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심리학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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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사람이 적은데. 이러다 눈에 띄는 거 아닌가. 보아하니 소강의실 수업이라 고작 24명 정원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신청 가능한 빈자리가 넉넉하게 남아있다. 신청인원이 아슬아슬하게 폐강을 넘긴 수준. 냄새가 난다. 내 대학생활 경험상 알 수 있다. 이런 경우는 보통 수업이 더럽게 재미없거나, 학점이 짜거나, 교수가 싸이코라거나, 최악의 경우 이 모든 것들이 복수에 걸쳐 해당되기도 했다. 게다가 아무리 교양이라지만 심리학은 내가 완전히 문외한인 분야였기에, 행여 시험이라도 망쳐 학점이 박살나면 그 땐 정말 큰일이었다. 졸업과 취업이 목전인 내게 그것은 너무 치명적이다.
“일단 도강이라도 해볼까.”
아직 수강정정 기간이니, 그냥 앉아 청강하더라도 내쫓지는 않을 것이다. 당장 내일 오후 2시에 수업이 있으니, 괜히 모험하지 말고 수업을 한 번은 들어나 가보고 결정하자. 결국 고민하던 신청을 미룬 채, 컴퓨터를 꺼버리고 침대에 벌러덩 드러눕는다. 음, 씻고 자야하는데. 바로 자면 살 더 찌는데... 고단한 아르바이트와 맛있는 저녁밥의 여파로, 눈꺼풀과 몸이 천근만근 무겁다. 졸음이 빠르게 밀려온다. 태형주 교수라. 태형주...
**********
“태형주? 심리학과 태형주 교수?”
“어? 뭐야. 너 그 사람 아냐?”
“당연히 알지, 임마. 우리 학교 4년씩이나 다녔는데 어떻게 몰라.”
공강 시간. 기범이와 만나 햄버거로 점심을 대충 해결하는 와중에도, 무의식적으로 계속 그 이름이 입에 맴돌아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나보다. 놀랍게도 그 소리를 들은 기범이 태연하게 아는 기색을 내비친다.
“남의 과 교수를 아는 네가 이상한 거야. 누군데. 수업이라도 들었냐?”
쩝쩝.
“아니. 그 사람 별종으로 유명하잖아. 학교 내에서.”
“별종?”
정말 몰라서 되묻는 나를 햄버거 씹으며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는 기범이의 눈빛에 슬쩍 열이 뻗치기 시작했지만, 내가 한참 아쉬운 입장이니 참아야 한다. 이 녀석은 보기와는 달리 가끔 정말 의외의 구석에서 쓸모가 있다니까. 게걸스럽게 먹어대더라니. 기범이 목이 막히는지 콜라 빨대를 입에 물고 급하게 들이킨 후 말을 잇는다.
쪼로록.
“어, 별종. 국내외 심리학계에서 알아주는 저명한 학자라잖냐. 물론 사실 그것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몰라. 근데 그 말이 맞는 것도 같은 게, 젊은 나이에 능력 인정받았다고 그렇게 바로 정교수 발탁되는 케이스가 흔치는 않으니까. 그래서 자리 때문에 서울대로 안 가고 우리 학교로 왔다는 이야기도 있고. 여기서 학생들 가르친 지도 꽤 오래 됐을걸.”
기범이의 말도 어느 정도 일리는 있었다. 보통 정교수 발탁 관례상 경력 순서를 무시한 경우라면, 그만큼 이례적인 실력이 뒷받침되어야 명분이 서니까. 그걸 정교수 자리도 별로 안 나는 우리 학교에서 해냈다면 별종이 맞지. 생각보다 더 대단한 사람이었구나.
“근데 소문에는 별종인 진짜 이유가 따로 있다더라.”
그가 다 먹은 햄버거 종이를 구기며 슬며시 먹잇감을 던져놓고 내 눈치를 본다. 누가 봐도 한 번 물어봐달라고 안달 난 모습. 분명 꿍꿍이가 있다. 그렇지만 알면서도 나는 그가 풀어놓은 미끼를 덥썩 물 수밖에 없다. 그가 내 대답을 기다린다는 듯 빤히 쳐다보며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여러 차례 두드린다. 시선 끝에 걸리는 구겨진 햄버거 껍질. ...그거였냐. 아오, 이 치사한 새끼.
“알았어. 내가 계산할 테니까 계속 말해봐.”
옳다구나 씨익 웃으며 누가 들을세라 얼굴을 가까이 들이미는 기범이의 입술 주변에 방금 먹던 햄버거 소스가 잔뜩 묻어있다. 살짝 역겨운 이 광경마저도 나는 참아낼 수 있다... 참아야만 한다.
“여성 편력이 카사노바 급으로 심하대. 거의 여대생 킬러라던데? 그래서 아직까지 일부러 결혼도 안 했다더라.”
“......”
“같은 남자가 딱 보면 알지. 그 하체, 괜히 그렇게 두꺼운 게 아냐. 솔직히 어딜 봐서 그게 학자의 외모냐. 태릉선수촌이지. 보기만 해도 정력이 그냥 막... 뭐냐, 물어놓고 그 눈빛은.”
“읽었냐? 미안. 겁나 한심해서.”
“어? 잠깐만... 그러고 보니 너 이상형이 그 타입 아니었나?”
“...?!”
“딱 맞네! 남자답고 듬직한 중년.”
화끈.
“...죽인다. 듣는 귀 많은데 목소리 낮춰라.”
“뭐야, 이 새끼 진짜야? 크크크. 어쩐지. 세상만사 별 관심도 없는 놈이 중얼중얼 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어. 아깝다. 햄버거 값으로 퉁 칠 만한 비밀이 아니었네, 이거.”
얄밉게 입맛까지 다시며 진심 아깝다는 표정 짓는 기범의 얼굴에, 당장이라도 주먹을 날리고 싶어진다. 하, 욕 나오네. 좀 외로워도 그냥 참고 끝까지 아웃사이더처럼 혼자 학교 다닐걸. 술이 문제지. 이 믿지 못할 녀석한테 무슨 생각으로 내가 그 때 커밍아웃을 했을까.
“그딴 헛소리에 햄버거면 비싸게 받아쳐먹은 거지, 이 사기꾼 새끼야. 다 먹었으면 일어나. 나 화장실 갔다가 수업 가야 돼.”
“야, 잠깐만. 근데 진오 너, 혹시 태형주 수업도 들을 생각은 아니지?”
“뭔데, 또. ...아니다. 너한테 물어보느니 그냥 모르고 들어갈란다.”
“야야야야. 그 사람 별종이라니까.”
“알겠는데 난 안 믿는다고. 너 안 갈 거면 나 먼저 간다.”
드르륵.
또 시답잖은 소리하나 무시하며 혼자 일어나 가버리려는데, 기범이가 다급하게 쓰레기를 정리하고 따라와 옆에 붙는다. 보통 그가 이런 반응을 보일 때 하는 말들이야말로 대부분이 믿을만한 정보라, 티 안 나게 넌지시 귀를 기울인다.
“그게 아니라... 그 사람 수업, 학점 지옥이야. 앞에 소문은 모르지만 이건 확실해. 전에 우리 동아리 심리학과 선배들이 욕하던 거 내 귀로 직접 들은 거라.”
“......”
“기억나. 절대평가든, 상대평가든 눈치 안 보고 자기 꼴리는 대로 주는 싸이코랬어. 그래도 들을 거냐? 너 그러다 학점 발목 잡히면 이번에 졸업 못 해, 임마.”
이건 정말 곤란한데. 기범의 말이 만약 사실이라면... 그의 수업이 인기 없는 이유가 어쩌면 우려했던 최악의 경우에 해당할지도 모른다.
“아직 결정 안 했어. 고민 중이다.”
“으아아아... 진짜구나, 너. 운명의 장난이란. 청춘이 뭐라고, 사랑이 뭐라고! 이 가련한 한 남자의 인생을 송두리째...”
퍽!
“욱! 켁, 켁!”
“...선 넘었다. 인정하지?”
갖은 오버 다 해가며 약 올리는 그의 모습에, 결국 참지 못하고 적당한 힘의 주먹을 명치에 기습적으로 꽂아 넣는다. 어우, 속이 다 시원하네. 그나저나 어쩌나. 혼란만 가중시킨 기범의 말에, 수강 정정에 대한 고민이 더욱 깊어져버렸다. 교양심리학 수업시작까지는 앞으로 두 시간. 차라리 그 시간이 빨리 와버렸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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