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아라 황석호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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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나는 7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엄마와 누나들하고만 함께 살았다. 딸 넷에 아들은 막내였던 내가 유일했으니, 아들이 뭐라고, 아들인 나를 낳기 위해 다섯씩이나 낳은 것이었다. 지금까지 살면서 아들 구실은 한 번도 하지 않았고, 게다가 게이니까 나를 낳고 출산의 종지부를 찍었던 아버지와 엄마는 자식 계획에 실패를 한 셈이었다.

  내가 국민학교를 다니는 동안은 물론이고, 살면서 아버지의 부재를 그다지 느끼지 않고 살았던 것도 다 이유가 있었다. 내 주민등록번호 뒷자리 처음 숫자 세 개는 100인데, 처음 1은 1900년대에 태어난 남자를 의미했고, 그다음 숫자 00은 내가 특별시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증명했다. 그런 내가 지방 도시 변두리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던 것이 다 아버지 때문이었다.


  내가 기억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가장 어린 나이 때에도 아버지는 내 곁에 없었다. 세상에는 존재했으나 같이 살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렇게 몇 년을 떨어져 살던 우리 가족이 아버지의 직장이 있는 지방 도시 변두리로 이사를 한 건 내가 7살이 되던 해였다. 정확히 날짜도 기억을 하고 있다. 5월 16일이었다. 굳이 기억을 하려고 애를 쓰지 않았지만 워낙 기억하기 쉬운 날짜여서 저절로 기억 속에 저장이 되었을 것이었다.

  아무튼 5월 중순에 이사를 해서 아버지와 함께 살다가 그해 추석을 보내고, 한 달 남짓이 지난 뒤, 정확히 말하면 음력으로 지내는 내 생일 딱 한 달 뒤에 아버지는 세상을 떴다.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와의 추억은 나열할 수 있을 만큼 몇 개 되지도 않는다. 여름휴가 때 올라온 아버지와 함께 온가족이 개장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어린이 대공원’으로 놀러 갔던 일은 특별시에서 있었던 유일한 추억이고, 온가족이 처음으로 바다에 놀러갔던 것, 낚시를 좋아했던 아버지를 따라 골프장 옆에 있던 수원지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낚시하러 갔던 것, 추석을 앞두고 내가 기억하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버지와 함께 목욕을 갔던 것은 지방 도시에 내려와서 쌓은 추억이다. 소소한 기억들이 몇 가지 더 있긴 하지만 그것은 정말 소소해서 기억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수준이다.


  이렇게 나는 아버지와의 정을 쌓을 시간적 여유가 거의 없었기에, 갑자기 아버지가 쓰러져 병원에 입원을 하고, 병원에서도 포기를 선언한 뒤 며칠 집에서 더 앓다가 생을 마감했을 때에도 내 눈에는 눈물이 흐르지 않았다. 큰누나의 큰 두 눈에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도 왜 내 눈에는 눈물이 흐르지 않는지 의아할 정도로 나는 슬프지 않았다.

  7살의 어린 나이에 상주로서 장례를 치르고, 1년 뒤 국민학교 1학년 때, 아버지의 첫 기일을 시작으로 나는 어린 나이부터 제사상 위에 조율이시, 홍동백서 하면서 음식들을 배열하는 경력을 쌓아 나갔다. 명절에 차례를 지내거나, 아버지의 기일에 잠시 내가 간직한 기억들을 떠올릴 뿐, 나는 아버지의 부재 자체를 못 느끼고 무럭무럭 자랐다. 그렇기에 내가 선생님 앞에서 불렀던 ‘아빠생각’도 그저 멜로디가 좋아서 따라 부른 것일 뿐, 노래 가사와는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살고 있었다.


  나중에 다시 이야기 하겠지만, 살면서 아버지의 부재를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다. 사춘기가 늦게 왔던 탓에 고등학교 3년을 정말 힘들게 보냈는데, 그때 비로소 아버지의 부재를 느꼈었다. 그것도 지금껏 살아온 인생에 비하면 잠시 동안의 일일 뿐, 나는 스무 살이 되면서 다시 예전처럼 엄마와 누나들만을 가족으로 여기며 살게 되었다.


  이야기가 딴 데로 새서 좀 길어졌는데, 아무튼 나는 여자들하고만 살았기에 성인 남자의 몸을 볼 일이 전혀 없었다. 아버지가 세상을 뜨기 전에 함께 목욕탕에 간 적이 있다고 앞서 얘기했지만, 목욕탕에 갔던 기억만 있을 뿐이지 목욕탕 안에서의 기억은 전혀 없고, 나는 항상 집에서 다라이에 물을 받아 놓고 목욕을 했기에 남자의 몸을 볼 기회가 전혀 없었다. 남자의 몸이라고 본 것은 내 몸뚱아리가 전부였다.


  그런데 선생님이 하얀 모시적삼을 아래위로 입은 모습은 내게 있어서 적잖은 충격이었다. 그렇기에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이다. 모시적삼이 뭐라고 그렇게 충격이냐고 반문을 할 사람도 있겠지만, 창문으로 초여름 오후의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때에, 그 햇빛을 그대로 받으며 하얀 모시적삼을, 그것도 홑적삼에 속바지도 입고 있지 않다는 것은 발가벗고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옷 안이 그대로 비쳤다. 100키로는 충분히 되었을 체구의 선생님이 입은 것이라 풍덩한 옷도 전혀 풍덩하지 않아 더욱 잘 비쳤다.

  유두는 물론이고 아래의 소중한 곳까지 모두 비쳤다. 유두는 작기라도 했으니 그나마 안 보이는 축에 속했다. 거뭇한 음모며, 자지가 늘어진 것까지 모두 보였다. 심지어 포피가 벗겨져 삼각형의 모양을 한 귀두까지 알아볼 정도였다. 완전히 벗은 모습은 아니었으나 나는 그때 처음으로 성인 남자의 몸을 보는 셈이었다. 포피가 덮여 있는 내 꼬추만 보던 내가 귀두가 훤히 드러난 성인 남자의 자지를 처음 본 것이었으니 나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에 충격을 받은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선생님은 자신의 몸이 훤히 비친다는 것을 모르는 듯 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모시적삼을 입고 돌아다닐 리는 만무했다. 선생님은 내게 다가오며 환한 미소를 짓고 물었다.


  “많이 기다렸어?”


  “아뇨. 청소 조금 전에 끝났어요.”


  “땀 때문에 집에서 찬물에 씻고 왔는데, 뛰어 왔더니 또 땀 나네.”


  선생님이 내게로 다가와 의자에 앉았다. 햇빛이 피아노에 가려서인지 의자에 앉았을 때는 속이 비치지 않았다. 햇빛 때문에 속이 비쳤던 것 같았다. 선생님은 나를 안아 자신의 다리 위에 올려놓았다. 땀냄새와 담배냄새가 확 풍겼다. 선생님에게서 늘 나는 냄새였다. 하지만 그리 싫지는 않았다. 선생님은 내 겨드랑이 사이로 손을 뻗어 전날에 배웠던 바이엘을 먼저 연주했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이 다리를 벌리고 앉은 내 사타구니께에 손을 올려놓고 내가 피아노 치는 것을 지켜봤다. 가끔 꼬추를 만지기도 했지만 그것도 늘 있던 일이었다. 선생님뿐만 아니라 동네 어른들도 우리가 놀고 있으면 꼬추를 만지고 가는 것이 흔한 일이었다.

  그렇게 평소와 다를 것이 전혀 없었으나 나는 이상하게 가슴이 떨렸다. 손가락도 떨려서 자꾸 다른 건반을 누르고, 그럴 때마다 나는 실수를 한 것을 만회하고자 조급한 마음으로 건반을 누르다 보니 더욱 엉망이 되었다. 선생님이 실수를 지적할까봐 마음이 불안해져서 몸까지 떨렸다.


  “너 오늘 왜 그래? 어제는 잘 쳤던 거잖아.”


  결국 선생님의 지적을 받으니 부끄러움까지 더해져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너 진짜 오늘 왜 이래? 왜 이리 떨어? 어디 아파? 이 더운 날에 추울 리는 없고....”


  선생님은 부들부들 떨고 있는 나를 진정시키기 위함이었는지 내 몸의 이곳저곳을 주무르거나 쓰다듬기 시작했다. 민소매를 입고 있던 내 팔을 주무르고, 가슴을 토닥이다가 쓰다듬고, 아래로 내려가 무릎부터 허벅지를 향해 주물렀다. 아주 짧은 반바지를 입은 터라 맨살에 선생님의 큼지막한 손이 그대로 닿았다.

  선생님의 손길에 떨리는 몸은 많이 누그러졌으나 가슴은 더욱 뛰었다. 허벅지 안쪽에 선생님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몸이 움찔거리고, 참으로 이상하게도 아랫도리에 힘이 들어갔다. 선생님이 평소에 꼬추를 만질 때에도 없던 일이었다. 선생님의 손은 사타구니를 주무르다 결국 꼬추에까지 이르렀다. 평소와 다르게 내 꼬추가 커진 것을 느낀 것인지 선생님은 순간 멈칫했다. 그러나 곧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 너 왜 이렇게 됐어? 몸이 떨렸던 게 이거 때문이었어?”


  선생님은 웃음을 멈추지 않고 계속 내 꼬추를 만졌다.


  “선생님.... 아파요.”


  “꼬추가 커졌으니까 아프지.”


  선생님은 내 바지 속으로 손을 넣었다. 고무줄로 된 바지라 손이 쉽게 들어왔다. 나 아닌 다른 사람이 맨살 꼬추를 만지는 것은 처음이었다. 선생님이 내 꼬추를 만지는 동안 엉덩이에서 뭔가 딱딱한 것이 느껴졌다.


  “영기야, 잠시만 일어나봐.”


  선생님의 모시 홑바지는 땀으로 젖어 있었다. 그것은 햇빛이 비치지 않더라도 옷이 맨살에 달라붙어 속이 훤히 비친다는 것을 의미했다. 선생님의 자지도 발기가 된 상태였다. 선생님은 자지를 끌어올려 고정시키고는 나에게 다시 앉으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앉지 않았다. 앉을 수가 없었다. 물기 어린 옷이 착 달라붙어 그 윤곽을 훤히 드러내는 선생님의 자지 때문이었다. 너무나 신기하고, 기이하기까지 해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선생님도 내 시선이 아래쪽에 머물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자지를 가리는 듯 하면서 쓰다듬었다.


  “뭘 그렇게 뚫어지게 보냐? 자지 처음 보는 것처럼....”


  “처음 봐요.”


  “뭔 자지를 처음 봐? 목욕탕도 안 가?”


  “네....”


  목욕탕에 안 간다는 것이 꼭 씻지도 않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것 같아 나는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집에서 목욕해요.”


  선생님은 또 말없이 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내가 선생님 앞에서 ‘아빠생각’을 불렀을 때와 같은 표정이었다.


  “때는 안 밀어?”


  “다라이에 뜨신 물 받아놓고 때 밀어요.”


  “등은?”


  “누나가 밀어줘요.”


  선생님은 길게 한숨을 쉬고는 나를 끌어안았다. 내 등을 몇 번이나 쓰다듬고, 토닥였다. 그리고 나에게 하는 말인지 혼자서 그냥 하는 말인지 계속 중얼거렸다.


  “그렇겠네.... 아빠가 없으니까.... 같이 목욕 갈 사람도 없고.... 자지 볼 일도 없었겠네.... 에고 이 짜식을 우짜면 좋노....”


  그날 저녁 늦게 선생님이 우리집으로 찾아왔다. 가난했던 우리집은 그 흔한 전화도 없어서 소식을 전해야 할 일이 있으면 옆집 전화를 빌려 쓰거나 직접 발로 찾아가야 했다. 조그만 부엌이 달린 단칸방에 살았던 선생님 집에도 전화가 없기는 마찬가지였으니 직접 오는 방법을 택했을 터였다. 안으로 들어오라는 엄마의 말을 끝내 무시하고, 선생님은 자기 할 말만 하고 다시 돌아갔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선생님의 가정 방문은 엄마의 해묵은 고민을 한 방에 해결하는 것이었다. 엄마는 만면에 미소를 띄우고 나에게 말했다.


  “너 이제 선생님이랑 같이 목욕 가라.”


  당장 그주 토요일 저녁에 선생님과 목욕탕에 갔다. 온갖 남정네들로 가득 찬 남탕에서 나는 모시옷에 가려진 것이 아닌, 선생님을 비롯한 많은 남자들의 실물 자지를 볼 수 있었다. 얼굴 생김새와 체구가 다르듯이 자지의 모양과 크기도 제각각 달랐다. 너무나 신기했다. 목욕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선생님의 자지와 내 꼬추가 왜 다르게 생긴 것인지를 묻고 선생님은 그 이유를 나름 상세히 설명했다.


  남자는 정말 목욕탕을 같이 갔다 오면 더 친해지는 것인지 그 후로 선생님과 나는 더욱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시험을 치면 채점을 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이런저런 자질구레하게 학교에 남아서 선생님을 도와야 하는 일은 모두 내가 떠맡았다. 반장은 차렷, 경례와 학급회의를 진행하는 것만으로 반장으로서의 품위를 유지하는 정도였다. 여기저기서 선생님이 학생을 차별한다는 말이 나왔으나 선생님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니네들이 꼼꼼하게 못하는 걸 영기가 다 맡아서 하는 바람에 미안할 지경이라고 아이들을 윽박질렀다.

  그때 나는 확실한 내편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깨달았다. 선생님은 언제나 내편이었고, 나 역시도 선생님편이었다.

  늘 그랬듯이 청소가 끝날 무렵에 나는 피아노를 닦았고, 청소 검사를 한 뒤 피아노 의자에 앉아 선생님을 기다렸다. 그러면 선생님은 활짝 웃는 모습으로 나타나 나와 함께 노래를 하고, 피아노를 가르쳐 줬다.


  선생님이 나를 데리고 목욕을 가면서부터 작은 변화가 있기는 했다. 먼저 옷차림새의 변화였다. 선생님은 청소가 다 끝나고, 우리반뿐만 아니라 다른반 학생들까지 모두 집에 돌아갔을 때에야 교실로 돌아왔다. 땀에 전 옷을 모두 벗고, 젖은 수건으로 몸의 땀을 닦은 뒤에 새옷으로 갈아입었다. 아래위로 모시적삼을 입는 것은 여전했으나, 바지의 길이가 무릎을 넘지 않을 만큼 짧아졌다. 따로 속옷을 입지 않고 모시적삼만 입었기에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에 속이 비치는 때가 많았다. 더 이상 충격적이지 않고, 모든 것이 자연스러웠다. 그리고 선생님은 내 꼬추를 더 자주 만졌다. 나는 선생님이 그러거나 말거나 실수를 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며 건반을 눌렀다.

  앞서도 말했듯이 어른들이 아이들 꼬추를 만지는 것은 비일비재한 일이었고, 우리들끼리도 꼬추를 만졌고, 나를 비롯한 내 친구들 모두 수치심 따위는 느끼지 않았다. 특히 나는 다른 아이들보다 더욱 꼬추 만짐을 많이 당했는데, 내가 여자 같아서 꼬추가 있는지 확인해 본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나는 내가 남자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의무인 것처럼 꼬추를 만지게 내버려뒀다. 그리고 선생님이 바지 안에 손을 넣고 꼬추를 만지는 것에도 내가 가만히 있었던 것은 또 다른 이유가 존재했다.


  단칸방에 혼자 살았던 선생님의 집에는 주말이 되면 찾아오는 손님이 있었다. 매주는 아니었지만 한 달에 두세 번은 꼭 찾아왔다. 선생님이 형규라고 부르는, 선생님보다 몇 살 적은 동생이었다. 내가 아저씨라고 처음 불렀을 때 손사레를 치며 형이라 부르라고 했던 사람이었다. 형규 형이 선생님 집에 찾아오는 날에는 세 명이 함께 목욕을 갔다.


  형규 형을 처음 만나던 날이었다. 선생님과 두 번째로 목욕을 가는 날이기도 했다. 미리 약속을 한 대로 토요일 해질 무렵에 목욕 가방을 들고 선생님 집으로 찾아갔다. 알루미늄으로 된 출입문에 노크를 하고 선생님을 부르며 문을 열었다.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듯 선생님이 밖으로 나왔다. 뒤따라 나오는 사람이 있어서 나는 자동적으로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형이 말한 애가 얘야?”


  “응. 우리반 부반장, 이영기.... 잘생겼지? 이대로 커서 어른 되면 딱 너처럼 될 거 같아.”


  선생님과 형규 형은 목욕을 하는 동안 가끔 장난을 치듯이 젖꼭지와 서로의 자지를 만지며 즐거워했다. 내 꼬추를 만진 것은 물론이었다. 나는 어른들도 서로 자지를 만지며 노는구나 싶었다.


  한 해도 반이나 지나가 7월에 접어든 토요일이었다. 오전 수업만 있는 날이라 오후 내내 선생님과 함께 있을 수 있어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날이었다. 집에서 빨리 점심을 먹고 다시 학교로 달려갔다. 청소가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피아노에 쌓인 먼지를 털어내고 친구들에게 일요일 잘 보내라고 인사를 하고 보냈다. 선생님도 어디에선가 점심을 먹고 올 터였다. 나는 책받침으로 부채질을 하며 선생님을 기다렸다.

  그런데 선생님 대신 다른 사람이 교실에 들어섰다. 교무실에서 잔심부름을 하는 급사 형이었다. 선생님이 보이지 않자 나에게 물었다.


  “선생님은?”


  “곧 오실 거에요.”


  “그런데 넌 왜 아직 남아 있어?”


  “선생님이랑 노래 부르고, 피아노도 배워요.”


  형은 뭔지 알겠다는 듯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윤상호 선생님한테 피아노 배웠는데....”


  “진짜요?”


  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진 대화에서 급사 형도 나랑 비슷한 과정으로 선생님에게 피아노를 배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가 다시 형에게 무언가를 물으려 할 때 선생님이 교실에 들어섰다.


  “어? 병무야, 어쩐 일이야? 내가 요즘 교무실에 잘 안 가니까 얼굴 보기도 힘드네.”


  “선생님 안녕하세요.”


  “지금 이 시간에 나한테 웬일로?”


  “조금 전에 선생님한테 전화 왔어요, 형규 형이 오늘 못 간다고 전해 달라 하던데요.”


  선생님의 표정이 일순간에 변했다. 웃음기가 완전히 사라졌다. 목소리도 한없이 가라앉은 듯했다.


  “응. 알았어. 선생님들은 다 퇴근했지?”


  “네. 저도 이제 퇴근하려구요. 근데 선생님은 퇴근 언제 하십니까?”


  “요즘 이 녀석이랑 같이 노래 부르는 게 재미있어서.... 저녁 먹을 때쯤 퇴근하는 거지. 어차피 혼자라서 심심한데....”


  형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선생님을 향해 입꼬리가 올라가는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선생님은 여전히 무표정이었다.


  “이 녀석 엄청 귀엽네요.... 그럼 저 먼저 가보겠습니다.”


  “그래, 잘 가.”


  선생님은 교실 뒤쪽 책상으로 가서 옷을 모두 벗고 젖은 수건으로 땀을 닦았다. 표정이 심상치가 않았다. 늘 인자하게 웃는 모습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계속 씩씩거렸다. 그러다 갑자기 수건을 책상 위에 내던졌다.


  “아~ 씨.발....”


  선생님은 하얀 모시적삼을 아래위로 입고 피아노가 있는 교실 앞쪽으로 쿵쾅거리며 걸어왔다. 피아노 의자에 앉아서도 나를 위에 앉히지 않고, 피아노 뚜껑을 거칠게 열었다. 그리고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다. 시끄러운 음악이었다. 음악을 모르는 내가 들어도 피아노 선율에 짜증과 분노가 서려있었다. 나는 선생님의 표정을 보고 있으니 그 감정 상태를 바로 알 수 있다 치고, 저 멀리서 선생님의 표정을 보지 않고 피아노 연주 소리만 듣는다 해도 분노가 느껴질 것만 같았다.

  선생님이 이처럼 화를 내는 것은 전화 내용 말고는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가 형규 형이 일방적으로 어기는 상황이었다. 형규 형이 오지 않는 것이 이토록 화를 낼 일인가는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형규 형이 오지 않는 것은 선생님이 화를 내는 이유가 분명했다. 지난 주말에도 선생님과 단둘이서 목욕을 갔으니, 선생님이 형을 만나지 못하는 것이 2주째인 셈이었다.


  나는 선생님이 화를 내는 것을 처음 보는 것이라 너무 낯설었다. 나를 두고 백일장과 합창대회 문제로 여자 선생님과 싸울 때에도 표정이 험악하기는 했었지만 지금에 비하면 그것은 약과였다. 아무 말 없이 씩씩거리며, 손가락에 힘이 잔뜩 들어간 채로 건반을 누르고 있는 선생님은.... 너무 무서웠다.

  연주가 시끄럽기는 해도 뭔가 선율이 느껴졌었는데, 갑자기 쾅~~~!!! 하고 건반을 내리칠 때는 오줌을 찔끔 지릴 것 같을 정도로 무서웠다. 선생님은 머리를 건반에 처박고 계속 씩씩거렸다. 나는 무서워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울먹이는 소리로 선생님을 불렀다.


  “선생님.... 무서워요....”


  선생님은 내가 옆에 있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듯이 깜짝 놀라 나를 바라보다 내 눈에 눈물이 살짝 맺히는 것을 보았는지 와락 껴안고 등을 토닥였다.


  “아냐 아냐. 너 때문에 그런 거 아냐.... 미안해, 미안해.... 괜찮아, 괜찮아....”


  선생님이 다시 예전처럼 너그러운 목소리로 나를 달래주니 내가 느꼈던 두려움도 금세 사라졌다.


  “영기야, 잠시만.... 선생님 담배 한 대만 피우고 하자.”


  선생님은 창문에 고개를 내밀고 담배를 피웠다. 나는 선생님의 뒤에 서서 담배를 다 피울 때까지 뒷모습을 바라봤다. 넓은 등과 튼실한 엉덩이가 눈에 들어왔다. 모시적삼은 엉덩이의 갈라진 부분까지 여실히 보여줬다.

  선생님은 다시 피아노 의자에 앉았다. 이번에는 나를 안아 다리 위에 앉혔다. 그리고 나직한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이번 주에 쳤던 거 다시 연습하자.”


  나는 건반 위에 손가락을 올리고 음표 하나하나를 틀리지 않으려고 애를 쓰며 건반을 눌렀다. 바이엘 교본의 단순한 선율이 교실에 울려 퍼졌다. 피아노 선율에 선생님의 화가 누그러졌으면 싶었다. 바이엘 몇 번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한 곡을 완성하고 페이지를 넘겨가며 또박또박 손가락을 놀렸다.

  그런데 선생님 때문에 자꾸만 틀렸다. 선생님의 거친 숨소리가 내 집중력을 깼기 때문이었다. 다시 또 화가 난 것인지 씩씩거리고, 한숨을 토해 내 귀를 뜨겁게 만들고, 가끔씩은 나를 간지럽히기도 해서 그럴 때마다 몸이 움찔거려 건반을 잘못 눌렀다.


  “선생님, 자꾸 틀려요.”


  “괜찮아.”


  “선생님....”


  “응?”


  “오늘도 형규 형 안 오는 거에요?”


  “응.”


  “그것 때문에 아까 선생님 화내신 거에요?”


  “아냐. 화 안 났어. 아까는 그냥 기분이 좀 그래서....”


  선생님이 화내는 거 처음 봤다고, 너무 무서웠다고, 그런데 이제는 누그러진 것 같아서 마음이 편해졌다고 말을 하려는데, 이런 말을 등지고 하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것 같아 선생님을 쳐다보고 말을 하려고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선생님의 얼굴이 나에게 무척 가까이 붙어 있었다. 수염이 내 볼을 스치고 지나가 까칠하다는 느낌도 잠시, 내 입술이 선생님의 입술에 맞닿았다.




-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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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pa…
  • 작성일
굿1빠 추천 평점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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