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여우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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층고 높은 벽에 설치된 책장에 내용을 알지 못할 전문서적들이 빼곡이 꽂혀 있었고, 군데 군데 비어있는 공간에는 가족 사진과 기념패가 전시되어 있었다.

 

서재의 다른 한쪽 벽의 커다란 책상 위에 놓여있는 꽃병에는 붉은색으로 만개한 글라디올러스가 줄지어 위를 향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방 가운데 놓여있는 소파에 뻘줌하게 앉아있던 재훈의 등 뒤에 있는 서재의 문이 열렸다. 그리고 하준의 아버지가 그를 향해 걸어 들어왔다.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는 재훈을 보면서 너그럽고 부드러운 표정으로 그는 편하게 앉으라고 재훈에게 조용히 말했다.

 

그리고 재훈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은 그는 희미한 미소를 띠고 재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렇게 일부러 먼 길을 와주어서 고맙습니다.” 6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그는 마치 재훈이 그의 귀한 손님이라도 되는 듯 그렇게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그런데....” 그가 말을 잇기 전 마치 무의식적인 듯, 손을 들어 자신의 턱을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짧게 깎은 후, 다시 자라기 시작한 듯 보이는 희끗희끗한 턱수염이 그의 손가락의 움직임에 따라 전등빛에 희미하게 반짝였다.

 

다시 한번 여쭤보고 싶어서 서재로 선생님을 다시 따로 모신겁니다.”

 

여전히 차분한 목소리로 너그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그가 재훈을 바라보았다.

그 날, 정말 선생님이 우리 아들과 함께 계셨는지요?”

웃는 표정에서도 그의 눈은 마치 매의 눈처럼 매서워 보였다.

 

자신이 목격했던 사람이 분명 그의 아들이었다라고 말하는 마트 주인 앞에서 이미 재훈은 하준이 그 날밤 자신과 함께 있었다고 증언을 했다. 늙은이가 눈도 나쁘면서 깜깜한 밤중에 잘못 본 것을 가지고 죄없는 자신의 아들을 들먹인다면서 난리 블루스를 추는 하준의 어머니와 틀림없이 그 시간에 자신과 같이 있었으므로 그런 짓을 한 사람이 하준일 리가 없다는 재훈의 말에 슬그머니 그 아주머니의 표정이 굳어져 갔고 어느 한 순간 자신도 자신이 보고 믿고 있던 사실이, 사실이 아닐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듯한 표정으로 바뀌어 갔다.

 

흥분해서 떠들어대는 자신의 아내를 진정시키면서 서 있던 하준의 아버지는 그런 그 마트의 주인이 돌아간 후에 이제 집으로 돌아가려는 그를 서재로 불렀다.

 

그저 고맙다는 형식적인 인사를 할 것이라고 예상했던 재훈과 달리 하준의 아버지는 낮은 목소리로 다시한번 그가 말한 것이 사실인지를 묻고 있었다.

 

중요한 일이라서 그렇습니다.”

예상밖의 그의 그런 질문에 대답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면서 그의 표정만 살피고 있는 재훈을 빤히 바라보면서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늦게까지 단 둘이서 술자리를 가지고, , 집에서 재워 줄 정도라면 꽤 우리 하준이를 잘 알고 있는 분인 듯 한데....” 그가 말을 멈추고 다시한번 재훈의 표정을 살펴보듯 유심히 바라보았다.

혹시 하준이에게서 무슨 평범하지 않은 면을 느끼거나 보신 적은 없으셨는지....”

여전히 재훈은 아무말도 하지 못하고 그런 그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탁자로 시선을 떨구었다.

아니요....”

 

나중에 혹시라도....” 그렇게 그의 말에 슬며시 고개를 젓는 재훈을 보고는 다시 그가 입을 열었다.

이 일에 관해서 다른 문제라도 생길때에는 그 모든 책임은 본인께서 질 것을 약속하시겠습니까?

그의 냉정한 말투에 재훈이 고개를 들고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나중에 다른 목격자라도 다시 나타난다던지, 근처의 씨씨티비에 찍힌 영상이라도 발견된다던지 할 때, 그 후의 책임을 모두 지셔야 한다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

예상치 못한 하준의 아버지의 말이었다.

 

나는 내 자식을 올바른 길로 이끌고 싶어요.“

재훈을 빤히 바라보면서 침묵을 지키던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이렇게 선생님께 다시 사실을 확인하는 겁니다.“

”.......“

내가 아직까지 살아오면서....“ 그가 말을 멈추고 헛기침을 했다.

잘못한 일이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내가 잘못한 일에 대해서는 인정하고 옳은 길로 가려고 노력해 왔다고 말할 수는 있습니다.“

”......“

그리고 내 자식도 적어도 그러한 길을 따라와주길 바래요.“

”......“

사십이 넘어서 힘들게 얻은 하나밖에 없는 자식이라 그 녀석 엄마가 모든 것을 다 받아주면서 오냐오냐 하면서, 사실 버릇없이 키웠어요. 그래서 그랬는지, 녀석은 이기적이고 타인들에 공감력이 전혀 없는 그런......“

그가 말을 멈추고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렸을 때에야 철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이제 스물이 넘은 성인이고, 언젠가는 제 회사를 물려받게 되겠지요.“

여전히 그의 시선이 부담스러운 재훈은 가만히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찻잔을 바라보고 있었다.

녀석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존경 받을 만한 인물은 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주변 사람들 중에 녀석을 믿고 사랑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

 

선생님...“ 그가 조용히 재훈을 불렀다.

정말 그 날 밤에 우리 애와 함께 있었나요?“

힘들게 고개를 들고 그의 눈을 한번 마주한 다음 다시 재훈은 고개를 떨구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의 낮게 한숨을 쉬는 소리가 재훈의 귀에 들어왔다.

그럼....“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애와 그날 밤 같이 있었다고 말씀하신건 왜 그런 것인지......“

 

그게....“

붉어진 얼굴로 재훈은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보았다.

 

 

 

 

집 근처에 차를 세우고 그는 작은 공원의 입구에 있는 벤치에 마치 쓰러지듯 털썩 주저앉았다.

담배 한 개피를 입에 물고 그는 불을 붙였다.

이질적인 향이 그의 폐속을 가득 채웠다가 입 밖으로 빠져나갔다.

 

희미한 빛을 내는 공원안의 가로등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여보세요.“ 그의 귓속으로 상대방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다짜고짜 그가 소리를 질렀다.

, 니가 뭐라고 니 멋대로 남의 말을 그렇게 마음대로 하면서 돌아다니냐?“

그게 무슨 말이야?“ 얼떨떨한 말투로 형우가 물었다.

다 들었어. 내가 혜원이하고 결혼할거라는 거하고 손하하고 사귀었던 것까지....!“

늦은 밤 그 곳을 소근거리면서 지나가던 한 커플이 그렇게 악을 쓰는 그를 보고 목소리를 낮추고는 발걸음을 돌렸다.

너가 하준이한테 다 말했잖아.“

! 생사람 잡지마.“ 이제야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듯 형우의 퉁명스러운 말투가 들려왔다.

, 그 자식하고 예전에 같은 교회 몇 번 다니면서 안면은 있지만 내가 그런 사이코하고 말이나 한마디 섞을 것 같애?“

”.......“

내가 니 얘기 어느 누구에게도 입에 담은 적 없지만....“

그가 화가 난 듯한 말투로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너도 니가 알아서 그 놈 조심해. 그놈 부모가 왜 걔를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일본으로 보낸 줄 아냐?“

”......“

수능 본 날 밤에 이쪽 바에 가서 술쳐먹다가 옆에 앉은 처음보는 남자한테 들이댔다가 까이니까 기분 나쁘다고 시비 걸고, 술병으로 얼굴 가격하고 손에 잡히는 게 의자이던 뭐던 닥치는 대로......“

그가 잠시 말을 멈추고 한숨을 쉬고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때 장난도 아니었어. 상대 남자 얼굴 찢어지고 이마 여덟바늘 꿰매고 여기저기 뼈 부러지고...“

”......“

걔네 아버지 그거 기사 나가지 않게 기자들 입막으면서 돌아다니고.... 아마 모르면 몰라도 합의금으로 수억 들었을걸? 상대방 남자 집안이 교육자 집안이고 아버지가 어느 고등학교 교장인가 그래서 그쪽에서도 어디서 자기 집안에 게이라는 말 나올까봐 그냥 쉬쉬하고 그 문제 덮어두자고 해서 넘어간거야.“

”......“

또 그런 문제 일으킬까봐 우선은 피해보자라는 심사에 걔네 아버지가 걔를 일본으로 보내 버린거고... 일본에서는 어디서 어떻게 지냈는지는 몰라도 말야.“

”......“

너 걔랑 엮어서 좋을 거 하나도 없다. 완전 싸이코라 제 멋대로 행동 하는 놈이니 알아서 몸사리고 조심해라.“

그럼 누가 걔한테 그런 얘기를.....“

여튼, 난 아니야. 부모님에게도 일 때문에 집 근처에 작은 교회 나가겠다고 했으니 당분간 나 마주칠 일도 없을거다.“

”......“

너도 그냥 무슨 일 있는 거면 비위 살살 맞춰주고 그놈 하고 거리 두고 살아. 앞으로 무슨 짓 할지 모르는 놈이다.“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천천히 길을 따라 그는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훈훈한 밤바람에도 그는 한기가 느껴졌다.

공원의 길을 따라 줄줄이 늘어선 나무에 피어있는 꽃에서 나는 향긋한 내음도 그는 느껴지지 않았다.

 

어둡고 적막한 분위기는 자신의 불편한 내면을 그대로 비추는 듯 했다.

 

하룻밤, 딱 한번의 잘못된 만남이 이렇게 자신의 삶을 불편하게 뒤틀어 놓을 줄 그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었다. 그냥 슬며시 발을 돌려 벗어나면 되는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렇게 힘들게 걸음을 옮기고 있던 그의 주머니에서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에 뜬 전화번호를 보면서 그는 다시한번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잠시 망설이던 그가 마침내 휴대폰을 귀에 가져다 댔다.

여보세요.“

역시, 형 밖에 없어.“ 실실 웃는 투의 하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형 덕분에 귀찮은 일 한가지 처리했으니 내가 한 턱 낼게.“

아니다.“ 무덤덤한 말투로 재훈이 대답했다.

그래도, 그냥 지나가면 섭하지.“

”......“

전에 그 형이 이번 주 토요일 밤에 술번개 올렸던데 그때 참석해.“

나는 다른 스케줄이 있다.“

.....“

그가 달착지근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이렇게 만나게 된 것도 인연인데 우리 친하게 지내. ?“

”........“

그날 밤, 또 우리 좋았잖아. 그때 형 몸이 완전 달아올라서 밤새 나 물고 빨고, 넣고 흔들어대고..할거 다 했으면서...“

”......“

나 그때 아주 좋았거든.... 형도 좋지 않았어?“

 

실실거리면서 웃는 하준의 목소리가 바짝 댄 그의 휴대폰 밖으로 새어나와 어두운 밤길에서 울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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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n class="sv_wrap"> <a href="https://ivancity.com/bbs/profile.php?mb_id=formylife" data-toggle="dropdown" title="그리고함께 자기소개" target="_blank" rel="nofollow" onclick="return false;"> 그리고함께</a> <ul class="sv dropdown-menu" role="menu"> <li><a h님의 댓글

  • <spa…
  • 작성일
적절한 긴장 속에서 이완되는 장면들이 사실감이 넘친다.
빠른 호흡으로 읽는 소설보다
음미할 수 있고, 생각할 수 있는 여백도 전해주고 있는
소설이다.
어쩌면 이전의 소설보다 내실있는 작품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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