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아라 황석호 -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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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새해가 되면서 석호가 마련한 연습실의 철문에 명패가 하나 붙었다. 명패에 새겨진 문구는 ‘SUKO FLY’였다. 우리말로 적으면 ‘석호 플라이’였고, 우리 밴드의 이름인 셈이었다. 석호가 짓고, 석호가 만들고, 석호가 붙였다.

  석호의 독단과 독선이 만든 결과물이었지만 나는 물론이고 민구와 철우도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새로운 연습실이 바로 석호의 독단과 독선이 만든 결과물이기 때문이었다. 이름이야 어찌되었든 함께 모여 합주를 하는 것이 중요했다.

  또 밴드의 이름에 FLY가 붙은 것도 나름 이유가 있었다. 석호가 선글라스를 끼고 학교에 나타난 날, 나도 모르게 저팔계라고 외쳤다. 민구와 철우도 내 말에 웃음보가 터졌다. 석호가 선글라스를 낀 모습은 날아라 슈퍼보드의 저팔계와 아주 흡사했고, 그것은 석호도 인정을 했다. 그러니까 석호 플라이는 황석호 자신의 이름에, 날아라 슈퍼보드를 접목시킨 것이라 할 수 있었다.


  복학을 하기도 전에 나는 너무나 바쁜 나날을 보냈다. 밴드 합주뿐만이 아니라 과외도 내 생활의 큰 부분을 차지하기 시작했다. 6개월 동안의 군생활 때문에 철주를 비롯한 철주의 친구들을 잠시 보지 못하는 사이 철주와 친구들의 성적이 뚝 떨어져 있었다. 그래봐야 몇 점이고, 몇 등이지만 1등의 맛을 알아버린 철주는 상실감이 컸다. 다시 과외를 하자마자 철주는 다시 1등을 했고, 철주의 친구들도 다시 성적이 올랐다.

  이것은 철주와 그의 친구들이 나를 더욱 믿고 따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또 나에게 엄청난 홍보 효과를 가져왔다. 주인 아주머니의 아들 자랑도 나에겐 광고요, 간접적인 영업이었다. 철주 그룹 말고, 한 팀을 더 받았다. 새로 중학교에 입학을 하려는 학생들이었다. 해가 바뀌자마자 벌어진 일이었다. 새로 짠 그룹의 과외비 한 달 치만으로 한 학기 등록금이 빠졌다. 나머지 과외비는 통장에 차곡차곡 쌓였다. 중학교 2학년 때 짧게 했던 자습위원의 활동이 나를 먹여 살리는 셈이었다.

  설날 연휴가 지날 무렵, 주인 아주머니가 예의 ‘영기 학생, 내가 진짜 이런 부탁은 안 하려고 했는데’ 하면서 두 명의 학생으로 팀을 짠 그룹을 소개했다. 돈 욕심에 마음이 흔들렸으나 과감히 거절했다. 네 명씩 묶은 두 팀의 과외만으로도 그 당시 웬만한 월급쟁이 이상의 수입을 올렸고, 더 받으면 학과 수업과 밴드 합주에 지장을 초래할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이것이 오히려 나에게 플러스 요인으로 작용했다. 아무나 안 받는다는 식으로 이야기가 퍼지고, 일단 받은 학생들을 제대로 가르친다는 소문이 퍼졌다. 내가 낸 것이 아니라 주인 아주머니를 비롯해 나에게 학생을 맡긴 엄마들이 내는 것이었다. 나중에 또 이야기를 할 때가 있을 것 같으니 과외 얘기는 일단 여기서 마무리하고....


  삼일절 다음날, 밴드 SUKO FLY의 멤버들은 모두 복학을 했다. 내가 재수를 해서 한 해 늦게 입학했지만 6개월의 군생활은 똑같은 학년으로 복학을 하도록 만들었다. 학년이 올라간 만큼 머리도 어색했던 짧은 머리에서 탈피하여 제법 자라나 있었다. 5월 축제 공연 때까지 더 길러서 다듬으면 어느 정도 봐줄만 할 듯 했다. 쓸데없이 보수적인 국문과 교수들이 내 머리를 가지고 수업 때 가끔 한 마디씩 하는 것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어차피 나는 학과 공부에 별 관심도 없었기에 학점도 F만 면해서 졸업만 하자고 생각을 하던 터였다.

  그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석호, 민구, 철우도 나와 마찬가지였다. 최소한의 학점을 타기 위해 수업에 들어가고 시험을 쳤을 뿐이었다. 졸업을 하고 나서도 계속 밴드를 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였다. 음악에 목숨을 걸었다는 석호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어느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다. 그냥 계속 함께 밴드를 하고 싶을 뿐이었다.


  3학년에 올라가면서 석호는 노래를 만드는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고유한 이름까지 갖춘 밴드가 남들 노래를 카피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지당한 말이었다. 우리만의 노래를 우리가 직접 연주하고 불러야 제대로 된 밴드였다. 하지만 나는 그런 능력이 전혀 없으니 석호가 곡을 쓰는 것을 구경만 했다. 민구나 철우도 나랑 별반 다르지 않았다. 곡을 쓰는 작업은 오로지 석호의 몫이었다. 석호도 자신을 뺀 우리에게 전혀 기대를 하지 않는 눈치였다. 우리는 그저 석호가 뽑아내는 멜로디가 좋다 안 좋다 평가만 하면 끝이었다.

  5월 축제 때, 우리가 만든 곡으로 공연을 하는 것을 목표로 삼은 석호는 열심히 곡을 썼다. 하지만 쉽지가 않았다. 곡이라는 게 목표가 섰다고 뚝딱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는 것은 석호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석호는 꾸준히 틈이 날 때마다 곡을 쓰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축제 공연에서 우리가 만든 곡을 부르냐 못 부르냐는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정작 우리가 걱정을 해야 할 것은 공연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였다. 단 4명으로 구성된 SUKO FLY는 정식 동아리도 아니고, 신규 등록을 하려고 해도 동아리 설립 기준에 맞지 않아 퇴짜를 맞았다. 옛날처럼 당연히 공연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으나 현실은 그렇지가 못했다. 동아리 탈퇴가 이런 결과를 가져오나 싶었다. 하지만 탈퇴를 후회하는 멤버는 한 사람도 없었다. 어치피 탈퇴를 하지 않았어도 공연을 못하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그냥 우리끼리, 우리의 장비로, 우리가 하고 싶은 곳에서, 우리가 하고 싶은 때에 공연을 해도 나도 그렇고, 민구와 철우도 상관이 없었는데, 석호는 그렇지가 않았다. 대운동장 가설무대나 노천극장에서 제대로 공연을 해야 한다고 우겼다. 하지만 여러 행사가 잡혀 있는 축제 때 우리가 하고 싶다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허가를 받고, 시간 조율이 필요했다.


  석호는 축제의 주최자 격인 총학생회를 직접 찾아갔다. 나를 대동하고서였다. 석호가 굳이 나를 데려간 것은 자기 나름으로 이유가 있었다. 석호 스스로가 자기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기에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자기를 말리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나도 분위기로 봐서 이전 우리가 속했던 밴드 동아리가 소위 운동을 한다는 사람들과 그다지 친하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심한 듯 했다. 민구의 말로는 운동권들과 척을 진 건 아니지만 동아리 선배들이 대대로 반대진영의 비운동권 세력에 붙어 총학과 단대 선거 때 동원되었다고 했다. 철우가 덧붙인 말로는 석호가 그쪽 애들한테는 꽤나 유명하다고 했다. 좋은 쪽이 아니라 안 좋은 쪽으로였다. 내가 이유를 캐묻자 내가 막 입학을 했던 1990년을 끌어왔다.


  “총학생회 출범식을 할 때 우리한테 공연 섭외가 들어왔어. 근데 그걸 석호가 일언지하에 거절을 했거든. 너도 알잖아. 석호 말투, 표정.... 그러니까 그냥 거절을 한 게 아닌 거지. 나랑 민구가 동아리방에 들어갔을 때는 이미 상황 종료였어. 그쪽 애들이 사색이 돼가지고 씩씩거리면서 나가더라. 석호가 걔네들한테 뭐라고 그랬는지는 민구랑 나도 몰라.”


  “근데 우리는 선거할 때 공연 같은 거 안 했잖아.”


  “그건.... 아이 씨.... 민구 니가 말해. 너 때문이잖아.”


  “영기야.... 기분 상하지 말고 들어.... 철우랑 나랑 가을 축제 공연 이후로 너한테 삐져서.... 우리가 동아리방에 얼씬도 안 했잖아. 그래서....”


  “야, 김민구. 니가 삐진 거지, 왜 나까지 끌어 들이냐?”


  “어쨌든 같이 안 했잖아. 내가 초콜렛 못 먹은 거 생각하면 한이 된다 한이.... 석호 말로는 하루에 대여섯 개는 꼭 붙어 있었다던데 정말이야?”


  나는 별 관심이 없어서 몇 개가 붙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몰라. 난 초콜렛 별로 안 좋아해서.... 근데 우리 다시 합주할 때는 초콜렛 안 붙었잖아.”


  철우가 내 말을 잡고 말했다.


  “석호가 그러는데, 그때 겨울 방학 시작하고부터 딱 끊겼다더라. 뭐 방학이니까 그렇겠지 싶었는데 개학하고 나서도 안 붙었다고 하더라고.”


  아무튼 석호가 공연 때문에 총학생회에 찾아간 것은 갑과 을이 완전히 역전된 상황이었다. 나는 3년이 지난 일이니 크게 문제가 될 것이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총학생회측에서 밴드 동아리에 또 공연을 부탁했다가 거절을 당한 이후였다.


  “우리는 밴드 동아리가 아닙니다. 그쪽이랑은 관련 짓지 말아 주세요.”


  석호는 먼저 밴드 동아리와 선을 확실히 그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감정을 건드리는 것이었다.


  “어차피 그쪽 출신 아니에요?”


  출신성분을 따지는 말에 내가 욱 하고 치밀어 올라 한 마디를 하려는 것을 석호가 알았는지 내 어깨에 손을 얹고 몇 번을 주물렀다.


  “그거는 옛날일이고.... 어떻게 안 될까요?”


  석호가 저자세로 나오는 것은 너무 낯선 일이라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석호가 묻고 있는데 대답은 하지 않고 총학생회 관계자는 자꾸 나를 힐끔힐끔 쳐다봤다. 나도 석호처럼 저자세로 부탁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나까지 그러면 석호의 자존심에 상처가 될 것 같아 나는 석호의 자존심은 내가 지킨다는 마음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내 옆에 서 있던 석호가 또 입을 뗐다.


  “혹시 우리가 공연하는 거 본 적 있는지 모르겠는데.... 얘 인기 엄청 많아요. 우리 밴드에서 베이스 치는 놈인데, 그냥 도레미파솔라시도만 쳐도 함성이 그냥 막.... 동아리방에 초콜렛 붙고 난리 났었어요.”


  관계자가 나를 한 번 더 보더니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그런데 단어 선택도 그렇고 말투가 좀 기분이 나빴다.


  “초대 가수 공연 전에 바람잡이 할 게 좀 필요하긴 해요.”


  바람잡이라는 말에 들러리의 뜻이 포함되어 있어서 나는 절대로 석호가 용납을 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내 예상이 완전히 빗나갔다.


  “오~ 좋네요. 초대 가수보러 사람들도 많이 올 테니까 더 좋아요. 우리가 할게요.”


  우여곡절 끝에 공연이 성사되었다. 말리러 갔던 나를 오히려 석호가 말리면서 이뤄낸 결과였다. 공연을 하기 위해 여러 가지 단서 조항이 붙었는데, 석호는 거의 대부분 수용했다. 하지만 딱 하나, 선곡한 노래를 미리 알려달라고 하는 말에는 석호도 거부했다. 내가 아는 석호의 성격으로는 단호하게 거절해야 했으나 석호는 그러지 않았다.


  “에이~ 그건 좀 아니다. 콘서트 보러 갈 때 어떤 노래 부를지 알고 가는 거 아니잖아요. 초대 가수가 무슨 노래 부를지 아세요? 아니잖아요. 모르니까 더 기대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석호는 유들유들하게 미리 알려줄 수 없는 이유를 말했다. 석호가 달리 보였다. 내가 알고 있는 석호가 아니었다. 나는 전적으로 석호의 편이었지만 이번에는 좀 실망스러웠다. 자기 마음대로 할 수가 없어서 동아리를 탈퇴해 연습실까지 따로 연 석호라고 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석호는 석호였다. 내가 아는 석호 그대로였다. 총학생회실을 빠져나오자마자 석호의 입에서 석호 특유의 억양을 가진 욕이 튀어 나왔다.


  “씨.발....”


  학생회관 앞 벤치에 앉아 담배를 피우는 동안 내가 석호에게 물었다.


  “너 진짜 부를 거야?”


  “그럼 어떡해. 그 전제조건으로 공연할 수 있는 건데.”


  그 전제조건이란 민중가요를 부르는 것이었다. 모든 곡을 민중가요로 채우라는 것은 아니고, 초대 가수의 성향을 고려해 최소 3곡은 불러야 한다는 조건이 달렸다. 총학생회 측에서 선곡을 알려달라고 한 것도 조건을 선뜻 받아들이는 석호를 믿지 못하는 데서 나온 것이었다.

  민구와 철우도 처음에는 석호를 이해하지 못했다. 독불장군 황석호가 어쩌다 이렇게 됐느냐고 놀려대기까지 했다. 그러나 석호의 한 마디에 바로 입을 닫았다.


  “아~ 씨.발~~~”


  석호는 담배를 한 대 피워 물고 한숨처럼 연기를 뿜고는 말을 이었다.


  “지하실에 틀어박혀서 있을 수는 없잖아. 오랜만에 제대로 된 무대에서 제대로 달려봐야 될 거 아냐.”


  담배를 다 피우고 나서 또 말을 이었다.


  “씨.발, 우리 맘대로 노래 골라서 하면 되잖아. 안 그래?”


  나도 그랬고, 민구와 철우도 석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곧바로 선곡에 들어가 공연 때 부를 노래를 정하고 열심히 연습했다. 2년 반 만에 하는 공연이라 모두들 기대감이 컸다. 특히나 나는 근음 셔틀이 아닌 제대로 된 베이스 주자로서의 공연이라 더욱 기대가 되었다. 게다가 노래도 석호와 반반이었다. 반반씩 나눠 부르자는 석호의 제안에 내가 눈을 똥그랗게 뜨고 바라보고 있을 때 석호가 심드렁하게 한 마디를 날렸다.


  “너 팔아서 공연 딴 건데 너도 나서야지.”


  말은 이러했으나 실상은 그게 아니었다. 공연이 성사된 그 전제조건을 내가 맡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좋았다. 무대에서 내가 노래를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나는 행복했다. 석호가 선곡한 노래들은 내가 들어도 너무 좋은 것들이라 내가 망치지나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그렇게 우리는 버스나 지하철이 끊길 때까지 연습을 했다. 나는 자취방이 연습실에서 가까웠으니 더 남아서 연습을 하는 때도 있었다.


  드디어 일주일 동안의 축제가 시작되고, 공연 당일 연습실에 나타난 석호는 미리 와 있던 우리들에게 무언가를 하나씩 던졌다. 검은색 티셔츠였다. 무대 위에서 맞춤 제작을 한 옷을 입고 공연을 해야 우리가 한 팀이라는 것을 보여줄 수 있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맞는 말이었다. 우리는 비닐에서 티셔츠를 꺼내 입었다. 앞면과 뒷면에 빨간색 글자가 박혀 있는 티셔츠였다. 뒷면은 모두 같은 글자가 적혀 있었으나 앞면은 사람들마다 모두 달랐다. 가장 늦게 티셔츠를 입은 민구가 각각의 티셔츠에 적힌 글자를 보고, 고개를 숙여 자신의 티셔츠에 적인 글자를 확인하고는 소리를 질렀다.


  “야, 이게 뭐야~~~ 씨.발 쪽팔리게....”


  석호는 K, 민구는 U, 철우는 O, 나는 S였다. 무대를 정면으로 봤을 때 나는 가장 왼쪽, 민구는 내 뒤쪽 가운데, 철우는 가장 오른쪽에 위치했다. 무대 앞 가운데가 석호의 자리였으니 이를 순서대로 조합하면 얼추 S, U, K, O였다. 뒷면에는 모두가 예상하는 대로 FLY가 적혀 있었다.

  석호를 제외한 우리는 또다시 석호의 독단과 독선에 치를 떨어야 했지만 한두 번도 아니고, 또 우리 밴드의 이름은 SUKO FLY 였기에 그냥 받아들였다. 그나마 민구의 씨.발이라는 말이 석호를 제외한 우리의 마음을 위로해줬다.


  공연이 7시라 일찍 저녁을 먹고 연습실에서 한 번 더 맞춰 본 후 학교로 올라갔다. 그냥 같은 학교 학생들 앞에서 노래 좀 하는 것인데, 이게 뭐라고 괜히 긴장이 되었다. 무대에 올라가 악기를 조정하고 있을 때 석호가 다가와 어깨를 토닥이고 몇 번 주물렀다. 긴장이 좀 누그러지는 것 같았다.

  우리의 공연을 허락해 준 총학생회 간부의 소개로 공연이 시작되었다. 우리가 미심쩍었는지 총학 간부는 무대에서 내려가지 않고 무대 뒤쪽 구석에 서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는 우리가 준비한 것들을 쏟아부을 예정이었다.


  석호가 기타를 한 번 좡~~~~ 치고, 곧바로 무반주로 소리치듯 노래를 불렀다.


  ♬ 나는 일몰의 고갯길을 넘어가는 고행의 방랑자처어러엄~~~~ ♬


  곧바로 민구가 듣기 싫다는 듯이 드럼을 마구 두드려댔다. 석호가 노래를 멈췄다. 약간의 침묵이 흐르고, 철우가 건반을 치기 시작했다. 곧이어 내가 한 마디의 베이스 멜로디를 연주했다. 그리고 철우의 건반 반주에 맞춰 내가 먼저 노래를 시작했다.


https://youtu.be/lUAH2sP4o8c 

정태춘, ‘아 대한민국’


  우리가 선택한 노래는 정태춘의 노래였다. 합법적으로 노래를 부르던 정태춘이 심의에서 통과되지 못한 곡들을 모아 불법으로 발표한 앨범에 있는 곡들이었다. 롹의 정신이 무엇인지 지금도 감이 잘 잡히지 않지만 그 중의 하나가 저항이고 자유라면 우리가 정태춘의 노래들을 선곡한 것은 저항과 자유를 실천하는 것이었다. 기존의 가요 심의 제도에 저항하여 앨범을 출시하는 정태춘의 마음과 민중가요를 꼭 넣어야 한다는 압박으로부터 저항하려는 우리의 몸부림이 노래에 담겨 있었다. 정태춘의 자유로운 영혼을 우리는 본받고자 했다.

  ‘아, 대한민국’에 이어서 ‘그대, 행복한가’를 부르고, 그 다음으로 ‘일어나라 열사여’를 불렀다. 원곡에 들어 있는 북소리를 재현하기 위해 민구가 엄청나게 노력했다. 노래는 대부분 내가 불렀지만 ‘일어나라 열사여, 깨어나라 투사여’ 부분은 석호가 자기의 장점인 고음을 살려 힘차게 내질렀다.

  그렇게 세 곡을 정태춘의 노래로 달리고 나서 총학 간부의 얼굴을 보니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역시나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는 우리가 준비한 노래로 다음 곡을 달렸다. 어쩌면 총학 간부의 마음에 꼭 드는 노래일 수 있었다. ‘들어라 양키야’였다. 나는 석호가 롹으로 편곡한 노래를 신나게 불렀다. 속이 다 후련했다.


  그렇게 전반부 네 곡을 마치고, 석호는 멤버를 소개했다. 이제 솔로 연주를 하지 말자는 합의 따위는 없었다. 민구와 철우는 석호가 소개를 하자마자 신나게 달렸다.


  “다음은 우리 석호 플라이의 베이스.... 처음엔 도레미파솔라시도밖에 못 쳤는데, 이제는 어떤지 볼까요. 모두 박수로 맞아주세요. 베이스 이~영~기이~~~~”


  석호가 나를 소개하자마자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주법을 총동원하여 지랄발광을 떨었다. 앞선 노래 네 곡을 내가 다 불렀으니 열화와 같은 함성과 박수가 터져 나왔다. 온몸이 짜릿했다. 마지막 석호 소개는 내가 했다.


  “다음은 우리 석호 플라이의 기타 겸 보컬.... 독단과 독선, 아집으로 똘똘 뭉친 날아라 슈퍼보드 저팔계.... 석호 플라이의 독재자 황~서~코~~~~”


  내가 소개를 하고 나서 석호는 뒷주머니에 꽂아뒀던 선글라스를 꺼내 썼다. 관객들의 웃음이 터졌다. 석호는 아주 진지한 목소리로 멘트를 날렸다.


  “방금 저 때문에 웃으신 거 아니죠?”


  무대 아래에서 맞아요~ 닮았다~ 등의 소리가 터져 나왔다.


  “네~ 아니라구요? 역시 그럴 줄 알았습니다. 우리 베이스 이영기 군이 저의 미모를 질투해서 그러는 거에요. 그럼 이제 즐길 준비 되셨나요? .... 좋습니다. 우리 석호 플라이와 함께 본격적으로 날아 봅시다. 철우야~~~~~”


  “아오~~~~”


  철우의 키보드 소리가 먼저 대운동장을 갈랐다. 그리고 곧이어 석호가 연주하는 현란한 고음의 기타 리프가 이어졌다. 석호가 굳이 기타 솔로 연주를 하지 않은 것은 이어지는 노래에 자신의 진가를 발휘하는 연주가 들어있기 때문이었다. 민구와 내가 눈짓으로 궁합을 맞춰 본격적으로 둥둥거리기 시작했을 때 무대 아래 관객들도 뛰기 시작했다. 예상보다 훨씬 뜨거운 반응에 나도 신이 나서 몸을 들썩이며 연주를 했다. 석호도 신이 나는지 육중한 덩치로 몇 번이나 쿵쿵 뛰었다.

  신나게 연달아 3곡을 달렸다. 그중에는 석호가 곡을 쓴 우리의 노래도 들어 있었다. 마지막 노래를 앞두고 석호가 멘트를 날렸다.


  “이제 마지막 곡입니다. 끝으로 이 자리에 설 수 있게 해주신 총학생회 관계자분들에게 감사드리구요, 다음에 이어지는 초대 가수 공연에 민폐가 되지 않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석호 플라이 꼭 기억해 주세요.”


  석호가 멘트를 마치고 나를 바라보며 첫 마디를 땠다.


  “나~~안~~~”


  나는 거기에 답을 했다.


  “알아요. 이 밤이 흐르면....”


  내 말 뒤에 바로 드럼을 강조한 전주가 흘렀다. 1992년 한 해를 강타한 서태지와 아이들의 ‘난 알아요’를 석호가 롹 스타일로 편곡한 것이었다. 석호와 나뿐만 아니라 철우도 참여하는 곡이었다. 전주가 끝나고 철우가 처음 랩 부분을 소리쳐 읊어댔다.


  ♬ 난 알아요 이 밤이 흐르고 흐르면 누군가가 나를 떠나 버려야 한다는 그 사실을 그 이유를 이제는 나도 알 수가 알 수가 있어요 사랑을 한다는 말을 못했어 어쨌거나 지금은 너무 늦어 버렸어 그때 나는 무얼 하고 있었나 그 미소는 너무.... ♬


  철우가 ‘너무’를 끝으로 랩을 멈췄을 때, 관객들의 함성이 대운동장에 울려 퍼졌다.


  “아름다웠어.”


  우리의 예상에 딱 맞은 관객들의 열띤 호응에 우리는 더욱 신이 났다. 원곡과는 다른 강렬한 사운드에 관객들이 또 뛰기 시작했다. 랩과 노래 사이의 짧은 간주가 끝이 나고 석호의 노래가 시작되었다. 서태지 몸의 두 배는 될 것 같은 석호가 부르는 난 알아요는 어둠이 살짝 내려앉은 5월의 공기를 갈랐다. 나는 중간 중간 코러스를 넣으며 석호를 도왔다.

  노래 중간에 또 철우가 랩을 하고 강렬한 사운드의 간주 뒤에 석호가 다소 거친 목소리로 그대여 가지 말라고 노래를 불렀다. 노래의 마지막은 강렬한 사운드를 죽이고 무반주로 석호 혼자 노래를 불렀다. 석호가 부르는 노래를 늘 듣는 나였지만 무대 위에서 부르는 것은 또 다른 느낌이었다. 반주에 맞춰 부를 때는 거친 목소리더니 무반주로 부를 때는 덩치에 걸맞지 않게 감미로운 목소리로 불러서 내가 다 소름이 끼쳤다. 담배를 그렇게나 피워대면서도 어찌 그리 노래를 잘 부르는지 신기하기만 했다.


  ♬ 오~ 그대여 가지 마세요 나를 정말 떠나가나요. 오~ 그대여.... ♬


  오~ 그대여를 끝으로 석호가 노래를 딱 멈추고,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대운동장에는 노래가 그치지 않았다. 관객들의 노랫소리가 이어졌다.


  “.... 가지 마세요 나는 지금 울잖아요....”


  잦아 들어가는 관객의 노랫소리에 이어 우리는 강렬한 사운드로 후반부를 달렸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 석호와 내가 마주 보며 무대를 한 번 쿵 뛰는 것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함성과 박수가 터져 나왔다. 석호가 마지막으로 인사 멘트를 날렸다.


  “지금까지 석호 플라이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초대 가수 공연 잘 보세요~~~~”


  민구가 자리에서 일어나고, 철우는 석호가 있는 쪽으로 걸어 나오고, 석호와 나는 뒤로 돌아 케이블을 만지작거렸다. 석호가 나에게 혼잣말인 듯 중얼거렸다.


  “씨.발.... 나올 때가 됐는데....”


  석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관객들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 오~ 그대여 가지마세요 나를 정말 떠나가나요 오~ 그대여 가지마세요 나는 지금 울잖아요 ♬


  석호의 노림수였다. 난 알아요를 맨 마지막에 배치한 것도 이런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서였다. 민구가 웃으며 다시 의자에 앉고, 철우는 재빨리 키보드로 뛰어갔다. 그리고 석호와 나도 제자리를 잡았다. 객석에서 함성과 박수가 터져 나왔다. 

  석호는 앵콜곡을 부르기 위해 물을 마셨다. 앵콜곡은 내가 제안한 곡이었다. 첫 시작을 장엄하게 했으니 마무리도 장엄하게 가야 수미상관 격으로 맞아 떨어진다는 논리였다. 모든 노래를 다 골라낸 석호도 내 의견을 받아들였다.

  목을 축인 석호는 앵콜 고맙다고 인사를 할 만도 했으나 그 어떤 말도 하지 않고 노래를 시작했다. 역시나 내가 제안한 것이었다. 조용한 전주와 함께 석호의 노랫소리가 대운동장에 울려 퍼졌다. 함성을 지르며 박수를 치던 관객들도 삽시간에 입을 다물었다.


  ♬ Ooh you're a holiday such a holiday Ooh you're a holiday such a holiday It's something I thinks worthwhile If the puppet makes you smile If not then you're throwing stones Throwing stones throwing stones.... ♬


  원곡처럼 최대한 반주를 자제하고, 석호의 목소리가 강조되도록 편곡을 했다. 주위의 모든 소음이 사라진 곳에서 석호가 무심하게 툭툭 던지는 듯이 부르는 노랫소리가 맑은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 노래의 끝에 철우와 내가 띱띱띱띱띱띱을 읊조렸다. 무대 아래 관객들은 박수로 박자를 맞추고 우리와 함께 띱띱띱을 읊조렸다.

  온몸에 닭살이 돋았다. 멤버 네 명뿐만이 아니라 모두가 하나가 된 것 같아 전율이 흘러 몸이 부르르 떨렸다. 꼭 사정을 한 뒤의 쾌감과 비슷했다.


  이제 모든 것이 다 끝났으므로 진짜로 케이블을 뽑으려는데, 무대 뒤에 서 있던 총학생회 간부가 우리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저.... 정말 죄송한데요.... 초대 가수가 아직 준비가 안 돼서.... 좀 더 해주시면 안 돼요?”


  수미상관이 딱 떨어진 우리의 공연에 예상치 못한 복병인 셈이었다. 갑과 을의 관계가 바뀐 듯한 모습이었다. 석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총학 간부는 밝게 웃으며 무대 중앙으로 나가 예상치 못한 상황을 관객들에게 알렸다. 그동안 우리는 어떤 노래를 할지 의논했다. 그리고 다시 무대 중앙에서 우리는 신나게 달렸다.

  두 곡을 불렀을 때 총학 간부가 우리에게 딱 한 곡만 더 해 달라고 부탁했다. 우리는 고개를 끄덕이고 마지막 곡을 불렀다. 석호가 부르는 노래를 온몸으로 들으며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전날 내린 비로 공기가 깨끗해졌는지 특별시의 하늘에서도 별이 보였다. 석호의 노랫소리가 맑은 밤하늘에 올라가 별이 되어 박힌 것 같았다. 그때였다. 유독 밝은 별 하나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나는 얼른 소원을 빌었다. 언제나 함께 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이었다.




-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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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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