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의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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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의 02
역시, 다시 돌아왔군요.
붉은 옷을 입은 여인이 말했다.
당신은 아까 그 주문을 외던...
준이씨가 말한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당신은 지금 악령에게 빙의되어 있어요. 그 악령은 당신에게 일탈적인 행동을 하게 할 거예요. 점차 자신의 존재를 키워나갈 악령은 당신에게 점점 더 악한 행동을 하게 될 거고, 당신은 결국 악령에게 송두리째 자신을 빼앗길 거예요. 내가 그래서 그 종을 손대지 말라고 한 거예요.
붉은 옷을 입은 여인이 말한다. 그때 준이씨는 몇 시간 전 벌어진 일들이 한순간 스쳐 지나간다.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자세한 것들은 그냥 스쳐 지나갔지만 이젠 하나하나 퍼즐이 맞춰지듯 의문이 풀리기 시작한다.
그럼 나 자신을 다시 찾을 방법이 있을까요? 그런데 내가 당신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난 준이이라고 해요.
준이씨가 말한다.
나는 지상계와 영혼계를 이어주는 영매, 미래라고 해요. 지상계의 악령들을 다시 지옥이나 천당으로 소환하는 일을 하죠. 당신에게 빙의한 악력은 내가 지난 수년간 쫓아다니던 악령이에요. 워낙에 힘이 세서 그간 계속 놓쳤는데 이번 빙의 때는 제가 그 순간에 발견해서 주문을 걸어놨기 때문에 악령이 당분간은 크게 힘을 쓰지 못할 거예요. 지금은 억제되어 있어서 원래의 파괴적인 악행은 제어되어 있지만, 그 효력이 곧바로 사라질 수 있으니 빨리 서둘러야 해요.
미래가 말한다.
어떻게 하면 그 악령을 지옥으로 소환할 수 있죠.
준이이 말한다.
원래 악령은 지상에 있을 때 어떤 원한이나 못다 이룬 염원이 있을 때 발생해요. 그러니 악령을 만든 원인을 소진하면 지옥으로 소환이 가능해지죠.
미래가 말한다. 미래가 말하는 악령의 전생 염원은 다음과 같다.
시대는 조선 말기, 19세기 초 경성의 중인 집안 무남독녀로 태어난 사람이 있다. 그녀의 이름은 진숙. 어릴 적부터 귀엽고 예쁘장한 외모로 주변 사람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그런 그녀는 신분의 장벽에 걸려 좌절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역관으로 당시 중국과의 교역을 돕고 있었다. 교역이 활발해지고 그 역시 지분을 가지고 무역을 도왔다. 소위 그가 관련한 무역이 대박을 터트리자 그의 가세는 날로 부유해졌고, 경성 내에서 재물로는 남 부러운 것이 없었다. 그래서 그의 무남독녀 진숙에게 그에 걸맞은 연분(緣分)을 찾아주기 위해 진숙의 아버지는 필요하다고 느끼지 않던 양반 신분을 거금을 주고 샀고, 진숙을 양반과 결혼시키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하지만 신분의 벽은 진숙의 아버지가 생각한 것보다 더 높았다. 지체 높은 양반집 자제들은 재물에 관심이 없는 경우는 물론이고, 가세가 기울었으나 괜찮은 집안의 자제들은 격이 떨어진다고 한사코 진숙과의 결혼에 퇴짜를 놓았다. 혼기를 놓치지 않기 위해 사방팔방으로 알아보던 중, 우연히 진숙은 동네 어귀에 있는 가세가 기울었지만, 정승판서를 배출한 집안의 둘째 아들과 눈을 맞춘다. 둘은 사랑에 빠졌고, 그만 결혼도 하기 전, 진숙은 자신의 순정을 바친다. 하룻밤을 보낸 두 사람은 그 이후로 다른 길을 걷기 시작했다. 둘째 아들은 정부에서 시행한 과거에 합격하여 관료가 되고, 진숙의 마을로 장원급제를 알리는 가마를 타고 행차했으며, 곧 주변의 부유한 양반 규수와 혼례를 치른다. 이런 내내 진숙은 그 둘째 아들로부터 외면을 당했고, 진숙은 새로 결혼하는 여인에 대한 질투와 시기심, 자신이 느끼는 신분적 한계, 여성으로서의 한계를 느끼며 둘째 아들이 혼례를 치르는 그 날 밤, 혼례가 치러진 집의 안마당에 서 있던 느티나무에 목을 매달고 죽는다.
내 이렇게 목숨을 끊지만 내 영혼만은 너를 저주하며 꼭 네 놈에게 복수하러 다시 돌아온다.
목을 매달기 전 진숙은 마지막 유서를 남기고 세상을 하직한다. 그 영혼이 천지를 떠돌다 어느 악령에게 굴복한 무녀의 종에 스며들었고, 무녀의 영력과 원혼의 염원이 결합한 종은 수백 년간 지상에서 온갖 악행을 저지른다.
그렇다면 그 원혼의 영혼결혼식을 시켜주면 어떨까요?
준이이 말한다.
오늘 들어본 말 중에 가장 똑똑한 말이네요.
미래가 말한다.
그럼 누가 결혼식을 하면 좋을까요?
준이이 말한다.
물론 그건 당신이지, 준이.
미래가 말한다.
잘생겼지, 성실하지, 마음도 착하지. 나라도 자네라면 결혼하고 싶겠는데. 내가 아니면 다른 사람이라도 결혼하라고 추천하겠어. 왜 그런 거 있잖아요. 누구한테 소개해주고 싶어지는 사람. 호호.
준이은 몹시 당황한다.
나이가 수백 살은 된 원혼과의 결혼식? 난 아직 총각인데.
준이이 말한다.
영혼결혼식을 하는데 그냥 편의점에서 생수 하나 사다가 하늘 보고 결혼한다고 말하면 끝인 줄 알았다. 적어도 그것이 준이에게는 영혼결혼식으로 충분한 의식이었다. 그런데 미래의 생각은 달랐다. 이것은 수백 년이 된 원혼의 사혼식(死婚式)이었고, 다 절차와 법도가 있어서 그에 맞추지 않으면 원혼이 다시 돌아온다는 것이다. 아무리 짧게 준비해도 하루 전에는 모두 준비할 수 없고 그러니 준이은 그 준비가 끝나는 동안 원혼에 빙의되어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낙담한 준이은 터벅터벅 집으로 향한다.
내일이면 모쪼록 이 모든 일을 과거지사로 묻어두고 지낼 수 있겠지.
준이은 속으로 자신에게 되뇌었다. 그때 저 멀리서 술에 취한 한 중년 남자가 게슴츠레한 눈을 뜨고 준이에게 다가왔다.
이봐, 여기 중앙로가 어디야?
술에 취한 남자가 묻는다. 그는 준이에게 아주 가까이 다가오더니 풀썩 준이에게 미끄러져 몸을 기댄다. 그러더니 갑자기 몸을 지탱하려는 듯 준이을 몸을 잡는데 하필 그것이 준이의 가슴이었다.
부드럽게 준이의 가슴을 잡고 쓸어내리며 남자는 술에 취한 채 만족한 웃음을 짓는다.
가슴이 참 감촉이 좋군.
술 취한 남자가 말한다.
많이 취하셨나 봐요. 취향이 독특하시네요.
준이이 말한다.
참 예쁘다. 긴 생머리가 참고와.
술 취한 남자가 말한다.
준이은 화들짝 놀라 남자를 뿌리친다. 그러고 보니 미래의 말이 떠올랐다. 가끔 준이을 원혼의 모습으로 볼 수 있다는 말. 물질계(物質界)와 영적 세계를 인간은 가끔 넘나들 수 있다고 그녀는 말했다. 그래서 영적 세계를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준이은 그에게 빙의된 진숙의 모습이 투영되지 준이이 보이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이었다. 준이은 이 술 취한 남자가 취기에 자신의 정신을 놓은 것이라 생각을 한다.
이거 놓으세요. 전 남자라고요.
준이이 말한다.
무슨 소리야. 이렇게 예쁜데.
술 취한 남자는 긴 팔을 휘청대면서 그 손을 준이의 엉덩이에 대고는 톡톡 쓰다듬는다.
엉덩이가 참 탐스럽기도 하지. 내가 밤새 보듬어줄까?
술 취한 남자가 다시 말한다.
이것 보세요. 요즘이 어느 세상이라고 여자를 함부로 대해요. 유치장에서 곰탕 한번 먹어봐야 정신을 차리려나. 얼른 꺼져요.
준이은 자신도 모르게 앙칼진 소리를 내며 그 남자의 뺨을 때린다. 그것도 모자란 듯 갑자기 그를 발길질하며 혼구멍을 낸다.
아니, 이러면 어떻게 해. 술 취한 사람이잖아.
발길질하면서 준이이 당황한 목소리로 말한다.
뭐긴 뭐야. 이런 사람은 이렇게 한번 치도곤을 당해야 정신을 차려서 다시는 이런 짓을 안 한다고. 술 취한 것이 뭐 정승판서 벼슬을 하는 것도 아니고, 이번 기회에 따끔하게 정신을 차리게 해줘야지.
준이의 몸에 빙의된 진숙이 준이의 입으로 말한다.
어찌 되었든 진숙의 바람대로 남자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왜냐하면 진숙이 준이을 통해 흠씬 두들겨 패주었기 때문에 그 남자는 기절을 한다. 얼굴과 온몸에는 피멍이 들고 술까지 취해서 이 겨울에 아무도 없는 길거리 한복판에서 널브러져 있다.
이 녀석을 어떻게 하지? 옳지. 저기 개천에다가 빠트려서 물에 흘려보내야지. 한 번 정신이 확 들게.
진숙이 말한다.
무슨 소리야. 그러다 이 남자가 죽으면 어떻게 해?
준이이 말한다. 두 사람 사이의 대화는 사실 준이이 모두 하고 있어서 이것은 마치 정신 분열증을 앓고 있는 사람의 증상 발현처럼 보였다.
죽어도 싸, 이런 사람은. 내 가슴을 만지고도 추후의 자책감도 없는 녀석이야.
진숙이 말한다.
내 가슴이야. 제 것이라고 함부로 말하지만.
준이이 말한다.
그건 내 가슴이기도 하다고.
진숙이 말한다. 준이은 진숙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 둘이 옥신각신하다가 그 술 취한 남자는 개천의 물에 빠져서 하부적대다가 결국 정신을 차리고 빠진 곳에서 빠져나와 캑캑대고 있다. 그곳을 황급히 빠져나온 준이은 누구를 마주칠세라 조심스레 집으로 간다. 집안에 들어와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잠을 잘 생각이었다.
내일 미래가 알려준 장소로 가서 영혼결혼식을 하면 이 일도 다 끝나는 거야.
준이은 속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샤워를 하는데 갑자기 자신의 손이 자신을 스스로 더듬고 있었다. 가슴을 만지고 팔뚝을 쓰다듬는다.
팔뚝을 만지는 기분이 좋아. 참 운동을 열심히 하나 봐. 그 남자가 만지고 참 좋아했겠어. 내 취향은 아니지만 말이지. 그 술 취한 남자는 딱딱한 가슴을 좋아하나 봐.
진숙이 말한다.
그만둬!
소스라치게 놀라며 준이이 말한다.
허벅지가 말 근육이야. 참 튼실하구먼. 에계계. 저 발은 왜 저렇게 작아. 250 신지, 신발?
진숙이 말한다.
255야.
준이이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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