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아라 황석호 -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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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클럽에서 공연을 하는 2년 동안 공연으로 인한 수입은 하나도 없었지만 술은 공짜로 먹었기에 우리는 즐거웠다. 석호는 악기상을 하는 아버지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으니 마음 편하게 곡을 쓰면서 연습과 공연에 몰두했고, 철우는 아내를 잘 만나 역시나 마음이 편했고, 나는 소득으로 잡히지 않는 과외 수입이 상당했으니 말할 것도 없고, 민구는 클럽에 공연을 다니기 시작한 얼마 후부터 나를 따라 학원에서 파트 강사로 일을 하며 돈을 벌었다.


  클럽이 몰려 있는 대학가에는 활기가 넘쳤다. 거리거리에 악기를 매고 다니는 밴드들이 심심찮게 보였고, 각 클럽에선 열기가 장난이 아니었다. 클럽에 입성을 하고 2년이 지난 뒤, 우리가 주로 공연을 하는 금요일 8시만 해도 꽤 많은 관객들이 함께 어울려 방방 뛰면서 공연을 즐겼다. 우리는 그 사람들의 기를 받아 더욱 신이 나서 공연을 했다.

  다들 세기말의 분위기에, 곧 지구가 멸망을 한다는 예언자의 말을 믿는 것인지 마음껏 자유를 발산했다. 암울한 분위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리 크지 않은 클럽 안에 울려 퍼지는 사운드를 온몸으로 들었다. 누구도 말리는 사람이 없었으니 온몸으로 느낀 사운드를 또 온몸으로 풀어냈다.


  처음 우리를 발탁한 클럽 사장이 사운드가 빵빵하다고 그랬듯이, 우리는 정말 사운드 하나만큼은 자신이 있었다. 석호 때문이었다. 석호는 사운드가 비는 걸 못 참아했다. 모든 노래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제대로 달리는 노래의 경우에는 우리 멤버 네 명이 낼 수 있는 모든 소리를 동원해서 사운드를 채웠다. 우리 아니 석호가 부르는 노래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우리가 무대 위에서 소리를 꽉 채워 달릴 때에는 모두가 열광을 했다. 롹의 힘이었다.

  또 첫 오디션 때 클럽 사장이 우리의 노래가 특이하다고 그랬듯이, 우리 공연을 보러 오는 관객들은 독특한 면이 없잖아 있었다. 그러니까 특이한 노래를 좋아하는 특이한 사람들이라는 말이다.

  사실 노래 자체가 특이한 것은 없었다. 석호는 장르를 파괴하면서 독특한 음악 세계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석호가 만드는 노래는 장르에서 절대로 벗어나지 않았다. 펑크든 롹 발라드든 멜로디 라인이나 곡의 구성은 롹 하면 떠오르는 그런 것이어서 전혀 특별하지도 특이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석호가 만들고 부르는 노래에는 정말 특이한 점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가사였다.


  석호가 밴드 동아리에서 탈퇴해 처음 연습실을 열고 본격적으로 곡을 쓰기 시작할 때만 해도 석호가 쓰는 가사는 지극히 평범했다. 이를 테면 She’s gone 같은 분위기의 가사였다.


  ‘She’s gone‘에 대해 잠깐 딴 얘기를 좀 해 보면, She’s gone은 정말 남자라면 노래방에서 한 번쯤은 불러 보려고 번호를 눌렀다가 첫 소절에서부터 어려움을 맛보고, lady~ 할 때는 본인 스스로가 여인이 떠난 것 보다 더 한 좌절을 느끼며 정지 버튼을 누르거나, 본인이 누르지 않더라도 같이 간 사람들이 욕을 하면서 정지 버튼을 누르는 그런 노래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석호는 너무 편안하게 이 노래를 불렀다. 그것도 기타를 치면서. 석호가 Lady won′t you save me~ 하고 노래를 부르면 정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정말 여자가 멀리 떠났더라도 석호가 이 노래를 부르면 당장 구해주러 달려올 것 같은, 그리고 바로 용서를 해 줄 것 같은 간절한 목소리였다.


  아무튼 93년에 석호는 이런 분위기의 가사를 썼다. 솔직히 좀 유치했다. 아니 유치하다기 보다 너무나 흔한 이야기라서 감흥이 일어나지 않았다. 이를 테면 ‘나는 그녀를 좋아하는데, 그녀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아서 너무 가슴이 아프다’는 내용을 조금씩 변주하는 식이었으니 감흥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내 말이 맞다고 다들 인정하리라 믿는다.


  그런데 석호가 4학년, 그러니까 94년이 되면서부터는 조금씩 달라졌다. 지극히 개인의 감성에서 벗어나 담담하게 사람들의 사는 이야기를 가사에 옮겼다. 3학년 때 우리가 했던 공연의 분위기가 석호에게 영향을 미친 것이라고 나는 지금도 확신한다.


  동아리 생활을 할 때도 그랬지만 연습실이 생기고 나서는 더욱 더 나는 연습실에 틀어박혀 살았다. 석호도 마찬가지였다. 수업을 듣고, 과외 수업이 없는 때에는 항상 연습실에서 살았다. 잠만 자취방에서 잤을 뿐이었다. 석호는 내가 과외 수업을 할 때도 연습실에 있었으니 4학년이라 수업이 별로 없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거의 하루 온종일 연습실에 있는 셈이었다.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곡 작업에 몰두하다가 막차를 놓쳐 내 자취방에서 함께 자는 일도 종종 있었다.

  앞서 석호와 연습실에 함께 있을 때면 늘 신해철의 노래를 들으며 이야기를 나눴다고 했었는데, 대체로 그러했지만 서로의 관심사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했다. 내가 민구나 철우에 비해서 석호에 대해 더 많이 관심을 가진 것은 외모뿐만이 아니라 속 깊은 이야기를 많이 나눴기 때문이다.


  사실 민구와 철우는 석호가 써내는 노래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다. 그저 음악이 좋아서 밴드를 하는 전형적인 사람이었다. 합주가 끝나면 연습실에 그리 오래 남아 있지도 않았다. 합주 외에 민구와 철우가 연습실에서 하는 일이라고는 소파에 늘어져 앉아 포르노 비디오를 보는 게 거의 다였다. 그리고 자신들이 직접 그것을 시연하기 위해 서둘러 떠났다.

  멤버들 중에 가장 말이 많고 솔직담백한 민구는 자신이 따먹은 여자에 대해 자주 보고를 했는데, 그것을 보면 밴드에 대한 열정과 여자에 대한 욕구가 거의 비슷하고 서로 시너지로 작용해 상승효과가 나는 셈이었다. 민구가 나에게 먼저 접근을 해서 나한테 따먹힌 것만 봐도 얼마나 성적 욕구가 강한 사람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철우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것은 내가 민구와 철우를 절대로 폄하하는 것이 아니다. 민구와 철우의 밴드에 대한 열정은 그 어느 누구보다 강했다. 민구가 드럼을 치고, 철우가 건반을 두드리는 것은 석호가 기타를 치는 것만큼이나 실력이 출중했다. 악기 연주에 대해 그토록 까탈스러운 석호도 민구와 철우에 대해 안 좋은 말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석호가 몇 마디만 하면 알아서 척척 시연을 해냈으니 석호에게 있어서 민구와 철우는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

  오히려 내가 문제였다. 아무 것도 할 줄 모르는 채로 밴드에 들어와서 근음 셔틀이나 하던 내가 밴드에 남아 있는 것은 석호를 비롯한 민구와 철우가 내가 보여준 노력을 높이 샀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석호라고 늘 연습실에서 곡 작업만 한 것은 아니었다. 민구가 보고를 먼저 시작하면 철우가 따르고, 석호도 보고를 했다. 연습실에 틀어박혀 살면서 언제 여자를 만나러 다니나 싶어 내가 물어본 적이 있는데, 석호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니가 나한테 24시간 붙어 있는 것도 아니잖아. 씨.발 나는 사람 아니냐? 나도 꼴리면 해야지.”


  맞는 말이었다. 나 역시도 게이바에 가서 호시탐탐 게이들을 노리는 이중생활을 하고 있었으니까.


  아무튼 석호와 나는 연습실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할 기회가 많았다. 서로의 성장 과정에 대한 이야기도 나눌 정도였으니 서로의 속내를 다 내비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역시나 석호는 내가 듣는 노래들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다.


  “그럼 니가 민중가요를 많이 들었던 것도 다 그 니가 했다는 독서회 활동 때문이라는 거지?”


  “응. 먼저 대학에 간 선배들이 많이 가르쳐 줬으니까. 내가 문학에 눈을 뜬 게 나를 잘 봐줬던 국어 선생님들 덕분인데, 독서회 선배들의 영향이 더 커. 성적이 딸려서 국문과 간 것도 있지만 나름 문학 소년이어서 국문과 선택한 이유도 있으니까.”


  “니 얘기 들으면.... 난 참 편하게 산 거라는 생각이 들어. 아무 걱정 없이 기타만 치고 살았으니까.... 너 덕분에 내가 노래를 듣는 폭이 넓어졌어.”


  석호는 내가 추천한 민중가요 롹 밴드 ‘천지인’의 노래를 듣고 감명을 많이 받았다. 거기에다 신해철이 쓰는 가사에 공감을 많이 했으니 석호가 써내는 가사의 내용이 달라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갑자기 변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그녀를 좋아하는데, 그녀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아서 너무 가슴이 아프다’는 주제는 변함이 없었다. 대신 생활 밀착형으로 바뀌었다. 노래 가사 속에 구체적인 이야기가 들어갔다.

  이를 테면 버스 정류장에서 매일 마주치는 그녀를 기다리며 보이는 풍경들이 예사롭지 않다는 뭐 그런, 그녀가 학교에 올라갈 때 무심코 차고 지나간 돌멩이 하나를 쥐어 들고 자기 주머니에 넣으며 그녀의 마음을 얻은 것 같이 기쁘다는 뭐 이런 식의 가사였다. 유치하긴 했지만 나름 구체적인 서사가 있고 정서가 담겨 있어서, 나 역시 석호를 짝사랑하는 내 마음과 일치하는 것 같아 공감이 많이 되었다. 원래 사람들의 마음은 대체로 유치하니까.


  석호가 이렇게 서사적인 내용의 가사를 쓰게 된 것은 나의 영향도 조금은 있다고 생각한다. 석호는 내가 쓰는 일기에도 관심을 보였다.


  “너 뭐 쓰는 거야?”


  “음.... 일기? 매일 쓰는 건 아니고 기억할 만한 게 있을 때 쓰는 거야. 지난 일기 보면 재밌어. 어릴 때 내가 이런 유치한 생각을 했구나 싶어서....”


  국민학교 5학년 때부터 일기를 쓸 때 그날에 있었던 일을 소설 형식으로 쓰고 거기에 내 심리를 담곤 했는데, 일기 검사를 하지 않는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도 이렇게 일기 쓰는 것은 계속 되었다. 윤상호 선생님의 영향이 컸다. 거기에 더해 고등학생 시절 방황을 했던 것도 내가 일기를 계속 쓰는 것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일기를 쓰는 것은 대학에 가서도 이어졌고, 지금도 쓰고 있으니 내 개인적으로 일기를 쓰는 것은 역사가 오랜 것이다. 지금 이렇게 과거를 돌아보며 글을 쓸 수 있는 것도 다 내가 쓴 일기 덕분이다.


  “석호 너도 한 번 써봐. 재밌어. 나중에 우리가 나이 들어서 자서전 쓸 때도 도움이 될 거야. 유명한 롹 밴드의 자서전.... 우리도 자서전 쓸 만큼 유명해지려고 지금 이렇게 열심히 밴드 하는 거잖아.”


  “오케이. 나도 틈틈이 써봐야겠네.”


  그리고 가사를 석호만 쓴 것도 아니었다. 내가 처음 밴드 동아리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내가 국문과여서 가사 쓰면 딱 좋겠다고 했으니 석호는 나에게도 가사를 맡겼다. 하지만 항상 석호 자신이 쓴 가사만이 노래가 되었다. 당연했다. 석호는 독단과 독선의 아이콘이니까. 솔직히 내가 쓴 가사는 내가 봐도 석호보다 더 유치해서 나라도 석호가 쓴 가사를 노래로 만들었을 것 같았다.

  중,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나름 글짓기 상을 휩쓴 나였지만 대부분 산문이었기 때문에 운문 형식의 노래 가사를 짓는 것은 정말 어려웠다. 대학 3학년 시창작론 수업을 들을 때, 이 수업만 열심히 들으면 나도 시를 쓸 수 있는 인간으로 거듭나겠다 싶었지만 종강을 하고 시험을 치고 나오면서 내가 깨달은 것은 나는 시를 못 쓰는 사람이구나 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시창작론 수업은 내가 시를 쓸 수 없다는 것을 배운 수업인 셈이었다.

  리듬을 살려 글을 쓰는 것은 정말 어려웠다. 게다가 석호가 던져주는 멜로디에 맞춰 가사를 쓰는 것은 더욱 어려웠다. 마디에 맞춰 단어를 선택하고 문장을 만드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나보다 곡을 직접 쓰는 석호가 훨씬 더 운율적인 인간이었으므로 곡의 흐름에 더 맞았다.


  정말 석호에게 도움이 되는 인간이 되고 싶었는데, 나는 그런 인간이 못 되는 것 같아 마음이 항상 무거웠다. 대신 내가 생각을 한 것은 도움은 못 되더라도 방해는 되지 말자였다. 열심히 베이스를 치고, 같은 리듬 파트인 민구와 궁합을 맞추면서 합을 이루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래도 가끔 석호에게 내가 쓴 가사를 주기는 했다. 멜로디에 맞춘 것이 아니라, 내가 쓴 가사가 노래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 머릿속에 생각이 훅 지나갈 때마다 적어둔 것이었다. 석호가 내가 쓴 가사로 노래를 만들어줬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마음으로 가사가 적힌 종이를 건네면 석호는 종이를 받아들고 슥 한 번 보고는 가방에 넣었다.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뭐 석호의 성격으로 봤을 때나, 내가 봐도 정말 아닌 것 같은 가사였으니 당연했다. 나는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딱 한 번, 내가 쓴 가사를 들고 한참을 바라보다 나에게 이러쿵저러쿵 얘기한 적이 있었다. 석호에 대한 솔직한 내 심정을 담은 가사였다. ‘나는 그녀를 좋아하는데, 그녀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아서 너무 가슴이 아프다’는 주제를 담은 가사였으니 석호의 관심을 끈 것 같았다. 물론 나는 ‘그녀’가 아니라 ‘그’, 그것도 석호를 대상으로 삼은 것이지만, 석호는 그것을 알 리가 없을 테니 오히려 나는 마음이 편안했다.


  “영기야, 이거 느낌이 확 오는데?”


  “진짜? 너한테 그런 말을 다 듣다니.... 노래가 될 거 같아?”


  나는 기대에 찬 표정으로 석호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석호는 나한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가사가 적힌 종이만 보다가 한 마디를 던졌다.


  “그건 모르지. 운율이 딱딱 안 맞는 거 같아서 뭔가 떠오르는 멜로디가 없네. 일단 갖고 있을게.”


  역시 석호다운 말이었다. 그래도 석호에게 뭔가 느낌을 줬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그날 저녁 일기장에도 석호에게 준 가사를 적어뒀다. 지금 다시 보니까 참 유치한데, 그때는 나름 진지하게 썼던 것 같다. 그때 내가 쓴 가사를 직접 옮기기는 쪽팔니까 좀 그렇고, 내용만 간단히 말해 보자면....

  뭐 석호를 향한 내 마음이었다. 대놓고 말할 수는 없으니, 나는 너를 바라보는데 너의 시선은 나를 향해 있지 않다는, 너의 시선을 나에게 돌린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걸 안다는, 하지만 꿈속에서 너는 나의 연인이 되어 달콤한 사랑을 속삭인다는, 꿈에서 깨면 또다시 다른 곳을 보는 너를 마주하지만 그래도 항상 내 시선과 내 마음은 너를 향하고 있다는, 뭐 그런 내용이었다.


  “근데.... 너 지금 짝사랑하니?”


  나는 짐짓 모르는 척 석호에게 거짓말을 했다. 하지만 그 마음은 진심이었다.


  “응. 우리과에 존.나 이쁘고 내 눈에 쏙 들어오는 애가 있는데, 너무 도도해서 말도 못 붙이겠어. 그냥 따먹기만 할 거면 밑져야 본전으로 대시하고 싶은데, 그게 아니라서.... 사심이 있으니까 더 말 못 붙이겠더라고. 괜히 대시했다가 까이면 진짜 마음이 아플 거 같아서 그냥 보고만 있어....”


  그렇게 학교에 다닐 때는 개인적인 감성을 가사로 옮기던 석호가 졸업을 하고나서부터는 확실하게 바뀌었다. 그 중의 하나를 예로 들면....


  내 친구는 라면을 정말 싫어해요

  맛있는 신라면도 절대로 안 먹어요

  이유가 뭐냐고 친구에게 물었더니

  내 친구가 나에게 도리어 물었어요

  쌀이 떨어져서 라면 먹어봤냐고

  내 친구가 나에게 이렇게 말했어요

  엄마 월급날이 다가올 때면

  항상 그렇게 라면만 먹었다고

  라면 먹기 싫고 밥 먹고 싶은데

  하루 한 끼 라면만 먹고 살았다고

  라면만 보면 그때 생각이 나서

  라면은 쳐다보기도 싫다고 했어요

  그래요 내 친구가 밥이 없을 때

  나는 밥 잘 처먹고 기타 쳤어요

  내 친구가 밥이 없어 라면 먹을 때

  나는 밥이랑 불고기 처먹고 노래했어요

  지금 내 친구는 돈 많이 벌지만

  그래도 라면은 절대로 안 먹어요

  진라면 신라면 안성탕면 너구리

  세상에 라면은 많고도 많은데

  내 친구는 그 어느 것 하나도

  마음에 드는 것이 없어요

  다른 친구는 내가 라면 먹을 때

  한 젓가락 먹겠다고 달려들어도

  이 친구는 국물 한 모금 먹지 않아요

  당신도 주위를 한 번 둘러보세요

  라면 안 먹는 사람 있는지 없는지

  내 친구는 라면을 정말 싫어해요

  그래도 나는 라면을 끊을 수 없죠


  이런 식이었다. 석호는 삶의 한 단면을 통해 공감을 이끌어내는 가사를 썼다. 앞의 가사는 물론 내 얘기였다. 연습실에서 합주를 하다 출출하면 라면을 잘 끓여 먹었는데, 안 먹겠다고 하다가도 라면 냄새에 결국 젓가락을 들고 한 젓가락씩 뺏어 먹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누구에게나 이런 경험은 다 있지 않겠는가. 멤버들이 그 더운 여름에도 발가벗고 연습실에서 라면을 끓여 먹을 때 젓가락 한 번 들지 않는 나를 신기하게 쳐다보던 멤버들에게 했던 말을 석호가 가사로 옮긴 것이었다.


  다시 지난날을 돌이켜 보면....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신 뒤 우리집은 정말 처참함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자식들을 다섯이나 남겨 두고 훌쩍 세상을 등진 아버지도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 아버지 회사에서 내준 사택에는 항상 손님들로 북적였는데, 아버지가 세상을 뜨고 나자마자 남은 식구들은 사택에서 쫓겨나 단칸방 하나를 겨우 얻어 살아야했다. 나이 마흔에 과부가 된 엄마는 아버지가 근무했던 회사가 운영하는 공장에 일자리를 얻어 자식들을 먹여 살렸는데, 70년대 말의 열악한 노동 환경에서 아줌마가 받는 임금이라는 게 뻔한 것이었으니 엄마의 월급날이 다가올 무렵에는 쌀을 살 돈이 없어서 라면을 끓여 먹을 수밖에 없었다. 라면도 개별 포장으로 된 것이 아니었다. 혹시나 알지 모르겠는데, 삼양라면 덕용포장이라고, 개별포장이 아니라 다섯 개를 하나로 묶어 놓은 것이 우리집의 일용할 양식이었다. 개별포장으로 된 라면 다섯 개보다 다섯 개가 묶음으로 들어있는 덕용포장이 쌌기 때문에 선택지는 이것 하나밖에 없었다. 스프의 함량이 개별포장보다 적은 것인지 끓여 놓아도 맛이 없었다.

  이런 일이 오래 가지는 않고 1, 2년 후에는 쌀이 떨어지는 일이 없긴 했지만 내 인생, 아니 우리집 식구들의 인생에서 가장 힘든 때가 아니었나 싶다. 이런 열악한 상황에서도 엄마는 과부가 된 지 2년도 채 안 되어 변두리 하꼬방이라도 집 한 채를 마련했으니 우리 엄마도 참 대단한 위인임에는 틀림이 없다. 내가 명절이 되면 외갓집 가는 것이 그렇게 싫으면서도 꼬박꼬박 따라갔던 것은 용돈을 받아 엄마에게 줄 수밖에 없는 상황을 내가 누구보다 더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어린 시절의 여러 경험 때문에 지금도 엄마랑 사이가 별로 안 좋긴 하지만 그 개고생을 다 하면서도 자식들을 키우고, 변두리 하꼬방 집 한 채를 가지고 지금은 5억이 넘는 집으로 만들었으니 엄마의 억척스러움은 실로 존경할 수밖에 없다. 먹고 살기 힘들어서, 자식들을 데리고 먹고 살아내야 했으니 나에게 다정다감할 여유가 없었다는 것도 다 이해하는데.... 그래도 안 친한 걸 보면 나도 참 답이 없는 인간인 것 같다.


  이런 이유로 나는 라면을 싫어했다. 밥 사 먹을 돈이 있는데, 왜 라면을 먹느냐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나에게 라면이란 간식이 아니라, 밥 대신에 먹을 수밖에 없는 식량이었기에 안 먹어도 되는, 아니 먹을 이유가 없는 음식이었다. 그렇다면 지금은? 싱크대 선반에 오뚜기에서 나온 오동통면을 비롯해 종류별로 다 갖추고 산다.


  아무튼 석호는 이런 식으로 가사를 쓰고 노래를 만들었다. 클럽에서 공연을 시작하면서부터는 더욱 구체적이 되어서 개인의 일상적 삶을 얘기하는 듯 하면서도 이 세상의 현실을 노래했다. 앞서 얘기했던 이유들도 있겠지만 역시나 신해철의 영향이 가장 컸다. 우리가 클럽 공연을 시작하고 얼마 있지 않아 신해철이 이끄는 N.EX.T가 새로운 앨범 Lazenca - A Space Rock Opera를 냈다. ‘영혼기병 라젠카’의 ost이기도 한 이 앨범을 석호랑 나는 그해 겨울이 지날 때까지 하루에도 몇 번씩 반복해서 들었다.


  밴드로 시작한 신해철이 잠시 솔로를 거쳐 다시 밴드 N.EX.T로 돌아와 4장의 정규 앨범을 내는 동안 석호와 나에게는 완전한 우상으로 자리를 잡았다. 석호는 4집 앨범에서 ‘The Hero’를 들을 때마다 가슴 벅차했는데, 그 이유가 바로 자기 얘기라는 것이었다.


https://youtu.be/zph-bKYiS_Q

 N.EX.T – The hero 


  “영기야, 와~ 진짜 이거 내 노래야. 나 어릴 때 보자기 매고 슈퍼맨 흉내 낸답시고 높은 데서 뛰어 내렸다가 다친 적 있거든. 게다가 필통에 롹 밴드 사진 붙이고 다녔고..... 그거 보면서 나도 밴드할 거라고 꿈을 키웠단 말야.”


  석호의 어린 시절이 머릿속에 그려지는 듯 했다. 통통한 어린 석호가 보자기를 매고 골목을 뛰어다니는 모습을 상상하니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어쩌다 한 번은 울기도 했다. 역시 N.EX.T의 4집 앨범을 들으면서였다.


  “나 솔직히 요즘 좀 힘들었거든.... 이게 맞는 건가 싶기도 하고.... 나는 내가 제일 잘난 줄 알았는데 아무 것도 아닌 거 같아서....”


  평일 오후 5시, 관객도 없는 곳에서 공연을 한다는 것에 석호는 자존심도 상하고 지쳐 있는 것 같았다. 나야 뭐 석호가 있으니까 석호를 바라보며 연주를 한다지만 석호는 비어 있는 무대를 향해 기타를 치고 노래까지 해야 했으니 내가 느끼는 감정보다 훨씬 더 깊은 공허감을 느낀 듯했다.


  “근데 이 앨범 듣고 힘이 났어. 그리고 반성도 했어. 아버지가 팍팍 밀어줘서 내가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사는데, 내가 배가 많이 불렀구나 싶어서.... 영기야, 나 더 신나게 노래할 거야. 난 아직 꿈이 있으니까.... 남들이 안 알아줘도 돼. 그냥 내가 부르고 싶은 노래 부를 거야. 한 사람이라도 내 노래 듣고 나처럼 위로 받고 희망을 품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성공한 거지.”


  석호는 이미 성공을 한 셈이었다. 이미 한 사람은 확보했으니까. 나 말이다. 나는 정말 석호가 부르는 노래에 감동을 해서 동아리에 가입도 하고, 정식으로 멤버도 되었으니까. 게다가 석호와 함께 합주를 하고, 공연을 하며 석호의 노래를 듣는 것이 나에게 위로요, 희망이요, 행복이니까.


  석호는 앞서도 얘기했듯이 신해철이 뽑아내는 가사에 엄청 공감을 했다. 특히나 ‘힘겨워 하는 연인들을 위해’를 듣고서는 동성동본 혼인금지라는 사회 제도의 모순에 가슴 아파하는 사람들을 위로하는 것은 물론이고, 제도 자체가 얼마나 어이가 없는 것인지 앨범에 직접 자기의 목소리를 싣는 태도에 감동을 했다. 


  “나도 이런 노래를 꼭 만들 거야. 힘들어 하는 사람들한테 위로가 되는 노래 말야.... ‘Money’도 좋잖아. money가 도대체 뭐니 그게 뭔데 이리 생사람을 잡니.... 가사 죽이지 않냐? 언어유희에 운율이 딱딱 맞잖아. 게다가 자본주의에 대한 신랄한 비판.... 이런 게 롹 아냐?”


  석호의 말에 나도 동의를 했다. 나에게도 신해철이 부르는 노래들이 많은 위로와 희망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게이라는 사실을 세상에 드러내지도 못하고, 철저하게 이중생활을 해야 하는 것이 너무 힘들고 외로워 이렇게 살아서 뭐하나 싶은 생각이 문득 들었을 때 신해철이 부르는 ‘Hope’를 듣고 제목 그대로 한 줄기의 희망을 봤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까지 내가 삶의 끈을 놓지 않은 것도 이 노래 때문이 아닌가 싶다. 노래 가사처럼 ‘그 언젠가 먼 훗날에 반드시 넌 웃으며 지나간 일이라고 말할’ 수준까지는 되지 못해도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는 게 다 노래 때문인 것은 사실이니까.


  신해철이 뽑아내는 가사에 영향을 받아 석호가 만드는 노래도 나에게 위로와 희망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석호가 직접 부르는 노래니까 더욱 그러했다. 신해철이 동성동본 혼인금지 때문에 힘겨워 하는 연인들을 위해 노래를 만들었듯이, 석호가 나와 같이 이중적인 삶을 살아가는 동성애자에게 위로가 되는 노래를 만들어줬으면 하는 헛된 바람도 가져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으니 그저 석호가 만들고 부르는 노래에 내가 함께 참여하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이렇게 석호가 만들고 부르는 노래가 대중적이지 않고 특이한 면이 없지 않았으나 석호, 나아가서 우리 밴드의 노래를 지지하고 성원하는 팬들이 있어서 우리는 행복했고 즐거웠다.

  사실 우리와 같이 클럽에서 활동하는 소위 인디 밴드들의 노래가 개성적인 면이 강했으니 우리 밴드의 노래가 툭 튀는 것이 아니긴 했다. 오히려 석호가 만들고 부르는 노래는 가사에 특이한 점은 있었으나 곡만으로 봤을 때는 오히려 장르에 충실했다. 그것 때문에 우리 밴드를 모르는 사람들도 클럽 안에서 방방 뛰며 즐길 수가 있었다.


  우리 밴드 ‘SUKO FLY’가 대학가 클럽에서 주로 활동을 했고, 우리가 하고 싶은 음악을 마음대로 했으니 인디 밴드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으나 우리는 정말 럭셔리 밴드였다. 에어컨 설치도 안 돼서 여름에는 팬티 바람 혹은 발가벗고 연습을 해야 하는  지하 구석방이긴 해도 갖출 것은 모두 갖추고 있는 우리만의 연습실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를 인디 밴드라고 보기에는 좀 그랬다.

  클럽에서 공연을 한 지 2년이 넘어서면서 가끔 주말 저녁 무대에도 섰지만 대학가 클럽에 국한되어 있었으니 석호도 그랬고, 나머지 우리들도 조금 아쉬운 면이 없지 않았다. 사람의 욕심이라는 게 그랬다. 클럽에서의 첫 공연 때에 비하면 비약적인 상승이었는데도 대학을 졸업하고 우리가 꾸던 꿈은 정말 크고 화려했기에, 이름을 얻고 잘 나가는 밴드들이 솔직히 부러웠다.


  순전히 내 생각인데, 석호의 노래 실력은 어디 내놓아도 딸리지가 않아서 좋은 노래를 받아 솔로 가수로 앨범을 내는 것이 훨씬 유리한 측면이 있었다. TV에 나와 대중들에게 알려지면 석호는 노래 실력 하나만으로도 분명히 유명해질 것이었다. 덩치가 있고 산적 같은 모습이 TV 연예인의 보편적인 이미지와 맞지 않는다 해도, 이무송 같은 사람도 가요 순위 프로그램에서 1위를 했으니 노래만 좋고 잘 한다면야 외모는 문제가 되지 않을 터였다. 오히려 외모와 상반되는 노래 실력이 반전 매력으로 작용할 수도 있었다. 또 기획사에 들어가서 윤도현처럼 솔로로 먼저 앨범을 내고 뒤에 밴드로 활동을 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었다. 아버지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으니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석호는 아예 이런 생각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밴드였다. TV 방송에 나가는 것이 그렇게 소원이면서도, 그래서 대학생들이 출전하는 가요제에 그렇게 목을 매달았음에도 밴드를 절대로 놓지 않았다.

  나는 그것을 우리 밴드에 대한 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민구는 다르게 생각했다. 내가 민구에게 석호에 대한 내 생각을 넌지시 얘기했을 때 민구는 단호하게 말했다.


  “석호가 절대로 그렇게는 못하지.”


  “왜?”


  “그렇게 하면 자기 맘대로 못하잖아. 뻔한 거 아냐?”


   민구의 말을 듣고, 민구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그랬다. 석호는 자기 맘대로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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