아와 피터를 찾으러 사방을 둘러보았다.
나는 아침에 눈을 떠보니 홀로 외로이 누워 있었다. 나만이 항상 고독을 느끼는 일이지만 오늘 따라 텅 빈 마음을 가눌 길 없어 괜스레 눈물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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