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심리학 (9)

작성자 정보

  • 작성
  • 작성일

컨텐츠 정보

본문

편한 자리에 타세요.”

.”

 

철컥. .

 

"...!"

 

평소에도 이렇게 깔끔하게 차를 쓰시나. 직전에 정리한 차 내부처럼 상당히 깨끗한 상태다. 눈에 보이진 않지만 어딘가에 방향제가 달려있는지, 상쾌한 소나무 향기가 은은하게 코끝을 찌른다. 담배는 확실히 안 피우시나보네. 기본적으로 차 안은 넓은 편이었지만, 그와 내가 앉으니 남는 공간 없이 적당히 꽉 찬 느낌. 이래서 SUV를 사신 걸까. 혼자서 차 안을 두리번거리며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겨있을 때.

 

안전벨트 매셔야 출발하죠.”

, 죄송합니다.”

 

쥐이이익. 철컥. 부르릉.

 

그렇게 시작된 그와의 동행. 막상 비좁은 공간에 단 둘만 같이 있으니 어색하고 떨리는 마음에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렇게 내성적인 성격도 아닌 내가, 사람 앞에서 이렇게 작아진 적이 있었던가. 첫 번개 때도 이렇게 떨리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차는 또 왜 이렇게 쓸데없이 좋아가지고. 주행 소음이 거의 없어 차 안이 음소거 한 마냥 조용하다. 긴장으로 인해 꼴딱거리는 내 침 삼키는 소리가 그에게 들릴까 걱정이 될 정도의 정적.

 

킁킁.

 

밖에 있을 때는 잘 몰랐는데. 술 많이 마시긴 했나본데요.”

... , 죄송합니다.”

하하하. 그렇게 계속 일일이 사과할 건가요. 미안해하라고 한 말 아닙니다. 좀 험악해 보이긴 해도 나 그렇게 무서운 사람 아닌데. 아무래도 교수인 내가 불편하긴 하겠죠. 이해합니다.”

 

순간 또 습관처럼 죄송합니다, 하고 말을 하려다 급히 입을 다문다. 술 냄새 생각해서 뒷좌석에 탔어야 했는데. 그를 조금이라도 더 자세히 보고 싶은 욕심에 조수석에 탄 것이 과욕이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소기의 목적이라도 달성해야지. 차마 대놓고 보진 못하고 곁눈질로만 힐끗 거리며 그의 모습을 눈에 담는다. 피부가 깨끗해서 그런지 푸른색 계열이 참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첫 만남 때 그를 정면에서 봤을 땐 진한 눈썹과 시원한 이목구비 때문에 다소 차가운 느낌이었던 것 같은데. 옆에서 바라본 그는 같은 얼굴임에도 서글서글하고 선한 느낌의 또 다른 매력을 풍긴다. 한 손은 핸들에, 나머지 한 손은 기어레버에 올리고 전방을 주시하며 운전에 집중하는 그 모습은, 게이가 아닌 일반 남자가 봐도 멋있다고 느낄 만했다. 듬직한 어깨, 굵직한 팔뚝을 지나 시선을 조금 더 아래로 내린다. 슬쩍 벌린 두 다리 사이에 툭 튀어나와 있는 묵직한 앞섶이 눈에 들어오자, 그 안의 내용물을 상상하며 내 물건이 멋대로 고개를 쳐든다. ...가방이 가리고 있기에 천만 다행이지.

 

술 좋아하나요.”

? . 나름 좋아합니다.

정말입니까? 교수와 학생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묻는 내가 그냥 친한 친구라 해도 같은 대답 할 건가요.”

 

운전 중 처음으로 그가 정확히 내 눈을 맞추며 재차 묻는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강렬한 그의 눈빛에, 순간 온몸이 움츠러든다. 눈빛으로 뿜어내는 카리스마 하나만큼은 확실한 사람이었다. 저 눈앞에서 거짓말은 꿈도 못 꾸겠는데. 만약 기범이가 나에게 이 질문을 했다고 한다면... 대답이 달라질 이유가 없었다.

 

.”

그럼 됐습니다.”

“......”

 

됐다니. 뭐가 됐다는 걸까. 이후로 뭔가 후속 질문들이 더 있을 줄 알았는데. 그 질문을 끝으로, 태형주 교수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운전에 집중한다. 이렇게 대화가 끝난다고? 마치 일방적인 취조를 당한 느낌. ...그랬구나. 곰곰이 돌이켜 생각해보면 언제나 질문을 던진 쪽은 태형주 교수였다. 그래서 나는 그를 마주친 것이 이 자리가 처음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해 정확하게 아는 바가 하나도 없다. 현진오,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다며. 궁금하면 직접 물어보는 게 가장 정확한 방법이잖아. 항간에 떠도는 소문 따위를 믿을 게 아니고.

 

.. 교수님.”

“...?”

아까 후문사에서... 우연치 않게 들었습니다. 교재비 안 받는다고...”

, 그건... 그냥 잊어버리세요. 그 사장님이 멋대로 그러시는 거라... 제 값 다 치르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거니까."

“......”

 

질문하는 입장이 되니, 차 안 공기의 흐름이 묘하게 바뀐다. 전에 없던 대담한 용기가 어디서 발했는지, 눈빛으로 그를 재촉하며 더 자세한 설명을 요구한다.

 

그 집 경제적으로 어려워서 문 닫는다고 하실 때, 제가 도움을 좀 드렸어요. 후원이라고 하면 설명이 되려나. 얼마 안 남은 학교 앞 양심적인 가게가 문 닫는 게 싫어서 개인적인 호의로 한 건데, 그게 고맙다고 저러시는 겁니다.”

 

거짓말이 아닐 것이다. 직접 내 귀로 듣고 눈으로 본 아까의 장면들과 논리적으로 일맥상통하니까. 노블리스 오블리주라는 말이 순간 머릿속을 스친다. ...보이는 것보다 더 그릇이 크고 훌륭한 사람이구나. 이제 다음 질문.

 

그럼 댁은 어디십니까.”

... 대치동입니다.”

 

뭔가 말할까말까 살짝 뜸을 들이다가 그의 입에서 탄식하듯 나온 대답. 학교로부터 대치동으로 내려가는 경로에 있는 지하철 2호선 역이라면... 삼성역이 가장 적합하긴 하다. 서울의 도로와 지하철 노선 모두를 잘 알고 있지 않으면 그렇게 빠른 시간에 판단 내리기가 어려웠을 텐데. 사투리도 쓰지 않으니, 아마 그는 서울 토박이인 걸로. 다음 질문...

 

혹시 종종 이렇게 제자와 같이 귀가하시나요.”

아뇨. 진오 학생이 처음입니다.”

“...?!”

 

당연히 긍정할 거라 생각하고 물은 질문이었다. 그 뒤에 곧바로 다른 사람들과는 차 안에서 주로 어떤 이야기들을 나누시냐고 자연스레 물을 작정이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그의 대답이... 정반대다. 여기 이 차에 탄 게 내가 처음이라고? 어째서, , 그것도 나와... 전공도 아니고, 아직 자신의 수업 수강신청조차 하지 않은 일개 학생일 뿐인데.

 

이유를...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이유요? , 답변이 어려운 질문이네요. 운전하면서 이미 제가 저 스스로한테 속으로 던졌던 질문이기도 하고.”

“...?”

. 다른 게 아니고, 그러고 싶어서 그랬던 거라. 별 다를 이유랄 게 없어요.”

“...!”

참 보잘 것 없는 답변이죠? 저야말로 원래 인간의 모든 행동에는 반드시 동기가 있다고 믿는 사람이거든요. 심리학자로서의 기본 마인드이기도 하고. 근데 지금은... 그 동기가 무엇인지 나도 잘 모르겠습니다."

“......”

"아까 내 뒤에서 감사했다고 소리쳐 말했을 때, 그냥... 그러고 싶었어요. 그게 다입니다.”

 

아리송한 그의 대답. 이유를 묻기 전보다 오히려 내 머릿속이 더욱 혼란스러워진다.

 

끼이이익.

 

이런 저런 이야기하다보니 벌써 다 왔네요, 삼성역. 저기 지하철 입구 보이죠?”

“....”

마음 같아서는 태운 김에 집 앞까지 데려다주고 싶은데, 오늘은 꼭 시간 맞춰 집에 가야할 일이 있어서요.”

아닙니다. 이 정도도 너무 감사합니다. 그럼...”

 

덜컥. .

 

내려서 찬 공기를 다시 쐬니 그제야 현실을 실감한다. 내가 그의 차를 타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 동시에 그와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나 아쉽다.

 

지이이이잉.

 

“...?”

그 이유가 궁금한 건 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우리 다음 수업 시간에 봅시다. .”

“...!”

조심히 가요.”

 

지이이잉. 부르릉.

 

...방금 내 귀로 똑똑히 들었다. 그의 수업을 내가 꼭 듣길 원한다는 말. 어설픈 나의 추측이 아닌, 확실한 그의 메시지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착각이나 오해가 아니었구나. 그리고 덧붙여 그 자신 또한 나와 함께한 오늘에 대한 이유가 궁금하다는 의미심장한 말까지.

 

오오오. 그 교수가 너 이름을 물어봤다고? ...야야, 그거 그린라이트 아니냐? 크큭.’

 

문득 기범이 맥주를 마시며 우스갯소리로 했던 말이 겹쳐 떠오른다. 게이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를 열렬히 좋아하고 있기 때문이라서 그런지 다른 선택지의 답안은 도저히 떠오르질 않는다. 본인 스스로도 그 이유를 모르고 호의를 베풀었다는 태형주 교수의 이 이상한 행동을, 내가 조금은... 오해해도 되는 것 아닐까.

 

그 이유가 궁금한 건 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우리 다음 수업 시간에 봅시다. .’

 

마지막에 창문을 내린 뒤 그가 특유의 매력 넘치는 웃는 얼굴로 남긴 말이 귓가에 웅웅거리며 맴돌아, 선뜻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한다. 지하철 입구가 바로 코앞이었지만 사람들이 오가는 인도에 우두커니 선 채로, 이미 그의 차가 멀어져 사라져버린 방향 쪽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관련자료

댓글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알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