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아라 황석호 -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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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2001년 1월 1일 월요일


  한 해가 밝았다. 하루하루가 무기력하고 사는 게 사는 것 같지가 않다.



2001년 4월 17일 화요일


  연습실을 옮기면 괜찮아질 줄 알았다. 하지만 마찬가지다. 민구랑 철우가 지하실이 아니라서 좋다고 하니까 그걸로 다행이라 생각하고 살아야지.

  철우가 기타를 제법 치지만 사운드가 안 산다. 결론은 재미가 없다. 베이스 주자를 소개 받고, 영기보다 훨씬 더 잘 치는 걸 눈으로 보면서도 마음에 안 찬다. 철우가 기타 치는 걸 좋아하는데, 그냥 세 명이서 가야되는 걸까.

  영기는 잘 살고 있는 걸까. 하루에도 몇 번씩 휴대폰을 만지작거리지만 문자 한 통 보내지 못했다. 그냥 공부 잘 되냐고 물어보면 되는 건데 왜 그게 안 되는 걸까. 공부를 잘 하고 있는 걸 너무나도 내가 잘 아니까. 많고 많은 직업 중에 하필이면 공무원이 되려고 하는지 이해가 안 가기는 해도 그건 동사무소 방위 출신인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거고, 영기는 영기 나름의 생각이 있는 거니까....

  지금도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다. 전화를 할까 말까.... 내가 영기를 생각하는 건 아무래도 사랑이 아닌 거 같다. 내 욕망이 만들어낸 집착이다. 아닌데.... 난 영기를 보고 있으면서도 보고 싶었는데.... 그건 사랑인데.... 이렇게 연락을 하지 않는 날이 하루하루 더해지면 영영 못 보고 헤어지는 것은 아닐까....



2001년 5월 11일 금요일


  오늘 공연 마치고 나오는데, 팬이 기다리고 있다가 베이스 치던 사람 요즘 왜 안 보이냐고 물었다. 가끔 공연 때 얼굴을 마주친 팬이었다. 근데 딱 봐도 게이였다. 옷 입고 다니는 거며, 목소리 톤도 높고, 특히나 손가락 마디 하나하나까지 끼스럽다. 내가 게이니까 게이는 딱 보면 안다. 민구도 게이 같다고 했으니 두 말 할 필요가 없다.

  내가 탈퇴했다고 하니까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키보드가 빠져도 공연이 좋았다고 치켜세우는데, 그냥 고맙다고 웃기는 했지만 왠지 나를 놀리는 거 같아서 존.나 짜증이 났다. 영기 빠지고 나서 사운드가 비는 게 확실하게 느껴지는 것은 내가 더 잘 아니까. 마음 같아서는 확 따.먹어 버리고 싶은데, 얼굴이 너무 못생겼다. 영기 반만 되도 따먹었을 건데.... 씨.발 저번에 만난 애한테 연락해서 나오라고 해야겠다.



2001년 6월 2일 토요일


  2,3일이 멀다하고 섹스를 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아서. 주말에 클럽에 가 있으면 눈빛만 봐도 알 수 있다. 민철이 형 말이 맞았다. 씨.발 내 뚱뚱한 몸뚱이와 큰 조ㅈ을 원하는 놈들이 너무 많았다. 원한다면 박아줘야지. 나랑 한 번 자면 그냥 막 벌린다. 내가 자지 큰 뚱이라서 희소성의 가치가 있다나 어쨌다나. 물렁살이 아니라 탄탄해서 엄청 좋단다. 그래 다 와라. 씨.발 다 박.아줄게.

  저번에 잤던 경민이를 오늘 또 만나서 했다. 이쁘장하게 생긴 게 존.나 섹스러운 새끼다. 조ㅈ도 잘 빨고, 선녀하강 자세로 허리도 잘 돌리고, 내가 밑에서 허리를 쳐주면 자지러지는 신음 소리가 대박이다. 내숭도 안 떨고, 세게 조ㅈ을 박아도 아픈 척 안 해서 좋다.

  저번에는 다 하고 그냥 헤어졌는데, 오늘은 이 새끼가 콘돔 벗기고 조ㅈ을 빨면서 나한테 사귀자고 했다. 사귀면 콘돔 안 끼고 해주겠다고.... 씨.발 하마터면 바로 사귀자고 할 뻔 했다.



2001년 6월 16일 토요일


  오늘 또 경민이를 만났다. 그냥 만나서 섹스만 하려고 했는데, 같이 밥도 먹고, 영화도 보고, 맥주도 한 잔 했다. 나한테 뭐하는 사람이냐고 자꾸 물어서 머리 긴 거 보면 모르겠냐고, 밴드한다고 했다. 씨.발년 자기가 뭐하냐고 물어놓고, 게이가 밴드하는 거 맘대로 말해도 되냐고 도리어 물었다. 어이가 없어서 게이는 밴드하면 안 되냐고, 내가 TV에 나오는 연예인도 아닌데 뭐 어떠냐고, 누구처럼 신문에 나서 밥줄 끊어질 걱정도 없고, 소문 나봤자 뒷말 좋아하는 것들끼리 몇 마디 할 거고, 내가 누군지도 모를 건데 뭐가 걱정이냐고 했다. 씨.발 옛날 같았으면 혹시 영기 귀에 들어갈까봐 걱정을 좀 했을 테지만 이제는 영기도 없는데....

  경민이 똥구멍에 생자지를 박고 그냥 안에 쌌다. 임신 걱정도 없는데 뭐 어때하는 생각이었다. 경민이도 좋아라 했다. 그동안 영기 때문에 아무도 안 사귀었는데, 이렇게 나 좋다고 콘돔도 안 낀 조ㅈ에 똥구멍 대주는 경민이가 사귀자고 난린데, 내가 뭐라고 망설이고 있는 건지.... 영기도 없는데.... 



2001년 6월 22일 금요일


  요즘 은정이가 노골적으로 다가온다. 정말 싫은데 어떻게 떼어놓을 방법이 없다. 처음부터 선을 확실히 그었어야 했는데, 그러지를 못한 게 후회된다.

  요즘 섹스 생각밖에 없어서 경민이한테 전화를 했다. 두세 번 울리기도 전에 전화를 받던 애가 계속 안 받길래 원룸에 찾아갔다. 나한테 그렇게 사귀자고 그래놓고 어떤 뚱땡이랑 같이 있었다. 자기는 원래 탑인데, 나한테만 바텀을 한 거라나 어쨌다나. 씨.발 존.나 꼴려서 그냥 셋이서 같이 했다. 경민이가 뚱땡이 똥구멍에 조ㅈ을 박고 있을 때 경민이 똥구멍에 조ㅈ을 박았다. 경민이가 열차 박을 해보고 싶었는데, 소원을 이뤘다고 좋아라 하길래 존.나 박아줬다. 경민이랑 뚱땡이를 나란히 엎드리게 해서 번갈아 가면서 박기도 했다. 씨.발 기분은 조ㅈ같은데, 색다른 느낌에 엄청 좋았다. 싸고 나서는 존.나 허탈했지만....



2001년 7월 7일 토요일


  씨.발 내가 무슨 짓을 한 건지.... 오늘 눈을 뜨고 나서 놀라 죽는 줄 알았다.

  어젯밤에 은정이가 하도 치근덕대길래 떼어 놓을 마음으로 민구랑 같이 셋이서 하자고 했는데 은정이가 콜을 하는 바람에 같이 모텔에 갔다. 내가 항문 섹스 좋아한다고, 그거 안 할 거면 안 간다고 해도 은정이가 다 해 준다고 해서 어쩔 수 없었다. 평소에 민구가 은정이 따먹고 싶어했으니까 그냥 나는 하는 시늉만 하고, 은정이랑 민구 둘이서 알아서 하겠지 하는 마음이었다. 씨.발 얼마 전에 셋이서 했던 게 계속 마음에 남아서이기도 했다. 민구랑 은정이가 하는 거 보다가 나도 땡기면 민구 똥구멍에 조ㅈ을 박을 마음도 있었다. 민구 새끼도 나만큼 변태고, 예전에 영기랑 그 일이 있었을 때 민구가 똥구멍 대줄까 하고 물어본 적도 있었으니까 받아들일 것도 같았다.

  근데 막상 모텔에 들어가니까 할 마음이 사라져서 그냥 침대에 누워서 술에 취해 잠이 든 척을 했다. 민구가 흔들어도 모르는 척을 했다. 민구가 은정이한테 내 자지를 빨아서 세우라는 소리가 들렸다. 진짜 빨리는 느낌이 들었다. 민구가 은정이한테 내 위에 올라가라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그리고 자지가 어딘가에 들어가는 느낌이 왔다. 나는 계속 자는 척을 했다. 그런데 이후로 기억이 없다. 진짜 잠이 든 것이었다.

  내가 눈을 떴을 때 소파에 앉아 있던 은정이가 보여서 진짜 깜짝 놀랐다. 민구는 없었다. 나는 황급히 발딱 서 있는 자지를 가리려고 이불을 덮었다. 은정이가 낄낄거리고 웃다가 먼저 나갔다. 민구한테 전화를 해서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더니 자기는 그냥 은정이가 내 위에 올라가 있을 때 똥구멍에 싸고 집에 갔다고 했다.

  씨.발 뭐가 뭔지 모르겠다. 별일이야 있겠어.



2001년 9월 14일 금요일


  공연이 끝나고 은정이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날 이후로 처음이었다. 나한테만 할 얘기가 있다고 해서 둘이 커피숍에 들어갔다.

  생리가 두 번이나 없어서 병원에 갔더니 임신을 했다는 결과가 나왔다는 것을 나에게 통보했다. 웃음이 나왔다. 게이가 임신을 시켰다는 게 너무나 웃겼다. 내가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쳐다만 보니까 은정이가 못 믿겠으면 병원에 다시 같이 가보자고 하길래 또 웃음이 나왔다.

  차라리 잘 된 일이었다. 민철이 형이 명절에 집에 오면 부모님이 결혼을 하라는 등살에 어쩔 수 없이 선을 보고 왔다고 나한테 하소연을 하기도 했고, 나도 아버지한테 은근히 여자친구가 없냐고 압박을 받고 있었으니 이번 참에 은정이를 집에 데리고 가면 될 것 같았다. 은정이에게 책임지겠다고, 결혼하면 되는 거 아니냐고 했다. 오히려 은정이가 생각해 보겠다고 했다.

  철우한테 무슨 일이냐고 전화가 왔길래 솔직하게 다 얘기했다. 철우가 미쳤냐고 쌍욕을 했다. 내가 저지른 일이니 내가 책임을 지는 게 맞다고, 철우 너도 사고 쳐서 결혼했으면서 왜 욕을 하고 지랄이냐고 나도 욕을 했다. 민구는 지우는 게 어떻겠느냐고 했다. 아마 자기랑 관련도 있으니 불편한 모양이었다. 나는 신경 쓰지 말라고 그냥 내가 책임지면 되는 일이라고 했다. 민구의 한숨 소리 때문에 땅이 꺼지는 줄 알았다.



2001년 9월 29일 토요일


  추석 연휴를 앞두고 은정이네 집에 찾아갔다. 임신을 시켰으니 결혼하겠다고 했다. 백수에 딴따라지만 아버지가 돈이 많고 지원을 해주니까 딸자식 굶길 일은 없을 거라고 했다. 내가 당당하게 나가니까 은정이네 식구들도 별 말이 없었다.

  씨.발, 남들 다 하는 결혼 나라고 못할까 싶다.



2001년 10월 1일 월요일


  추석이다. 저녁에 민철이 형이 집에 인사를 하러 왔다가 내가 여자를 임신시켰다는 말을 듣고 엄청 웃었다. 내가 진지하게 진짜라고, 결혼할 거라고 하니까 나한테 미쳤다고 혀를 끌끌 찼다.



2001년 10월 6일 토요일


  양가 상견례를 했다. 어차피 할 거 미루면 뭣하나 싶어서 일사천리로 진행했다. 날짜 잡고, 결혼식, 신혼여행 등을 예약할 일만 남았다.



2001년 10월 10일 수요일


  날짜가 잡혔다. 11월 4일이다. 결혼식은 내 맘대로 할 거라고 은정이에게 통보했다. 밴드 공연하는 식으로 할 거라는 내 말에 은정이도 오케이했다.



2001년 10월 25일 목요일


  영기가 연습실에 찾아왔다. 작년 12월 1일에 마지막으로 봤으니까 거의 1년 만이었다. 너무 반가웠다. 마음 같아서는 끌어안고 싶었지만 너무 쪽팔려서 그냥 반갑다고 웃기만 했다.

  영기가 결혼식에 와주는 것만 해도 고마운데, 같이 연주를 해주겠다고 해서 좋아 죽는 줄 알았다. 영기한테 참 부끄럽고, 마음에 내키지도 않는 결혼식이긴 하지만 영기의 축하를 받을 수 있어서 너무 좋다.



2001년 11월 3일 토요일


  내일 결혼식이다. 아버지도 연습실에 와서 같이 맞춰 봤다. 며느리랑 손주가 한꺼번에 들어온다고 아버지가 좋아하니까 내 마음도 그다지 무겁지가 않다.

  결혼식을 하루 앞두고 있으니 내가 결혼을 한다는 것이 조금 실감이 난다.

  오늘 내 기타 반주에 영기가 노래를 부를 때 너무 기분이 좋았다. 내가 영기에게 가장 듣고 싶은 말을 영기가 노래로 불러주니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영기가 이런 내 마음을 알면 나를 완전히 미친놈 취급을 하겠지만.... 옛날 영기 자취방에서 아침에 깼을 때 잠들어 있는 영기를 바라보며 몇 번이나 너를 사랑한다고 마음속으로 말했었는데.... 정작 사랑하는 사람한테는 말도 못하고, 하룻밤 실수로 전혀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과 결혼을 하는 내 팔자도 참 똥이다. 그래도 어쩔 수 있나, 내가 책임질 것은 져야 하니까....

  잘 되겠지.... 잘 될 거다.... 잘 안 되면.... 그것도 그 나름으로 잘 되는 거다.



2001년 11월 5일 월요일


  첫날밤은 무사히 넘겼다. 은정이 머리에 꽂은 실핀을 짜증을 내면서 뽑다가 다 뽑고 나서 그냥 자버렸다. 철우가 신혼여행 첫날 실핀 뽑다가 제대로 하지도 못했다고 투덜댔었는데, 나는 실핀 때문에 첫날밤을 아무 일 없이 보낼 수 있어서 오히려 다행이었다.

  오늘은 둘째날.... 지금 은정이가 샤워를 하고 있다. 은정이랑 모텔에 갔을 때처럼 자는 척하다가 진짜 자야겠다.

  근데 사이판은 너무 좋다. 씨.발 다음에 영기랑 꼭 다시 와야지.



2001년 11월 6일 화요일


  은정이랑 싸웠다. 뭐 예상했던 일이다. 오늘은 그냥 자지 말라고 했는데, 그냥 잘 거다. 하루 종일 리조트 수영장에서 놀다보니 엄청 피곤하니까.



2002년 2월 12일 화요일


  민철이 형이 세배하러 왔다가 아버지한테 한소리를 들었다. 석호는 결혼도 하고 조금 있으면 아이도 낳는데, 너는 왜 아직 결혼을 안 하느냐고, 석호처럼 빨리 결혼해서 부모님 마음 편하게 하라는 덕담이 아닌 잔소리를 들었다.

  민철이 형이 나를 끌고 나가 술 한 잔을 하면서 엄청 웃기만 했다. 나도 그냥 따라 웃었다. 웃는 것 말고는 정말 할 게 없었다. 헤어질 때 민철이 형이 대놓고 물었다. 진짜 내 아이가 맞냐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솔직히 나도 아직 의심스럽다. 은정이를 못 믿는 건 아니지만 내가 잘 때 벌어진 일이고, 나는 기억도 없으니까.

  은정이 배가 불러오는 것을 볼 때마다 마음이 복잡하다. 아이가 태어나면 제일 먼저 친자 확인부터 할 거다. 내 아이가 아니면 한 바탕 난리를 피우고, 그것을 계기로 다시는 결혼의 결자도 꺼내지 말라고 엄포를 놓을 거다.



2002년 5월 16일 목요일


  씨.발 월드컵 앞두고 강팀이랑 붙는 평가전인데, 아이 목욕시키고, 기저귀 갈고, 시시때때로 우는 거 달래주느라 축구도 제대로 못 봤다. 오늘 졌으면 존.나 열 받았을 건데 이겨서 다행이다.

  아이 목욕시킨다고 축구 못 봐서 자꾸 욕을 하니까 은정이가 자기가 할 건데 왜 욕을 하고 지랄이냐고 욕을 하길래 내가 더 심하게 욕을 해서 결국 또 싸웠다. 씨.발 이러다가 우리나라에서 하는 월드컵도 못 보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그래도 아이는 돌봐야 하니까....

  아이가 귀여워 죽겠다. 엄마가 어릴 때 나랑 똑같다고 했다. 근데 아직 이름도 못 지어줬다. 철우처럼 영기한테 지어 달라고 할까....



2002년 5월 22일 수요일


  아이 출생신고를 하러 갔다. 은정이가 아이 이름도 안 짓고 출생신고를 하러 가냐고 잔소리를 하길래 씨.발 내가 알아서 할 거라고 큰소리 치고 집을 나왔다. 마음에 두고 있는 이름이 있어서였다.

  출생신고서에 떨리는 손으로 아이의 이름을 썼다. 황영호. 영기와 내 이름 석호 중에 한 글자씩을 따서 지은 이름이었다. 이것 말고는 도무지 떠오르는 게 없었다. 서류를 다 작성하고 다시 한 번 살펴보는데, 아빠 이름이 황석호이고, 아들 이름이 황영호라서 부자 관계가 아니라 형제 같은 이름이고, 혹시나 누가 알아볼까봐 괜한 마음에 이름을 살짝 바꿨다. ‘남’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를 지우면 ‘님’이 된다는 유행가 가사처럼 ‘호’에서 획을 빼 ‘오’로 바꿨다. 떠오르는 한자가 다섯 오밖에 없어서 ‘英五’로 적어 넣었다. 쓰기도 쉽고, 부르기도 쉬운 이름이라 만족스러웠다.

  지금 영오가 내 옆에서 쌔근쌔근 자고 있다. 씨.발 너무 귀엽다. 귀여워도 욕이 나오는 게 신기하지만 씨.발 존.나 귀여운 걸 어떡해. 조심조심 토닥이고 영오야 하고 부르니까 싱긋이 웃는 것도 같다.



2002년 9월 12일 목요일


  영오가 백일이 지나면서 더 귀여워졌다. 내 백일 사진이랑 똑같이 생겼다. 내 옆에서 조용히 자고 있는 영오한테 진심으로 사과를 했다.

  영오야, 아빠가 살짝 의심해서 정말 미안해. 니 얼굴 보기 전에 진짜 살짝, 정말 살짝 의심했으니까 아빠 이해해줘. 진짜 진짜 미안해. 그리고 진짜 진짜 사랑해. 아빠는 이제 너 하나만 보고 살 거니까 무럭무럭 자라야 한다.



2003년 1월 15일 수요일


  은정이가 드디어 폭발을 했다. 도대체 이유가 뭐냐고 했다. 나는 나도 모르겠다는 듯이 그냥 고개를 저었다. 나도 결혼을 하고 은정이랑 살다보면 저절로 될 줄 알았다. 쉽지는 않겠다는 생각을 하기는 했지만 전혀 불가능할 것이라고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안 된다.

  나를 똑같이 닮은 영오가 내 핏줄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니 내가 은정이의 몸 안에 사정을 한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것을 마지막으로 한 번도 은정이의 몸에 들어가지를 않았으니 은정이도 불만이 가득하겠지.

  결혼 초창기는 은정이가 영오를 임신하고 있어서 그것을 핑계로 피했다. 출산 후에는 영오 낳는 걸 보고 엄청 충격을 받아서 할 수가 없다고 둘러댔다. 은정이도 출산 후유증으로 시달렸으니 그냥 넘어갔다.

  근데 이제는 더 이상 핑계를 댈 것이 없어서 마음을 내려놓고 은정이에게 몸을 맡겼다. 영오가 만들어질 때 그랬던 것처럼 내가 가만히 누워 있으면 은정이가 올라와 별 지랄을 다했다. 꼼짝을 하지 않는다. 내가 어떻게 은정이에게 사정을 했는지 나도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다. 아마 가장 큰 이유는 내가 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어서이겠지.



2003년 4월 14일 월요일


  합주를 끝내고 철우가 집에 가고 나서 민구가 나에게 따로 만나는 여자가 있느냐고 물었다. 질문의 의도를 몰라 대답 없이 물끄러미 쳐다만 보니까 민구가 솔직하게 말했다. 은정이한테 연락이 왔는데, 내가 다른 여자를 만나지는 않는지 물어보더라고 했다. 나는 당연히 없으니 고개를 저었다. 은정이가 임신을 했다고 말한 뒤로는 남자도 안 만나고 있는데, 무슨 여자를 만난단 말인가.

  은정이가 나를 의심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오죽 답답했으면 민구한테까지 연락을 했을까 싶어 조금은 안타깝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이해도 되었다.

  민구랑은 할 말 못할 말 다 하고, 영오를 만들 때도 같이 있었으니까 나도 대놓고 말했다. 은정이 보면 섰던 조ㅈ도 죽는다고. 그때는 잘만 했으면서 왜 그러냐고 민구가 묻는데, 대답할 말이 궁했다. 민구가 내 식성은 아니지만 그래도 남자니까, 셋이 같이 발가벗고 있었으니 발기가 됐던 게 아닌가 싶었다. 그것까지 민구에게 말을 할 수는 없어서 그냥 나도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그냥 은정이가 딴 남자를 만났으면 좋겠다. 그래야 나도 마음 편하게 남자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2003년 4월 30일 수요일


  민구가 나한테 문자메시지를 보여줬다. 은정이에게서 온 문자였다. 나랑 셋이서 같이 해보자는 제안이었다. 오죽 답답했으면 은정이가 이런 문자까지 보냈을까 싶어 이해가 되었다. 내가 그렇게 해볼래 하는 제안을 하기도 전에 민구가 화부터 냈다. 안 그래도 죄 지은 것 같아서 마음이 불편한데, 이런 문자까지 받으니까 미칠 것 같다고, 마누라 단속 잘 하라고 했다. 민구의 마음도 이해가 되었다. 한창 결혼 얘기가 오가는 와중에 이런 문자를 받았으니 감정이 요동칠 만했다. 모든 게 내 잘못이었다. 나 하나 때문에 여러 사람의 인생을 망치는 것 같아 마음이 찢어진다.



2003년 5월 9일 금요일


  오랜만에 영기를 봤다. 결혼이나 돌잔치를 해야 겨우 얼굴을 볼 수가 있으니 정말 반가웠다. 사람들의 눈치가 보여서 반가운 척을 하지도 못했다. 근데 신기하게 영오가 영기한테 안겨서 생글생글 웃었다. 할아버지 할머니한테도 잘 안 가려는 놈인데.... 자기 이름 한 글자가 영기한테서 나온 것을 아는 건가.... 설마.... 철우 아이들도 나랑 민구한테는 안 오는데 영기한테는 잘 가는 거 보니까 아이들도 잘생긴 걸 아는 것일 테지. 내가 애기라도 영기가 안아주면 좋을 거 같다.

  오늘 은정이가 무서웠다. 영지가 영기를 챙기니까 발끈해서 영기를 깎아 내렸다. 항상 은정이는 영기에게 날을 세우고 있었으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일이었지만 오늘 은정이를 보고는 은정이가 영기에게 질투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내 마음을 은정이가 알아챈 것 같아 소름이 끼쳤다.

  근데 영기 때문에 마음이 좀 상했다. 누구보다 잘 아는 놈이 사운드가 빠질 거 같다는 얘기를 했다. 자기 때문인데, 자기가 밴드를 때려치우고 나가서 사운드가 비는 건데, 그래서 내 마음도 공허한 건데.... 하긴 내 잘못으로, 내 욕심 때문에 영기가 나간 거니까 영기를 원망할 수도 없었다.

  영오가 돌잡이에서 기타를 잡는 바람에 무겁던 내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나를 이해하고 알아주는 놈은 내 아들 영오밖에 없는 것 같아 더욱 사랑스러웠다.



2003년 7월 21일 월요일


  은정이가 결국 또 폭발을 했다. 나도 폭발을 했다. 쌍욕이 난무하는 설전이 오고 갔다. 영오가 아니었으면 폭력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었다.

  그냥 조용히 헤어지자고 했으면 나는 얼마든지 받아들이고 조용히 보낼 생각이었는데, 은정이가 먼저 내 상처를 건드렸다. 영기 얘기만 안 했으면 나는 그냥 욕을 듣고만 있었을 텐데.... 은정이는 역시나 내가 영기를 좋아하는 걸 눈치 채고 있었다. 여자의 촉은 정말 무서운 것이었다. 한 번도 자기한테는 영기를 바라보는 눈빛을 보낸 적이 없다고, 설마 설마하면서 참고 살았는데 영오 돌잔치 때 확실히 알게 되었다고, 그냥 딴여자를 사랑하면 머리끄댕이를 잡고 싸울 수도 있는데 남자랑은 싸울 수도 없어서 기분이 조ㅈ같다고 했다. 씨.발년.... 조ㅈ도 없는 년이 조ㅈ같다고 하니까 웃겼다. 내 마음을 들켜서 놀란 마음을 감추기 위해 나도 은정이의 치부를 드러냈다. 딴남자 만나는 거 알면서도 모르는 척했는데 적반하장이라고, 말도 안 되는 영기를 끌어들이는 너는 정말 쓰레기 같은 년이라고 욕을 했다. 정말 내가 쓰레기 같았다.

  은정이가 집을 나가서 안 들어온다. 영원히 안 들어왔으면 좋겠다.



2003년 7월 26일 토요일


  은정이와 완전히 끝을 냈다. 이혼 합의서에 도장을 찍고 다시는 보지 말자고 서로에게 쌍욕으로 다짐을 했다. 내가 비겁하게 은정이의 외도를 구실 삼아 위자료 없이 끝을 맺었다. 은정이가 내세우는 나의 귀책사유는 법적으로 통하지 않았다. 나는 성불구도 아니고, 영기와 그 어떤 행위도 하지 않았으니 은정이가 내세우는 것은 공염불에 불과했다. 결과적으로는 내가 이겼지만 은정이에게 진심으로 미안했다. 은정이의 앞날을 위해 영오는 내가 맡았다. 아니 솔직히 은정이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영오를 맡은 것이었다. 영오마저 없다면 나는 정말 살지를 못할 것 같아서....



2003년 10월 11일 토요일


  영기가 왔다고 철우한테 연락을 받자마자 연습실로 달려갔다. 영오를 엄마한테 맡길 여유도 없었다. 철우랑 민구가 영기한테 아무 말을 안 한 것인지 영기는 은정이랑 헤어진 걸 모르고 있었다. 영기한테 너무 쪽팔렸다.



2003년 10월 19일 일요일


  어제 민구 결혼식에 갔다가 영기 집에 처음으로 찾아갔다. 단촐하지만 깔끔하게 살고 있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영기는 변한 게 하나도 없었다. 혼자 살면 귀찮아서라도 대충 어질러 놓고 살 텐데 영기는 그런 게 하나도 없었다. 설거지거리가 밀려 있는 나랑은 완전히 달랐다. 그냥 막 쳐들어간 건데 씽크대가 텅 비어 있고, 욕실에도 물기 하나 없이 깨끗했다. 침대도 잘 정리가 되어 있었다. 사귀는 년을 데리고 와서 섹스도 하고 그랬을 텐데.... 영기는 성격처럼 섹스도 다소곳하게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영기를 보니까 또 욕망이 들끓어 올라 자고 가도 되냐고 했더니 영기가 흔쾌히 허락을 해서 기분이 엄청 좋았다. 영기랑 처음 잘 때 그랬듯이 영오 재우고 밤새도록 둘이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싶었는데.... 영기는 선을 확실히 그었다. 단순히 선만 그은 것이 아니라 아예 공간을 분리해서 나를 다른 방에 자게 했다. 그때의 기억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이 분명했다.

  나라는 놈은 정말 사람들에게 상처만 주고 사는 것 같아서 내가 너무 밉다.



2004년 7월 24일 토요일


  영기 집에 영오 핑계로 자주 갈 수 있어서 너무 좋다. 영오가 영기랑 잘 놀아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 아빠 마음을 잘 아는 내 새끼.... 생긴 것도 똑같은데 영기 좋아하는 것도 지 아빠랑 똑같다.

  야, 황영오, 너 혹시 나처럼 영기한테 마음이 있는 거니? 너도 나 닮아서 남자 좋아하는 게이인 거니? 그럼 안 돼. 혹시 만에 하나 니가 게이라 해도 나는 이해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영기 좋아하면 안 돼. 그거는 이해해 줄 수도 없고, 이해하기도 싫어. 그러면 나처럼 너도 마음 아프거든. 그리고 너랑 나는 아빠랑 아들이니까 더 그래서는 안 돼. 영기는 내 꺼 거든. 나만 사랑할 거 거든. 니가 내 아들이라고 해도 영기를 양보할 수는 없어.

  진짜 나는 미친놈이다.



2004년 11월 28일 일요일


  영기가 내 부탁을 들어줘서 오늘 녹음을 마쳤다. 영기가 노래하는 것을 듣고 있으면 모든 근심 걱정이 다 사라지는 것 같다.




-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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