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빛깔의 이야기 -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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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록……초립둥이 


   나는 집에서 나와 원룸에서 혼자 자취 생활했다. 기숙사 생활은 성격에 맞지 않아 고생길로 자처했다. 아침을 간단하게 먹은 후에 스포티한 캐주얼웨어로 차려 입고 원룸을 나섰다. 첫강의가 있는 날 나는 일부러 천천히 걸으며 주위를 살펴보았다.  그사이 시험을 보러 대학교에 들락날락했어도 캠퍼스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런데 어마어마한 규모의 캠퍼스로 들어서자 빼어난 조경 식수가 한눈에 들어왔다. 캠퍼스에는 여기저기 봄빛이 완연했다. 


   나는 강의실로 통하는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다. 많은 학생들이 복도를 오고갔다. 강의실 안에는 학생들이 모여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강의실을 구석구석 둘러보고 앞 좌석 가운데에 앉아 수업이 시작하기를 기다렸다. 학생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귀담아듣다가 졸려서 눈이 스르르 감겼다. 강의실 의자에 앉아 졸고 있는데 갑자기 정적이 흘러 눈을 번쩍 떴다. 교수가 강단에 올라서서 학생들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김 교수가 교양을 강의하고 있을 때 한 학생이 슬그머니 문을 열고 들어왔다. 학생은 수업을 방해할세라 조심조심 의자에 앉았다. 그 학생은 하필 많고 많은 자리 중에 내 옆에 않았다. 나는 학생 얼굴을 한번 힐끗 보더니 마구 가슴이 설레었다. 여태껏 어지간한 여자를 사귄 적이 없었는데 이제 와서 남학생에게 호감을 품다니. 나 자신도 알 수 없는 설레이는 마음을 의아하게 생각하고 남학생을 다시 바라보았다. 설마했는데 역시 내 직감이 맞았다. 어느덧 남학생에게 관심을 가지는 사이에 강의가 끝나고 학생들이 웅성거렸다.


   나는 목적 달성을 위해 남학생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했다. 강의실을 옮겨 갈 때마다 남학생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 남학생은 나의 의도를 눈치채지 못하고 학업에 열중했다. 나는 남학생의 매력에 끌려 수업은 뒷전이었다. 


   점심 시간, 나는 구내식당에서 식판을 들고 주위를 휘둘러보다가 빈자리를 찾아냈는데 공교롭게도 남학생과 마주 앉았다. 남학생은 흰색 세로 줄이 진 검은색 트레이닝복을 입고 점심을 먹으며 나의 허점을 예리하게 지적했다.

"날 아까부터 왜 따라다니지?"

"내가? 웃기고 자빠졌네. 우연의 일치겠지."

"능청떨지 마. 글고 초립둥이인 주제에 날 언제 봤다고 반말이냐?"

"그쪽이 먼저 반말했잖아."

"나 이래 봐도 삼수생이니까 까불지 마."

나는 남학생의 말에 가슴이 뜨끔했지만 자기의 입장을 물러설 수 없어 아무렇지도 않게 말대꾸했다.

"호칭은 붙여 줄 수는 있는데 형 대우 받을 생각은 말어. 글고 보니 형 동안이다."

"그런 소리 많이 들어. 이것도 인연인데 우리 통성명이나 하고 지내자. 난 차로라고 해."

"난 기소야. 근데 오티(orientation) 할 때 왜 못 만났지?"

"얘들끼리 노는 데 끼기 싫어 참석 안 했어."


   차로와 나는 대학 생활과 강의에 적응하면서 지냈다. 서로 뜻이 맞고 아주 친하여 늘 함께 어울리는 사이로 캠퍼스에서 동성연애에 빠졌다고 소문이 자자했다. 차로와 나는 소문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우정을 돈독히 했다. 


   나는 요리 솜씨를 뽐내려고 원룸에 차로를 초대했다. 차로는 저녁을 맛있게 먹고 나를 극구 칭찬했다.

"이렇게 맛있는 저녁은 생전 처음 먹어 본다."

"정말?"

"난 이날 이때까지 거짓말 한번 안 하고 살었어."

"에이, 그게 사실일까?"

차로는 묻는 말에 대답하지 않고 능글능글 웃기만 했다. 나는 밥상을 물리고 차로와 자연스럽게 술을 마셨다. 나는 술의 힘을 빌려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나 ‥‥ 형을 사랑해도 돼?"

"맘대로 해."

"정말?" 

"응, 근데 사랑이라는 말 뜻을 알고 그러는 거니?"

차로의 뜻하지 않은 반문에 나는 대답에 급급하여 거리낌없이 말했다.

"그럼, 언제든 그걸 할 수 있다는 거지."

"으하하-. 우린 둘 다 남자잖아."

"남자끼리 사랑하지 말라는 법이 있나?"

내가 농담으로 얼버무리자 차로가 동성연애에 대하여 물어 보았다.

"그럼, 누가 탑(top)이고 누가 바텀(bottom)인데?"

"그게 무슨 말이야?"

차로는 동성연애를 경험한 것처럼 차근차근 자세히 설명했다.

"응, 탑은 성행위에 남자 역할 하는 거고, 바텀은 여자 역할을 맡는 거야."

"형이 그걸 어떻게 알아?"

나는 이상한 생각이 들어 차로와 눈을 맞추고 물어 보았다. 차로는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고 음흉하게 웃으며 나의 생각을 어루더듬어 보았다.

 "웬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데 이 순진한 친구만 모르고 있구먼. 아, 니가 둘 다 경험해 보면 되겠다."

"웃기고 자빠졌네."

차로는 나에게 다짜고짜로 달려들어 웃을 벗기기 시작했다. 나는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르며 차로가 하려는 것을 한사코 제지하였다.

"으악! 형, 잠깐만 ‥‥ 아이고, 나 죽는다."


   나는 어제 밤 원룸에서 차로와 함께 잤다. 차로는 아침 일찍 일어나 얼굴을 마주 보고 나를 매우 귀여워했다.

"에이, 내숭떨더니 그거는 잘하는구먼."

"뭘, 형이 그걸 가르쳐 주고서 무슨 소리하는 거야?"

"그동안 그걸 어떻게 참으며 지냈데?"

"웃기고 자빠졌네!"


   나는 성행위의 후유증 때문에 차로를 배웅하러 나가지 못했다. 차로는 거뜬하게 차리고 나서는 것을 보면 성행위쯤은 이제 단련이 되어 힘들지 않은 듯했다.


   어느덧 봄이 가고 여름이 왔다. 나는 차로를 캠퍼스에서 만나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쩌다가 서로 눈길이 마주치자 기분이 이상야릇했다. 1학기말 시험을 마치고 나니 섭섭하면서도 홀가분했다. 나는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로에게 여름 방학 계획을 말했다. 그런데 차로는 동문서답했다.

"나 휴학계 내고 군대 갈거야."

"아니, 맘이 왜 변한 거야?"

"내가 변한 게 아니고 니가 하는 행동이 말해 주는 것 같은데."

"형, 마음이 어떻게 한결같을 수가 있어? 내 감정에 너무 치우치다 보면 그럴 수도 있잖아."

나는 변명에 급급하여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차로는 나의 속을 조금도 몰라주고 자기 주장을 끝까지 굽히지 않았다.

"우리 이쯤에서 헤어지는 게 나을 거 같으니까 미련 가지지 말고 돌아서자."

"진짜 웃기고 자빠졌네. 좋아! 맘 변하면 언제든 돌아와."

"아마 그럴 일은 없을 걸."

차로는 냉정하기가 얼음장 같아 정나미가 떨어졌다. 나는 등을 돌려 차로와 캠퍼스에서 헤어지며 속말했다.

'군대에 가기 전에 콱 뒈져 버려라!'

"에취!"

내가 속으로 욕하는 것을 아는지 차로가 재채기했다. 나는 터무니없는 거짓말하면 콧구멍이 간질거려 재채기하는데, 그러나저러나 그 누가 천야만야한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는 나를 구해줄까?


   나는 짐을 싸 들고 집에 돌아왔다. 그러나 차로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아 미칠 지경에 이르렀다. 나 자신은 변한 것이 없고 다만 차로가 나를 떠났을 뿐인데 마음이 동요했다.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몸부림치는 나는, 종일 방 안에서 뒹굴고 있었다. 어머니는 나의 처지도 아랑곳없이 자기 뜻대로 밀고 나갔다.

"기소야, 얼른 청소하고 빨래 좀 널어라."

나는 어머니의 말을 들은체만체하고 집 밖으로 나가 버렸다. 슬리퍼를 질질 끌고 시내를 어정어정 돌아다니다가 명하를 백화점 앞에서 만났다. 명하는 나를 보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색했다.

"야, 어디 가니?"

"그냥 나왔어."

"잘 됐다. 우리 집에 가서 놀자."

명화는 나와 통하는 데가 있어 가족처럼 스스럼없이 지냈다. 나는 명하의 마음속을 환히 꿰뚫고 직설적으로 말했다.

"너 부모님 안 계시지?"

"너 돗자리 깔고 거리로 나앉아야겠다."

나는 명하에게 눈길을 주고 소리 없이 빙그레 미소지었다. 명하는 내가 오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억울함을 하소연했다. 

"아, 글쎄 내가 방학해서 집에 오자마자 울 꼰대 해외 여행 갔어. 날 집 지키는 개로 아나 봐."

"으하하-. 니가 평소에 얼마나 못되게 굴었으면 그렇게 했겠냐?"

사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나 자신도 부모를 위하는 마음이 형편없다. 아무튼 명하는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서 사람을 도나캐나 사귀는 연애 박사로 한때 이름을 날렸다.  


   명하와 나는 같이 저녁을 먹고 텔레비전을 시청했다. 명하는 사각으로 된 팬티를 입은 채 소파에 앉아 오락 프로를 보았다. 나는 명하의 아랫도리 부분을 한번 힐끗 보고 이내 시선을 텔레비전 쪽으로 옮겼다. 텔레비전 배경 음악과 명하의 휴대전화 벨이 어우러져 분간할 수가 없었다. 나는 휴대전화가 온 것을 명하에게 일러 주었다.

"야, 전화 왔어."

"여보세요?"

명하는 텔레비전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전화를 받았다. 나는 귀를 쫑긋 세우고 통화를 엿들어 보았다. 상대방의 말은 소리가 작아 들리지 않았다. 명하는 휴대전화를 내려놓으며 나의 의중을 떠보았다.

"내가 아는 형이 술 사 가지고 온데."

"혹시 내가 아는 형이야?"

"아마 모를 걸. 그 형은 삼수하고 이번에 학교에 갔으니까."

명하가 삼수라고 말하는 순간 문뜩 나의 머릿속에 차로의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나는 차로를 잊어버리려고 명하에게 말을 시켰다.

"그 형 어디서 만났어?"

"요전에 클럽에서 술 마시다가 대판 싸우는데 그 형이 나서서 단번에 해결해 줬어."

"힘 꽤나 쓰나 본데. 근데 무슨 술 사온데?"

"보나마나 돈 없는 학생에게 부담이 적은 술이겠지." 

"안주는 뭘로 하고?"

"울 집 냉장고에서 아무거나 먹으면 돼. 근데 이게 오늘따라 왜 이리 질문이 많지?"

명하가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어 나는 멋쩍게 씩 웃어 보이며 시선을 돌렸다. 텔레비전에서 게임과 노래와 춤 등으로 즐겁게 프로그램을 진행해 나갔다.


   딩동-

나는 초인종 소리를 듣고 명하를 대신해서 현관문을 열어 주고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차로가 내 앞에 나타나다니. 이게 꿈일까 생시일까? 차로는 내심 몹시 당황했으나 애써 천연한 표정을 지으며 인사말했다.

"안녕하세요?"

"예, 어서 오세요."

나는 짐짓 모른 체하고 인사로 답례했다. 차로와 명하와 나는 거실바닥에 술자리를 잡고 편히 앉아 권커니 잣거니 술을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일부러 차로와 눈길이 마주치면 술잔을 기울였다.


   차로가 사 온 술을 금세 마셔 버렸다. 사람은 술을 친구로 삼고, 술이 사람의 마음을 동탁하게 만들었다. 양주는 명하 아버지가 무척 아끼는 것인데 술기운이 올라 그것도 마저 겁 없이 마셨다. 술은 힘 있는 자가 정복하는 것이라 체력이 달리면 그것으로 끝이였다. 나는 차로와 명하를 두고 집으로 돌아가려고 일어섰다. 명하는 내 손을 꼭 잡고 못 가게 말렸다.

"왜 벌써 일어서니? 더 놀다 가지."

나는 명하가 잡은 손을 뿌리치고 밖으로 나갔다. 집안에만 있지 않고 바깥바람을 쐬니 우울했던 기분이 풀렸다. 술에 취한 몸을 이끌고 가로등을 따라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멀어 보였다. 하늘을 우러러보니 밤하늘에 별이 뜨지 않았다. 누구를 막론하고 나를 대신할 수 없다. 그래서 차로에 연연하지 않고 나 자신을 위하여 하루하루 열심히 살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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