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아라 황석호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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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내 친구 석호에 대해 이야기를 하기 전에 먼저 내 어린 시절부터 이야기를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내가 노래를 좋아한 것은 국민학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금은 초등학교가 옳은 말이지만 나는 분명히 국민학교에 입학해서 국민학교를 졸업했고, 졸업앨범에도 국민학교라 적혀 있으므로 나에게는 국민학교가 더 옳은 말일 게다.
졸업을 한 이후로 벌써 4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뒤라 지금은 어떻게 변했는지, 아니 저출산 때문에 학생들이 줄어 학교가 남아 있기나 한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내가 학교를 다니던, 1980년 전후의 시절에는 오르간이 있었고, 이렇게 그때를 회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도 오르간이다. 담임선생님의 오르간 반주에 맞춰 동요를 부르던 음악 시간이 나는 가장 즐거웠다.
요즘은 피아노도 흔해 빠져서 마트에만 가도 디지털 피아노쯤은 쉽게 볼 수 있지만 내가 국민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는 피아노가 있는 집은 부잣집이라는 등식이 성립될 정도였다. 특히나 내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지방 도시 변두리 동네에는 더욱 그러했다.
동네 분위기는 학교에도 적용이 되는 것인지, 내가 다녔던 학교에는 피아노는커녕 오르간마저도 반마다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한 층에 한 대 정도여서, 음악 시간이 되면 쉬는 시간에 키 큰 남학생들 네 명이서 다른 반에 있는 오르간을 우리 반으로 날라야 했었다. 매 학년 그 네 명 안에 꼭 내가 들어있었기에 오르간을 들고 낑낑대며 복도를 오가야 했지만 나는 즐겁기만 했다. 왜? 음악시간이니까. 왜? 마음껏 소리 지르며 노래를 부를 수 있으니까.
노래를 좋아했던 나는 TV 프로그램 중에 ‘누가누가 잘하나’를 가장 좋아했다. 나와 같은 어린이들이 나와서 동요를 부르며 경연을 했던 프로그램이었다. 오디션 프로그램이 범람하는 요즘이지만 그때 당시는 이 프로그램이 일종의 오디션 프로그램인 셈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오디션이라기보다 어린이들의 노래자랑이었다. 전국노래자랑도 그때 그 시절 있긴 했으나 주로 어른들이 그 대상이고, 노래를 부르다 땡~ 하는 것 때문에 웃음기 가득한 프로그램이라 어린 나에게는 별다른 감흥을 불러일으키지를 못했다.
내가 살았던 지방 도시의 지역방송에도 ‘누가누가 잘하나’ 같은 프로그램이 있긴 했으나, 프로그램 제목도 기억이 나지 않은 걸 보면 가끔 시간대가 맞았을 때 보던 것이 아닐까 싶다. 그래도 이 프로그램을 아직도 기억하는 것은 5학년 때 담임선생님 덕분이다. 내가 노래하는 것을 듣고, 이 프로그램이 폐지가 된 것을 무척이나 아쉬워하셨기 때문이다. 내가 4학년 때까지 방송이 되던 프로그램이었다.
노래와 관련된 어린 시절을 회상하다보면 5학년 담임선생님을 빼놓을 수가 없다. 여자선생님이 주를 이뤘던 학교에서 몇 안 되는 남자선생님이었다. 윤상호 선생님. 이제는 나이가 들어서 선생님들 이름을 대부분 잊어버렸지만 아직도 이름까지 기억하는 몇 안 되는 선생님이었다. 잊어버릴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 선생님은 나에게 특별한 존재였으니까.
국민학교 6년을 보내는 동안 내가 유일하게 오르간을 옮기지 않아도 되었던 때가 바로 5학년 때였다. 무슨 이유였지는지는 지금도 정확히 모르겠지만, 우리반에는 학교에서 딱 1대였던 피아노가 있었다. 미루어 짐작해보면, 담임선생님은 합창단을 이끌기도 했으니 그것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어쩌면 그 피아노는 학교 소유가 아니라 선생님 개인 소유의 것일 수도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우리반만 독점한다는 것을 설명하기가 좀 곤란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다른 반들은 오르간을 옮겨가면서 오르간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불렀다면, 내가 5학년일 때, 학교에서 유일하게 우리반은 피아노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불렀다. 교실 앞쪽 창가에 당당히 놓여 있던 까만색 피아노는 담임선생님뿐만 아니라 나도 애지중지하던 물건이었다. 방과 후 청소 시간에 내가 맡은 일이 바로 피아노를 닦는 것이었기에 소중히 다룰 수밖에 없었다.
선생님의 나이를 정확히 알지는 못해도, 대략 짐작으로 그때 당시 마흔 정도 되지 않았나 싶다. 그때 내 눈에 비친 선생님은 친구들의 아버지와 비슷하게 보였다. 결혼을 하지 않고, 학교 근처에 살던 선생님이었다. 내가 살던 집과도 가까워서 자주 마주쳤기에 엄마와 누나들도 알았고, 두세 번은 우리집에 와서 밥도 먹고 갔다. 그만큼 선생님과 나는 친분이 남달랐다. 그것은 바로 노래 때문이었다.
5학년에 올라가서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선생님은 나를 선생님 책상으로 불렀다. 교실 앞쪽에 피아노가 놓여 있었으니 우리반은 교실 뒤쪽에 선생님 책상이 있었다. 아침에 등교를 해서 수업을 하기 직전이었을 것으로 기억한다.
“영기 너, 작년에 부반장이었지?”
“네.”
“우리반 남학생들 중에 작년에 반장이나 부반장했던 애가 너밖에 없어. 아무래도 니가 반장이 될 거 같으니까 반장 되면 잘해야 된다. 알았지?”
“네.”
3학년과 4학년 때 내리 부반장만 했던 나는 내심 반장 욕심이 있었다. 남녀 통틀어서 반장 한 명과 남학생, 여학생 각각 한 명씩 부반장을 하던 시스템에서 남자 부반장은 정말 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여자 부반장은 나름 여학생들의 대표라도 되는 셈이었지만 남자 부반장은 반장에 밀려 그런 것조차 할 수가 없었다.
어린 마음에 3학년 때는 선생님에게 부반장 하기 싫다고 떼를 쓴 적도 있고, 4학년 때는 담임을 잘못 만나 부반장이었던 내가 욕받이에 화풀이 대상이었다. 4학년 때 반장은 동네에서 가장 큰 교회 목사의 아들이었기에 담임이 감히 건드리지 못하고, 아이들이 떠들면 부반장이 통솔을 못해서 그렇다고 내가 뺨을 맞았다. 씨.발.... 4학년 때 담임 송 선생, 너 잘 살아 있니?
아~ 감정을 추스르고.... 아무튼 이런저런 이유로 나는 반장 욕심이 강했다. 혼자 개고생을 하며 나를 포함해 5명이나 되는 자식들을 키워야 했던 엄마에게 반장 임명장을 안겨 주고 싶은 마음도 컸다.
그러나 선생님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고, 나의 바람도 처참히 무너졌다. 남자 셋, 여자 셋이 후보로 나갔던 반장 선거에서 나는 2등을 했다. 1등은 우리반에서 축구를 가장 잘하는 명수였다. 중국집을 운영하던 명수네 집에서 짜장면을 돌렸다는 소문이 사실인 것 같았다. 내가 받은 표는 다른 학생들보다 약간 많았을 뿐, 표차가 제법 되었다.
결국 나는 또 부반장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4학년 때 목사 아들 성택이가 반장이 되고, 나머지 남자 둘이 부반장을 놓고 경쟁을 했을 때 내가 몰표를 받아 부반장으로 당선이 되었기에 나는 당연히 쉽게 부반장이 될 줄 알았다. 하지만 이것도 내 망상에 불과한 것이었다.
나는 아직도 그때의 기억이 생생하다. 부반장 선거에서 내가 받은 득표수는 36표였다. 지금은 이름이 기억나지 않지만 나랑 경쟁을 했던 다른 학생이 받은 득표수는 35표. 35 대 35에서 마지막 한 표에 내 이름 이영기가 적혀 있었다.
선거가 끝나고, 나와 같은 부반장이 된 선화에게 내가 여학생들의 몰표를 받았다는 말을 들었다. 그 말은 곧 절대다수의 남학생들에게서 표를 못 받았다는 말이었다. 남학생 수가 여학생보다 몇 명이 더 많았기에 남학생들 중 나에게 표를 던진 사람은 고작 한 손으로 꼽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선거 당시에는 그 이유를 도무지 알 수가 없었는데, 며칠이 지나고 난 뒤 나를 찍었다고 당당히 밝힌 친구 귀룡이에게서 그 이유를 들었다. 이유는 너무나 간단했다. 하지만 나를 너무나 아프게 했다. 귀룡이가 밝힌 이유는 이러했다.
“니가 너무 여자 같아서.”
씨.발.... 인정했다. 7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편모슬하에 네 명의 누나와 함께 살았던 나는 여성스러운 면이 많을 수밖에 없었을 터였다. 여학생들보다 손이 커서 공기놀이도 내가 더 잘했고, 키도 큰데다 점프력도 좋았기에 고난이도의 고무줄놀이도 내가 월등했다. 그렇다고 공을 가지고 노는 걸 싫어하지는 않았는데, 발로 하는 것은 젬병이어서 축구를 비롯해 발야구는 한 마디로 쥐약이었다.
남녀가 유별하던 80년대 초반의 국민학교 교실에서 같은 성별의 사람들에게 여자 같다는 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친구가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아무래도 좋았다. 대놓고 나를 지지해주는 귀룡이는 나랑 가장 친한 친구였고, 귀룡이 집 책장에 꽂혀 있는, 위인전을 비롯한 그 많은 아동용 전집들 또한 내 친구가 되었으니까.
5학년에 올라가서도 제법 시간이 흐른 어느 날, 운동장 화단에 심어둔 벚나무에 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던 기억이 남아 있으니 4월 초의 봄날이었을 것이다. 선생님은 음악 시간도 아닌데 피아노 앞에 앉았다. 그리고 우리반 모두에게 노래를 시켰다.
도시 변두리 개발제한구역으로 묶인 동네라 학교 하나를 세우는 데에도 힘이 들었던 탓인지 제법 인구가 많은 동네였음에도 국민학교가 두 곳밖에 없어서 우리반 학생수는 투표결과로도 알 수 있듯이 71명이었다. 베이비붐 세대이기에 윗학년보다 훨씬 많아 3학년 때까지 오전반 오후반으로 나눠서 수업을 해야 했다. 이렇게 많은 학생들이 한 명씩 피아노 옆에 서서 노래를 불렀으니 시간도 상당히 오래 걸렸다.
동요 한 곡에 2분을 잡고, 산술적으로만 계산을 해도 71명의 학생들이 모두 노래를 부르는 데에 걸리는 시간은 142분. 수업시간이 45분이었으니 3교시를 할애해야 하는 시간이었다. 선생님은 잘 부르는 학생은 다시 부르게 하고, 교무수첩에 무언가를 적기도 했으니 점심시간을 넘겨 하루 온종일 노래만 부른 날이었다.
1분단부터 한 명씩 나가서 노래를 불렀다. 선생님은 처음에 누구나 다 아는 동요인 ‘고향의 봄’을 부르게 했다가, 같은 노래만 계속 반복해서 듣는 것이 지겨웠는지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동요 몇 개를 선정해 놓고 골라서 부르도록 했다. 선생님은 아이들이 소곤소곤 잡담을 하며 놀아도 개의치 않고 노래를 부르는 학생에게만 집중을 했다. 처음에는 나도 친구들이 노래를 부르는 것을 열심히 들으며 마음속으로 따라 부르면서 어떤 노래를 부를 것인지 고민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나는 점점 지쳐갔다. 나는 4분단 맨 뒷자리에 앉아 있었으니 내 차례는 맨 뒤였기 때문이었다.
그날 수업의 마지막 시간이 되어서야 내 차례가 돌아왔다. 그것도 수업 시간이 얼마 남아 있지 않은 때였다. 기다림에 적잖이 지쳐 있던 나는 마지막으로 앞으로 나가 피아노 옆에 서서 노래를 불렀다. ‘고향의 봄’인지 ‘둥근달’인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내가 노래를 부르고 났을 때, 선생님은 나에게 다른 노래를 한 번 더 불러보라고 시켰고, 나는 한 번 더 불렀다. 선생님은 아무 말 없이 내 얼굴만 물끄러미 바라봤다. 나는 부끄럽기도 하고, 선생님의 시선이 부담스럽기도 해서 고개를 숙였는데, 마침 모든 수업이 끝나는 종이 울렸다.
청소 당번도 아니었던 나는 선생님의 지시로 집에도 못가고 교실에 남았다. 청소검사가 끝나고 다른 학생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간 이후에도 계속 교실에 남아 있었다. 피아노 의자에 앉은 선생님의 옆이었다.
“영기 니가 제일 좋아하는 노래 불러봐.”
나는 어린이 노래자랑 프로그램을 보면서 꽂혔던 동요 하나를 불렀다. ‘아빠생각’이었다. 내가 무슨 노래를 부를 줄 모르는 선생님은 반주를 할 수 없었을 터이므로 나는 무반주로 노래를 불렀다. 노래자랑에 나온 어린이처럼 두 손을 곱게 모아 잡고, 꾀꼬리처럼 입을 벌리며 노래를 했다. 2절을 부를 때에는 선생님도 아는 노래였는지 피아노를 쳤고, 나는 피아노 반주에 맞춰서 더욱 크게 열심히 불렀다.
(동요 - 아빠생각)
“영기야....”
“네?”
“짜식이.... 많이 그리운가 보네....”
나는 그때 노래가 사람을 울릴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내 볼을 살짝 꼬집는 선생님의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우람한 덩치에 얼굴도 곰처럼 우락부락하게 생긴 선생님이 우는 모습은 어린 나에게 상당히 낯설었다. 왜 우는지 그때는 알 수가 없었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선생님은 아버지가 없는 내가 아빠를 그리워한 나머지 ‘아빠생각’을 불렀던 것으로 생각한 것 같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아버지 없이 지낸 지 5년이 넘었기에 너무나 익숙해져서 전혀 생각을 하지 않고 지냈었다. 하지만 선생님은 내가 부르는 노래 하나에도 스토리를 가미해 들었지 않나 싶다. 그만큼 선생님은 감성적인 사람이었다. 선생님은 계속 나에게 노래를 시켰고, 나는 아빠생각 말고도 선생님의 반주에 맞춰 동요를 더 불렀다.
“너 가요는 부를 줄 아는 거 없니?”
문득 떠오르는 노래가 있었다. TV에도 많이 나왔고, 큰누나가 하도 많이 들어서 귀에 못이 박힌 노래였다. 백영규의 ‘슬픈 계절에 만나요’였다.
그렇게 동요에 가요까지 몇 곡을 부르고 나서야 선생님은 나뿐만 아니라 학생들에게 노래를 시킨 이유를 말했다.
“다음 달에 합창대회가 있거든. 합창단을 꾸려야 해서 말야. 너 내일도 남아서 나 좀 도와줘.”
나는 다음날뿐만이 아니라 그 주 내내 남아서 선생님을 도와야 했다. 별 것은 아니었다. 수업이 모두 끝나고 다른 반에서 노래를 좀 한다는 학생들이 우리 교실에 모이면 선생님은 한 명씩 노래를 시켰고, 노래가 끝나면 나는 선생님이 불러주는 점수를 기록했다. 마지막날에는 6학년생들이 우리 교실에 모였는데, 죄다 작년에 합창단을 했던 학생들이었다. 나는 또다시 점수를 기록해야 하는가 했으나, 선생님은 남학생들만 노래를 시켰다. 3명이었던 것으로 기억이 되는데, 한 명만 남기고 나머지 두 학생은 돌려보냈다. 아마 변성기가 시작되어서 목소리가 변했기 때문일 것이었다.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작년처럼 방과 후에 남아서 합창 연습을 할 것이라 통보를 하고 돌려보낸 뒤 나와 함께 수첩에 적힌 점수를 보며 5학년 학생들을 추려냈다. 그리고 한 학년이 올라간 기존의 합창단원에 새로 추가된 5학년생들이 모여 합창 연습을 시작했다. 한 반 정도 되는 합창단원에 남학생이라고는 목소리가 변하지 않은 6학년 형 하나와 나를 포함한 5학년 두 명이었다. 남자들은 모두 알토 파트에 배정이 되어서 한 달이 넘는 동안 주말에도 학교에 나와 연습을 했다.
연습을 한 곡은 두 곡으로, ‘흰구름 꽃구름 시원한 바람에’로 시작하는 ‘목장의 노래’와 ‘할머니도 안경 쓰고 내동생도 안경 쓰고’로 시작하는 ‘일학년’이었다. 목장의 노래는 지정곡이었고, 일학년은 자유곡이었다. 처음 일주일은 노래를 배우고, 각 파트별로 모여서 따로 연습을 하기도 했는데, 그때는 이미 대회에 나간 경력이 있는 6학년들이 지도를 했다.
나는 연습을 하는 동안 무척이나 행복했다. 일주일에 몇 번 들지 않는 음악 시간을 그렇게나 좋아하던 나에게 매일이 음악 시간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제창이 아닌 합창이었으므로 소리가 어우러지는 화음의 세계는 나를 흥분에 빠뜨리기에 충분했다. 연습을 하는 중에 잠시 쉴 때 선생님이 우리에게 건네주는 사탕의 달콤함도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아 있다.
그냥 노래만 하는 것이 아니라 율동을 하면서 노래를 해야 했기에 대회를 3주 정도 남겨두고서는 율동 연습도 추가 되었다. 운동회 때 매스게임을 담당하는 선생님을 따라 간단한 율동을 배우고, 거기에 맞춰 노래를 불렀다.
이경규가 이끌던 예능 프로그램 ‘남자의 자격’ 중에 박칼린이 나와 합창에 도전하는 편을 빼놓지 않고 본방 사수를 한 것도 5학년 때 율동을 하며 합창을 하던 추억이 되살아나서였다. DVD까지 사서 몇 번이고 돌려보곤 했으니 합창 연습을 하던 때는 내 인생에 있어서 너무나 행복했던 순간들이었다.
그런데 합창 대회를 일주일 정도 남겨둔 때였던 것으로 기억이 되는데, 나 때문에 일이 하나 터졌다. 나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 내가 수습을 하긴 했으나, 인자하고 너그럽기만 하던 선생님의 얼굴이 순식간에 먹이를 눈앞에 둔 것 같은 포악한 곰으로 변하고, 화가 난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교실을 울린 사건이었다.
한창 연습을 하고 있는데, 교실 미닫이문이 열리고, 선생님 한 사람이 들어왔다. 문이 열리는 쾅! 소리는 너무나 무지막지해서 아름다운 선율이 흐르던 교실을 순식간에 조용하게 만들었다. 담임선생님이 화가 난 얼굴로 문 앞에 서 있는 선생님을 향해 소리쳤다.
“노크도 없이 이게 무슨 짓입니까?”
다른 선생님도 만만치가 않았다. 여자 선생님 특유의 높고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교실을 울렸다.
“노크를 몇 번이나 해도 무시했잖아요. 선생님이 못 들어 놓고 왜 나한테 화를 내요?”
“그래도 그렇지, 이게 무슨 경웁니까?”
“선생님이랑 싸울 생각 없어요. 다 필요 없고....”
여자 선생님은 앞에서 지휘를 하던 담임선생님을 무시하고, 우리들 쪽을 향해서 말했다.
“이영기 이리 나와.”
나는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다른 반 선생님이 나를 찾을 이유가 전혀 없는데, 갑자기 내 이름이 불려서였다. 내 표정을 본 담임선생님은 나를 대신해서 선생님께 물었다.
“영기는 왜요?”
“이번 교육청 주최 백일장에 영기가 학교 대표로 나가게 됐어요. 글 쓰는 거 연습시켜야 돼요.”
“그걸 꼭 지금 해야 됩니까? 지금 합창 연습하는 거 안 보여요?”
“일주일밖에 안 남아서 급하단 말이에요.”
“백일장이 언젠데요?”
“다음 주 목요일이요.”
합창 대회랑 겹치는 날이었다. 5월은 어린이날이 끼어 있어서 이런저런 행사들이 몰려 있었으니 겹칠 만했다. 나도 그렇고, 담임선생님도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담임선생님의 입에서 단호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고성이 오가는 설전이 벌어졌다.
“안 됩니다.”
“왜 안 돼요?”
“영기 그날 합창대회 나가야 됩니다.”
“안 돼요. 백일장 나가야 돼요.”
“제가 먼저 영기 찜해서 한 달 넘게 연습하고 있는데, 지금에 와서 뭐라는 겁니까? 절대 안 됩니다.”
“이봐요, 윤상호 선생님. 영기가 학교 대표라 그랬잖아요. 백일장은 영기 혼자 나가는 거에요. 개인전이라구요. 합창단원 중에 영기 하나 빠진다고 표나 나겠어요?”
이 말이 담임선생님을 열 받게 만든 것 같았다. 곰의 포효 소리가 터졌다.
“표 나요. 그것도 많이 납니다.”
이것으로 그날의 연습은 끝이었다. 선생님은 학생들을 모두 돌려보내고, 교실에는 담임선생님과 여자선생님 그리고 나, 이렇게 세 사람만 남았다.
여자선생님의 말인즉슨, 어린이날 기념으로 실시한 교내 백일장에서 내가 쓴 동시가 장원으로 뽑혔고, 학년별로 2명씩 참가하는 교육청 주최 백일장에서 내가 수상 가능성이 가장 높으니 꼭 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교내 백일장에서 장원으로 뽑힌 것은 상 쪼가리 하나를 받은 적이 있으니 나도 아는 사실이었는데, 교육청 백일장은 나도 처음 듣는 얘기라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담임선생님과 여자선생님은 옥신각신, 설왕설래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말들이 오고갔다.
내가 결정을 해야 하는 일이었다. 합창대회와 백일장 중에 나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합창을 택했다. 여자선생님의 말처럼 백일장은 개인전이니까 내가 좀 더 돋보이는 점은 있었다. 하지만 그건 선생님의 생각일 뿐 나는 그다지 돋보이고 싶지 않았다. 교내 백일장도 어쩌다 보니 얻어걸린 것이었을 뿐, 또다시 시를 써서 상을 받고 싶은 욕심도 없었다. 확실히 상을 받는다면 또 모르는 일이지만 그렇다는 보장도 없었기에 그다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억지로 할 필요는 없을 듯 했다. 그러나 합창은 달랐다. 연습 그 자체가 나에게는 너무나 행복한 일이었으므로 애초에 고민이 필요 없는 일이었다.
“선생님....”
내가 부르는 소리에 두 선생님이 모두 나를 쳐다봤다.
“저.... 합창할래요.”
담임선생님은 환호성을 질렀고, 여자선생님은 나를 붙잡고 이런저런 말들을 주억거렸지만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며 여자선생님이 교실에서 나가자마자 담임선생님은 나를 끌어안고 내 이마에 뽀뽀를 했다. 선생님은 기쁨을 주체할 수가 없었는지 피아노 건반을 두들기며 노래를 불렀다. 음악 시간에 선생님이 노래하는 것을 듣기는 했었으나 동요가 아닌 노래는 처음 듣는 것이었다. 나를 무릎 위에 앉히고 피아노를 치면서 내가 알 수 없는 노래를 불렀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선생님이 불렀던 노래들은 이태리 가곡이었지 싶다. 그리고 나중에 더 커서, 파바로티가 노래하는 것을 처음 들었을 때 내 머릿속에 선생님이 바로 떠오른 걸 보면 선생님은 전형적인 테너임에 틀림없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선생님과 함께 우리 합창단원은 대회에 참가했다. 하지만 수상은 하지 못했다. 간혹 실망을 하는 학생들이 보이기도 했지만 나는 그렇지가 않았다. 모여서 대회 준비를 하느라 연습을 하던 그 자체가 좋았기 때문이었다. 선생님의 표정도 그리 어둡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이 되니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지 않았나 싶다.
합창대회가 끝이 났어도 나는 자주 남아서 선생님과 함께 노래를 불렀다. 나 혼자만이 아니라 선생님도 불렀고, 음악 교과서에 나오지 않은 여러 동요들도 배우고 불렀다.
“영기 너 지금 보니까 손가락이 기네. 피아노 잘 칠 거 같은데....”
그렇게 해서 선생님에게 피아노도 배웠다. 오른손으로 치고, 왼손으로 치고, 두 손을 함께 칠 때 왼손이 자꾸만 오른손을 따라 가서 힘들긴 했지만 계속 하다 보니 따로 놀게 되는 경지까지 올랐다. 하지만 손가락이 길어서 잘 칠 것 같다는 선생님의 예상과는 달리 나는 그러지를 못했다. 바이엘로 시작한 피아노 배우기는 5학년이 끝날 때까지 바이엘을 채 끝내지 못했다. 악기는 연습이 생명인데, 선생님과 함께 하는 시간이 아니면 연습을 할 수가 없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선생님도 내 상황을 잘 알았던지라 조급해 하지 않았다. 내가 피아노를 치는 모습을 보는 것 자체가 즐거운 듯 했다. 며칠에 걸쳐 한 페이지가 넘어가면 물개박수를 치고는 했으니까. 나도 선생님의 허벅지에 올라앉아 피아노를 치는 것이 노래를 부르는 것만큼이나 즐거웠다.
내가 반에서 키가 큰 축에 속하긴 했으나 겨우 5학년이 커봐야 선생님에 비하면 턱없이 작았기에 피아노 의자에 앉으면 높이가 맞지 않았다. 선생님은 여자선생님과 다투던 그날처럼 나를 허벅지 위에 앉히고 피아노를 가르쳤다. 페달을 밟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나를 위한 배려이기도 했다.
그렇게 나는 방과 후에 선생님의 배려로 피아노도 배우고, 선생님과 노래를 부르며 즐거운 날들을 이어갔다. 싱그러운 5월이 지나 6월에 접어들면서 나는 그 당시 어린이답게 아주 짧은 반바지에 무릎 아래까지 오는 양말을 신고 등교를 했고, 선생님의 옷차림도 한결 가벼워졌다. 교실에 에어컨은커녕 선풍기도 없던 그 시절, 아이들로 가득 찬 갑갑한 교실에서 수업을 할 때 유독 땀을 많이 흘리던 선생님은 보기에도 시원한 모시적삼을 입고 출근을 하는 적이 많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수업이 모두 끝난 뒤, 학교에서 집이 가까웠던 나는 가방을 집에 놔두고 다시 학교로 돌아와 내가 맡고 있던 피아노를 깨끗이 닦았다. 피아노를 닦는 것 말고, 남자 부반장으로서 내가 맡은 일이 하나 더 있었는데, 바로 청소 검사였다. 내가 이문열의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 나오는 엄석대도 아니었으니 말이 검사였을 뿐, 그냥 청소를 끝낸 급우들에게 잘 가라, 내일 보자는 인사를 하는 것이 다였다. 그리고 선생님이 다시 교실로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나의 일상이었다.
그날도 피아노 의자에 앉아 선생님을 기다렸다. 문이 열리고 선생님이 들어왔다. 그런데 수업을 할 때와는 조금 다른 모습이었다. 하얀 모시적삼을 입은 모습은 같았지만 윗도리뿐만 아니라 아랫도리도 모시적삼이었다. 방금 씻고 온 듯 약간 곱슬거리는 머리카락도 촉촉이 젖어 있었다. 창으로 들어오는 오후 4시의 햇빛은 선생님의 하얀 모시적삼을 더욱 빛나게 만들었다. 눈이 부셨다. 나를 향해 웃는 선생님의 미소도 햇살만큼이나 밝았다. 나는 선생님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나와는 조금 다른 선생님의 모습을 처음 봤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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