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아라 황석호 -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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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철우와 민구의 표정이 너무 진지해서 하마터면 그럴까 하면서 받아들일 뻔했다. 나는 고개부터 저었다.
“내가 뭐 한 게 있다고.... 과외 안 하니까 저녁이랑 주말에 시간이 많이 남아서 연애하기 존.나 좋아. 요즘 내가 여자 따먹는 재미로 사는데.... 싫어.”
민구가 오만 인상을 다 찌푸리며 나에게 말했다.
“이 씨.발새끼.... 다른 때는 안 그러면서 여자 얘기만 나오면 말 존.나 얄밉게 해. 재수 없는 새끼.... 빠.구리도 존.나 못하는 새끼가 말은....”
“야, 김민구.... 너 한 번만 더 빠.구리 얘기하면 혀를 확 뽑아버린다.”
은정이만 보면 속이 상하는 철우는 민구에게 화풀이를 했다. 민구와의 관계도 생각이 났을 터였다.
“아이고 무서워라.... 영기야, 나 좀 살려줘. 요즘 철우도 완전 지 맘대로야. 내 편이 하나도 없어....”
민구는 엄살을 피웠다. 석호가 뷔페 입구에서 우리에게 손짓을 했다. 행사가 시작하려는 모양이었다. 자리에 돌아와 앉자마자 하늬가 나에게 안아달라고 팔을 내밀었다. 애나 어른이나 여자들에게 인기가 있는 내 팔자가 야속했다. 내 인생은 정말 실속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생일상 뒤에 배경으로 자리 잡은 스크린에 돌잔치의 주인공 영오의 사진이 시간순으로 흘러갔다. 1년 동안 살아온 삶의 궤적이었다. 모든 사진을 석호가 찍은 것인지 석호는 어디에도 없고, 간간이 은정이의 모습만 나왔다. 그러다 마지막 사진에 석호가 등장을 하고, 돌잔치에 온 사람들 모두가 한 바탕 크게 웃었다. 석호의 돌사진인 듯 발가벗고 있는 모습이었다. 바로 그 옆에는 영오의 사진이 나란히 있었는데, 쌍둥이처럼 똑같았다. 씨도둑은 못한다는 말이 떠올랐다.
영오를 안고 얼굴을 부비는 석호의 모습이 너무나 행복해 보였다. 조금 전 화를 내던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철우의 무릎에 앉은 윤슬이도 철우와 무척이나 닮아 있었다. 영지가 철우에게 웃으며 말했다.
“오빠, 윤슬이 돌잔치할 때도 저렇게 할 걸. 자기도 윤슬이랑 똑같잖아.”
“그러게, 재밌네.... 영지야, 우리 아들 하나 더 낳아서 저렇게 해 볼까?”
“미쳤어?”
말은 미쳤냐고 했지만 영지는 웃고 있었다. 남편이 돈도 못 버는 백수 딴따라여도 철우를 바라보는 영지의 눈빛에는 항상 웃음이 가득했다. 사랑의 힘이었다. 철우도 그랬다.
“하늬 돌잔치 때 엄마 돌사진이랑 같이 붙여 놨어도 재미있었겠네....”
내 말에 영지가 답했다.
“하늬도 나 별로 안 닮고 아빠 닮았어요.”
“내가 보기엔 아닌데? 아빠 닮았으면 이렇게 이쁠 리가 없지. 엄마 닮았으니까 이렇게 이쁘지.”
“호호호호 오빠는 진짜 말도 이쁘게 해. 여자들이 안 좋아할 수가 없어.... 하늬야, 지금 너 안고 있는 삼촌이 니 이름 지어준 거야. 삼촌한테 고맙다고 뽀뽀해.”
하늬가 내 볼에 쪽 하고 뽀뽀를 했다. 너무 귀여웠다.
“윤슬이 니 이름도 영기 삼촌이 지어준 거 알지?”
영지의 물음에 윤슬이가 나를 한 번 슬쩍 쳐다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영지가 윤슬이를 낳기 전 만삭의 몸으로 연습실을 찾아온 적이 있었다. 출산 전 휴가를 받고 집에서 쉬고 있을 때 심심하다며 철우를 따라온 것이었다. 뱃속의 태아를 위해서 합주는 하지 않고 영지 앞에서 철우의 여성 편력에 관해 낱낱이 까발렸다. 영지는 쿨하게 웃으며 받아쳤다.
“상관없어요. 어차피 한철우 애는 내가 뱄는데 뭐.... 영기 오빠, 우리 애 이름 지어야 되는데, 한글 이름으로 지을 거거든요. 오빠가 국문과 나왔으니까 이쁜 단어 좀 얘기해 봐요.”
그때 내 입에서 나온 단어가 윤슬이었다.
“윤슬? 처음 들어보는 말인데 뭐에요?”
“음.... 왜 있잖아.... 바다나 강물에 햇빛이나 달빛 받아서 반짝이는 거. 그게 윤슬이야.”
“어머나~ 말도 이쁘고 뜻도 이쁘네.... 우리학교 국어샘들한테도 리스트를 받아놓은 게 있거든요. 다 마음에 안 들었는데.... 윤슬.... 윤슬.... 윤슬아~ 부르기도 좋고, 아들이든 딸이든 상관없을 거 같아요. 접수 완료.”
석호가 철우에게 한 마디를 던졌다.
“아이 이름은 항렬자 따라야 되는 거 아냐?”
철우에게 물은 것인데, 영지가 발끈 하며 대답을 했다.
“그런 거 진짜 싫어. 평생을 달고 살아야 하는 게 이름인데 멋없게 지을 수는 없어요. 영지가 뭐야 영지가.... 내 별명이 버섯인 거 알아요? 진짜 싫어.... 아이 이름은 심사숙고해서 이쁘게 한글로 지을 거에요.”
영지의 마음이 나랑 똑같았다. 내 별명이 미역기인 게 너무 싫어서 내 아이만큼은 이쁘게 이름을 지어줘야 한다는 마음으로 찾은 것이 윤슬이었다. 찾았다기 보다는 책을 읽다가 낯선 단어 나와서 뭐지 하고 사전을 찾아보고 나서 마음속에 저장해 둔 단어였다. 어차피 나는 아이를 낳을 일도 없으니 나에게는 무의미한 것이었다.
둘째 아이를 가졌을 때도 영지가 나에게 연락을 해서 이름을 지어달라고 했다. 의사를 구워 삶아 딸이라는 것을 알아냈다며 여자 아이에 맞는 이름을 부탁했다.
“우리학교 국어샘들은 딱 두 개 찝어줬어요. 오빠도 뭔지 알겠죠?”
“혹시 송이, 아름?”
“맞아요. 성이 한씨니까 한송이, 한아름..... 나도 그 정도는 짓겠다.”
“하늬는 어때? 하늬바람이라고 들어봤지? 서쪽에서 부는 바람.... 하늬바람이 불면 곡식이 익어. 이선희 노래 중에 갈바람 있잖아. 갈바람이 하늬바람이야.”
역시나 내가 딸을 낳으면 붙여 주려고 생각하던 이름이었다.
“오~~ 이뻐 이뻐....”
철우의 아들과 딸은 내가 낳지 못하는 아이의 이름을 받은 셈이었다. 내가 생각해 뒀던 이름이 가장 친한 친구 중의 한 명인 철우가 낳은 아이들에게 붙여졌으니 나로서도 좋은 일이었다.
“나도 애를 낳으면 저렇게 나를 닮겠지? 나중에 돌잔치 할 때 나도 저렇게 해봐야겠어.”
민구가 흐뭇하게 웃으며 한 말이었다. 그런데 이 말을 바로 영지가 받아쳤다.
“민구 오빠는 꼭 아들 낳아야 해요. 딸 낳으면 안 돼.”
“왜?”
“딸이 오빠 닮았다고 생각해 봐요. 끔찍하죠?”
민구는 정말 상상을 했는지 잠시 있다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했다. 철우와 나는 민구의 모습을 보며 웃었다. 민구를 공격하던 철우도 이번에는 좀 안쓰러웠는지 민구의 편을 들어줬다.
“영지야, 민구한테 너무 심했어.”
“심하긴 뭐가 심해. 이쁜 여자 밝히니까 내가 이러는 거 아냐. 여자는 이뻐야 된다고 늘 그랬잖아. 민구 오빠, 반성하세요.”
민구가 억울한 듯 영지에게 반발을 했다.
“왜, 나만 가지고 그래. 영기도 이쁜 여자 엄청 밝혀. 얘가 얼마나 눈 높은데....”
“영기 오빤 자기가 잘생겼으니까 그래두 돼.... 어우~ 진짜 영기 오빠 애 벌써부터 보고 싶다. 아들은 잘생기고, 딸은 이쁠 거 아냐. 진짜 인형 같겠다.... 오빠 빨리 결혼해서 애 낳으세요. 오빠가 딸 낳으면 우리 윤슬이랑 어릴 때부터 붙여 놓을 거야. 호호호호”
철우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와~ 진짜 우리 마누라 영기만 좋아하고, 남편 앞에서 너무 심한 거 아냐? 내가 고백하기 전에 영기 보여줬으면 큰일 날 뻔 했어.”
“내 남편 지금 보니까 바보네.... 오빠가 안 보여주면 내가 못 봐? 난 눈 없어? 나 입학하고 나한테 공연 보러 오라고 한 사람이 오빠면서.... 베이스 치는 오빠 잘생겼네 하면서도 나는 오빠만 보고 있었는데.... 오빠 정말 실망이야.”
“진짜?”
“그럼 진짜지.... 내 눈엔 오빠가 제일이었단 말야.... 이제 아줌마 다 됐으니까 하는 말인데.... 오빠랑 연애할 때 몸에 무슨 문제 있나 싶었어. 나 안 건드려서.... 이렇게 자기 닮은 애도 잘 만들면서....”
철우는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밝게 웃었다. 자기를 닮은 아이가 있다는 것은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부러웠다. 민구도 부러운 듯이 철우 부부를 바라봤다. 돌잔치 사회자의 말이 들렸다. 돌잔치의 하이라이트 어쩌구하며 돌잡이 순서를 진행하는 말이었다.
생일상에는 일반적인 돌잡이 물건들 외에도 장난감 악기들이 놓여 있었다. 아빠가 밴드를 이끌고 있으니 추가한 것 같았다. 사람들은 저마다 소망하는 것을 외쳤다. 돈을 잡으라고 하는 말이 가장 많이 나왔다.
영오가 잡은 것은 장난감 기타였다. 빨간색에 알록달록한 무늬가 있는 것이고, 다른 것들에 비해 크기도 했으니 영오의 시선을 잡아 끈 모양이었다. 다들 아빠를 꼭 닮았다며 크게 웃었다. 석호의 얼굴에도 함박웃음이 피어났다. 영오의 할아버지는 아예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쳤다.
영오의 독사진을 비롯해 가족들끼리 사진을 찍고, 우리끼리도 사진을 찍었다. 내가 영오를 안고 있는 모습도 사진으로 찍혔다.
헤어지기 전에 마지막 담배를 피우기 위해 바깥으로 나가려는데, 영지가 나를 붙잡았다.
“오빠, 하늬 잠깐만 봐줘.”
내가 하늬를 안고 있을 때 영지는 비닐봉지에 음식들을 이것저것 담았다. 담배를 다 피우고 들어온 철우는 영지에게 짜증을 냈다.
“쪽팔리게.... 내가 이런 거 하지 말랬지?”
영지는 철우의 말을 무시하고 음식을 봉지에 담았다. 나는 안고 있던 하늬를 철우에게 넘겼다. 그리고 영지에게 봉지를 얻어 나도 음식을 담았다.
“역시 오빠는 혼자 사니까 내 마음을 아는구나.... 오빠, 육회를 많이 담아요. 제일 쓸모 있어....”
석호에게 미안하다는 말도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가슴이 너무 아팠다. 그리고 두려웠다. 한동안 석호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을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석호가 자기랑 꼭 닮은 아이를 안고 행복해 하는 모습을 봤으니 다행이었다.
나는 또 쳇바퀴 속으로 들어가 열심히 달리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남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나는 공무원의 일상이 정말 지겨웠다. 직원들과도 거의 말을 섞지 않았다. 어쩌다 있는 회식도 눈 밖에 나지 않을 정도로만 참석하고 혼자서 지냈다. 그냥 나에게 주어진 업무만 충실히 이행했다. 따박따박 정해진 날에 월급이 들어오는 날만 기다리며 살았다.
특별하게 기억할 만한 것이 없어서 일기를 쓸 거리도 부족했다. 드라마를 보고 감상평을 쓰거나 가끔 영화를 보고 평점을 매기듯 한 줄 평을 적었다. 일주일에 두세 번 노래방에 가던 것도 차츰 줄어 일주일에 한 번 꼴로 바뀌어 갔다. 노래를 부르는 것보다 담배를 피우는 시간이 더 많았다. 노래방에 갈 때마다 기계적으로 누르는 번호가 있었다. 집 근처 노래방 기계는 금영이라 5508, 사무실 근처 노래방은 태진이라 4638이었다.
신해철 - 일상으로의 초대
석호가 좋아하고 또 자주 부르던 노래였다. 아니, 나랑 가끔 노래방에 같이 갈 때마다 불렀다.
“영기야, 이 노래 고백하는 노래로 짱이지 않냐? 닭살스럽지도 않고.... 정말 나도 이런 가사 쓰고 싶다....”
“너 이 노래 부르는 거 안 지겨워?”
“지겹긴.... 연습하는 거야.... 열심히 연습해서 내가 마음에 두고 있는 애한테 고백할 때 불러줄 거야....”
석호가 이 노래를 부를 때마다 석호가 일상으로 초대를 하는 사람이 나였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었다. 석호가 마음에 두고 있는 여자가 누군지는 몰라도 이 노래로 고백을 받으면 참 행복하겠다 싶었다. 그런데 석호는 이 노래로 고백도 못하고, 은정이를 엄마로 둔 영오의 아빠가 되어 있었다. 나는 그런 석호를 생각하며 혼자서 노래를 불렀다. 내가 부르는 노래는 고백이 될 수도 없었고, 좁은 노래방에 퍼지는 헛된 소음에 불과했다.
하루하루가 모여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났다. 신해철의 노래 가사처럼 눈을 뜨면 똑같은 내 방이었고, 또 하루가 시작이 되었다. 숨을 쉴 뿐 별 의미도 없이 그냥 지나갔다. 한 장 또 한 장 벽의 달력은 단 한 번도 쉼 없이 넘어가고, 나는 천천히 혼자 메말라가는 느낌으로 하루하루를 살았다.
영오의 돌잔치가 있고 몇 달 만에 철우에게서 또 전화가 왔다. 가끔 안부를 묻는 전화가 아니었다.
“민구 결혼식 날 잡혔어. 다음 주 토요일 3시야.”
“누구랑 결혼하는데?”
“너도 알잖아. 민구가 공들인 제자.”
“민구도 너처럼 빼도 박도 못하게 임신시킨 거야?”
“응. 진짜 내가 그것들 때문에 못 살겠다.... 영기 너는 제발 좀 꼭 결혼식 하고 나서 임신 시켜라, 알았지?”
“응.... 그럼 또 우리가 축가 불러줘야 되는 거야?”
“응. 나 결혼할 때처럼 한 곡만 간단히. 석호가 선곡해 놨어. 너 언제 시간 돼? 한 번 맞춰 봐야지. 드럼 없이 가야되니까 너 꼭 필요해.”
“이번 주말에 한 번 갈게.”
“그래, 그동안 손가락 좀 풀어놔.”
민구의 결혼식 1주일 전 토요일, 퇴근을 하고 집에 들러 베이스 기타를 가지고 연습실로 향했다. 석호 결혼식 이후로 2년 만이었다. 석호를 보러가는 발걸음이 그다지 가볍지는 않았다. 돌잔치 때 제대로 사과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헤어졌기 때문이었다.
연습실로 가는 내내 그냥 아무 일도 없었던 척, 그냥 반갑기만 한 척, 만약 민구가 나와 있다면 오래 공을 들여 결국 결혼에 성공을 한 것을 축하하면서 어색함을 쫓아야겠다고 몇 번을 다짐했다.
연습실 철문이 잠겨 있었다. 여러 번 노크를 하고, 쾅쾅 두드려 봐도 안에서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철우가 없더라도 석호는 있을 줄 알았는데 없는 모양이었다. 철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너 벌써 왔어? 나는 저녁쯤에나 올 줄 알았지.”
“석호도 없던데....”
“요즘 석호가 좀 그래.... 최대한 빨리 갈 테니까, 건물 1층 커피숍 있지? 거기서 커피 한 잔 하고 있어. 내가 석호한테 너 도착했다고 얘기할게.”
1층 커피숍에서 주문한 커피가 나오고 다 마시기도 전에 석호가 커피숍으로 들어섰다. 혼자가 아니었다. 석호는 영오를 안고 있었다. 나는 서둘러 담배를 껐다.
“아깝게 장초를 끄냐? 그냥 펴도 되는데....”
“애가 있는데 어떻게....”
“괜찮아. 적절한 위해환경 속에 살아야 면역이 생겨서 더 건강해. 우리 아버지도 나 어릴 때 담배 피우면서 키웠어.”
석호는 영오를 무릎에 앉힌 채로 담배를 피워 물었다.
“이 새끼 애 아빠 맞아? 진짜 미쳤나봐.”
나는 냉큼 영오를 안고 내 무릎에 앉혔다. 그리고 다가오는 담배 연기를 손으로 저으며 흩어냈다.
“영오는 왜 데리고 왔어?”
석호는 공중으로 연기를 뿜어내고 심드렁하게 말했다.
“너 보여 주려고.... 돌잔치 때 영오가 너 좋아하는 거 같아서....”
“그럼 은정이도 데리고 오지. 이따가 연습할 때 영오 어떻게 하려고 그래?”
“연습할 게 뭐 있냐? 그냥 하던 대로 하면 되지.... 그냥 철우 결혼할 때처럼 간단하게 하자. 통기타 반주 좀 하고, 철우더러 피아노 치라고 그러고.... 그냥 그렇게 하면 되잖아. 그냥 넌 영오나 좀 봐줘. 낯 엄청 가리는 놈인데 신기하게 너는 안 가리네.”
석호는 철우가 올 때까지 영오를 키우면서 벌어진 재미난 일화들을 나에게 주절댔다. 영오 덕분에 분위기가 어색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영오는 내 무릎 위에 앉아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철우가 도착해서 연습실에 올라갔을 때도 나는 계속 영오와 놀았다. 석호는 철우와 둘이서 몇 번 맞춰 보는 걸로 끝이었다. 역시나 모든 게 석호 마음대로였다.
“이럴 거면 영기 괜히 불렀잖아.”
철우의 말에 석호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몇 달 만에 얼굴도 보고, 영오랑 놀고.... 좋잖아....”
결혼식이 있던 토요일 오후, 민구는 열 살 차이 나는 어린 신부를 옆에 끼고 결혼식 내내 웃었다. 신부의 엄마가 울고 있는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철우의 말로는 신부 집에서 반대가 심했는데,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임신한 몸으로 부모에게 바득바득 우겨서 결혼이 성사되었다고 했다. 철우가 교사 마누라 월급으로 사는 것처럼 민구도 간호사 마누라의 월급으로 편안히 밴드 생활을 이어가는 셈이었다. 철우와 민구는 정말 마누라 복이 있는 놈들이었다.
축가를 부르기 위해 앞으로 나간 석호를 대신해서 나는 또 영오를 품에 안았다. 은정이 없이 영오를 데리고 혼자 왔기 때문이었다. 내 옆에서 영지가 투덜댔다.
“석호 오빤 애 좀 맡기고 오지.... 괜히 오빠가 고생하네요.”
“아냐, 잠시 안고 있는 게 고생이라고.... 애들은 친정에 맡긴 거야?”
“네. 돌잔치 때는 퇴근하면서 애들 데리고 나온 거고, 지금은 방학이니까 내가 집에서 보다가 맡기고 온 거죠.”
석호의 노랫소리가 예식장에 울려 퍼졌다. 닭살스러운 걸 싫어하는 석호가 정말 닭살이 돋도록 감미롭게 노래를 불렀다. 민구는 부케를 들지 않은 신부의 손을 꼭 잡고 축가를 들었다.
축가가 끝나고 무대에서 내려온 석호는 철우에게 통기타를 맡기고 화장실로 달려갔다. 축가 부르기 전부터 배가 아프다고 하더니 급한 모양이었다.
“근데 은정이는 안 보이네. 나는 좀 늦게 오나 싶었는데 안 오는 건가봐?”
내 질문에 영지가 철우에게 물었다.
“영기 오빠 몰라?”
“응. 석호가 말 안 했나봐. 석호가 말 안 하는데 내가 말하기도 좀 그렇고....”
철우와 영지의 오고가는 말에 바로 느낌이 왔다. 철우에게 물었다.
“언제?”
철우도 내가 눈치를 챘다는 것을 알고 솔직하게 말했다.
“영오 돌잔치 끝나고 얼마 안 있어서.... 석호가 말하기 전에는 모르는 척 해.”
돌잔치 이후 그 몇 달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마음 한 구석이 착잡했다.
민구의 결혼식은 사진 촬영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 웨딩카도 신부 쪽에서 진행했다. 애매한 시간에 결혼식을 올려서 다들 점심을 먹지 않아 함께 모여 이른 저녁을 먹었다. 커피를 마시고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마무리가 되려는 즈음에 석호가 나에게 한 마디를 했다.
“너 집들이 안 해?”
“이사한 지 3년이 다 돼 가는데 무슨 집들이를 지금에 와서 하냐?”
“그게 무슨 상관이야. 아무 때나 하면 되지.... 나 오늘 너네 집 놀러가도 돼?”
석호는 철우를 끌어들였다.
“철우야, 오늘 영기 집에 놀러 가자.”
철우 대신 영지가 대답했다.
“여보야 놀다 와.”
“자기는?”
“엄마 집에서 애들이랑 같이 있으면 되지. 나중에 와서 데리고 가.”
철우는 영지를 처갓집에 내려주고 우리집으로 갔다. 내가 말리는데도 석호는 나에게 영오를 맡기고 기어이 두루마리 휴지와 각종 집들이를 갈 때 꼭 가지고 가는 것들을 사왔다. 혼자 사는 내가 1년은 쓸 것 같았다. 철우의 손에는 맥주와 안주거리가 들려 있었다.
“혼자 살기에 꽤 크네. 이걸 과외해서 샀다 그거지? 진짜 대단하다.... 몇 평?”
“25평인가.... 잘 모르겠어.”
20평대의 아파트여도 방이 세 개였다. 욕실도 가장 큰 방에 하나 더 딸려 있어서 두 개나 되었다. 거실도 여러 사람이 앉아 있을 수 있을 만큼 꽤 컸다. 혼자 살기에는 좀 과도한 측면이 없지 않았다. 거실에는 아무 것도 없고, 내가 잠을 자는 방에는 큰 자리를 차지하는 장롱 같은 것이 없어서 철우가 더 크게 느낀 것일 수도 있었다. 가장 작은 방에 옷장을 두고 거기서 옷을 갈아입었다. 나머지 방 하나는 아예 비어 있었다.
-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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