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아라 황석호 -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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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와~ 형님 정말 대단하십니다. 이런 분인 줄 모르고 처음 오셨을 때 얕잡아 본 거 죄송합니다.”
나이가 겨우 두 살 차이인데, 나를 깍듯하게 대하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내가 뭐가 대단해서.... 겨우 두 살 차이인데 나한테 그럴 필요 없어.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그냥 친구하면 되지.... 말 편하게 해.”
“형님, 그래도 됩니까?”
“형님 소리도 부담스럽고.... 괜히 내가 늙은이 같아서....”
“오~~ 형님 정말 쿨하네.... 그럼 형이라 부르고 진짜 말 놓는다.”
“그래 그렇게 해.”
처음에는 1차 때처럼 음악 이야기로 대화가 시작되었다. 그러다가 처음 만난 사람들이 늘 그렇듯이 호구 조사로 이어졌다. 경수는 아파트 상가에서 독보적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주공 마트의 운영자였다. 몇 년 전까지 밥을 해먹을 때 늘 이용하던 곳이었다. 대형 마트와 가격 차이도 그다지 나지 않고 정육까지 취급하는 가게였다.
“한 번도 못 봤는데....”
“내가 나가 있을 필요가 없지. 직원들이 알아서 하니까.... 근데 108동이면.... 형 나이에 애들도 제법 클 텐데, 집이 좀 좁지 않나? 애가 몇이야?”
경수는 몇 동이 몇 평인지 다 꿰고 있는 했다.
“혼자 살아.”
“형 돌아왔구나.... 혼자 살기에 그 정도면 딱 좋지.”
경수가 자기 마음대로 생각하도록 그냥 내버려뒀다. 괜히 바로 돌리려 했다가 쓸데없이 말만 길어질 것 같아서였다.
경수는 전형적인 한량 스타일이었다. 대단지 아파트 상가에서 독점으로 슈퍼마켓을 운영하고 있으니 수입도 괜찮을 터이고, 남는 시간에 취미로 배운 것이 드럼인 듯 했다. 그 취미가 밴드까지 이어졌으니 나름 제대로 된 취미활동인 셈이었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경수의 휴대폰에서 벨이 울렸다.
“아~ 씨.발.... 형 미안. 마누라야.... 응. 이제 들어가.... 알았어.... 형 욕해서 미안.”
“뭐 그런 거 가지고. 나도 욕 잘해.”
“오늘 의무방어전 치르는 날이거든. 까먹었을까봐 벌써부터 단속을 하네. 애들 이모도 여기 사는데, 벌써 거기 보내놨어. 씨.발 자매가 쿵짝이 잘 맞아. 살이나 좀 빼지.... 형은 좋겠다. 의무방어전 같은 거 없어서.”
나는 그냥 씁쓸하게 웃었다.
“이만 가자. 이건 내가 낼게.”
“무슨 소리. 내가 한 잔 하자고 했으니까 당연히 내가 내야지. 그냥 달아놓고 한 번에 계산하면 돼. 자주 오는 데 거덩.”
술집을 나오면서 경수가 나에게 말했다.
“형, 다음에 내가 좋은 데로 한 번 모실게. 그럼 다음 주 합주할 때 보자. 엄청 기대돼....”
주공 밴드의 오디션에 합격한 다음날부터 본격적으로 연습을 시작했다. 베이스 주자가 빠져서 가을 공연을 못할 줄 알았는데 내가 들어와 다행이라는 멤버들에게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한 것도 있었고, 정말 오랜만에 공연 무대에 설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이기도 했다.
공연 때 연주할 악보를 보며 일주일 동안 계속 손에 익혔다. 젊을 때는 몇 번만 치면 바로 외워지던 것이 나이가 드니까 쉽지 않았다. 연습만이 답이었다. 매일매일 퇴근을 하면 연습을 하다가 잠이 들었다. 출근을 해서도 손가락이 저절로 움직였다. 빨리 퇴근 시간이 되어 베이스를 잡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하루하루가 기대감으로 가득 찬 날들이 이어졌다.
처음 합주를 하는 날에는 정말 신나게 연주를 했다. 비록 아마추어 취미 밴드라서 음악적인 감동을 느끼지는 못하더라도 아무렇지 않았다. 내가 밴드의 한 부분이 되어 합을 맞춰가는 것이 중요했다.
주공 밴드의 멤버들, 특히 리더인 경수는 내가 밴드에서 대단한 역할을 맡아줄 것으로 기대했다. 내가 소장하고 있던 석호 플라이의 앨범을 멤버들에게 하나씩 나눠준 것이 화근이었다. 나를 제외한 네 명의 멤버들 중에 밴드 경험이 있는 사람은 둘뿐이었다. 기타를 치는 우식이와 키보드 담당 호태였다. 그 경험이라는 것도 내가 밴드를 처음 시작한 것처럼 대학 밴드 동아리에서 1,2년 활동했던 것이 전부였다.
대학가 클럽에서 공연을 하고, 앨범까지 낸 밴드에서 활동을 했던 나는 그들에게 프로급인 셈이었다. 석호가 하라는 대로 하고, 석호가 없으면 끈 떨어진 뒤웅박 신세라는 것을 그들은 알 리가 없었다. 그래서 솔직하게 말했다. 그냥 리더인 석호가 악보에 콩나물 대가리를 그려주면 그것만 쳤을 뿐이라고, 나도 니들과 똑같으니까 나한테 바라지 말고 같이 해나가자고....
그래도 나에게 미션이 하나 주어졌다. 노래였다. 보컬이 있으니 베이스만 연주하겠노라고 아무리 말해도 멤버들 모두 고개를 저었다. 보컬을 맡고 있는 철민이도 노래 두 곡을 나에게 양보했다.
개천절이 끼어 있는 주말 연휴에 아파트 주민 광장에서 공연을 했다. 먼저 자리를 잡고 있는 관객들은 모두 멤버들의 가족이나 친하게 지내는 이웃 사람들이었다. 저마다 관계가 있는 사람들을 응원하며 공연을 즐겼다.
나를 보러 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도 좋았다. 하마터면 공연이 무산될 수도 있었던 것을 내가 운 좋게 밴드의 일원이 되어 살릴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 만족했다. 게다가 아주 오랜만에 사람들 앞에서 공연을 한다는 것이 너무나 신나고 기분이 좋았다.
일주일에 이틀, 금요일과 토요일 저녁에 합주를 하는 것은 내가 일주일을 버틸 수 있는 힘이 되었다. 합주 뒤에는 술자리가 이어졌다. 밴드 합주의 뒤풀이로 술자리를 하는 것인지, 술자리를 갖기 위해 밴드 합주를 하는 것인지 헷갈리기는 했으나 아무래도 좋았다. 사회성이 없어서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힘들어 하는 나였지만 석호 플라이의 멤버들과 끈끈한 관계를 맺었듯이 주공 밴드의 멤버들과도 조금씩 친분이 쌓였다. 혼자 집에 틀어박혀 있지만은 않겠노라는 내 의지가 반영된 결과였다.
하지만 부담스러운 면이 없지는 않았다. 특히 리더인 경수가 나를 부담스럽게 했다. 오디션 첫날부터 가깝게 다가온 경수는 밴드 생활이 쌓여갈수록 나에게 더욱 다가왔다. 경수의 한량 기질이 그렇게 만들었고, 내가 혼자 살았기 때문에 다른 멤버들에 비해서 나를 더욱 편하게 생각하는 듯 했다.
밴드 활동을 1년 가까이 하던 여름날이었다.
“형, 오늘 우리 좋은 데 가자.”
금요일 저녁 합주를 하기 전에 다른 멤버들이 없는 틈을 타서 경수가 나에게 제안을 했다. 오디션 첫날에도 그랬듯이 합주가 끝나고 둘이서 술을 마시는 일이 잦아지면서 경수는 나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털어 놓았고, 중년 남자들이 겪는 일들에 대한 하소연을 많이 했다.
남자 둘이었으니 성적인 이야기도 자주 오고갔다. 주로 경수가 떠들었고, 나는 보조를 맞췄다. 경수를 통해 별별 것들을 다 알게 되었다. 나에게는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성매매와 관련된 것들이었다. 나는 자격지심으로 다 아는 것처럼 보조를 맞췄다. 경수가 말하는 좋은 데란 오피스텔 같은 성매매 업소였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잘 빠져나오긴 했는데, 이날은 적극적으로 들이댔다.
“형, 내가 쏠게. 씨.발 돈 벌어서 뭐해. 더 나이 들기 전에 즐기는 데 써야지.”
내가 대는 핑계가 공무원 월급으로 그런 데 가기 부담스럽다는 것이었는데, 자기가 쏘겠다고 하니 나에게는 새로운 핑곗거리가 필요했다. 더 이상 돈이 없다는 핑계는 통하지 않을 듯 했다.
“내가 죽여주는 데 알거든. 유리방인데 파트너도 교환이 가능해. 유리로 딴놈들 하는 거 보다가 맞교환하는 거야. 씨.발 죽이지?”
씨.발, 부러웠다. 일반 남자들은 돈만 있으면 음지에서 별짓을 다 할 수 있었다. 뭐 게이들의 생활에도 음지가 존재했고, 그곳에서 본능을 발산하고 살았지만 차원이 달랐다. 민구와의 섹스를 마지막으로 10년 넘게 본의 아닌 금욕 생활을 해오던 내 본능을 경수가 자극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나는 그저 웃기만 할 뿐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적당한 핑곗거리가 생각나지 않아서였다.
“나도 소문 듣고 한 번 갔었는데, 진짜 죽이더라. 유리로 다 볼 수 있으니까 진짜 떼씹 하는 기분이 들더라고. 내가 또 한 섹스 하니까 씨.발 존.나 박았지.”
“그 정성을 마누라한테 쏟아. 반찬이 달라질 거다.”
“마누라 살찐 거 보면 섰던 조ㅈ도 죽어. 가족끼리는 진짜 하는 게 아닌 건 가봐. 형 가자. 형 덕분에 밴드도 하는 건데 내가 크게 한 번 쏴야지. 1차로 룸 가서 술 존.나 빨고 2차로 가면 딱 좋아. 내가 오늘 풀코스로 모실게.”
마누라를 들먹여도 의지를 굽히지 않는 경수의 제안을 물리치기 위해 내가 한 술 더 떠서 말했다.
“그런 데 별로 재미없어. 막 벌리는 허벌 보지 돈 주고 먹어서 뭐해. 나 변태라서 그런 걸로 성에 안 차.”
“이야~ 그럴 줄 알았어. 형 얼굴 처음 보고 젊을 때 잘 나갔겠다 싶었어. 형 뭐 좋아하는데? 유리방 말고 이미테이션 갈까? 형, 메이드 좋아해? 지하철 세트 똑같은 데 나 아는데....”
“그래봐야 보지 따 먹는 거 똑같은데 뭐.... 나 변태라니깐.”
“남자 중에 변태 아닌 놈이 어딨어. 씹구멍만 보면 자지 쑤시고 싶은 건 다 똑같지.”
“씹구멍 질렸어.... 나 똥구멍에 조ㅈ 박는 거 좋아해. 막 대주는 허벌 보지는 재미도 없어. 씨.발, 그런 데 가서 똥구멍 대달라면 대주겠냐고....”
“오~ 나도 항문 섹스 좋아해. 돈만 더 주면 얼마든지 대주지. 뭐가 걱정이야. 형이랑 필리핀 놀러 가면 대박이겠다. 작년에 친구랑 필리핀 가서 앞뒤로 다 박았거든. 존.나 재밌었는데....”
다른 멤버들이 속속 들어오는 바람에 경수도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경수는 나에게만 대놓고 솔직하게 말을 했지, 다른 멤버들에게는 형으로서의 체면을 지키는 편이었다.
합주가 끝나고 간단히 술자리를 하는 중에 내가 담배를 피우러 밖으로 나오면 경수는 나를 따라 나와 담배를 피우며 계속 추근댔다. 결국 내가 선택한 것은 나를 바보로 만드는 것이었다.
“나 이제 나이 들어서 조ㅈ도 잘 안 서. 술 마시면 더 그래....”
하지만 이것도 소용이 없었다.
“나도 술 마시면 잘 안 서. 그래서 내가 갖고 다니는 게 있지.”
경수는 지갑 안에서 뭔가를 꺼내 나에게 보여줬다.
“카마그라라고 태국 놀러가는 친구한테 부탁해서 받아 놓은 거야. 자연성분이라서 몸에 무리도 없고 싸고 나서도 건드리면 바로 서.”
집요한 것이 꼭 민구 같았다. 나를 위하는 경수의 마음이 느껴져서 고맙기는 했으나 나에게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제안이었기에 짜증이 살짝 밀려왔다. 짐짓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마지막 카드를 꺼내들었다.
“니 마음은 고마운데.... 내가 공무원이라서.... 몸을 좀 사려야 돼서.... 필리핀 같이 놀러 간 친구랑 가. 나는 좀 그러네....”
그 후로는 경수도 체념을 한 듯 더 이상 달라붙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나는 멤버들과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면서 밴드 활동을 했다.
그렇게 한 해가 가고 두 해가 갔다. 정말 40대의 세월은 빛처럼 빠르게 흘러가서 어느덧 내 나이도 50이 되었다. 50대는 빛보다 빠르게 흘러갈 것은 분명했으나 그것을 비유할 말이 떠오르지도 않고, 얼마나 빠르게 지나갈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나이의 숫자 두 개가 모두 바뀌어서 약간 기분이 우울했다. 허물이 없어진 주공 밴드의 멤버들도 50살이 된 나를 놀리기도 해서 더욱 그러했다. 갑갑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노래방을 찾는 일이 잦아졌다.
영오가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온 날도 갑갑한 마음으로부터 오는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노래방에 들렀던 것이었다.
영오가 집으로 온 다음날, 출근을 해서 오전만 근무하고 반차를 내서 집으로 일찍 돌아왔다. 널브러진 집도 청소를 하고, 밀린 빨래도 돌리고, 같이 살게 된 영오를 제대로 먹여야 했기에 이것저것 준비할 것이 많아서였다.
집에 오기 전에 대형 마트에 들러 오랜만에 푸짐하게 장을 봤다. 냉장고에 다 들어갈까 걱정이 될 만큼 많았다. 가구 코너에서 영오가 쓸 책상과 의자도 골랐다. 당일에 배달은 물론 조립까지 해주는 것이 마음에 들어 바로 결제를 했다.
집에 도착해서 버릇처럼 열쇠로 문을 열려다가 처음으로 초인종을 눌렀다. 초인종에 달린 카메라에 얼굴을 갖다 댄 것도 처음이었다. 내가 열지 않아도 자동으로 문이 열렸다. 영오는 내가 들고 있는 박스를 받아들었다.
“왜 이렇게 일찍 오셨어요?”
마트에 들렀다 오느라 그리 일찍 온 것도 아니었다. 평소에 오는 시간보다 두어 시간 빨랐을 뿐이었다.
“오늘 하루 종일 집에 있.... 영오야, 너....”
순간적으로 내 집이 아니라 다른 집에 온 착각이 들었다. 깨끗하게 청소가 되어 있었다. 빨래를 널다가 문을 연 듯 빨래건조대가 반쯤 차 있었다.
“할 일이 없어서 했어요. 심심해서.... 옛날이랑 너무 달라서요.”
“공부나 하고 있지.... 일부러 청소하고 빨래하려고 일찍 온 건데.... 암튼 고맙다. 우리 오늘 저녁 근사하게 먹자. 이왕 하는 김에 박스에 있는 거 냉장고에 넣어줘. 나 잠깐 나갔다 올게.”
아파트 상가에 있는 열쇠점을 찾았다. 처음에는 열쇠 하나를 복사해 영오에게 줄 생각이었으나 진열되어 있는 디지털 도어락을 보고는 바로 마음을 바꿨다. 출장 예약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편의점에 들렀다. 담배를 사기 위해서였다. 내가 피우는 디스플러스와 영오가 피우는 던힐 1mg을 한 보루씩 샀다.
마트에서 사온 식재료들을 이것저것 다듬는 동안 철문의 자물쇠가 디지털 도어락으로 바뀌고, 영오가 쓸 방에 책상과 의자가 놓였다.
“아저씨.... 이러실 것까지는....”
“고등학생 방에 책상이 없는 게 더 이상하잖아.”
급한 마음에 가구 코너에 있는 것 중에 가장 비싼 것을 사기는 했으나 더 좋은 것을 사주지 못해 마음이 좀 무거웠다. 내가 석호에게 받은 선물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것이었다. 앞으로 영오와 함께 사는 동안 석호에게 받은 것을 영오에게 대신 갚기로 마음을 먹었다.
오랜만에 집에서 푸짐하게 저녁을 먹고, 영오가 씻으러 욕실에 들어간 사이 새로 장만한 책상 위에 각티슈를 올려놓았다. 그리고 휴지통도 책상 옆에 가져다 놓았다. 10대 남학생들에게 꼭 필요한 것들이지 싶었다.
식탁에 앉아 과일을 깎아 먹으며 영오에게 물었다.
“컴퓨터는.... 데스크탑보다 노트북이 낫겠지?”
“그것도 사 주시게요?”
“응. 필요하잖아. 내 방에 들어와서 컴퓨터 같이 쓰기에는 너나 나나 불편할 텐데....”
“거실에 아무 것도 없는데, 아저씨 컴퓨터 거실에 내놓으면 되잖아요.”
“거실에 소파 들여 놓을 거야. TV도 딥따 큰 걸로 하나 장만할 거고. 너 핑계 대고 나도 돈 좀 써보려고. 돈 뒀다 뭐하겠어. 이런 데 쓰는 거지....”
영오는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 싱긋이 웃으며 말했다.
“그럼 이왕 사주시는 김에 좀 더 쓰셔서.... 맥북으로 사주세요. 저 애플빠에요.”
영오는 주머니에서 아이폰을 꺼내 나에게 흔들었다. 나 역시도 아이팟부터 시작해 아이폰, 에어팟에 애플워치까지 차고 다니는 애플의 노예였으므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내 방에 있는 아이맥을 보고 영오가 맥북 얘기를 꺼낸 듯 싶었다.
“오케이. 맥북 프로로 사줄게. 석호도 맥으로 노래 만들었는데....”
영오의 표정이 약간 변하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실수를 했다 싶어서 얼른 다른 것으로 화제를 돌렸다.
“거실에 TV 놔둬도 공부하는 데에 지장 없지? 너도 공부만 하고 살지는 않을 거 아냐.”
“괜찮아요. 학교 가면 밤늦게 올 건데요 뭐. 아저씨 편한 대로 하세요. 저도 축구 볼 때 큰 걸로 보면 좋죠.”
“너 축구 보는 거 좋아하나 보네.”
“아저씨는요?”
“나도 뭐 가끔.... 손흥민 나올 때 보고 그러는 정도?”
“저도 그래요.”
“그럼 OLED로다가 화질 좋은 걸루 사야겠네. 너 공부하다가 지겨우면 넷플릭스로 영화도 같이 보고 그러자.”
그렇게 새로 살림살이를 장만하면서 본격적인 영오와의 동거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정작 집에서 영오를 볼 수 있는 시간은 주말을 빼고는 거의 없었다. 학교가 멀어서 새벽같이 나가서 밤늦게야 들어왔다. 고2였으니 한창 공부를 하느라 바쁘기도 할 터였다.
영오와 함께 산 지 한 달 남짓 되던 어느 토요일이었다. 주공 밴드의 5월 정기공연을 앞두고 새로운 곡을 연습하느라 나름 바쁘던 때였다. 이른 저녁을 먹고 집을 나서는 나에게 영오가 물었다.
“토요일 이 시간마다 어디 가시는 거에요?”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밴드 합주하러 가. 아파트 주민들끼리 하는 밴드가 있거든.”
영오는 그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혼잣말인 듯 중얼거렸다.
“아저씨랑 같이 공부하려고 그랬는데....”
합주를 하는 동안 영오의 말이 내내 마음에 걸려 술자리에는 가지 않고 집으로 바로 돌아왔다. 자기 방에 있던 영오가 나와서 나를 맞이했다.
“오늘은 일찍 오시네요.”
“합주 끝나면 술 한 잔 하는데 오늘은 그냥 왔어. 니가 나랑 같이 공부할 거라고 해서....”
영오의 얼굴에 해맑은 웃음이 피어올랐다. 웃는 모습도 석호랑 무척 닮아 있었다. 내가 씻는 동안 영오는 공부할 거리를 가지고 식탁에 앉아 있었다. 내가 식탁에 앉아 담배를 피워 무는 것을 보고 영오도 한 대 피워 물었다.
“나 이제 다 까먹어서 돌머리 됐는데....”
“돌머리 제가 깨드릴게요.”
영오는 연습장에 이것저것 적어가면서 나에게 설명을 했다.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연습장은 보지 않고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웃고 있는 나에게 영오가 말했다.
“아저씨가 이렇게 공부하라고 했잖아요. 중학교 때부터 이렇게 공부했어요....”
“너 학원은?”
“그런 건 제가 알아서 할 거니까 아저씨는 신경 안 쓰셔도 돼요.”
그날부터 주말 저녁은 영오와 함께 공부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영오가 꽤나 설명을 잘 해서 진짜 무디어진 내 돌머리가 깨져 옛날 기억이 조금씩 되살아났다.
중간고사가 끝난 주말, 주공 밴드의 5월 정기공연이 있는 날이었다. 영오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TV를 보고 있었다. 나는 집을 나서면서 영오에게 한 마디를 툭 던졌다.
“오늘은 시험 끝났으니까 공부 안 할 거지? 나 좀 늦게 들어올 거야.... 오늘 밴드 공연하는 날이라서 술 한 잔 하고 올 거야.”
영오는 고개를 돌려 나를 한 번 슬쩍 보고는 그저 ‘네’ 라고 답을 할 뿐 별 말이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영오에게 공연을 보러 오라는 말을 하고 싶었으나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영오 앞에서는 밴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항상 조심스러웠다.
공연이 열리는 주민 광장에는 공연 시작 전부터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응원을 하러 나온 가족들의 힘이었다. 멤버들이 부러웠다. 악기 세팅을 해놓고 공연 시작 전에 담배를 피웠다. 나를 제외하고 유일한 흡연자인 경수도 내 옆에서 담배를 피웠다.
“형, 공연할 때 정말 짜릿짜릿하지 않아?”
“하하하하 밴드가 그래. 나랑 밴드 하던 친구는 공연할 때 여학생들이 환호성 지르고 하는 바람에 흥분돼서 쌌어. 뭐 20대 팔팔한 나이였으니까. 그러고 보니까 그 친구도 드럼 쳤네.”
“진짜 그래. 마누라가 방방 뛰면서 손 흔들어주니까 진짜 이뻐 보이더라. 씨.발, 오늘 제대로 한 번 해줘야겠어.”
공연이 시작되었다. 나는 늘 그렇듯이 고개를 숙이고 베이스 줄을 보면서 연주를 했다.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많이 사는 아파트의 특성상 트로트곡도 선곡에 포함이 되어 무료한 일상을 보내는 주민들을 위로했다.
주공 밴드의 메인 보컬 철민이의 노래가 세 곡이 나가고 나서 내 차례가 되었다. 석호 플라이를 할 때도 그랬듯이 내가 부르는 노래는 언제나 롹발라드였다. 내가 선곡한 것은 주공 밴드 멤버들의 와이프들을 위한 노래였다. 10대 소녀 시절의 감성을 자극하는 노래, 공일오비의 ‘텅 빈 거리에서’와 패닉의 ‘달팽이’였다.
노래를 하기 위해 마이크에 입을 가져다 대느라 고개를 들었다. 객석 뒤쪽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영오였다. 팔짱을 끼고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노래 가사는 십 원짜리 동전 두 개만 든 채 전화도 못하고 공중전화 부스 안에서 찌질하게 울고 있는 내용이었지만 노래를 부르는 나는 힘이 났다. 경수가 치는 드럼 소리가 내 심장 소리처럼 쿵쿵 크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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