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심리학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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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수업을 들어오게 된 동기가 학구열이나 호기심이 아니라... 나 때문이었다고요?”
“......”
“그날 나를 세 번 씩이나 마주쳤던 것도, 사실은 우연이 아니라 다 계획했던 일 아닙니까?”
“......”
“진오 학생. 현진오. 이 호모 새끼야. 이런 식으로 솔직하게 말하면 뭐, 내가 다 이해한다고, 괜찮다고 해줄 줄 알았나, 어?”
“......”
“그대로 벙어리처럼 닥치고 아무 말도 하지 마. 눈도 마주치지 마. 역겨운 얼굴... 꼴도 보기 싫으니, 여기서 나가. 꺼져!”
“흐어! 허억. 허억...”
가위에 눌린 건가... 머리가 무겁고 띵하다. 다시 떠올려보기 너무나 끔찍한 꿈.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리고 보니, 침대시트가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있다.
“후우우. 에이씨. 샤워 한 번 더하고 자야겠네.”
끼리릭. 쏴아아.
뜨뜻한 물로 씻어내려고 해봐도 좀처럼 방금 전 꿈의 기억이 잊혀 지지 않는다. 마치 현실인 것처럼 생생했던 악몽. 입도 벙긋 할 수 없는 답답한 상황 속에서, 당장이라도 나를 갈기갈기 찢어발겨 죽일 것 같던 그의 맹렬하고 공격적인 눈빛이 번뜩 생각 나 순간 소름이 끼친다. 그의 차를 탔던 그날 이후 다음 수업일이 점점 가까워질수록, 평상시에도 왠지 이유 모를 이상한 압박감 같은 것을 종종 느끼며 하루가 쉽게 피로해지곤 했다. 내가 걱정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일주일이 흘러, 그렇게 수업이 있는 날이 코앞에 다가오고. 결국 그 압박감이 악몽으로 현신하여 나를 찾아온 걸까. 그래도 일어나지 않은 일이니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 어쩌면 꿈이었기 때문에 이 정도로 끝났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현실에서 안일한 욕심을 부린다면 이것보다 더욱 더 끔찍한 일이 벌어질지 누가 알겠는가. 꿈에서 봤던 것처럼 만약 정말 내가 그에게 고백이라도 해서, 그로부터 경멸어린 시선과 모욕적인 언사를 겪는다면 그 순간을 나는 견딜 수 있을까. ...고백은 무슨. 그럴 기회조차 없으면서.
끼이익, 덜컥. 스윽스윽.
욕실에서 나와 머리와 몸에 묻은 물기를 마저 털어내고, 냉장고에 찬물을 꺼내 한 잔 따라 마신다. 생각이 많아 과열되었던 머리가 차갑게 식으며, 어지러움도 조금은 진정이 되는 듯하다. 새벽 4시 43분. 방금 전의 기분 더러운 꿈을 혹시나 이어꾸지 않을까 다시 잠에 들기가 조금 두렵긴 하지만, 일어나기엔 너무 이른 시간이다. 거실을 가로질러 내 방으로 가는데.
“으... 흐으...”
“......”
엄마 방에서 나지막이 흘러나오는 신음소리. 오늘따라 평소보다 소리가 크게 새어 들리는 것 같아 더 속상하다. 하. 그놈의 돈이 뭐라고 저렇게 까지... 차라리 내가 빚을 지고 말지. 애써 찬물로 진정시켰던 머리의 열이 다시금 끓어오른다. 내 방 침대에 다시 누웠는데도, 걱정과 화가 겹쳐 쉽사리 가라앉질 않아 다시 잠들기가 힘들다. 내일 일어나서 얼굴 보자마자 당장 하는 일 그만두라고 말해야지...
**********
“그만 둬, 당장.”
“뭐가.”
“뭘 뭐가야. 시치미 떼지 말고. 대체 어디가 그렇게 아파서 밤마다 끙끙거리는데.”
“......”
“아프면 병원부터 가야지. 병원은, 가 봤어?”
평소와 같이 엄마와 아침 겸 점심을 먹는 이 자리에서, 새벽잠 설쳐가며 내내 벼르던 속내를 털어놓는다.
“...오늘 파스 사다가 붙일 거야. 너는 신경 쓰지 마.”
탁!
“신경 쓰지 말라고?”
“얘가 오늘따라 왜 이렇게 오버해? 너 어른 앞에서 누가 이렇게 버르장머리 없이 숟가락을 식탁에...”
“신경 쓰지 말까? 정말? 내가 엄마한테서 아예 신경 꺼버렸으면 좋겠어? 같이 살아도 본체만체하며 무시하고 살길 바라는 거냐고.”
“......”
“내가 나 때문에 이래? 엄마 때문에 이러는 거잖아. 이대로 몸 망가져서... 아들 덕에 호강 한 번 못 해보고 죽도록 고생만하다 진짜 확... 죽어버리기라도 하면, 그러면 엄마만 억울할 거 같아?”
탁.
“너 오늘 지나쳐. 엄마 더 이상 화나게 하지 말고... 그만하자. 밥맛 떨어진다.”
“아니, 내 얘기 아직 안 끝났어. 내가 억만금이 필요하다고 했어? 아니면... 멀쩡한 새 아빠를 데려오라고 했어?”
“현진오!”
“소리 지르지 마!”
움찔.
“내가 아홉 살짜리 어린애처럼 응석 부리는 거야, 지금? 말도 안 되는 걸 원하는 게 아니잖아. 그냥, 그냥 제발 무리만하지 말라고. 나랑 같이 건강하게 오래 살아달라는 게, 욱... 그게 그렇게 들어주기 힘든 부탁이야?”
분노인지 억울함인지 그간 쌓이며 억눌려왔던 복합적인 감정들이 한꺼번에 북받쳐, 결국 터지는 눈물을 참아내지 못 한다. 악을 써가며 소리치는 낯선 모습의 나를 보는 엄마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린다.
“진오야...”
“엄마잖아. 나한테는 하나밖에 없는 가족이야. 왜 엄마는... 흑. 이날 이때껏 나만 보고 살았으면서, 나는 엄마한테 말 한 마디 못 하게 하는데.”
얼굴이 눈물로 범벅이 되거나 말거나. 이대로 또 다시 먼저 일어나서 등을 돌리고 방으로 들어가 버리면 지는 거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애초부터 불효자식, 후레자식 소리 들을 각오하고 꺼낸 얘기잖아. 기왕 엄마에게 할 소리 못 할 소리 다 퍼부은 이참에, 반드시 엄마로부터 무리 안 하겠다는 대답을 듣고야 말 것이다. 내말이 끝나고도 한참동안이나 멍하니 식탁을 내려다보던 엄마가 이윽고 입을 연다.
“그만둘게.”
“...!”
“네 말이 맞아. 이번엔 엄마가 잘못한 거야. 주제도 모르고... 욕심이 과했어. 미안해.”
드르륵. 휙.
“수업 늦겠다. 얼른 씻고 준비해.”
식탁에서 일어나 뒤돌아서 개수대로 향하는 엄마. 순간, 아차 하는 마음이 생긴다. 방금 이 격한 감정에 질렀던 소리가 정말 엄마만을 위한 것이었을까. 요 며칠 사이 있었던 머리 아픈 일들 때문에, 그저 화풀이 대상으로 가장 가까이에 있는 엄마를 선택했던 것은 아닐까. 뒤늦게 후회가 밀려든다.
“......”
언제부터였을까. 엄마의 어깨가 이렇게나 좁아지기 시작한 것이. 어렸을 땐 참 든든했는데. 그 뒤에 폭 하고 숨으면 세상 무서울 것이 없었는데. 지금 엄마의 뒷모습은 내게 무척이나 낯설다. 항상 내가 먼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방으로 들어가 버렸기에, 먼저 일어난 엄마의 뒤돌아선 모습을 보는 것은 오늘이 처음인 것 같다. 그리고 절실히 깨닫는다. 대화를 나눌 유일한 사람이 내게로부터 등을 돌려버렸을 때의 쓸쓸함이 얼마나 지독한 것인지. 늘 내가 진다고 억울해했다. 매번 엄마가 나를 이해해주지 않는다며, 방 안에서 혼자 상처받곤 했다. 헌데 그것이 아니었다. 왜 진작 몰랐을까. 엄마는 아들인 내가 더 속상해 할까봐, 언제나 지금 이 자리를 지키고 앉아서 나를 위해 한결같이 져주고 있었던 것이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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