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빛깔의 이야기 -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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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랑……원수 같은 아들


   훈이가 오기를 기다리다가 지친 종호는 잠이 막 들려고 할 때 현관문이 조용히 열리는 소리를 들었다. 훈이는 발소리가 나지 않게 조용조용 걸어 방 안으로 들어갔다. 종호는 훈이 일에 대해서는 한시름 놓고 잠을 청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훈이가 거실에서 우당탕거리며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훈이가 먹은 것을 토하는 소리가 밤의 정적을 깨뜨렸다. 종호는 훈이를 나무라듯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한밤중에 잘 한다!"


   훈이가 술병이 나 욕실에 들락날락하는 바람에 종호는 걱정 때문에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날이 막 밝을 무렵, 종호는 집안이 조용하여 마음놓고 잠을 청했다. 그런데 훈이가 종호의 방에 노크도 없이 불쑥 들어와 다짜고짜 명령조로 말했다.

"아빠, 저 대신 친구 면회 좀 다녀오세요."

"못 가."

훈이는 종호에게 얼토당토하니한 도움을 청했다. 종호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한마디로 거절했다.

"아빠가 정 그렇게 나오면 부자간에 인연을 끓을 거에요."

"나 하나도 안 겁나니까 니 맘대로 해라."

훈이는 어른 앞에서 함부로 엄포를 놓았다. 종호는 호락호락 넘어갈 사람이 아니라 만만찮게 대응했다. 훈이는 종호의 맞갖잖은 태도에 토라져서 입을 삐쭉거리고 방을 나갔다. 종호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을 자려고 눈을 감았다. 그러나 훈이의 일이 마음에 걸려 잠이 오지 않았다. 종호는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다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며 투덜거렸다.

"저건 아들이 아니라 웬수야!"


   종호는 욕실 안으로 들어가 양치질하며 거울을 보고 있었다. 훈이가 후닥닥 들어와 삼각팬티를 벗고 변기에 앉아 묽은 똥을 누었다. 종호는 양치질하다 말고 어이없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비아냥거리는 투로 말했다.

"잘 한다! 다 큰 애가 채신머리 없이 가랑이를 떡 벌리고 볼일을 보냐? 

"어때요? 아빠랑 함께 목욕도 가는데, 그리고 아빠는 똥 안 누고 살아요?"

훈이에게는 말싸움으로 못 당하니까 종호가 양치를 마치고 그의 약점을 들추어냈다.

"야, 밤새 먹은 걸 토하더니 이젠 아래가 터졌냐?"

"히-. 아빠, 메모지에 면회 가는 길 적어 놨어요." 

종호는 훈이와 말싸움해서 지더니 기어이 욕실을 나가면서 불쑥 한마디 내뱉었다.

"아유, 못된 놈은 똥 냄새도 독하다!"

"메롱-."


   "야, 신난다!"

종호는 파자마를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탁자 위에 놓인 메모지를 읽어 보더니 환호성을 질렀다. 종호는 입술에 메모지를 대고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훈이는 욕실에서 나와 종호가 기뻐하는 표정이 얼른 납득이 가지 않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종호는 틀어진 마음을 돌리더니 그제야 훈이를 위하여 위로의 말을 건넸다.

"너 병원에 안 가도 되겠어?"

"병원에 도착하기 전에 큰일 저지르게 생겼어요. 제 걱정하지 마시고 잘 다녀오세요. 참, 친구한테 맛있는 거 많이 사 주세요."

"그래, 니 용돈에서 이번 경비를 제하면 되니까 걱정하지 마."

"아빠! 아빠한테 용돈 타서 이것저것 쓰다 보면 쓸 돈이 없어요. 돈이나 많이 주면서 그런 말씀하세요."

훈이가 눈살을 찌푸리고 불평을 늘어놓자 종호는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아무튼 공짜는 없는 줄 알고, 나 없는 사이에 일 저지르지 마."

"알았어요. 아빠나 ‥‥ 윽!"

훈이는 용변이 급해서 할말을 못하고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종호는 메모지를 지갑에 넣고 구두를 신었다.


   종호는 승용차를 몰고 면회를 갈까 하다가 지난밤에 잠을 이루지 못해 대중 교통을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아파트 앞에서 택시를 잡아타고 버스 터미널에 도착하자 때맞게 홍천으로 가는 시외버스가 출발할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종호는 매표소에서 버스 승차권을 구입하고 시외버스에 오르자마자 잠을 청하여 보았다. 시외버스가 복잡한 시내를 잘 빠져 나가 고속 도로를 쌩쌩 달렸다. 종호는 짙푸른 산의 풍경을 보는 순간 문뜩 3년 전의 일이 머리를 스쳤다.


   매미가 바람이 불지 않는 무더운 날씨에 짜증을 내며 맴맴거렸다. 종호는 베란다에서 빨래를 널고 있는데 창문 너머로 훈이와 상우가 다정하게 걸어오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훈이와 상우는 주위를 살펴보고 이내 입맞춤했다. 종호는 그 광경을 목격하고 나서 남들이 볼세라 가슴이 조마조마해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런데 바로 그 때 종호 아내가 안방에서 남편을 나직이 불렀다.

"여보!"

"지금 가요."

종호는 빨래를 널다 말고 침대에 누워 있는 아내 곁으로 다가가더니 능청맞게 굴었다.

"우리 마누라가 날 왜 불렀지?"

"여보, 나와 이혼해 줘요."

종호 아내는 애절한 눈빛으로 남편에게 간절히 부탁했다. 종호는 아내의 말을 무뚝뚝하고 퉁명스럽게 받아넘겼다.

"왜 자꾸 그런 소릴 하는 거요?"

"지금이라도 좋은 여자 만나서 행복하게 살아가야 될 거 아녀요."

"지금도 행복하니까 쓸데없는 걱정 하지 말고 자리에서 일어나기나 해요."

"당신 참 야속하네요."


   종호의 아내는 오래 버티지 못하고 결국은 뼈만 앙상한 채 운명을 달리했다. 종호는 불혹에 상처한 뒤 만사 제쳐놓고 결국은 술에 절어 살았다. 훈이는 종호의 잘못을 지적하고 술을 끊으라고 충고했다.

"아빠, 아빠가 그런다고 엄마가 살아 돌아오지 않으니까 정신 좀 차리세요."

"니가 내 괴로운 심정을 알고 그런 소릴 하는 거야?"

"그건 몰라도 이건 한 가지 알아요."

"니가 뭘 안다고그래."

"아빠가 정 그렇게 나오면 부자간의 인연을 끊어야 한다는 거요."

종호는 훈이의 따끔한 충고에 정신이 들어 자신과의 힘든 싸움을 잘 버텨 내었다. 만일 훈이가 없었다면 종호는 아내를 잃고 정신나간 사람처럼 지냈을지 모른다. 때때로 종호는 죽은 아내의 말이 아직도 귀에 쟁쟁했다.

"당신 참 야속하네요."


   종호는 부인과 상우의 일을 까맣게 잊은 채 하루하루 살았다. 그런데 시외버스를 타고 가며 기억이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그 당시의 기억을 더듬어 보는 사이에 종호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고여 있었다.


   산에 길이 구불구불 나 있어 운전사는 시외버스를 능숙한 솜씨로 몰아 위병소 앞에 멈추었다. 종호는 시외버스에서 내리자마자 휴대전화를 들고 도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친구야, 나 종호다!"

"야, 너 안 죽고 살아 있었냐?"

"넌 내가 죽기를 바라고 있었던 거 같다."

"으하하-. 야 인마 너무 반가워서 하는 말이야. 근데 웬일로 전활 다 했냐?"

종호는 부대 정문에 설치한 현판을 보면서 도이에게 위치를 일러 주었다.

"백 병기 부대가 내 눈에 보인다."

"정말? 조금만 기다려. 내 금방 그리 갈게."

"알았어. 내가 기다리고 있으마."


   종호는 도이를 부대 앞에서 만나자 반가워서 손을 덥석 잡았다. 도이는 종호를 위아래로 훑어보고 의구심을 가졌다.

"너, 내 친구 맞냐?"

"왜, 내가 어때서 그러는데."

"나이는 못 속이는구나."

종호와 도이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고 방그레 웃어 보였다. 종호는 도이의 어깨를 툭 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너 예전에 꾀죄죄하더니 지금은 진짜 멋있다."

"뭐 먹고 싶어서 그러냐? 자, 우리 오랜만에 만났으니 낮술이나 마시러 가자."

"정말? 너 그래도 되는 거냐?"

도이는 웃옷을 벗어서 어깨에 걸치고 종호의 손을 이끌면서 속내를 털어놓았다.

"난 사람 아니냐? 틀에 박힌 시선으로 보지 말고 오늘은 맘껏 마시러 가자."

"좋아! 그동안 못 나눈 이야기도 할 겸 쌓이고 쌓인 회포나 풀러 가 보자고."


   도이는 전통 시장 주차장에 승용차를 멈추었다. 종호와 함께 식당 안으로 들어가 원형 탁자에 앉자마자 술과 안주를 시켰다. 주인 아주머니가 술과 해장국을 원형 탁자 위에 내려놓고 종호와 도이의 얼굴을 흘끔흘끔 보았다. 종호와 도이는 남의 시선은 아랑곳없이 권커니 잣거니 술을 마시며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상우는 훈이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 안절부절못하고 내무반을 서성거리다가 말없이 벽시계를 바라보고 땅이 꺼지게 한숨 쉬었다. 내무반 문이 열리면서 주번 사관은 누구에게 쫓기듯 상우를 소리쳐 불렀다.

"상우야, 대대장님이 부른다. 짚차 타고 빨리 가 봐라."

"예, 이병 상우!"

상우는 주번 사관에게 궁금한 것을 물어 보지 못하고 지프차에 올랐다. 지프차가 거리를 쏜살같이 질주하여 전통 시장에 도착했다. 상우는 영문도 모르고 지프차에서 내려 전통 시장 안으로 들어갔다.  


   도이가 부대로 전화한지 채 10분도 되기 전에 상우가 나타났다. 상우는 도이를 보자마자 거수경례를 척 붙였다.

"충성!"

"오, 그래. 이리 앉아라."

"예. 이병 상우!"

상우는 군기를 바짝 차리고 종호 옆에 앉아 차려 자세를 취했다. 종호는 상우의 어깨를 툭 치며 긴장을 풀어 주었다.

"상우야, 여기선 편하게 지내는 게 예의다."

"예, 이병 ‥‥."

도이가 상우의 말을 가로채고 명령을 내렸다.

"어라,  다시 한 번 해 봐."

"예, 알겠습니다!"

"자, 잔 받아라."


   종호와 도이와 상우는 술잔을 나누는가 싶더니 어느새 분위기가 무르익어갔다. 상우는 도리에 어긋나지 않게 정도껏 술을 마셨다. 그러나 종호와 도이는 몸을 못 가눌 정도로 취했다. 도이는 강한 정신력으로 사리를 분별하고 뒤처리를 했다.

"이병, 내가 임무를 줄 테니까 우리 친구랑 함께 있어. 알았지?"

"예, 이병 상우!"

"야, 그런 건 사적인 자리에서는 가려서 좀 해라."

"예, 알겠습니다."


   도이는 종호와 상우를 전통 시장에서 가까운 여관으로 들여보내고 자신은 택시를 타고 집을 향하여 떠났다. 상우는 몸을 못 가누는 종호를 침대에 눕혀 놓고 방 안을 서성거렸다. 그렇지 않아도 훈이에게 전화하려던 참이었는데 때마침 종호의 휴대전화 벨이 울렸다. 상우는 직감적으로 훈이가 전화를 걸은 것을 알고 종호의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조심스레 꺼냈다. 휴대전화에 꼴통이라는 별명이 눈에 잘 띄었다. 상우는 소리 없이 빙그레 미소지으며 전화를 얼른 받았다.

"여보세요?"

"울 아빠는 뭐하고 니가 전활 받니?"

"니가 더 잘 알잖아."

"설마 너랑 술 마신 건 아니지?"

"응, 우리 대대장님이 니네 아빠랑 친구더라."

훈이는 종호가 메모지를 보고 좋아하던 일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상우는 오로지 세상 소식이 궁금하여 제일 먼저 물어 보았다.

"요즘 바깥세상은 어떠니?"

"너만 군대에 들어가 있을 뿐이지 변함이 없어. 참, 너 휴가 받아 나오면 우리 보육원에 가 보자."

"그래, 요즘 들어 부쩍 꿈속에서 보이곤 하는데 잘됐다."

상우는 보육원 시절을 회상하며 속내를 털어놓았다.

"니네 엄마랑 함께 집에 가자고 했을 때 나도 따라갈 걸 그랬나 봐."

"왜? 이제 와서 후회하니?"

"그렇지만 우리 절친하게 지낼 수 있어서 좋아."

상우는 훈이의 질문에 대답이 없고 자기 소신을 피력했다. 상우가 훈이와 통화하는 사이에 낮술에 취한 종호가 잠꼬대를 했다. 상우는 실실 웃으면서 종호가 잠꼬대하는 것을 훈이에게 일러 주었다.

"지금 아빠가 니 욕하고 있어."

"뭐라고 하는데?"

"이놈의 꼴통은 대학교에서 좋지 않은 술을 배우더니 지 아비 속 썩는 줄 모르고 허구한 날 밤늦게 들어와. 에이, 웬수 같은 놈!"

상우가 종호의 말투를 흉내내자 훈이는 으하하 웃음이 터졌다. 훈이는 휴대전화에 빠져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상우와 통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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