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여우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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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집앞에서 방장은 낯선 얼굴의 두 남자와 담배를 피워 물고 있었다. 마치 무엇인가 진지한 이야기라도 나누고 있던 듯 그들의 모습에서는 일반적인 술번개에서의 취기와 흥분으로 고조된 분위기는 풍겨나오지 않았다.
어깨너머로 재훈을 발견한 방장이 담배꽁초를 바닥에 던지듯 떨어뜨리고 구둣발로 밟았다.
“왔냐?”
무표정한 얼굴로 방장은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재훈에게 시선을 주었다.
아무 말 없이 그런 방장을 향해서 손을 슬쩍 들어보이고는, 재훈은 빼꼼히 열려있는 술집의 문을 통해 안을 흘끗 들여다보았다.
술집 안의 사람들의 시끄러운 목소리와 웃음소리가 문 틈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하준이는?”
그의 뒤에서 여전히 담배를 피고 있는 두 남자를 흘끗 돌아 본 후, 방장은 다시 재훈의 얼굴을 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방금 돌아갔어.”
“......”
“집에서 부모님이 찾는다나 뭐라나.... 하면서 가야한다고 하더라.”
그런 그를 보고 한번 고개를 끄덕해 보이고는 재훈은 몸을 돌려 문을 열었다. 그리고 술집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적당하게 취한 사람들의 시끄러운 대화소리와 웃음소리를 뚫고 부지런히 발을 옮기던 그는 한쪽 구석자리에 앉아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던 손하의 앞에서 멈추어 섰다.
손하의 옆에 나란히 앉아있던 윤수가 마치 무슨 눈싸움이라도 하는 듯 서로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그 둘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재훈이, 오랜만이네.”
“그래, 오랜만이다.”
여전히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손하의 눈에서 눈을 떼지 않고 그렇게 재훈이 윤수에게 대답을 했다.
어느 한 순간, 손하가 자신의 옆에 놓여있던 가방을 집어들고 지퍼를 연 다음 지갑을 꺼냈다.
“내가 알아서 낼게. 나중에 내 계좌로 보내.”
방장을 찾는 듯 여기저리 돌아보는 손하를 보고 윤수가 슬며시 손하의 어깨를 밀었다.
재훈이 슬며시 몸을 돌려 여전히 정신없이 시끄럽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와 술집의 문 밖으로 걸어나왔다.
“벌써 가게?”
그의 등 뒤에서 방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뒤돌아보지 않고 왼손을 들고 슬며시 한번 저어 보였다.
뒤에서 자신을 따라오고 있는 손하의 발걸음 소리를 들으면서도 그는 뒤돌아 보지 않았다.
그렇게 천천히 그는 방향감각도 잊은 듯, 큰길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한참을 그렇게 걷던 그는 횡단보도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멍하니 길 건너편을 바라보았다.
맞은편 도로에서 신호등을 기다리는 한 커플 이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그들 뒤로 을씨년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는 창덕궁을 희미한 가로등이 비추고 있었다.
신호등이 바뀌고 그가 다시 앞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는 그의 옆에서 손하가 나란히 그의 보폭에 맞추어 그를 따라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었다.
오른쪽 길로 접어들어 율곡로를 따라 걸음을 옮기고 있던 그의 주변은 이제 적막함만이 맴돌고 있었다.
그렇게 시끄럽게 달려가던 차들의 소음마저도 그의 귀에는 들려오지 않았다.
이윽고 어두운 가로수 아래에서 발을 멈추고 그는 여전히 그를 따라오던 손하에게 고개를 돌렸다.
“거기는....”
거친 쉰 목소리가 입 밖으로 튀어 나왔다. 낮은 헛기침을 하면서 그가 목을 다듬었다.
“어떻게 오게 된거야?”
그의 말에 씁쓸한 미소가 손하의 입가에 번졌다.
“나도.....잘 지냈어.”
“.....”
“못 본 사이에 더 멋있어졌네?”
맞은편의 코너를 돌아 그들의 옆을 쏜살같이 달려 지나가는 차량의 헤드라이트에 손하가 한순간 눈이 부신 듯, 실눈을 하고 얼굴을 찡그렸다. 그의 머리가 방금 지나간 차량이 일으킨 바람에 헝클어져 버렸다.
그런 그를 보면서 재훈이 길 건너편의 편의점 앞에 놓여있는 간이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너는....”
편의점에서 커피를 사가지고 나와 테이블의 자신의 앞쪽에 내려놓는 재훈을 보면서 손하가 입을 열었다.
“내가 거기 있는지 어떻게 알고 왔어?”
재훈은 그 술자리에 올 생각도 계획도 전혀 없었다.
토요일 오후에 다시한번 술자리에 꼭 오라는 하준의 확인문자를 보고도 그는 곧장 삭제를 해 버렸다.
무엇이든 들어주겠다는 말로 처음 만난 하준을 유혹을 했고, 그런 그의 약속을 지켰다.
그것으로 끝이라고 재훈은 여러번 되뇌었다.
더 이상 그 어린 사이코 녀석에게 끌려다니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다짐했다.
대학교 동창들과 간단하게 저녁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던 그의 휴대폰에 메시지가 도착했다는 소리가 울렸고, 직감적으로 하준일 거라는 생각에 그는 불편한 심정으로 휴대폰을 집어들었다.
그가 잘 알고 있는 종로 술집의 내부의 사진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한쪽눈은 실눈을 한 채로 입술의 양쪽 끝을 올리고 웃음짓고 있는 녀석은 그 사진을 보고 있는 재훈을 향해 슬쩍 윙크를 하고 있었다. 그런 하준의 얼굴 뒤로 술자리에 참석한 여러 사람들의 모습이 어지럽게 그의 눈에 들어왔다.
‘숨은 그림 찾기 – 형이 아는 사람을 한 명 찾아 봐.’ 라는 문자가 연이어 그의 휴대폰에 도착했다.
그리고 한쪽에 앉아 있는 손하의 얼굴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흐릿한 옆모습이었지만 확실히 손하라는 것을 그는 한눈에 알아보았다.
순간 온몸에 소름이 끼치고 심장이 멎는 듯 느껴졌다.
다른 생각할 겨를도 없이 곧장 그곳으로 향하면서도 가슴이 답답해지고 눈앞이 막막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멍한 표정으로 여전히 대답이 없는 재훈을 바라보던 손하가 자신의 앞에 놓여있는 커피를 집어들었다.
터무니 없는 핑계로 하준은 왜 그 자리에서 사라져 버린 것일까? 도대체 녀석은 그에게서 더 이상 무엇을 원하는 것일까?
그것을, 그런 모든 말도 안되는 상황들을 어떻게 손하에게 설명을 할 수가 있을까.
자신이 만들어 낸 그 터무니 없는 모든 일을, 손하의 등 뒤에서 자신이 저지른 부정한 행동으로 인한 덫에 지금 자신이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어떻게 그에게 털어놓을 수가 있을까.
“나....”
잠시 침묵을 지키던 재훈이 힘들게 입을 열었다.
“사실 너에게 할 말이 있어.”
헤어지고 난 후에, 서로 살아가는 세상이 다른 이유로 서로 얼굴을 보지 않고 조금씩 천천히 잊게 될 줄 알았다. 그런 얄팍한 계산으로 손하에게 거짓말로 자신의 부정을 감추고 순간의 쾌락을 즐겨왔으며 스스로 딴에는 그런식으로 자신의 그런 모든 행위가 소위 말하는 ‘완전범죄’로 끝날 일일 줄 알았다.
나중에, 세월이 흐른 후, 손하가 그러한 사실을 알게 된 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었다. 어짜피, 이미 공소시효가 지나가 버린 범죄일 뿐이었다.
더 이상 어떤 감정도 남아있지 않은 상태에서, 과거에 한때 만났던 상대의 이별을 고한 이유가 터무니없는 거짓이라고 하더라도, 더 이상 무슨 감정에 충격이 있을 수 있을까 하고 그는 간단하게 생각해버렸다.
하지만 인생은 그가 그렇게 계산한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그가 그렇게 계산한 것에 비해서 너무 일찍 모든 것을 손하가 알아버리게 되어 버렸다.
게다가, 자신의 그 모든 거짓된 말과 행동을 자신의 입으로 직접 말해야 만 하는 상황에 자신이 내몰려 버렸다.
그의 그런 비밀을 손에 쥐고 있는 하준에게 어떤 식으로도 다시는 휘둘리지는 않겠다는 생각에 그는 그 모든 것을 고백해 버리겠다고 생각했지만, 그 모든 말은 그의 혀 끝에서 멈추고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말을 잇지 못하고 자신의 커피만 빤히 바라보던 재훈이 손하의 시선을 피해 오고 가는 차들로 어지러운 도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우리 아빠 아프다는거.....”
간신히 재훈이 입을 열고 슬쩍 손하의 얼굴을 본 후, 고개를 떨구었다.
“그거... 거짓 말... 이었어.”
팔꿈치를 테이블 위에 대고 그가 손바닥으로 자신의 이마를 가렸다.
“미안해.”
그렇게 굳어버린 듯 앉아있는 재훈의 귀에 어떠한 손하의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옆의 도로를 지나는 자동차의 소리만이 적막함을 깨뜨리고 있었다.
“나... 그거...”
한참 후에 그의 귀에 손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알고 있었어.”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들고 그가 손하를 바라보았다.
“예전에....”
씁쓸한 표정을 지으면서 손하가 말을 이었다.
“아버님이 아프셔서 응급실에 있다는 네 전화를 받고 난 후에.... 아마 인호였을 거야. 너가 다른 남자와 지금 같이 있는데 너무 다정해 보인다고 혹시 둘 사이에 무슨 문제 있는 것 아니냐고....”
씁쓸한 미소를 입가에 비치면서 손하가 슬쩍 재훈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연락이 왔더라고...”
다시 입을 다물고 손하가 자신의 손안에 쥐어있는 커피잔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럼...”
낮은 목소리로 재훈이 입을 열었다.
“왜 나에게 얘기 안했어?”
재훈의 시선을 피해 손하가 고개를 돌리고 가로등의 빛이 닿지 않는 어둠속에 짙게 드리워진 녹음을 바라보았다.
“몇번이나 너에게 물어보려고 했었는데.... 차마 물어볼 수가 없었어.”
그리고 느릿하게 한숨을 내 쉬었다.
“너 잃게 될까봐.”
“.......”
“너 없이 살아간다는게 자신이 없어서....”
“......”
“나는 아직 너밖에 없는데.... 네가 나의 전부인데....네 마음속에서 내 자리는 사라지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처음에는 불안하기만 했는데...”
그가 말을 멈추고 희미한 웃음을 한번 짓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어두운 도로로 시선을 돌렸다.
“하루에 한 뼘씩만 너에게서 멀어지기로 단단히 마음을 먹기로 했어.“
”.......“
”어짜피, 언젠가... 아마도 곧, 네가 나에게 이별을 말하는 때가 오겠구나 하고....“
”.......“
”처음엔 그런 순간이 올까봐 두렵기만 했어. 네 눈치만 보게 되고... 그런데 그렇게 시간이 지나다 보니까...“
”......“
”그 때가 오면 더 이상 널 보지 못하게 될 거라는 생각에 너무나 안타깝고 두려우면서도...“
그가 말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희미한 미소를 띄고 재훈을 바라보았다.
”어처구니 없게도, 마치 내 자신이 그게 언제인지 기다리고 있는 것같은 느낌도 드는 거였어.“
”......“
”그리고 그 순간이 오면 내가 화를 내야 하는 것일까, 담담하게 너를 보내줘야하는 것일까,... 미리 리허설을 해 놔야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터무니 없는 생각도 들고 말야.“
다시한번 손하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
다 마셔버린 커피잔을 손에 쥐고 있던 손하가 입을 열었다.
”너에게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었어.“
”.......“
”나, 너 사랑하면서 네 옆에서 오랫동안 아주 많이 행복했고... 우리 헤어진 것은.. 그냥 또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인연의 매듭이 풀려서 헤어지게 된 거고...“
”.......“
”나, 괜찮아.“
”.......“
”그러니까 혹시라도 마음에 걸려 했던 거라면 그럴 필요없어.“
”......“
희미한 미소를 띠고 그가 언뜻 휴대폰을 열고 시간을 확인했다.
”나 이제 가봐야 겠다. 지금 가야 영등포에서 부천으로 가는 버스 탈 수 있거든.“
내려 놓았던 가방을 등에 메고.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나는 재훈을 향해 손하가 손을 내밀었다.
몸을 돌리던 그가 다시 문득 무엇인가 떠올랐다는 듯, 재훈을 돌아보았다.
”아까 술자리에서 어떤 어린 녀석하나가...“
”희미한 가로등 빛에 반짝이는 눈빛으로 손하가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나에게 와서 아주 당돌하게 말하더라, 이제 너는 자기꺼라고...벗어나지 못할거라고...”
“......”
“인생이란게 자기가 살아가는 것 같지만, 사실은 인형놀이라고, 자신도 모르게 서로 다 보이지 않는 줄로 묶이는 거라고...”
“......”
“날더러 같이 해보지 않겠냐고 해서 난 전혀 관심 없다고 했어.”
“......”
“걔가 내 휴대폰 번호도 알고 있는 것 같던데. 마지막으로 한가지만 부탁할게.”
그가 진지한 표정으로 똑바로 재훈을 바라보았다.
“난 이제 그냥 조용히 살고 싶어. 이제 간신히 대리로 승진도 했고 나 다운 삶을 살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어떤 식으로든 내가 원하지 않는 것에 엮이고 싶지 않아.”
“......”
“무슨 말인지 알지?”
희미한 웃음을 보이면서 한번 더 재훈의 눈을 들여다 본 후, 손하가 몸을 돌렸다.
그리고 재훈에게 등을 보이고 걷기 시작했다.
멍하니 그런 손하를 바라보던 그의 등 뒤에서 서늘한 밤 바람이 불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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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사막여우'를 읽는 호사를 누린다.
오늘은 여유가 행복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