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아라 황석호 -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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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석호마저 소집이 해제된 이후로는 우리들 세상이었다. 복학을 할 때까지 우리 멤버들은 할 일도 없었기에 늦잠을 자고 오후에 동아리방에 모여 합주를 했다. 주말에만 모이던 것이 매일 모이게 되니 서로의 합이 더욱 잘 맞아 떨어졌다.
6개월의 군생활을 하는 동안 베이스를 잡지 못한 시간이 억울해 더 열심히 연습을 한 결과, 나도 베이스 줄 위를 자연스레 걸어 다니고, 줄 위에서 부드럽게 미끄러졌다. 게다가 정교의 연주를 보고 멋있다고 생각했던 것을 나도 구현하고 있었다. 오른손 엄지로 줄을 두드리고, 검지로 줄을 뜯는 것이 이제는 일도 아니어서, 어쩌다 마주 친 그대의 베이스 연주도 껌이었다. 둥두두 둥두두 둥두두 하는 스리핑거 피킹도 자유자제로 구사했다.
이런 나를 한 번쯤 칭찬해 줄 법도 했으나 석호는 전혀 그러지를 않았다. 오히려 자신을 더욱 앞세워 민구와 철우에게 생색을 냈다.
“니들이 반대할 때 내가 잘 가르칠 거라 그랬지? 내가 사람 하나는 잘 뽑았어. 내 안목은 누구도 못 따라가. 니들도 내가 잘 뽑은 거 인정하지?”
민구와 철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특히 민구와 나는 같은 리듬 파트라 궁합이 중요했는데, 정말 합이 잘 맞았다. 민구가 박자를 쪼갤 때마다 나도 거기에 맞춰 둥 둥 둥 둥 베이스 줄을 퉁겼으니 안 맞으려야 안 맞을 수가 없었다. 그 누구보다 석호를 인정하는 민구도 석호처럼 생색을 냈다.
“정교랑 할 때는 어긋날 때가 많았는데, 영기랑 하면 박자가 딱딱 맞아. 이게 다 내가 잘 인도해서 그런 거야. 영기가 나 믿고 딱 따라오잖아. 내가 이렇게 될 때까지 참고 기다려줘서 이렇게 된 거라니깐. 영기 너도 인정하지?”
틀린 말이 아니었다. 연주를 하다보면 삘을 받아서 박자가 좀 빨라지기도 할 터인데, 민구의 박자 쪼개기는 그냥 메트로놈 그 자체였다. 인정을 해야 했다.
“응.”
그나마 철우가 가장 중립적이고, 이성적이었다.
“와~ 씨.발 김민구, 존.나 가증스럽네. 영기 들어오는 거 제일 반대한 새끼가....”
민구가 발끈했다.
“씨.발, 너도 반대했잖아. 석호가 영기 키보드 가르쳐야겠다고 했을 때 삐져가지고 며칠 동안 말도 안 한 새끼가....”
“그러는 너는? 석호가 너한테 영기 드럼 좀 가르치라고 했을 때 너 석호한테 뭐라 그랬어? 드럼이 그냥 두드리기만 하면 되는 줄 아느냐고 석호한테 존.나 짜증냈잖아.... 야, 영기야, 이 새끼가 석호한테 뭐라고 했는지 알아?”
아무 말이 없는 나에게 철우가 핏대를 올리며 고자질을 했다.
“얼굴만 반반하지 아무 것도 못하는 애 갖고 뭐하는 짓이냐고 그랬어. 기생오라비 같이 생긴 게 여자들한테 끼 부린다고 존.나 씹었다니까, 이 새끼가.”
민구가 나에게 손사레를 치며 말했다.
“아니야, 영기야 아니야. 기생오라비는.... 너 잘생겼다고 칭찬한 말이야. 절대로 아니야.... 와~ 씨.발 지금 그런 걸 왜 얘기 하냐? 존.나 속 좁은 새끼. 나랑 영기랑 찰떡궁합으로 잘 맞으니까 샘 나냐?”
민구와 철우가 다투는 걸 가만히 보고만 있던 석호가 한 마디를 던졌다.
“궁합? 씨.발, 너 말하는 거 보니까 조만간에 영기랑 속궁합도 맞추겠다.”
“미쳤냐?”
나는 소리를 질렀다. 속궁합 때문이었다. 석호만큼은 아니지만 듬직한 민구가 다가와 속궁합도 맞춰 보자고 하면 거부할 생각은 전혀 없지만 그건 석호가 없을 때 그렇다는 얘기이고, 석호와 함께 있고 싶어서 밴드에 가입을 하고 열심히 연습을 했던 나는 그 말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석호와 속궁합을 맞춰 보고 싶은 내 마음을 들킨 것 같아서 더욱 그랬다. 내가 게이라는 것을 드러내면 안 된다는 방어기제에서 나온 것이기도 했다.
“남자끼리 뭔 속궁합이냐?”
내가 발끈하는 것에 석호가 반응을 하지 않아 분위기가 어색해진 것을 민구가 바꾸기 위해 나를 달래기 시작했다.
“영기야, 왜 그래. 나는 너랑 속궁합도 맞출 수 있어. 너 이뻐서 얼마든지 할 수 있다구.... 근데 이게 다 장난치는 거잖아. 석호가 농담한 거 갖고 왜 그래....”
“농담도 할 게 있고 해서는 안 되는 게 있는 거야. 씨.발, 내가 미쳤냐? 너한테 똥구멍 벌리게?”
말을 해놓고 눈앞이 아찔했다. 민구 말대로 장난으로 받아들이고 나 역시 농담으로 받아치면 되는 것을 나는 정색을 했다. 나도 나름 이유가 있었다. 장씨 아저씨가 나에게 남자 좋아하지? 하고 바로 내가 게이라는 것을 알아봐서 나는 내가 게이라는 것을 철저하게 숨겨야 했기 때문에 나에게는 장난으로 받아들일 여유가 없었다.
그냥 민구에게 ‘씨.발 내가 똥구멍 한 번 대줘? 황석호, 너한테도 대줄까?’하고 대놓고 내 욕망을 말로 표현하는 게 오히려 장난으로 인식하고 농담으로 받아치는 게 되는 것인데, 나는 정색을 하며 똥구멍을 벌리는 게 미친 짓이라고 말을 함으로써 내가 게이, 그것도 마짜라는 것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말았다.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의 의미였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기에 나는 더욱 정색을 했다.
“씨.발, 상상만 해도 기분 엿같고 드러워.”
나는 일부러 화가 많이 난 듯 베이스를 챙겼다. 석호가 나에게 물었다.
“그만 하려고?”
“과외 하러 가야 돼.”
과외 수업은 좋은 핑계였다. 석호가 또 나에게 물었다.
“오늘 과외 없는 날이잖아.”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내 입에서는 거짓말이 술술 나왔다.
“오늘 새로 온 애 보충해야 돼.”
나는 베이스 기타를 어깨에 둘러매고 동아리방을 빠져나왔다. 자취방으로 가는 동안 앞으로 멤버들을 어떻게 보나 하는 생각만 들었다. 게다가 석호에게 너무나 미안했다. 자위를 할 때마다 석호를 주인공으로 설정해 두고, 그 주인공이 나를 온갖 자세로 범하다가 정액을 뿌리는 상상을 하며 기분 좋게 정액을 배출하던 나 때문이었다. 내가 이런 상상을 한다는 것을 석호가 알면 정말 기분이 더럽고 엿같을 텐데, 오히려 내가 그런 말을 씨부려댔으니 나는 정말 이율배반적인 놈이었다. 자취방에 이불을 덮고 누워 있다가, 이불킥을 하며 도로 일어났다. 도무지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두어 시간이 지나 아래층에서 주인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영기 학생.... 전화 왔어.”
철우였다. 아주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자기들이 어디에 있는지를 밝혔다. 자주 가는 민속주점이었다. 부추전이 맛있어서 내가 무척이나 좋아하는 곳이었다. 막걸리 사발도 이뻐서 술맛이 더 좋게 느껴지는 집이었다.
내가 주점에 도착했을 때, 테이블 가운데에 부추전이 놓여 있었다. 아무도 젓가락을 대지 않아 동그란 모양이 그대로였다. 건배를 하고, 한 잔을 다 비운 뒤 젓가락으로 부추전 가장자리의 바삭한 부분을 한 점 떼어 입에 넣었을 때 민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영기야, 미안해.... 니 기분 알 거 같애. 여자들한테 존.나 인기 많은 니가 그런 말 들으면 진짜 기분 드러울 거 같애. 미안해. 기분 풀어.... 일부러 너 좋아하는 거 시켜놨어.”
입술을 꼭 다물고 아무 표정이 없던 석호도 내가 부추전을 한 점 더 뜯어 먹고 너무 맛있어서 기분이 좋아 웃는 것을 보고, 석호 특유의 해맑은 미소를 나에게 보내왔다. 다행이었다. 나에게 전화를 했던 철우가 한 마디를 던졌다.
“이거 너 다 먹어. 내가 너 올 때까지 손도 못 대게 했어.”
부추전 접시를 나에게 당겨 젓가락으로 부추전을 찢고 있는 나를 보며 철우가 말을 이었다.
“거봐. 내가 이거면 화 풀릴 거라고 했잖아.... 야, 이영기.... 너 부추전에 무슨 사연이라도 있냐? 이거만 보면 사족을 못 써....”
나는 부추전에 눈을 박은 채로 말했다.
“울엄마가 꼭 이렇게 구웠거든. 얇고 끝이 바삭하게....”
“그래쪄요? 이거 먹을 때마다 엄마 생각나서 그래쪄요? 우쭈쭈쭈 우리 영기 많이많이 먹어~~~.”
철우는 꼭 자기가 엄마가 된 것처럼 내 머리를 쓰다듬기까지 했다. 그런데 내가 부추전을 좋아하는 것은 엄마 생각이 나서 그런 게 전혀 아니었다. 그냥 어릴 때부터 엄마가 해준 것에 길이 들어 있어서 그 맛을 잊지 못하는 것뿐이었다.
술잔이 다시 부딪치고 모두 한 사발을 다 들이켰을 때, 아무 말을 하지 않고 있던 석호의 입에서 한 마디가 터져 나왔다.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나는 물론이고, 민구와 철우도 석호의 얼굴을 쳐다봤다.
“미안해.”
독단적이고 독선적인 석호의 입에서 한 번도 나오지 않았던 말이었다. 합주를 하다가 틀리면 그냥 쉽게 기계적으로 나오는 미안하다는 말을 석호는 절대로 하지 않았다. 잘 틀리지 않긴 했지만 석호도 사람인 이상 어쩌다 한 번 틀릴 때가 있었는데, 그때도 미안하다는 말 대신 그냥 아~ 씨.발 한 마디로 퉁치는 석호였다.
자기가 해놓고 자기도 놀랐는지 표정을 찡그리고 바로 한 마디를 토해냈다.
“아~ 씨.발....”
나를 비롯한 민구와 철우가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다시 술잔을 부딪쳤다. 석호가 웃는 얼굴로 나에게 말을 건넸다.
“영기 너.... 씨.발 농담 한 마디 한 거 가지고 오늘처럼 정색하면 진짜 내가 너 확 따.먹어 버린다.”
진짜 다시 정색을 해서 석호가 나를 따먹나 안 따먹나 시험해 보고 싶었지만 나 때문에 합주를 망친 것이 미안해서 농담으로 받아쳤다. 하지만 나는 진심을 담았다.
“아이고 무서워라.... 나 따먹을 때 꼭 콘돔은 껴줘. 요즘 세상이 무서워서....”
나의 진심을 담은 농담에 어색했던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민구도 내 말을 농담으로 받았다.
“석호가 따먹기 전에 내가 먼저 속궁합 맞춰야겠어. 영기야, 우리 언제 속궁합 맞출래?”
“말 나온 김에 오늘 밤에 맞출까? 나 오늘 한가해.”
황색 잡지 선데이 서울에나 나올 법한 말로 민구의 말을 받아쳤다. 모두 술잔을 부딪치며 즐겁게 웃었다. 정말 다행이었다.
다음날부터 또 즐겁게 동아리방에 모여 신나게 합주를 했다. 수업도 없는 휴학생 신분이라 시간에 전혀 구애를 받지 않았기에 시시때때로 모여 동아리방을 우리가 전세를 낸 듯 사용했다.
그런데 이것이 문제가 되었다. 군대에 갔다가 오면 뒷방 늙은이처럼 뒤로 물러나 주는 것이 관례였는데, 우리는 여전히 우리가 주인인 양 동아리방을 점거하다시피 했으니 후배들의 불만이 터져 나왔다. 나랑 동기인 90학번들은 죄다 현역병으로 군대에 끌려가 있었고, 91학번들도 가을 축제 공연을 끝으로 동아리방에 자주 오지 않았다. 92학번들은 이제 본격적으로 자기네들이 동아리방을 사용하겠다 싶었는데, 우리가 주말이 아닌 평일에도 계속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으니 불만이 터질 수밖에 없었다.
정식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서로의 합주 시간을 잘 배분하면 쉽게 해결될 수도 있는 문제였는데, 다짜고짜 불만부터 터뜨리니 우리 멤버들도 적잖이 마음이 상했다. 거기에 더해 석호의 독단적이고, 독선적인 성격이 후배들의 불만에 기름을 부었다. 관례는 관례일 뿐이고, 우리가 새로운 관례를 만드는 것이라고 후배들의 입을 틀어막았다. 세 학번이나 높고, 여러 모로 분위기를 압도하는 석호였는지라 후배들이 찍소리를 못했다. 하지만 그것은 석호의 앞에서일 뿐이었다.
후배들이 불만을 터뜨리고 난 며칠 뒤, 우리가 합주를 하고 있는데 동아리방 문이 벌컥 열렸다. 고학번 선배들이었다. 들어오자마자 소리를 빼액 질렀다. 당연히 신나게 연주를 하던 우리는 일제히 멈췄다. 졸업을 앞두고 있는 86학번 선배가 석호에게 잔소리를 퍼부었다.
“야이 황석호 씨.발새끼야. 관례는 관례일 뿐이라고? 관례가 아니라 우리 동아리 전통이야. 후배들을 위해서 선배가 군대 갔다 오면 뒤로 물러나 주는 게 우리 전통이라고. 니가 뭔데 전통을 깨. 어~~?”
우리는 모두 아무 말을 못했다. 독단적이고, 독선적인 석호도 86학번 선배가 하는 말에는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저 선배의 뒤에 서 있던 92학번 멤버들을 쳐다볼 뿐이었다. 86학번 선배는 뒤에 서서 울고 있던 후배의 등을 토닥이며 위로했다. 키보드를 치는 92학번 후배였는데, 멤버 중의 유일한 여자였다. 동아리 10년 역사를 통틀어 여자는 이 후배가 유일했다. 선배는 유일한 여자 후배의 눈물에 넘어간 셈이었다. 나는 치밀어 오르는 것이 있어 한 마디를 하려다가 묵묵히 짐을 챙기는 다른 멤버들을 보며 참았다. 민구와 철우도 무척이나 이뻐라 하는 후배이기 때문이었다. 석호도 겉으로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이 후배를 이뻐하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기타를 말없이 챙기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매일 신나게 연주를 하다가 며칠 쉬게 되니 좀이 쑤셨다. 자취방에서 베이스를 꺼내 줄을 퉁겨봤지만 앰프가 빠진 베이스는 끈 떨어진 꼭두각시 인형에 불과했다. 비싼 베이스라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렇게 일주일을 무료하게 보내고 있던 때에 석호에게 전화가 왔다. 베이스를 가지고 당장 나오라고 했다. 석호의 말이었기에 당장 나갔다. 석호는 대문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따라와.”
앞장서서 가는 석호의 뒤를 따라가면서 어디 가느냐고 물었지만 석호는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석호는 나를 데리고 오래된 상가 건물 지하로 내려갔다. 지하 구석에 있는 철문 앞에 멈춰 서서 나에게 문을 열어보라고 했다. 석호가 하는 말이었으니 나는 문고리를 잡고 열었다. 내 뒤에 서 있던 석호가 크게 소리쳤다.
“짠~~~~”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내 눈 앞에는 동아리방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사방의 벽에는 흡음재가 붙어 있고, 벽 안쪽에 드럼 세트가 떡하니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딱 봐도 새 거였다. 내 뒤에 서 있던 석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좋지?”
“이게 다 뭐야?”
석호는 내 물음에 대답은 하지 않고, 성격대로 자기 할 말만 했다.
“베이스 놓고 따라와.”
나는 석호가 따라오라니 또 따라갔다. 석호가 두 번째로 나를 데리고 간 곳은 동아리방이었다. 합주를 하고 있는지 문 밖에서도 쿵쿵거리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석호는 노크도 없이 문을 열었다. 노크를 한다고 해도 들리지가 않았으니 소용이 없는 일이기는 했다.
덩치 큰 석호가 들어서자 일제히 연주가 멈췄다. 갑작스런 석호의 출현에 92학번 후배들도 적잖이 놀란 듯 석호와 나를 보고 인사도 안 했다. 석호는 여기저기 물려 있는 케이블을 뽑았다. 그리고 키보드를 번쩍 들어 나에게 안기고, 자기는 커다란 앰프 하나를 들었다. 유일한 여자 멤버인 후배가 석호에게 소리쳤다.
“선배, 지금 뭐하는 거에요?”
석호는 나를 앞세워 동아리방을 나가면서 딱 한 마디를 날렸다.
“내 꺼야.”
그렇게 석호와 내가 앰프와 키보드를 들고 와 새로운 곳에 설치를 마치고 건물 입구에 쭈그려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을 때, 철우가 도착해서 세 명이 함께 담배를 피웠고, 5분 뒤에 민구가 도착해서 또 담배를 피웠다.
지하로 내려가 방문을 열고 들어간 민구와 철우도 나와 똑같은 반응을 보였다.
“이게 다 뭐야?”
똑같은 말이 터진 민구와 철우에게 석호가 웃으며 말했다.
“씨.발, 드러워서 내가 만들었어. 다들 마음에 들어?”
대답이 필요 없는 물음이었다. 당연히 마음에 들었다. 아니 들고도 남았다. 폭이 좀 좁긴 했지만 동아리방의 두 배가 넘어 보이는 크기였으니 합주를 하다 지치면 편하게 쉴 수도 있을 것 같아 마음마저 상쾌했다.
“석호야, 이 키보드....”
“내가 영기랑 가져왔어.”
“그럼 걔네들은....”
“지들 알아서 하겠지.”
“그래도 동아리 후배들인데....”
“난 아닌데?”
철우와 나는 아무 말을 하지 않고 석호의 얼굴만 쳐다봤다. 석호가 단호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키보드랑 앰프 갖고 나오면서 내 몸도 마음도 동아리 떠났어.”
나는 석호 때문에 동아리방을 찾았고, 석호가 나를 뽑았고, 석호한테 베이스를 배웠고, 석호가 나를 멤버에 끼워줬으므로 전적으로 석호의 편이라 석호를 따라 말했다.
“나도 아냐.”
석호랑 나를 번갈아 쳐다보며 아무 말이 없는 철우에게 석호가 다그쳤다.
“그럼 너는 동아리 가서 뒷방늙은이로 남든지. 니가 알아서 해.”
“내가 미쳤냐? 스물셋밖에 안 됐는데 무슨 늙은이야? 이제 제대로 하는 거 같구만. 나도 동아리 그딴 거 안 해.”
이쯤에서 멤버 중에 가장 말이 많은 민구도 한 마디를 해야 했는데, 민구는 방에 들어와서 이게 다 뭐냐는 말을 끝으로 한 마디도 안 하고 있었다. 민구는 우리가 무슨 말을 하는지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 듯 했다. 방에 들어오자마자 드럼 세트만 만지작댔다. 석호가 민구를 향해 의견을 물었다.
“김민구, 넌 어쩔 거야?”
민구는 석호가 묻는 말에 대답을 하지 않고 오히려 석호에게 물었다.
“석호야, 이거 아무도 안 친 거지?”
“설치하고 내가 몇 번 손으로 두드려는 봤어.”
“석호야, 이거 얼마야? 내가 언제까지 돈 주면 돼?”
“씨.발 돈은 무슨.... 우리집 악기상하는 거 몰라서 그러는 거야?”
“그럼 지금부터 이거 내 꺼다. 나중에 딴말 하지마.”
“알았어. 그러니까 너 어쩔 거냐고?”
민구는 석호가 묻는 말에 대답은 하지 않고 계속 드럼 세트를 쓰다듬기만 하다가 갑자기 신이 들린 듯 완전히 넋이 나간 표정으로 드럼을 두드려댔다. 석호의 질문에 드럼 소리로 대답을 하는 셈이었다. 석호와 나도 케이스에서 기타를 꺼내 케이블을 연결하고 소리를 맞췄다.
석호가 기타를 잡고 징~~~~~ 하고 소리를 낸 뒤 우리에게 말했다.
“그럼 이제 우리 영원히 같이 가는 거다.”
“씨.발, 달려~~~~~~”
민구가 드럼스틱을 치며 박자를 맞췄다. 어떤 노래로 달릴 것인지는 이미 석호의 말 속에 있었다.
N.EX.T - 영원히
석호가 장만한 공간에서 처음으로 달리는 노래였다. 끊어질 줄만 알았던 우리의 합주가 계속 이어지는 것에 걸맞은 노래였다. 특히나 나에게 이 노래는 더욱 가슴에 와 닿는 것이었다. 석호에게 선물을 받은 빨간 베이스 기타가 너무 좋아 며칠 동안 끌어안고 잠을 잤던 내가 노래의 주인공이 된 것 같아서였다. 그것은 석호도 마찬가지였다. 석호의 기타도 나와 같은 빨간색이었기에 이 노래를 들으면서 우리 노래라며 즐거워했다. 그리고 석호는 나에게 신해철이 다시 밴드를 할 거라는 자신의 예언이 맞지 않느냐고 생색도 냈다.
아무튼 모두가 즐거웠다. 석호가 나한테만 비싼 베이스 기타를 선물한 것이 아니라 철우에게도 민구에게도 선물을 한 셈이어서 김이 좀 빠지긴 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다시 함께 모여 합주를 한다는 것이 중요했다.
우리는 겨울로 접어드는 때에 새로 마련된 우리만의 장소에서 마음껏 젊음을 발산했다. 우리가 뿜어내는 열기는 한겨울의 추위도 막을 수 없었다.
-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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