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여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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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두를 신은 후, 현관의 전신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옷매무시를 다듬고 있는 재훈을 현관 밖에 서 있던 그의 어머니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게 일찍일찍 집에 들어와서 쉬었으면 아침에 편할 것 아니냐. 툭하면 외박에....”
거울 속으로 그렇게 그에게 면박을 주고 있는 그의 어머니를 힐끗 보고나서 그가 몸을 돌렸다.
“그러길레 가까운 교회로 나가면 좋잖아요. 이사온 적이 언제인데 아직까지 그 먼데로....”
그의 말에 앞서서 정원의 계단을 내려가던 그의 어머니가 슬며시 발걸음을 멈추고 그를 뒤돌아 보았다. 그리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늘 노려보았다.
“너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어?”
그리고 다시 몸을 돌려 부지런히 걸음을 옮겨 계단을 내려갔다.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재훈도 다시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김기사, 얼마나 걸릴까?”
”30분이면 도착할 것 같습니다.“
운전석에 앉은 김기사에게서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던 그의 어머니가 문득 고개를 돌려 옆에 앉아있는 재훈을 바라보았다.
”혜원이 며칠 후에 호주에서 돌아온단다.“
”.......“
”이집사님 딸 말야. 3년전에 유학갔던 둘째 딸...“
”네. 알아요.“
오늘 교회에서 이집사님 만나면 의논해보고 가능하면 일찍 날짜 잡을거야. 그런 줄 알고 있어.”
“........”
너 혹시라도 만나는 여자 있으면 일찌감치 정리 해.“
눈을 깔고 고상한 표정을 지으려고 노력하는 듯 했던 그의 어머니가 한순간 그를 노려보았다.
”너 설마..아직도 그 놈을..“
낮은 목소리로 그렇게 작게 말하고, 당황해 하는 재훈의 표정을 한번 훑어보고는 그녀는 다시 김기사 쪽의 눈치를 살폈다.
”따라다니는 여자라도 있으면 이참에 확실하게 선 긋고 주변 정리 잘 해놔. 혜원이네 집에 책 잡히지 않게.“
”.......“
”혜원이가 싫은 건 아니지?“
그렇게 묻는 그녀의 시선을 피해서 그가 얼굴을 떨구고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정장바지의 무릎 부분을 툭툭 털었다. 그리고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혜원이라면 절대로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그가 중, 고교시절에 교회에서 자주 보아왔던 그녀였다.
자신보다 다섯 살이 어린 그녀는 그렇게 초등학교 시절부터 당찬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부모님의 성화에 교회에 억지로 끌려 나오던 그와 달리 그녀는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스스럼없이 입 밖으로 표현해버리곤 했다.
처음엔 그런 그녀가 ’또*라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긴 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자신만의 세계를 세우고 그 속에 자신이 계획한 성을 지어가는 그녀를 보면서 부러운 생각이 들기 시작했었다.
여자는 절대로 밖으로 내보낼수 없다는 구시대적 가부장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던 중견기업의 이사장이던 그녀의 아버지도 결코 그녀를 이길 수 없었고 자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학창시절을 보내던 그녀가 대학에 들어간 후에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하겠다고 영국으로 떠났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리고 어느 새 호주로 건너가 이제 다시 원래 자신의 자리로 돌아오게 된 것이었다.
어짜피 여자를 만나서 결혼이라는 것을 해야만 한다면 그런 그녀가 최고의 선택일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자신만의 삶을 살 줄 아는 여자, 남자에게 매달리지 않고 서로의 공간을 넉넉하게 인정해줄 그런 여자, 그렇게 자신의 삶을 구속하지 않고 서로의 사생활도 인정해 줄수 있는 그런 존재가 혜원이었다.
”너 형우하고는 싸웠니?“
그렇게 딴 생각을 하면서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 그에게 그의 어머니가 물었다.
”싸우긴 왜 싸워요. 애들인가..." 마치 남의 얘기하듯 심드렁하게 그갸 대꾸했다.
”예전엔 그래도 집에도 놀러와서 얼굴도 비치고 하더니 요사이 뜸해서 물어보는거야.“ 여전히 날카로운 목소리로 그녀가 말을 이었다.
”걔네 아버지가 제왕은행 은행장인건 알고 있지? 계속 가깝게 형제처럼 잘 지내.“
”.........“
”오늘 10시 예배 시간에 그렇게 다 온다고 해서 그 시간 맞춘거야. 벨라호텔 사장님도 오늘 뵙게 될테니 깍듯하게 인사드리고.“
”........“
그 여편네는 말하는 게 아주 재수없고 잘난체만 하는게 꼴 보기 싫긴 하지만 그래도 적당히 비위 맞추면서 지내야지 어쩌겠니.”
짜증섞인 말투로 주절거리던 그녀가 말을 멈추고 한숨을 내쉬었다.
“다, 늬 아버지 사업하고, 너! 앞으로 잘 되라고 이러는거야.”
“.......”
“그렇지만 않으면 이 좋은 날씨에 왜 내가 교회에 가겠니. 마음맞는 친구들하고 꽃놀이를 가지...”
그녀가 다시한번 낮은 한숨을 내쉬고는 그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어, 왜? 무슨일로?”
휴대폰을 귀에 바짝 붙이고 주변을 살피면서 재훈이 물었다.
“문자 보낸지가 언젠데 이제 연락을 해?” 오바스러운 현식의 목소리가 들렸다.
“교회라서..... 예배봤거든. 근데 왜?”
“하준이가 너 전화번호 알려달래서....”
“하준이가 누군데?”
“헐....야!” 어이없다는 듯 현식이 그의 귀에대고 소리를 질렀다.
“너, 어젯밤에 걔랑 잤어 안잤어?”
“아..... 걔....”
“그래 걔!. 걔가 나한테 니 전화번호 알려달라고 그러더라.”
“아.... 그래서 설마 가르쳐줬어?”
“가르쳐 줬겠냐? 니 성격 다 아는데? 그냥 모르겠다고 딱 잡아떼기는 했어.”
“잘했어. 고마워.”
“야, 글구, 재미를 봤으면 니가 정리를 해야지. 한두번도 아니고 .....” 목소리 톤을 높여서 마치 무슨 큰 일을 자기 손으로 해결한 듯이 그는 그렇게 생색을 냈다.
“그래..그래.. 미안하게 됐어.”
“내가 손하 볼때마다 양심이 찔리기도 하고...”
그런 현식의 말에 피식하고 재훈은 웃음이 났다.
“저기....” 낮은 한숨을 내쉬면서 재훈이 말을 이었다.
“형 주려고 내가 백화점 상품권을 하나 준비해 놨거든.....”
“뭘...또....” 그런 그의 말에 한순간 현식의 말투가 부드럽게 변해버렸다.
“얼마 되진 않지만 그래도 괜찮은 옷 한 벌은 충분히 사서 입을수 있을거야.”
“야, 내가 뭘 그런걸 바라고 네 뒤처리 해주겠냐? 다..네가.......”
말을 꺼냈지만 그 다음의 할 말을 찾지 못하는 현식의 표정이 눈앞에 보이는 듯 해서 재훈은 피식하고 웃음이 나왔다.
“그래서... 형이 나에게 그렇게 신경써주니까 또 형이 술번개를 할때마다 내가 꼬박꼬박 찾아가는거지.”
그렇게 느긋하게 그가 말했다.
교회 내의 카페에 앉아있던 그의 어머니가 그를 찾아 카페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는 것이 그의 눈에 띄었다.
“그럼, 난 이제 가봐야 해서.....”
“야 근데...”
전화를 끊으려는 재훈의 귀에 다급한 현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
“그.... 상품권은 언제 줄건데?”
연애를 해 본 사람이라면 모두 다 알 것이다.
연애에서 가장 힘든 일이라면, 내가 마음에 드는 사람이 나에게 관심을 갖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사귀면서 마음에 들지 않는 상대방의 셩격이나 행동을 받아들이는 것도 이렇게 힘들지는 않을 것이고, 회사일이나 그 외의 다른 일로 바쁜 와중에도 연인의 얼굴을 보기 위해서 억지로라도 시간을 만드는 것도 그렇게까지는 힘든 일이 아니다.
그렇게 정말로 어려운 일은 사귀고 있는 연인에게 이별을 고하는 것이다.
그렇게 재훈은 손하에게 어떻게 헤어지자고 말을 꺼낼 것인가를 며칠째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다.
그와 사귀는 도중에도 언젠가 이 날이 올 것이라는 것을 모른 적은 없었다. 이렇게 끝이 날 것이라는 것쯤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말을 꺼내서 어떻게 가능한 쉽게 그를 자신에게서 떨어뜨려 단념하도록 할 수있을지 그는 해답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손하와 사귄것도 이제 1,2년도 아니었다.
벌써 6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아니 좀 더 자세하게 말하지만 1개월이 모자라는 7년을 그와 연인이라는 이름으로 지내고 있었다.
이렇게 시간이 빨리 흐를 줄 몰랐다.
그리고 처음과 달리 그와의 관계에 불안과 조바심과 기대와 가슴설렘이 점차 사라지고 난 후, 마치 단물 빠진 껌을 계속, 아직까지 자신이 씹고 있었다는 것을 7년이 가까워지는 이 시기에, 이제 와서야 깨닫게 되었다.
마치 아무 생각없이 주둥이를 놀려 이빨 사이로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는 껌을 자동적으로 씹고 있는 모자란 사람처럼, 그는 아무런 감정이 들지도 않는 손하와 그렇게 오랫동안 연인이란 울타리 안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와 마지막으로 관계를 한 적이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침대에 나란히 누워서도 예전에 보다 만 동영상의 마지막 부분을 하품을 참으면서 간신히 끝내고 잠이 들곤 했었다. 그의 몸이 자신의 곁에 누워있다는 것을 의식은 했던 것일까?
이 정도로 무감각한 관계라면 그냥 편안하게 그만하자고 말을 건넨다고 해도 손하도 덤덤하게 받아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쇠뿔도 단김에 뺀다고 침대 한쪽 끝에 놓여있는 휴대폰에 손을 뻗는 순간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이제 잘 준비 다 했지?” 느긋한 손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대충....”
“그건 그렇고....” 갑작스레 공연히 달착지근한 목소리 톤으로 손하가 말을 이었다.
“이달 24일이 우리 7년 되는 기념일인거 알아?”
“어?....어...” 그가 머쓱한 투로 얼떨떨하게 대답했다.
“그래서 그런데....” 그의 대답에 기쁜 듯 손하가 계속 말을 이어갔다.
“이십삼일하고 이십사일 이틀동안 연차라도 내고 같이 여행이라도 갔다 올까? 자기하고 어디 여행갔다 온 것도 꽤 된 것 같은데...”
“저기...손하야...”
지금 아니면 또 다른 기회가 오기가 힘들 듯 했다. 아니 입 밖으로 말을 꺼내기가 지금 이 순간이 지나면 곱절 이상이나 더 힘들어질 듯 했다.
그래서 단단히 마음을 먹고 재훈이 입을 열었다.
“내가 할 말이 있는데....”
“뭔데?” 기대 가득한 말투로 재훈이 말을 계속하기를 그가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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