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아라 황석호 -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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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평소에도 욕을 잘하는 석호였지만 갑자기 터져 나온 욕설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내 말 끝에 나온 욕설이니 나에게 하는 것이었으므로 나는 더욱 할 말이 없었다.


  “밴드에서 기타가 제일 멋지지 그깟 베이스가 뭐가 멋져?”


  긴 머리카락에 얼굴이 반 넘게 가려져 있었지만 화가 난 표정이 보였다. 표정이 아니더라도 그의 격앙된 목소리가 단단히 성이 났음을 드러내고 있었다.


  “당연히 기타 치는 선배가 제일 멋지죠. 믿을지 모르겠는데.... 사실 선배 때문에 밴드 들어온 건데....”


  나는 사실대로 얘기했다. 황석호 너한테 반해서 동아리 문을 두드렸고, 하는 일도 없으면서 매일 동아리방에 오는 것도 너를 보기 위해서이고, 지금도 너의 두툼한 허벅지와 그 사이에 있는 것에 눈길이 가고 있다는 것을 겉으로 표현하지 않았을 뿐, 내 진심을 모두 담았다.


  “진짜? 그치? 밴드는 기타지?”


  갑자기 달라진 태도에 나는 마음이 놓여 그를 더욱 띄워 올렸다.


  “게다가 선배는 보컬도 하잖아요. 당연히 제일 멋지죠.”


  “하하하하 그래.... 안 그래도 너한테 뭐 좀 가르치려고 했어. 바이엘 좀 쳤다 그래서 키보드 가르칠까 싶었는데, 니가 베이스 하고 싶다니 베이스 가르치면 되지 뭐.”


  방학이 끝날 때까지 나는 석호에게 베이스의 기본 베이스를 배웠다. 정교의 정교한 연주에 비하면 턱도 없었지만 그래도 둥둥둥둥 4개의 현을 뜯으며 차근차근 배우고 연습을 했다. 그것이 신의 한수였다는 것은 방학이 끝나고 밝혀졌다.

  합주를 할 때마다 석호와 정교가 자주 부딪치고, 또 그럴 때마다 나이가 한 살 많다는 것을 앞세우던 정교는 개학을 하고 얼마 있지 않아 밴드 멤버에서 탈퇴했다. 석호뿐만 아니라 다른 멤버들도, 합주를 할 때마다 지각을 하고 꼰대짓을 하는 정교에게 참다 참다 결국 불만을 토했기 때문이었다. 

  정교의 빈자리는 자연스럽게 내가 채웠다. 민구와 철우의 반대에 부딪쳤으나 석호가 던진 한 마디에 모두 말이 없었다.


  “내가 제대로 가르치면 되잖아. 영기 너 열심히 연습할 거지?”


  “네.”


  그리고 석호가 한 마디를 더 보탰다.


  “씨.발, 나이도 같은데 영기 너도 말 까. 같은 멤버잖아.”


  석호의 한 마디에 학번은 상관없이 모두 말을 까고 친구가 되었다. 첫 합주에서 나는 글리산도니 슬랩이니 하는 테크닉은 전혀 구사할 수가 없었으므로 석호가 찍어주는 대로 근음을 퉁기는 수준으로 연주를 했고, 한동안은 근음 셔틀로서의 역할만 충실히 이행했다. 없는 것보다는 나았기에 다른 멤버들도 불만이 없었다. 나의 모자람을 민구가 드럼으로 채우고, 내가 석호에게 가르침을 받으며 발전할 때까지 묵묵히 기다려줬다.

  그러는 동안 고학번 선배들의 강요에 의해 2학기 때 밴드 신입회원을 모집한다는 대자보를 붙였다. 석호는 기준을 한참 낮추어 90학번 1학년 멤버를 선발했다. 나도 거기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걱정을 했으나 석호의 말 한 마디에 나는 89학번 멤버에 그대로 남았고, 가을 축제 정기공연 연습에 본격적으로 돌입했다.


  공연 때 부를 노래가 정해지자마자 석호는 나에게 악보를 건넸다. 나는 석호가 오선지 위에 그려준 음표들을 박자에 맞춰 베이스 줄에 그대로 옮겼다. 내가 베이스의 매력에 빠지게 된 것은 정교가 슬랩 주법으로 연주를 하는 모습에 반해서였는데, 생초보인 나는 꿈도 못 꾸는 것이라 박자를 놓치지 않고 정확한 음을 전달하는 것에만 신경을 썼다.

  그냥 석호에게 배우기만 할 때는 동아리방 구석에 굴러다니는 베이스 기타를 잡고도 별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당당히 밴드의 멤버로서 무대에 올라가야 하는 상황에서는 누가 갖다 놓은 것인지도 모르는 베이스 기타를 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또 석호가 일렉트릭 기타를 매고 다니는 모습도 멋져 보였다. 동아리방에 들어오면 조심스레 케이스에서 기타를 꺼내 연습을 하고, 연습이 끝나 집으로 돌아갈 때면 다시 케이스에 넣고 어깨에 둘러매는 동작 하나하나가 내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석호는 어찌나 애지중지 하며 기타를 다루는지 내가 석호의 기타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나도 석호처럼 내 소유의 베이스 기타를 소중하게 만지작거리며 다루고 싶었다.


  “석호야, 베이스 기타 많이 비싸?”


  “싼 것도 있고 비싼 것도 있고 가격대가 엄청 다양하지. 근데 왜?”


  “베이스 기타 하나 사려고. 앞으로 계속 칠 거고, 공연도 할 건데 내 기타로 하고 싶어서....”


  “오~~~ 드디어....”


  “근데 내가 아무 것도 모르니까....”


  “나랑 같이 가자. 내가 잘 아는 가게도 있고....”


  주말에 악기상가 입구에서 석호를 만났다. 온갖 악기들이 즐비한 상점들을 기웃거리며 걷는 나에 비해 석호는 다른 곳에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직진을 했다. 나는 석호의 뒤꽁무니만 줄줄 따라가 어느 상점으로 들어섰다. 다른 곳에 비해 규모가 상당했다. 잘 아는 가게가 있다더니 그 말이 정말인지 직원으로 보이는 사람도 석호를 반갑게 맞이하고 스스럼없이 대했다.


  “새로 들어왔다는 애가 얘야?”


  “네. 엄청 잘생겼죠? 노래는 좀 하는데 아직 연주는 햇병아리에요.”


  석호는 나를 데리고 베이스 기타가 진열된 곳으로 갔다. 여러 대의 베이스 기타가 나란히 걸려 있었다. 다양한 종류와 색깔에 먼저 눈이 갔지만 내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역시나 가격표였다. 지난여름에 노가다를 하며 벌어놓은 돈의 일부로 사는 것이라 내가 고를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내 시선을 가장 먼저 잡아 끈 것은 석호가 치는 기타의 브랜드에 색깔도 빨간 것이었다. 가격표를 확인했다. 아찔했다. 베이스 기타의 가격이 이럴진대, 일렉트릭 기타의 가격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석호가 자기 기타를 애지중지 아끼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동아리방에 굴러다녀서 내가 잡고 연습을 하는 것도 전시되어 있었다. 가격표를 살펴봤다. 역시나 굴러다닐 만한 가격이었다. 어쩌면 나 같은 생초보에게 딱 알맞은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석호에게 말했듯이 앞으로 계속 연주를 할 것이고, 또 공연도 해야 했으니 내 성에 차지 않았다. 나는 조금 욕심을 내어 그것보다 조금 윗가격대의 것을 몇 개 골라 시연을 해봤다. 대동소이한 소리였다. 그렇다면 석호의 기타와 같은 빨간색으로 하는 것이 좋겠다 생각을 하고 있는데, 석호는 내가 제일 처음 가격표를 봤던 그 베이스를 잡고 시연을 했다. 막귀인 내가 들어도 소리의 차원이 달랐다. 거기에 현란한 연주가 더해졌으니 말할 것도 없었다.


  “영기야, 이거 좋네. 너도 쳐봐.”


  내가 보고 들었으니 쳐보나 마나였다. 오히려 내가 치면 퀄리티가 떨어질 것이 뻔했다.


  “영기야, 이걸로 해.”


  나도 그것으로 하고 싶었다. 소리는 물론이고, 석호의 기타와 같은 모양에 같은 브랜드, 같은 빨간색이었으니 내가 가장 원하는 것이었다. 나는 다시 한 번 가격표를 봤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찔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조금씩 마음이 변해갔다. 내가 원하고, 석호도 원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내 통장의 잔고액수에서 빨간 베이스 기타의 가격을 뺐을 때 나오는 값이 마이너스가 되지 않는다는 것도 내 마음을 변화시킨 이유였다. 문제는 내가 찾아간 현금의 액수였다. 석호가 잘 아는 가게였으니 먼저 내가 찾아간 돈을 지불하고 나머지는 나중에 주겠다고 해도 될 것 같았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뜨고 석호에게 내 결심을 말했다.


  “그럴까? 그게 좋겠지?”


  내 말이 떨어지자마자 석호는 카운터를 향해 베이스 기타를 흔들고 소리쳤다.


  “이걸로 주세요. 전시된 거 말고 새걸로....”


  나는 카운터에서 직원 아저씨가 박스 포장을 벗기고 세팅을 하는 것을 지켜봤다. 내가 처음으로 소유하는 고가의 물건이었다. 애지중지 아낄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직원 아저씨는 조심스레 케이스에 넣고 석호에게 건넸다. 석호는 직접 내 어깨에 둘러매어 주었다. 아저씨가 밝은 미소를 띠고 나에게 말했다.


  “새거 생겼으니까 신나겠네.... 공연 잘하고 다음에 또 봐.”


  “영기야, 우리 빨리 가서 연주해 보자.”


  석호는 내 팔목을 잡고 달리듯이 가게를 빠져 나갔다. 석호의 육중한 체구에서 나오는 힘에 딸려 나도 어쩔 수 없이 딸려 나갔다. 지갑을 꺼내 다 털어내며 찾아온 돈이 이것밖에 없으니 며칠 안으로 나머지를 꼭 드리겠다고 석호를 보증인으로 세워 말을 할 틈도 없었다. 석호는 도망을 치듯 내 팔목을 잡고 가게를 빠져 나와 지하철역까지 뛰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우리를 향해 저것들 잡으라고 소리를 치거나 따라오는 사람이 없었다. 지하철역에 도착해서야 석호는 달리기를 멈추고 숨을 돌렸다. 나도 숨을 헐떡거리며 석호에게 말했다.


  “석호야, 나 계산도 안 했어.”


  석호도 숨을 헐떡거리며 나에게 말했다.


  “그런 거 필요 없어.”


  “그게 무슨 말이야? 계산 안 했으니까 이거 훔친 게 되는 거잖아. 다시 가서 계산하자.”


  “훔치긴 뭘 훔쳐. 아버지가 준 건데....”


  “뭐?”


  “그 가게 우리 아버지가 운영하는 가게야. 아까 그 사람 울아버지고.... 너한테 선물로 주는 거니까 더 이상 묻지마. 대답하기 귀찮아.”


  석호는 선물을 주는 것도 독단적이었다. 내가 이런 고가의 선물을 받을 자격이나 이유가 있는 것인지 헷갈렸지만 선물이라는 단어에는 돈을 지불할 의무가 없다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기에 나는 현실적인 생각으로 석호가 주는 선물을 냉큼 받았다. 언젠가 나도 석호에게 이만큼의 값어치를 가진 선물을 하면 된다고 스스로 합리화했다.

  석호는 지하철을 기다리는 동안 이어폰 하나를 내 귀에 꽂았다. 익숙히 들어서 너무나 잘 알고 있고, 또 내가 무척이나 좋아하는 노래가 흘러나왔다. 고등학교 다니는 3년 동안 하도 굴려서 이제 맛이 가기 시작한 내 마이마이에도 자주 꼽히던 앨범이었다. 지하철을 타고 학교로 가는 내내 나는 석호와 같은 노래를 들었다. 지하철에서 내려 교문을 지나 동아리방으로 올라가는 동안에도 이어폰이 귀에 꽂혀 있었다.


  토요일 오후의 학교는 한산했다. 주위에 사람이 없으니 노래를 따라 부르기에도 좋았다. 게다가 신나는 노래가 흘러나왔으니 가만히 듣기만 하기가 힘들었다. 내가 부르는 노래가 석호의 입에서도 흘러나왔다. 정확히 말하면 노래가 아니었다.


  “Many guys are always turning your round. I'm so tired of their terrible sound. Darling you're so cool to me and I was a fool for you. You didn't want a flower, you wanted honey. You didn't want a lover, you wanted money. You've been telling a lie. I just wanna say Goodbye.”


  이 부분을 자연스럽게 따라 부르려고 무진장 들으면서 읊조렸는데, 석호도 나랑 같았는지 석호의 입에서도 가사가 줄줄줄 새어 나왔다. 신해철의 리듬과 억양과도 똑같았다. 석호와 나는 서로 마주보며 유쾌하게 웃었다. 학생회관 벤치에 앉아 석호가 담배 피우는 모습을 보면서 석호에게 넌지시 물었다.


  “석호야, 너 이런 노래 듣니?”


  사실 밴드의 리더격인 석호가 신해철의 솔로 앨범을 좋아하는 것이 어쩐지 낯설어서였다. 석호는 내 질문이 의외였는지 인상이 조금 찌푸려졌다.


  “이런 노래? 이런 노래가 어때서? 너 좀 전에 영어랩 줄줄줄 따라 부르더니 해철이 형님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당연히 좋아하지. 그러니까 노래도 따라 부르고 계속 듣고 있었던 거 아냐. 근데 이 앨범은 밴드하는 너한테는 좀 안 맞는 거 같아서....”


  “난 또 뭐라고.... 나 엄청 좋아해. 솔직히 너도 좋아하게 할려고 이어폰 꽂아준 건데 너 영어랩하는 거 보고 내가 얼마나 반가웠는데.... 해철이 형님 나랑 같은 고등학교 나왔어. 형님은 나를 모르겠지만 나는 중학생 때부터 알았거든. 부활 콘서트 하면 해철이 형님이 포스터 붙이고 다니고 그랬었는데.... 같은 고등학교 배정 받고 어찌나 좋던지.... 넌 언제부터 좋아했어?”


  “대학가요제 때부터.... 엄청 충격이었어. 재수할 때 무한궤도 앨범 사서 이어폰 귀에 꼽고 잠들기도 했어.... 너 축제 때 앵콜송으로 ‘우리 앞에 생이 끝나갈 때’ 불렀었잖아. 엄청 감동이었어. 재수할 때 힘들면 그 노래 들으면서 위로 받고 그랬었거든.”


  석호는 나를 바라보며 밝은 미소를 지었다. 잘 웃지 않는 석호가 가끔 웃을 때면 그 모습이 너무나 해맑아 내 가슴을 두근대도록 만들었는데, 바로 내 앞에서 그런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내가 신해철을 좋아하는 것이 그 이유인 것 같아 나는 그에게 감사했다.


  “근데 이번 솔로 앨범에는 발라드도 있고 랩도 하고 그러잖아. 그래서 나는 좀 의외다 싶었던 거지. 나야 뭐 그냥 아무 거나 막 들으니까 상관없지만....”


  “나라고 별거냐? 나도 아무 거나 막 들어.... 필 꽂히면 그거만 듣기도 하고.... 근데 난 믿어.”


  “뭘?”


  “해철이 형님 다시 밴드할 거라는 거. 밴드가 그런 거거든. 한 번 빠지면 헤어 나오질 못해. 나는 해철이 형님이 다시 밴드할 거라는 데에.... 음.... 내 자지도 걸 수 있어.”


  나는 석호의 아래쪽을 내려다봤다. 곁눈질로만 보던 것을 합법적으로 볼 수 있는 기회였기에 한참을 바라보다 한 마디를 던졌다.


  “누구랑 내기하는 건데?”


  “너랑.”


  순간적으로 신해철이 밴드를 하지 않아서 석호의 자지가 내 것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하지만 나는 내 마음과는 반대로 말했다. 일부러 인상을 찌푸리고 말투도 거칠게.


  “씨.발 싫어. 내가 미쳤냐, 너랑 자지 걸고 내기하게.... 해철이 형님 당장 밴드했음 좋겠네.”


  석호는 담뱃불을 톡 튕겨내고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빨리 가서 연습하자. 너도 새 베이스 생겼으니까 치고 싶을 거 아냐....”


  동아리방에 들어서서 나도 석호처럼 조심스럽게 베이스 기타를 꺼냈다. 석호만큼 연주는 못해도 내가 소유한 것으로 줄을 뜯는 기분은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기뻤다. 연습을 마치고 석호와 헤어져 기숙사 방에 올라와서도 베이스 기타를 한참 동안 놓지 못했다. 볼수록 신기하고 가슴이 벅찼다. 무엇보다 석호와 같은 브랜드에 빨간색이어서 더욱 그랬다. 앞으로 이것으로 연습을 하고 공연도 한다는 생각에 쉽사리 잠이 들지 않았다. 


  나는 석호에게 선물을 받은 빨간 베이스로, 지난 학기에 봤던 공연에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해 내 나름대로 열심히 연습했다. 수업만 듣고 나머지 시간은 오로지 연습이었다. 베이스는 정말 베이스여서 소리가 두드러지지 않았기에 나는 최대한 실수를 하지 않으려고 열심히 뒤를 받쳐줬다. 멤버들도 나를 배려해서 공연 중간에 멤버를 소개할 때 솔로 연주를 다 같이 생략함으로써 내 기를 살려주기로 합의를 봤다.


  그런데 막상 공연 당일에는 그 합의가 완전히 깨졌다. 가장 먼저 깬 것은 석호였다. 석호가 합의를 깼으니 민구와 철우가 이어서 합의를 깨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일이었다.

  일은 이렇게 진행되었다. 예상되는 앵콜곡을 포함해 총 일곱 곡을 연주하기로 하고, 처음 세 곡을 달린 다음에 멤버를 소개하는 것으로 계획을 짰다. 석호가 맨 먼저 드럼을 치는 민구를 소개했다. 민구가 자리에서 일어나 드럼 스틱을 돌리며 함성을 질렀다. 다음은 키보드를 치는 철우의 소개가 이어졌다. 철우는 집회를 할 때 구호를 외치듯 주먹을 불끈 쥐고 하늘을 향해 쳐올렸다.

  다음은 내 차례였다. 내 이름 이영기가 석호의 입을 통해 나오자마자 나는 아직 새것이라 윤기가 좔좔 흐르는 빨간색 베이스 기타를 머리 위에 올리고 흔들었다. 그때였다. 객석에서 박수와 함께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그 환호성은 톤이 높은 여자들의 목소리였다. 민구와 철우를 소개할 때와는 확연히 다른 박수와 함성이었다.

  마지막으로 석호가 스스로를 소개할 차례였다. 석호는 소리를 높여 자신을 소개했다. 민구와 철우 때만큼의 박수가 터져 나오는가 싶었는데, 갑자기 석호가 예정에 없던 기타 솔로를 연주했다. 고음의 기타 리프가 퍼져 나가다 좌~~~~앙 하고 끝을 맺는가 싶던 차에 철우가 예정에 없던 건반 솔로를 연주했다. 마지막에 건반을 쫘~~~악 훑어내리는가 싶었는데 바로 이어서 드럼 소리가 들렸다. 역시나 예정에 없던 것이었다. 그렇게 하지 않기로 해놓고 다들 합의를 깨는 것으로 다시 합의를 한 듯했다. 나도 뭔가를 해야 하는데, 할 줄 아는 게 없으니 민구의 드럼 소리가 끝나는 것에 맞춰 도레미파솔라시도를 치고 지판 위의 현을 좌~악 훑어 내렸다. 이게 뭐라고, 객석에서 또 톤이 높은 환호성이 터졌다.


  내 왼쪽 옆에 있던 민구가 씨.발 소리와 함께 드럼 스틱을 네 번 치면서 박자를 맞췄고, 그것을 신호로 새로운 곡의 연주가 시작되었다. 석호가 현란한 기타 연주와 신들린 듯한 고음의 가창력으로 한 곡을 뽑았다. 티삼스의 ‘매일매일 기다려’였다.

  다섯 번째의 노래는 내가 부르는 차례였다. 역시나 석호의 배려였다. 혼자서 일곱 곡을 다 하기에 벅차다는 것이 명분이었다. 선곡도 나에게 맡겼다. 나는 대중적인 노래를 골랐다. 멤버들 모두 찬성이었다. 감미로운 곡 하나는 해줘야 관객의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다고 석호가 나를 치켜세웠기에 나는 뛸 듯이 기뻤다. 내가 메인으로 부르고, 석호가 코러스를 넣어주기로 해서 노래가 더욱 빛날 것 같기도 하고, 혹여 내가 잘 못하더라도 석호가 받쳐줄 것이라는 믿음에 마음이 편했다.


  건반 소리가 아름다운 전주가 끝나고 나는 떨리는 가슴을 겨우 겨우 누르면서 첫 소절을 불렀다. 80년대에 학창 시절을 보낸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노래였다. 누가 불렀는지, 노래 제목이 뭔지는 몰라도 첫 소절만 들으면 누구나 다 알았다. 나랑 동갑이었던 김혜수가 나오는 허쉬 초콜렛 광고에서 배경이 된 노래, ‘Hard to say I’m sorry’였다.


https://youtu.be/U1yeC2wmtzw

 Chicago, ‘Hard to say I’m sorry’


  ♬ Everybody needs a little time away. I heard her say from each other ♬


  첫 소절을 부르자마자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정말 경이로운 순간이었다. 국민학교 때 교실에 남아 윤상호 선생님 앞에서만 노래를 부르던 내가 많은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좋은 일이었다. 게다가 손을 흔들며 환호성까지 질러주니 10대 후반에 방황을 하며 지냈던 내 삶을 모두 보상 받는 것 같아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었다. 기를 쓰고 공부를 해서 특별시에 온 것이 너무나 잘한 일인 것 같았다. 정말 특별한 경험이었다. 최대한 연습하던 것만큼만 부르자고 마음을 먹었는데, 관객들의 반응은 내 능력치 이상의 것을 이끌어냈다. 너무나 행복했다.


  내 노래가 끝나고 나서도 나는 혼신의 힘을 다해 석호가 부르는 노래에 베이스를 퉁기며 근음을 전달했다. 롹 사운드가 주는 흥겨움과 석호의 빵빵한 엉덩이에 눈길이 가는 바람에 더욱 흥분이 되어 자지가 부풀어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지구상에 유일한 합법적인 마약이 음악이라더니 그 말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성황리에 공연이 끝이 났다. 악기를 정리하면서 무대 앞으로 다가와 손을 흔드는 사람들에게 밝게 미소를 짓고 손을 흔들었다. 다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그제야 나는 밴드를 하는 이유가 여자를 꼬시기 위함이라는 말을 실감했다. 무대 앞에는 죄다 여자들이었다.


  성황리에 공연을 끝냈으니, 거나한 뒤풀이가 이어질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내가 말을 붙일 사이도 없이 민구와 철우는 동아리방에 들르지도 않고 먼저 가버렸고, 석호와 나는 기타를 매고 동아리방으로 향했다. 우리가 가는 곳으로 몇몇의 여자들이 뒤따라 왔다. 동아리방 앞에도 몇몇의 여자들이 서 있었다.

  석호는 열쇠로 문을 따고 나를 먼저 방으로 들여보낸 다음 자기도 방으로 들어와 다시 문을 잠갔다.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석호는 매고 있던 기타를 내던지다시피 놓고 소파에 드러누웠다. 그토록 애지중지하는 기타를 거칠게 놓는 행동은 석호의 심리를 말해주고 있었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너무나 거슬렸다. 이어지는 노크 소리에 내가 문을 열려고 하자 석호가 소리를 질렀다.


  “열지마.”


  공연이 끝나고 공연장에서 동아리방까지 오는 내내 한 마디도 없던 석호가 내뱉은 첫 마디였다. 나는 석호가 불편했고, 다소 억울한 마음도 있어서 조심스레 한 마디를 던졌다.


  “나도 이만 가려고....”


  “가지마. 그냥 여기 있어.”


  단호한 말투에 나는 몸이 얼어 석호의 말대로 가만히 서 있었다. 석호의 말이 이어졌다.


  “저 씨.발년들 다 갈 때까지 나가지마.”


  짐작은 하고 있었는데, 설마 하던 생각이 석호가 내지른 씨.발년들이라는 말에서 확신이 들었다. 민구와 철우가 그냥 가버린 것도, 석호가 나에게 나가지 말라고 하는 것도 다 나를 향한 질투심이었다. 몇몇 여학생들이 나에게 환호를 좀 질렀다고 삐진 것이 분명했다. 너무 유치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해도 됐다. 밴드를 하는 목적이 여자를 꼬시는 것이었으니, 여자들의 관심이 나에게 쏠리는 것을 보고 화가 날 법도 했다. 공연은 거의 자기네들이 다 했는데, 겨우 근음이나 퉁기고, 노래 하나 겨우 부른 내가 여자들의 환심을 샀으니 억울하기도 할 터였다. 무대 밑에서 손을 흔드는 여자들에게 밝게 웃으며 나도 손을 흔들어준 것이 어쩌면 자기네들을 놀리는 것처럼 보였을 수도 있었다. 여자들이 보이는 그딴 관심들이 나는 하나도 달갑지 않다는 것을 알 리가 없는 그들이었으니 내가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나는 석호와 함께 연습을 하고, 공연장에서 함께 연주를 했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고, 석호에게 수고했다는 말 한 마디와 다음에는 더 열심히 연습해서 더 좋은 공연을 하자고 의기투합을 하는 것이었는데, 결과는 내 바람과는 반대여서 나 역시도 가슴이 아팠다.


  “그냥 갈게....”


  내가 문고리를 잡자마자 석호가 다시 소리를 질렀다.


  “씨.발, 가지 말라고~~~!!!”


  나는 석호의 말을 뒤로 하고 문을 열고 나왔다. 그리고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여자들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기숙사로 올라갔다. 여전히 내 이름을 부르며 따라오는 여자들을 죽이고 싶었다. 정말이지 이딴 여자들은 내 인생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방해하는 족속들 같아서였다.


  그 후로 합주는 없었다. 명분은 공연이 더 이상 없기 때문이었다. 나는 1학년이었지만 다른 멤버들은 모두 2학년이었고, 관례상 2학년을 마치고 군대에 가기 때문에 합주가 의미 없다고 했다.

  그래도 나는 매일 매일 수업이 끝나면 동아리방으로 직행했다. 합주는 없어도 석호가 있기 때문이었다. 어느 정도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들을 뽑아 놓긴 했지만 석호의 눈에는 한참 못 미치는 것이었기에 석호는 닦달을 하며 연습을 시켰다. 거기에 끼어 나도 연습을 했다.

  동아리방 문에는 매일 몇 개씩 허쉬 초콜렛이 항상 붙어 있었다. 누가 봐도 나를 타겟으로 하는 초콜렛이었다. 나는 보고서도 못 본 체 했다. 덕지덕지 붙은 초콜렛을 뜯어 먹은 것은 나랑 학번이 같은 신입 멤버들이었다. 석호도 한두 번 뜯어 먹는 것을 봤다. 모르는 척했다.

  자기네들은 아무리 꼬시려고 해도 안 되는 여자들이 나에게 다가오는 것을 보고 얼마나 배알이 꼴릴까 싶었다. 내 마음은 몰라주고, 지들 마음대로 생각하는 것이 야속하기만 했다. 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간 듯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나는 밴드의 멤버였고, 내가 해야 하는 일이 분명히 있었으므로 나는 수업이 끝나면 동아리방에서 베이스를 붙잡고 기숙사 통금 시간까지 놓지를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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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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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삶보단 지내왔던 기분을 아니 이 글이 더 와닿습니다. 감사해요^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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