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여우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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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와요.”
커다란 거실에 들어서는 재훈을 보고 널찍한 아이보리색의 가죽 소파에 앉아 있던 혜원의 할머니가 부드러운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맞은편에 앉아있던 혜원의 아버지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고개를 돌리고 재훈을 바라보았다. 거의 무표정한 얼굴로 재훈을 빤히 바라보던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흘렀다.
물론 할머니를 포함해서 혜원의 모든 가족을 재훈은 어렸을 적부터 주말에 교회에서 자주 보아왔고, 가끔씩 인사도 나누었기에 딱히 어색할 것은 없었다.
하지만, 그냥 평범한 지인으로 찾아온 것이 아니고 혜원의 미래의 배우자가 될 수도 있는 그런 입장으로 서로 마주한 것은 완전히 다른 느낌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자신의 자리를 재훈에게 내어주고 혜원의 아버지는 창가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자리를 잡고 앉아 눈치를 보고 있는 재훈의 표정을 한번 바라보던 할머니가 근처에 서 있던 도우미 아주머니에게 손가락으로 주방쪽을 가리켰다. 아마도 차를 가져오라는 표시인 듯 했다.
“그래서 혜원이하고는 어떻게....”
그녀가 여전히 인자한 표정으로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재훈의 옆에 서 있는 혜원에게 시선을 한번 준 후 다시 재훈을 바라보았다.
집으로 찾아온 손님에게 늘어놓는 상투적인 ‘부모님은 잘 계신지’ 라거나 ‘회사일은 잘 돌아가는지’ 와 같은 빈 인사말 조차도 없이 그녀가 솔직하게 자신이 궁금한 것을 곧장 그에게 물었다.
한번 심호흡을 한 후에 재훈이 입을 열었다.
“그게......” 단단히 마음을 먹었는데도 불구하고 막상 입을 열자 그는 자신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인자한 듯 보이는 그녀의 표정과 미소 속에 감추어진 범접할 수 없는 카리스마와 무게감이 느껴졌다.
빨리 끝내기로 재훈은 단단히 마음을 먹었다. 얼른 모든 것을 원래대로 돌려 놓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자신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 무거운 분위기에서 벗어나 자신의 방의 침대위에 편하게 눕고 싶었다.
단단히 마음을 먹고 재훈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힘들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그의 그런 말에도 그녀의 얼굴에는 전혀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여전히 인자한 표정에 여유로운 미소가 흘렀다.
잠시 그렇게 그를 바라보던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주방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차 두잔은 서재로 가지고 와. 손님하고 둘이 할 말이있으니까.”
그리고 여전히 자비로운 미소를 띠고 재훈을 한번 바라본 후, 그녀가 걸음을 옮겼다.
여전히 아무말도 하지 않고 느긋하게 마치 구매할 물건을 여기저기 둘러보는 듯한 표정으로 그녀가 재훈을 바라보고 있을 때 혜원의 어머니가 서재로 들어와서 조심스럽게 차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시선을 돌려 앉아있는 재훈을 한번 보고는 다시 밖으로 나갔다.
“아버지를 뵌 적이 꽤 되는데 잘 계시지? 얼마동안 일요일 예배를 통 못나가서 말이야.”
그녀가 자신의 찻잔을 들고 입으로 가져가서 한모금을 마셨다.
얼굴에 흐르는 여유로운 표정과는 달리 그녀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의 눈을 주시하고 있었다.
입밖으로 아무말도 하지 못하고 재훈은 슬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사업도 많이 배우고 있을텐데.....” 물끄러미 그런 그를 바라보면서 다시 그녀가 말을 이었다.
“가장 큰 거래처가 ‘솔라포스’지 아마?”
마치 재훈에게 묻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기억을 더듬는 듯 한 말투로 그렇게 말하고 그녀는 다시 여유로운 표정으로 재훈을 바라보았다.
“거기도 IMF 때 한참 힘들어 했어. 부도나서 법정관리까지 들어갔었는데... 거의 공중분해 될뻔한 것을 내가 소생시켜줬어. 보니까 또 살아나면 나중에 나에게 힘도 될 듯 해보였고 말이야.”
만족스러운 듯 그녀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번졌다.
“그 다음부터 매년 고맙다고 선물도 보내고.... 여러모로 나에게 신세진 것에 보답하고 싶다고 표현도 하고...”
그렇게 말하는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그가 시선을 자신의 앞에 놓여있는 찻잔에 두었다.
‘현광’이나 ‘아시아물산’도 마찬가지지. 예전부터 나하고는 아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고...“
그렇게 그녀가 재훈의 회사에 영향력이 있는 거래처를 계속 입에 올렸다.
”요새 ‘베르티’의 송이사 때문에 속 좀 끓이고 있는 것 같던데....“
얼마전부터 그에게 은근히 갑질을 즐기는 듯이 행동하는 거래처와 담당자의 이름이 그녀의 입 밖으로 나오자 눈이 똥그래진 그가 시선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사업이란게....“ 그런 그의 얼굴의 표정의 변화를 감지하면서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자기가 잘해서 잘되는 것으로 착각을 하는 족속들이 있는데... 사실 그게 아니거든.“
여전히 자비로운 웃음을 보이는 그녀의 입술한쪽에 미세한 경련이 일었다.
”모든게 다, 그 ‘인간관계’에서 비롯된 것이고, 그것으로 결실을 맺어가는 것이지 사업에서 독불장군은 존재할 수가 없어.“
그녀가 슬며시 고개를 끄덕이고 손을 뻗어 자신의 찻잔을 집어들었다.
”교회 앞 사거리에 큰 세탁소 있지? ‘반석세탁’ 이라고....“ 그녀가 그의 표정을 한번 살피고 찻잔을 입에 대고 한모금 마셨다.
”입지 좋고, 교인들 사이에 평판 좋고... 당연히 장사 잘 돼서 계속 확장하고....“
찻잔을 내려놓고 그녀가 다시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 사람말야. 처음엔 정말 아무것도 없었어. 배운게 세탁일인데 손님은 없어서 가게 문닫게 되고 목구멍에 거미줄 치게 되었는데... 어느 날, 어떻게 알았는지 나를 찾아와서 내 앞에서 무릎을 꿇더라고, 도와달라고 애원하면서....“
시선을 다시 자신의 찻잔에 고정하고 있는 듯 보이는 그를 여유롭게 바라보면서 그녀가 말을 이었다.
”그냥 목사님에게 딱 한마디만 건넸어. ‘목사님 저 성도가 힘들어 보이네요’ 라고... 그 다음에 그 사람 팔자가 그렇게 피게 된거야.“
”........“
”얼핏 들어보니까...“
잠시 찻잔을 손에 쥐고 침묵을 지키던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어머님께서 혜원이에게 차근차근 이것저것 요구를 많이 하셨던 것 같더라고....“
그런 그녀의 말에 그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며칠전 어머님하고 통화중에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보니 그렇게 말하시길레 알게 되었지.“
”......“
”혜원이하고 둘이서 같이 하겠다고 마음만 먹으면 내가 어머님하고 한번 대화를 하려고 해. 그러고 나면 모든 것이 해결될거야. 어머님도 혜원이가 하자는 대로 다 승낙하시고.... 모두 행복해지는거지.“
”......“
아무말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있는 그를 잠시동안 그녀가 빤히 바라보았다.
”내가 하고 싶은 말 다 한듯하니 마음속에 잘 새겨두고 다시한번 생각해봐요.“
그런 그녀의 말에 그가 고개를 들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한다 안한다라는 말을 지금 할 필요는 없어.“
”.....“
”다시 천천히 계산해보고 나중에 대답해줘요.“
그녀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결혼은 생각하고 하는 것이 아니고 계산하고 하는거거든.“
그녀를 따라 몸을 일으키는 그를 한번 바라보고는 그녀가 말을 이었다.
”그럼 나중에 다시 봐요.“
그에게서 그녀가 몸을 돌려 거실의 문을 열고 먼저 밖으로 발을 옮겼다.
그를 배웅하겠다고 나온 혜원이 일부러 그의 차의 조수석에 올라 그를 집 근처의 조용한 공원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차를 세우고 잠시 산책을 한다는 말로 그와 몇 걸음 걷던 그녀가 주위를 한번 돌아보고는 그를 보면서 입을 열었다.
”할머니가 뭐라셔?“
”네가 원하는 대로 해주겠다고...“
”......“
”우리 어머니가 할머님 말씀대로 다 들어주실거라고....“
”아, 정말. 그 늙은 여우.“
그녀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피식하고 웃었다.
”설마 했는데, 역시.....“
크게 한숨을 내쉬어보이고 그녀가 다시 발을 옮겼다.
”그래도 뭐....“
앞서서 걷던 그녀가 발을 멈추고 돌아서서 그를 바라보았다.
”우리가 파혼하는 것도 아니고 이제 겨우 몇 번 만나본 것이 전부였는데 할머니가 다른 꿍꿍이로 못된 일이야 꾸미시려고....“
”.......“
”오빠 마음 단단히 먹고 그만두려면 더 일이 커지기전에 이쯤해서 어떻게든 멈추는게 나아.“
”......“
”나중에 시간만 더 끌다가 서로 집안에 말이 더 오가고 난 후에 오빠가 그만둔다고 하면 그땐.....아, 생각만 하기도 끔찍하다.“
얼굴을 찡그리고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사람 말려죽이는 거... 그 늙은 여우 정말 일가견이 있다니까....“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그녀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사실, 오빠에겐 말하지 않은 것이 있는데....“
공원의 한쪽에 있는 벤치에 앉아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 아빠 재혼하신거야. 우리 엄마하고...“
하준에게 이미 들은 사실이지만 그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그렇게 말을 잇는 혜원을 바라보았다.
”아빠가 대학때부터 사랑하던 사람이 있었대. 똑똑하고 자기 주관 강하고 독립적이고....“
”.....“
”할머니가 그때 반대를 하셨는데도, 아빠가 너무 사랑해서 막무가내로 결혼했다고...“
”......“
”그 늙은 여우. 같이 살아 본 사람만 알아.“ 그녀가 다시 큰 한숨을 내쉬었다.
”은근히 사람 피말리게 하는 할머니, 결국에는 못버티고 결혼 한지 몇 년 후에 이혼하겠다고 하니까 그냥은 못보낸다고... 처음부터 자기 말 듣지 않은 벌 받아야 한다고...“
”아주 계획적으로 사돈네 사업하는 거래처 등 뒤로 다 손 써놔서..... 그런 것 있잖아. 차라리 한번에 망하게 하면 좋은데 그것도 아니고 약올리듯이 아주 야금야금 피말리게.... 한번 거래했다가, 신용 얻은 다음에 주문 내놓고 거래 끊고.... 발주 넣어놓고 컴플레인 걸고...“
”.......“
”그렇게 자기가 결혼 선택한번 잘못한 것 때문에 친정집 몰락하는 거 보면서 결국에는 약먹었다고...“
”.......“
”자기가 죽어야만 그 악연 끝나겠구나 하고 생각했던거지. 아버지하고 사이에 아들하나 있었는데 친정부모에게 맡겨놓고...“
그녀의 그 말에 재훈은 오싹한 느낌이 들어왔다.
”유서도 어딘가에 있었겠지. 그 늙은 여우가 어떻게든 가로챈거겠지만...“
말을 멈추고 한참을 그녀는 그녀의 앞에 서있는 나무의 어두운 이파리들을 올려다보았다.
”내 목적은 사실 그냥 우리집에서 벗어나는거야.“
여전히 시선은 바스락거리는 나뭇잎들에 두고 그녀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
”오빠 어머님이 그 늙은여우 말 다 들어준다고 해도, 나나 오빠, 그 다음부터 그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어.“
”......“
”가장 좋은 방법은, 오빠는 나와 그리고 우리가족 누구하고도 개인적인 관계에 가능한 거리를 멀리 두는거야. 오빠는 오빠어머니와는 다르지 않아? 무슨 방법을 쓰더라도 사업에서 번창하겠다는 것이 오빠의 꿈은 아니지 않아?“
그녀가 고개를 돌려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사실, 이렇게 말하면서도.....“
그녀가 다시 재훈의 시선을 피해 시선을 앞의 나무로 돌렸다.
”오빠 곁에 있으면 좋다. 예전엔 집에서 도망치기 위해서 해외로 돌았는데.... 오빠 곁에 있으면 뭔가 편해지고 그냥 슬며시 오빠 옆에서 눌러 앉고 싶어지기도 하고....“
말을 멈추고 그녀가 자신의 말이 어이 없다는 듯이 피식하고 웃었다.
”내가 또 쓸데없는 이야기를 했네.“
멋쩍은 듯 재훈을 돌아보고 한번 웃어보이고는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튼, 그 늙은 여우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그게 내가 진심으로 오빠에게 충고하는거야.“
그리고 슬그머니 그녀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집에 도착해 정원으로 통하는 돌계단을 걸어 올라가던 재훈이 고개를 들어 어두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손하야.“
별하나 보이지 않는 어두운 하늘을 바라보면서 그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나 정말 이런말 할 자격 없는 거 아는데...“
마치 그 어두움 속에 손하가 정말 있기도 하다는 듯 진지한 말투로 그가 말을 이었다.
”내가 정말 나쁜놈인거 알고 있는데....“
그가 슬그머니 그의 두 주먹을 꽉 쥐었다.
”그래도 나 다시 한번만 믿어주고 나하고 같이 어디든지 도망이라도 가면 안될까?“
예상치 못하게 그의 눈꼬리가 촉촉이 젖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우리 둘이 같이 살까? 다 버리고?“
한참을 그렇게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던 그가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마지막 돌계단을 올라 정원의 풀을 밟고 그가 발을 멈췄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어 한참을 화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떨리는 손가락으로 누군가의 번호를 누르고 휴대폰을 귀에 가져다 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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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재미지게 읽고 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