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아라 황석호 -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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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석호가 세상을 등진 이후로 내 생활도 바뀌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나에게 즐거움은커녕 기대감도 주지 못했다. 모든 것이 귀찮았다. 제일 귀찮은 것은 설거지였다. 저녁을 먹고 들어오거나 배달을 시키는 일이 잦아졌다. 빨래도 내일 당장 입을 것이 없을 때에야 마지못해서 세탁기를 돌렸다. 청소를 하는 것도 귀찮았다. 이틀이 멀다하고 먼지를 털고, 쓸고, 닦고 하던 것이 사나흘로 바뀌더니 일주일을 지나 발 디딜 틈이 없어졌을 때에야 한 번씩 청소를 했다. 아무렇게나 벗어던진 옷가지들을 모아 세탁기를 돌리는 것과 거의 일치했다.
내가 집에 돌아와서 하는 일이라고는 TV를 켜놓고 그냥 멍하게 앉아 담배만 피우다가 잠이 오면 그냥 쓰러져 자는 것뿐이었다. 밴드의 리더 격이었던 석호가 없으니 철우와 민구도 자연스레 연락이 뜸해졌다. 40대 중반으로 접어든 나이인 대다 늘 보던 친구가 저 세상으로 먼저 간 것을 보고 건강에 유의하면서 가족들을 위해 더 열심히 살 것이었다.
영오에게서도 연락이 없었다. 나는 영오에게 아빠의 친구였을 뿐이었기에 연결고리 역할을 하던 석호가 없으니 연락을 할 명분도 사라진 셈이었다. 석호 부자와 함께 여행을 가기 위해 넣어뒀던 장바구니 안의 목록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저절로 사라졌다.
눈이 떠져서 씻고 출근을 하고, 남들이 퇴근을 하니 나도 따라 퇴근을 했다. 잠이 오니까 잤고, 굳이 알람을 맞춰놓지 않아도 아침 7시면 눈이 떠졌다.
그런 하루하루가 쌓여 한 달이 가고 두 달이 갔다. 해가 바뀌었다. 나이 한 살을 더 먹어도 똑같은 하루가 흘러갔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다. 아파트에 심어둔 벚나무에 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가 부는 바람에 꽃잎이 날려 비처럼 쏟아져 내려도 가슴이 뛰지 않았다. 꽃잎이 날리면 두 팔을 벌리고 빙글빙글 돌면서 꽃비를 온몸으로 맞던 내가 아니었다. 바닥에 떨어진 연분홍 꽃잎들이 그저 허망한 내 마음 같아서 오히려 울적해졌다.
봄이 가고 여름이 와도 옷차림만 바뀌었을 뿐 하루하루의 일상은 그대로였다. 가끔 숨 쉬는 것도 귀찮아져서 호흡을 멈춘 적이 있었으나 내 심장은 내 의도와 상관없이 멈추지를 않아 나를 다시 숨 쉬게 만들었다. 지루한 일상도 내 의도와 상관없이 이어져서 더위도 차츰 누그러지고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부는 가을이 왔다.
9월이 지나고 10월이 되었다. 가슴 한 구석이 죄이는 듯했다. 고등학생 시절 방황을 할 때처럼 가슴이 아팠다. 아버지의 제삿날이 다가오면서 느낀 아픔이었다. 대학에 들어가고 나서 치유되었다 생각했던 아픔이 다시 찾아왔다. 그때보다 더 아팠다. 아버지의 부재에서 오는 아픔에 석호가 추가되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숨 쉬는 것이 귀찮은 정도가 아니라 싫었다. 그런데 씨.발.... 운동도 전혀 안 하는데 내 심장은 너무나 건강해서 관상동맥이 막히는 심근경색의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건강검진에서도 모든 게 정상이었다. 지나친 건강을 삼가기 위해 담배 피우는 양을 두 배로 늘려도 마찬가지였다. 집에서 깡소주를 들이 부어도 내 몸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저절로 토해냈다.
나는 너무나 건강한데, 가슴이 너무 쓰리고 아팠다. 근무하는 구청 앞에 가로수로 심어 놓은 플라타너스 잎이 하나씩 떨어질 때마다 바늘 하나가 가슴을 파고 들어 심장을 찔렀다. 너무 답답하고 너무 아파서 조퇴를 하고 병원에 갔다. 의사에게 솔직하게 다 털어놓았다.
“제가 스물한 살 때 만난 친구가 있었는데요, 작년에 죽었습니다. 그래서 너무 가슴이 아파요.... 그 친구가 그냥 친구가 아니거든요. 전 그 친구를 사랑했습니다. 제가 게이라서요. 그 친구는 게이가 아니니까 제가 좋아하는 걸 몰랐을 테죠. 짝사랑인 셈입니다.... 20년 넘게 짝사랑하는 게 너무 답답해서 용기를 내어 가지고 고백하려고 했었거든요. 근데 그 친구가 허망하게 죽어버렸어요.... 딱 이맘 때요.... 가슴이 너무 아파요.... 죽을 거 같은데 심장은 너무 건강해서 죽지도 않아요.... 너무 아파서 미칠 거 같은데 제정신으로 병원에도 찾아왔네요.... 정신과 와서 이런 말하면 또.라이로 보이나요?”
의사는 내 말을 잘 들어주고 이런저런 말도 해줬지만 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약 처방도 받았다. 나는 약을 먹지 않았다. 내가 나를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죽는 것을 본능적으로 무서워했기에 충동적인 행동을 전혀 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나는 그럴 만한 용기도 없었다.
10월 중순이 지나면 조금씩 나아진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참았다. 살아있는 자의 어쩌지 못하는 슬픔이었으니 참을 수밖에 없었다.
10월 하순이 되면서부터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시절 아버지의 제삿날이 지나면 답답한 가슴이 나아지는 것과 비슷했다.
하지만 10월이 채 가기도 전에 나는 다시 무너져 내렸다. 석호와 나의 우상이었던 신해철이 사경을 헤매다 결국 세상을 등졌다. 겨우 가라앉았던 마음이 다시 요동을 쳤다. 재수를 할 때부터 지금까지 항상 그의 노래를 들으며 살아왔는데, 석호처럼 그는 가고 노래만 남았다.
슬프고 답답한 마음을 풀기 위해 노래방으로 달려갔다. 다른 노래들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신해철의 노래만 불렀다. 지난 25년 동안 나를 철 들게 하고, 힘겨울 때 위로를 해주던 노래들이었다.
마지막 몇 분이 남았을 때 미뤄두었던 노래의 번호를 눌렀다. 신해철이 방송에서 자신의 장례식 때 울려 퍼졌으면 좋겠다고 말하던 노래였다. 석호가 Bee Gees의 ‘Holiday’를 레퀴엠으로 삼았듯이 ‘민물장어의 꿈’은 신해철의 레퀴엠인 셈이었다.
신해철 – 민물장어의 꿈
나에게 10월은 정말 잔인한 달이었다. 내 인생에서 중요했던 사람들이 모두 10월에 세상을 떴다. 해마다 10월이 되면 가슴이 터질 듯 아플 것 같았다.
오히려 석호가 부러웠다. 석호가 살아있었으면 우상이던 신해철의 죽음 앞에서 나보다 더 가슴이 아팠을 터였다. 아픔이 없는 저 하늘 위에서 석호는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신해철을 맞이하여 어깨를 감싸 안고 위로해 주겠지 하는 생각으로 나는 아픔을 견뎠다.
해가 바뀌어 2015년 여름, 여느 날처럼 TV 앞에 멍하게 앉아 생각없이 채널만 돌리다가 본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중식이 밴드를 만났다. 그 어떤 기대감도 없이 무기력하게 살아가던 나에게 큰 기쁨이고 희망이었다. 첫 방송 예심에 나와 부른 자작곡은 신이 나기도 했고, 무엇보다 생활밀착형 가사가 내 마음에 쏙 들어왔다. 석호가 추구하던 음악과 맥이 통하는 것이 있어서 관심 있게 지켜봤다.
첫 방송이 끝나고, 퇴근을 하면 중식이 밴드를 검색하며 조금씩 알아갔다. 발매된 음원들을 모두 다운 받아 아이튠즈 보관함에 넣어두고 수시로 들었다. 출퇴근길에 듣는 노래 목록에도 추가시켰다.
노래를 들을 때마다 가사가 귀에 쏙쏙 들어왔다. 시대의 아픔이, 젊은 세대의 절망이, 잘못 돌아가는 세상에 대한 한탄과 비판이 담겨 있었다. 석호도 무척이나 좋아했을 만한 노래들이었다.
중식이 밴드 – 선데이 서울
무기력했던 내 삶에서 중식이 밴드의 노래들은 생의 활력을 가져다주었다. 일주일 내내 노래를 듣고 방송이 되는 날에는 TV 앞에 앉아 응원했다.
여러 미션들을 통과하고 탑10 안에 들었을 때는 내가 다 기분이 좋았다. 사전투표도 하고 본방송을 보면서 문자투표도 했다. 데면데면하게 지내던 사무실 직원들에게도 열심히 알렸다. 다른 참가자를 응원하는 직원과는 싸우기까지 했다.
본방송이 있는 날에는 그나마 말을 트고 지내는 직원들에게 100원을 주며 문자투표를 부탁했다. 100원 가지고 되냐는 말에 점심까지 사주면서 부탁했다. 방송이 시작되면 직원들에게 메지시를 보내 중식이 밴드의 번호를 말하고 다시 한 번 각인시켰다. 점심까지 사줬기에 투표 인증샷을 요구했다.
내 기대에 부응해서 탑4까지 올라갔다. 스튜디오가 아닌 큰 무대에서 생방송이 진행될 때에는 표를 구해 직접 보러갔다. 많은 사람들이 구경 와 있었다. 특히 솔로 참가자들의 팬덤은 체계적이고 열성적이었다. 무더기로 자리를 잡고 앉아 만들어 온 것들을 흔들며 응원을 했다.
나처럼 중식이 밴드를 응원하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도 곳곳에 존재했을 테지만 한 곳에 뭉쳐 있지 않아서 솔로 참가자들의 팬덤을 감당하기에는 힘들어 보였다. 내가 나서야 할 것 같았다. 솔로 참자가의 팬들이 함께 소리를 지르면 나는 그것을 받아 혼자서 소리를 질렀다. 나도 한 때는 밴드 SUKO FLY의 서브 보컬 출신이었으니 목소리 하나는 자신이 있었다.
아저씨가 혼자 보러 와서 소리를 빽빽 지를 때마다 내 주위에 앉은 사람들이 나를 쳐다봤지만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곳은 오디션 경연장이었고, 응원을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기 때문이었다. 남녀 커플로 구경 온 내 옆자리 남자도 중식이 밴드를 응원한다고 친한 척을 했다. 그렇다면 가만히 있지 말고 같이 소리 지르자고 부추겼다.
그런데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하필이면 내가 직접 보러 간 그날 떨어졌다. 생방송이 시작되기 전부터 어느 정도 감지는 하고 있었다. 문자 투표의 비중이 높은 상황에서 역시나 체계적으로 움직이는 팬덤을 감당할 수는 없었다.
안타까운 마음을 뒤로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밤공기가 무척 차갑다는 것이 느껴졌다. 여름부터 목요일 밤마다 방송을 챙겨보는 동안 어느새 10월이 지나 11월이 되어 있었다. 고통스러울 것이라 생각했던 2015년 10월이 나도 모르게 지나가 있었다. 중식이 밴드는 내 빈 가슴을 채우고, 내 상처를 감싸 안아준 셈이었다. 고마웠다.
방송이 끝나도 계속 중식이 밴드의 노래를 들으며 살았다. 방송의 여파 때문인지 노래방에도 두 곡이 나와 있었다. 노래방에 갈 때마다 먼저 두 곡을 부르고 다른 노래들을 불렀다.
해가 바뀌어 겨울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내가 구독해 둔 페이스북 페이지에서 중식이 밴드가 공연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정말 오랜만에 대학가 클럽 나들이에 나섰다. 내 젊은 시절이 숨 쉬는 곳이었다. SUKO FLY의 멤버로 클럽 무대에서 공연을 하던 내가 정말 오랜만에 좋아하는 밴드의 공연을 보러 가는 마음은 무척이나 설레었다.
클럽 안에서 혼자 기다리는 것이 좀 어색해서 옛날 추억을 되새기며 이리저리 배회를 하다 공연 시작 시간에 맞춰 클럽으로 향했다. 작은 클럽 안이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방송에 나오고 난 몇 달 사이 팬클럽도 생겼는지 한데 모여서 현수막도 흔들고 소리를 질렀다. 방송의 힘이었다. 나 역시도 방송을 통해 밴드의 존재를 알았고, 클럽 공연까지 보러 왔으니 방송의 힘은 대단한 것이었다.
출퇴근길에 늘 들었던 노래들을 직접 공연장에서 들으니 더욱 좋았다. 공연의 매력이었다. 공연을 보는 사람은 물론이고 공연을 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석호가 동아리에서 탈퇴를 하고 총학생회에서 제시하는 조건들을 모두 받아들였던 것도, 클럽 공연 첫날 관객이 없는 와중에서 우리가 연주를 했던 것도 모두 공연의 매력 때문이었다. 함께 호응해 주는 관객들이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었다.
마지막 앵콜곡이 나올 때 나는 코끝이 찡했다. 우리네 살아가는 모습이 가사에 그대로 나타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음원으로 출시된 것이 아니라 공연장에서만 들을 수 있는 노래라서 더욱 가슴으로 다가왔다.
중식이 밴드 – 불타는 버스
중식이 밴드가 좋은 노래들로 승승장구할 수 있기를 바라며 공연장을 빠져 나왔다. 집에 돌아와 베이스 기타를 오랜만에 꺼내 들었다. 석호에게 받은 가장 큰 선물이었기에 밴드를 그만 뒀을 때에도 가끔씩 꺼내 깨끗이 닦고는 했었는데, 석호가 세상을 뜬 이후로는 한 번도 꺼내 본 적이 없었으니 거의 3년만이었다. 스트링에 약간 녹이 슬어 있을 뿐 몸체는 정상이었다. 넥이 휜 것 같지도 않았다. 녹이 슨 스트링을 걷어내고 깨끗하게 닦았다.
다음날, 집 근처 악기 가게에서 점검을 받고 새 줄을 장착했다. 그리고 조그만 앰프를 장만했다. 바로 집으로 돌아와 앰프에 연결을 하고 조율을 하기 위해 한 줄 한 줄 손가락으로 튕겼다. 앰프가 보잘 것 없어도 20대 젊은 시절에 끼고 살았던 내 베이스는 묵직한 소리로 방 안을 울렸다.
하도 오랜만이라 잘 될까 싶었으나 내 손가락들은 모두 기억을 하고 있었다. 석호 플라이의 1집 노래를 틀어놓고 미친 듯이 연주를 했다. 그동안 어떻게 참고 살았는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너무 신이 났다. 엄지로 줄을 때리고 검지와 중지로 줄을 뜯었다. 쿵짝거리는 소리가 그동안 텅 비어 있던 내 마음과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인터폰이 울렸다. 무슨 짓이냐고, 미쳤냐고 항의가 들어왔다.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이 분명했으므로 진심으로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다. 하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앰프에 헤드폰을 끼우고 다시 미친 듯이 베이스 줄을 튕겼다. 하루 종일 아무 것도 먹지 않아도 배가 고픈 줄을 몰랐다. 베란다 밖에는 어느새 어둠이 깔려 있었다.
그 후로 할 일이 없어 갑갑할 때면 베이스 기타를 꺼내 미친 듯이 줄을 뜯었다. 밴드가 하고 싶었다. 석호가 밴드는 마약과 같은 것이라 절대로 끊을 수 없다던 말이 사실이었다. 석호 플라이에서 빠진 것도 하기 싫어서가 아니었기에 하고 싶은 걸 억지로 참느라 고생했었는데, 이제 참는 것이 한계가 온 것 같았다.
그렇다고 철우와 민구에게 연락을 해서 밴드를 하자고 할 수는 없었다. 내가 나올 때 그렇게 말리고, 몇 번이고 다시 하자고 한 것을 내가 뿌리쳤으니 뜬금없이 밴드를 하자고 연락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헤드폰을 끼고 베이스 줄을 튕기는 것뿐이었다.
날이 갈수록 밴드에 대한 금단 증세가 심해졌다. 정말 미칠 것 같았다. 다시 정신과에 가서 밴드가 하고 싶어 미치겠는데, 미치지 않도록 해 달라고 할 수가 없었다. 정신과 의사라도 별 미친놈 다 보겠다고 쫓아낼 것 같았다.
유난히 무더운 어느 여름날, 퇴근을 하고 샤워를 하기 위해 옷을 다 벗었을 때 베이스 기타가 눈에 들어왔다. 곧바로 베이스를 매고 줄을 뜯었다. 옛날 생각이 떠올랐다. 젊고 열정이 있었던 20대의 모습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혼자서 뜯는 베이스 기타는 아무리 해도 성에 차지 않았다. 발가벗은 채로 거리로 달려 나가 베이스 줄을 뜯으며 밴드를 하고 싶다고 외치고 싶었다. 내가 생각해도 미친 것이 분명했다.
여름이 가기 전, 아파트 엘리베이터 앞에 붙어 있던 공고문은 나를 살리기 위해 하늘이 내려준 선물이었다. 아파트 주민들끼리 하는 밴드에서 베이스 신입회원을 모집한다는 공고였다. 나이불문이고, 아파트 주민이면 된다고 적혀 있었다. 몇 년 전에도 본 적이 있었다. 그때는 그저 스쳐지나갔었는데, 이제는 눈에 확 들어와 가슴에 박혔다. 공고문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밴드 회원모집 공고 보고 전화 드렸습니다.”
“네. 악기는 좀 다룰 줄 아십니까?”
“네. 젊을 때 좀 쳤습니다. 제가 어떻게 하면 되나요?”
“음.... 통기타 동호회 같이 아무나 받아들이는 건 아니라서 오디션을 좀 봐야 합니다. 다음 주 토요일 저녁 6시에 오디션을 볼 건데, 그때 시간 되십니까?”
시간이 안 되면 만들어서라도 가야 할 판이었다. 그런데 일주일 넘게 기다리기가 답답했다.
“네. 됩니다만.... 혹시 오디션을 좀 일찍 볼 수는 없을까요? 저는 매일 저녁에 시간이 됩니다.”
“저희도 모집 기간을 좀 둬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 그렇군요.”
“그럼 6시까지 관리사무소 건물 지하로 오세요. 거기가 연습실이거든요. 혹시 악기는 가지고 계십니까?”
“네. 있습니다. 그럼 오디션은 어떻게....”
“그냥 자신 있는 곡 한두 개 하시면 됩니다. 노파심에서 말씀 드리는 건데요.... 우리가 아파트 주민 밴드이긴 하지만 그래도 꽤 실력이 됩니다. 혹시 보셨는지 모르겠지만 매년 봄가을에 주민광장에서 공연도 했구요. 베이스 치던 분이 갑자기 이사를 가셔가지고 모집을 하는 거거든요.”
“아~ 네에~”
“음.... 미리 말씀드리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드리는 말씀인데요.... 방금도 말했지만 아무나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어느 정도 실력이 되어야 한다는 말 꼭 명심해 주세요. 예전에 어느 주민분이 오디션 떨어뜨렸다고 진상을 좀 피우셔서 말이죠. 우리는 제대로 된 멤버를 구한다는 거 꼭 알아주십시오.”
“네. 그럼 다음 주 토요일 저녁에 뵙겠습니다.”
자부심이 느껴지는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주눅이 들어 고분고분하게 인사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 일주일 조금 넘는 시간이 주어진 것이 어쩌면 다행이었다. 오디션에 합격하기 위해서는 연습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처음 보는 오디션이었다. 클럽에서 봤던 오디션은 석호 플라이 전체가 하는 것이어서 나는 그저 묻어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기에 부담이 별로 없었는데, 다 늙은 나이에 혼자서 오디션에 참가하는 것은 상당한 부담이었다.
오디션은 선곡이 중요했으므로 노래를 신중하게 골라야 했다. 그런데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한 곡밖에 없었다. 송골매의 ‘어쩌다 마주친 그대’였다. 여러 베이스 주법이 총망라된 것이었으니 오디션 곡으로 이 노래만한 것이 없었다. 나와 함께 오디션을 보는 사람들에게 뒤질 수 없었으니 매일 퇴근을 하면 자기 전까지 열심히 연습했다.
오디션을 보는 날, 하루 종일 연습을 하다가 이른 저녁을 먹고 집을 나섰다. 처음 보는 오디션이라 기대도 되었지만 절대로 떨어져서는 안 되는 오디션이었기에 무척 긴장이 되었다. 긴장을 달래려고 관리사무소 앞에서 담배를 세 개피나 연달아 피워댔다. 그래도 가슴이 콩닥거렸다.
천천히 걸어서 지하 계단을 내려갔다. 대학 시절 무턱대고 동아리방에 찾아가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그때는 그냥 무대뽀였다면 지금은 분명한 목적과 목표가 있기 때문이었다. 문 앞에 서서 가슴을 한 번 쓸어내리고 두 번 노크를 했다. 안에서 ‘네~’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조심스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네 사람이 앉아 있었다. 나를 쏘아 보는 눈빛에 눌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먼저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오늘 오디션 본다고....”
배가 나오고 덩치가 좀 있는 아저씨가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맞이했다.
“안녕하세요, 제가 전화 받았던 사람입니다. 지금 바로 한 번 해 보시죠.”
“다른 분들은....”
“아~ 전화하신 분이 그쪽 한 분이셔서요.”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뭔가 심상치 않았다. 다들 나이가 들어 보이긴 했는데, 모두 나보다는 더 젊어보였다. 30대로 보이는 사람도 있었다. 한 때 젊어보인다는 말을 많이 듣던 나도 나이 마흔을 넘어서면서 내가 봐도 딱 내 나이처럼 보였으니 나이 많은 아저씨가 와서 밴드를 하겠다고 하는 게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마뜩찮게 바라보는 눈빛에 괜히 주눅이 들었다.
어깨에 매고 있던 베이스를 내려놓으려는데, 벽 쪽에 베이스 하나가 눈에 띄었다. 안 그래도 나이 많은 내가 25년도 더 된 베이스를 들고 연주를 하면 더 늙어 보일 것 같아 조심스레 물었다.
“저걸로 해도 될까요?”
사람들은 대답 없이 니 마음대로 하세요 하는 표정으로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베이스를 매고 줄을 튕겨보니 조율이 다 되어 있었다. 나는 휴대폰을 꺼내 노래를 찾은 다음 크게 심호흡을 하고 재생 버튼을 눌렀다. 전주가 나오자마자 다들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이었다.
순간 너무 떨려서 눈을 감았다. 안 보고 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나는 서둘러 박자에 맞춰 4번 줄을 엄지로 한 번 때리고 줄을 뜯으며 첫 두 마디를 연주했다. 내 것만큼은 아니었으나 소리가 괜찮아서 긴장이 조금 풀리는 것 같았다. 그 다음은 구창모의 노랫소리에 맞춰 리듬에 손가락을 얹었다. 그리고 계속 눈을 감고 신나게 연주했다.
노래가 잦아 들어갈 때에야 눈을 떴다. 모두들 나를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처음과는 달리 표정이 좀 풀려 있어서 다행이었다. 나는 가만히 베이스를 내려놓고 오디션 프로그램에 나온 사람처럼 가만히 서서 평가를 기다렸다. 서로 내 눈치를 보며 수군대다가 내 전화를 받았다던 사람이 먼저 말을 꺼냈다.
“혹시 다른 곡 하나 더....”
오디션을 보러 온 사람이 나 하나뿐이고, 표정도 꽤나 만족한 듯 보여서 조금 도발을 해도 되지 싶었다. 케이스에서 내 베이스를 꺼내 어깨에 둘러맸다. 또 자기네들끼리 수군댔다. 세월이 묻어나는 내 베이스에 대한 이야기인 것 같았다. 내가 21살 때 산 것이었으니 26년이 된 것이었다.
나는 석호 플라이의 1집 앨범에서 내가 부른 노래를 재생했다. 석호가 베이스 라인을 기가 막히게 만든 것이라 내 목소리와 베이스가 부각되는 것이었다. 다른 참여자에게 밀린다 싶으면 꺼내들 비장의 무기로 준비해간 것이었다. 사실 준비랄 것도 없긴 했다. 옛날에 하던 대로 하면 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한 때 클럽에서 공연을 했던 밴드의 멤버라는 것을 내세워서라도 오디션에 합격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내가 연주를 마치자 모여 있던 사람들이 박수를 쳤다. 그리고 나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고 모두 소개를 했다. 내가 역시나 나이가 제일 많았다. 나는 나이와 이름, 아파트 동과 호수를 말하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오디션 합격인가요?”
내 전화를 받은, 그러니까 드럼을 치는 이경수 씨가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당연하죠. 그리고 말씀 낮추세요, 제일 형님이신데....”
합주는 금요일과 토요일 저녁이었다. 오디션 첫날은 가을 공연에 연주할 악보를 받고 합주 없이 바로 술자리로 이어졌다. 신입회원 환영회가 명분이었다. 모두들 내 경력에 관심을 보였다. 특히나 밴드의 리더인 경수가 나에게 질문을 많이 퍼부었다. 나는 그저 간단히 대학 다닐 때 스쿨밴드를 했고, 졸업을 하고 나서도 몇 년 간 밴드 활동을 했노라고 답했다. 모두 존경의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부끄러웠다. 경수가 눈빛을 반짝거리며 물었다.
“아까 연주한 노래는 뭐에요? 처음 듣는 노랜데....”
“SUKO FLY 라고.... 인디 밴드 노래....”
나에게 반말을 하라고 했지만 초면에 그러기가 쉽지 않아 나는 그냥 말끝을 흐리는 식으로 말을 했다.
“우리 주공 밴드에 제대로 된 사람이 들어왔어요.”
밴드 이름이 주공이었다. 주공아파트라서 그런 듯 싶었다. 아파트 주민 밴드 이름으로 이것만큼 적당한 것이 없을 듯했다.
2차는 자연스럽게 노래방으로 이어졌다. 주공 밴드의 메인 보컬 김철민 씨가 가장 먼저 마이크를 잡았다. 보컬답게 선곡도 X-Japan의 Tears였다. 처음부터 내질러야 하는 것이라 웬만큼 노래에 자신이 있지 않으면 쉽지 않은 곡이었는데, 철민이는 목소리가 카랑카랑한 것이 꽤나 잘 불렀다. 괜히 보컬이 아닌 듯 했다. 하지만 내 귀는 석호가 부르는 것에 맞춰져 있었기에 그저 무난하게 부르는 것에는 그다지 감동이 되지 않았다. 토시보다 석호가 더 잘 부른다고 소문이 자자했었다.
마이크가 돌고 돌아 나에게 왔다. 밴드의 뒤풀이 자리였으니 그에 어울리는 노래를 불러야 할 것 같았다. 다른 회식 자리에서는 엄두도 못낼 노래였다.
N.EX.T – Lazenca, Save Us
나 역시 석호에 비하면 보잘 것 없긴 해도 이 노래만큼은 고음도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다. 내가 다시 밴드를 하게 되었다고 석호에게 알리려는 듯 나는 그냥 막 내질렀다. 노래를 다 부르고 점수가 나오기 전에 리모컨으로 취소 버튼을 눌렀다. 둘러 앉아 있던 모두가 나를 또 물끄러미 바라봤다. 기타를 치는 김우식 씨가 나에게 물었다.
“형님, 밴드하실 때 베이스만 친 거 아니죠?”
“아주 가끔.... 서브 보컬로.... 내가 하던 밴드에 워낙 노래 잘 하는 보컬이 있어서....”
키보드를 치는 최호태 씨가 나에게 물었다.
“도대체 형님이 하던 밴드 이름이 뭡니까?”
“그냥 인디 밴드.... TV에 한 번 나오지도 못한 그런 밴드.... 다음에 알려 줄게.”
다들 가정이 있는 몸들이라 노래방 2차를 마지막으로 흩어졌다. 나도 내가 연습해야 할 악보를 챙겨 집으로 향했다. 드럼을 치는 경수가 내 뒤에 따라 붙었다.
“형님, 시간 괜찮으면 저랑 한 잔 더 하실래요?”
나에게 남는 게 시간이었으니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오랜만에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게다가 새로 시작하는 밴드의 리더이고, 드럼 주자였으니 어느 정도 얘기가 필요할 것도 같았다. 아파트 상가 투다리에서 꼬치 몇 가지를 시켜놓고 나란히 앉아 소주를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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