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심리학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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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세요.”

 

도살장에 끌려가는 가축마냥 침통한 심정으로 그의 뒤를 따라 걷다보니, 어느새 도착한 지하광장 주차장. 학교 내에도, 그리고 주변에도 이야기할 수 있는 다른 장소는 많았지만 그가 굳이 선택한 곳은... 그의 차 안이었다. 주변의 시선에 구애받지 않고 마음껏 화를 내기 위해서일까. 아니면 손찌검 같은 해코지라도 하려나. 별의 별 생각이 다 스쳐간다.

 

벌컥, .

 

그날과 크게 다르지 않은 청결한 내부의 모습. 익숙한 소나무 향기. 달라진 점이 있다면, 그 때의 가벼운 설렘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죄책감과 두려움에 무겁게 가라 앉아있는 내 마음이었다.

 

수업은 이미 신청했더군요.”

“...?”

 

그가 처음으로 꺼낸 말이었다. 당연히 왜 자신의 사무실 앞을 기웃거리고 있었는지 먼저 물어볼 줄 알았다. 그 여자 교수의 고자질을 여과 없이 들었으니, 왜 자신을 엿듣고 있었는지 또한 궁금해 할 거라고 생각했다. 헌데 예상과는 너무 다른 그의 첫마디 말.

 

“....”

그렇다는 이야기는, 이제 반말로 이야기해도 된다는 말이고.”

“......”

, 한결 낫네. 아무래도 존댓말은 심리적 거리감을 주거든. 오리엔테이션 때 괜히 그러겠다고 했나 계속 후회했다.”

 

놀랍게도 그는 지금 이 상황에서 여유로이 미소 짓고 있다. 나에게 화가 많이 난 게 아니었나. 누구라도 화가 날만한 상황이었다. 특히나 아까의 통화 내용의 무게감이 적잖이 무거웠음을 생각했을 때, 그의 지금 이런 행동이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 줄곧 마음속으로 그의 맹목적인 용서를 바라긴 했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그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나라서, 그리고 그 피해의 당사자가 태형주 교수였기에 이 상황을 타개하고 싶은 내 개인적인 염원이었을 뿐. 3자의 시선으로 조망한다면, 나조차도 그가 나에게 화를 내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진오 네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 교수님.”

오늘 내 사무실을 찾아온 이유가 있을까.”

“......”

 

뒤늦게 날아오는 변화구.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올 것이 왔구나. 마음 같아서는 지금 이 자리에서 그냥 솔직하게 털어놓고 싶다. 그날 이후 교수님을 너무 뵙고 싶었다고. 다른 공부나 수업에 전혀 집중하지 못 했으며, 오늘만을 기다려왔다고. 휴강으로 인해 다시금 겪게 될 일주일을 버티기가 어려울 만큼, 당신이란 사람에 푹 빠져 있다고. 이게 내 진심이라고. 태형주라는 사람에 대해 더 알고 싶은 욕심에, 잘못인 줄 알면서도 몰래 엿들으려 한 점 정말 죄송하다고. 그렇게 다 말해버리고 후련해지고 싶은데... 그럴 수 없다는 거 알고 있다. 그의 알쏭달쏭한 말만 믿고 저지르기에는, 얻을 수 있는 기댓값에 비해 리스크가 한없이 크다. 이런 안 좋은 상황에서 급작스레 커밍아웃하며 자신이 좋다고 말하는 게이 남학생을 그는 어떻게 생각할까. 좋고 싫은 것은 둘째 치고, 예상치 못했던 일에 많이 당황스러울 것이다. 그의 수업은커녕, 다시는 그와 얼굴 마주하며 이야기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는 생각하지만, 누가 알겠는가. 최악의 경우 졸업을 앞둔 이 시점에 아웃팅으로 지옥 같은 학교생활을 보내게 될 가능성 또한 전혀 배제할 수 없다. 문득 어젯밤 꿈 속 잔인했던 그의 모습이 떠올라, 지금의 모습과 겹쳐지며 몸서리친다. 그 어떤 거짓말을 해도 그에게 더 큰 오해를 불러일으킬 것 같은 겁이 나, 차마 변명 하지 못하고 마치 묵비권을 행사하는 죄인처럼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입을 다문다.

 

“......”

곤란한가. ... 그럼 질문을 조금 구체적으로 바꿔서. 오늘 나를 찾아온 이유가, 순전히 네 의지였니. 아니면, 다른 사람이 시킨 일이야?”

다른... 사람이요?”

그래. 너 말고 다른 사람. 이것만큼은 꼭 거짓 없이 말해줬으면 좋겠는데.”

 

그가 강렬하고 진지한 눈빛으로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 거짓 없이 말해달라는 그의 요구가 없었다 하더라도, 저 눈빛 앞에서 거짓을 고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다른 사람이라... 누군가 염두에 두고 있는 사람이라도 있는 걸까. 그 사람은 대체 그와 어떤 관계일까. 그리고 그런 사람이 있다한들, 그에게 나를 보낼 이유가 뭐가 있을까. 그와 이야기하면 할수록, 이해하기 힘든 새로운 의문점들이 끊임없이 하나씩 튀어나온다.

 

제 의지였습니다.”

그래. 그럼 됐다.”

 

목이 메여 갈라지는 목소리로 어렵사리 대답하자, 그제야 그가 안심한다는 듯 편히 웃으며 고개를 전방으로 돌린다. 이번엔 대체 또 뭐가 됐다는 걸까. 지금 상황에 내게 응당 해야 하는 질문 대신에, 다소 엉뚱한 물음만을 던지는 그의 의도를 도저히 모르겠다. 여기까지 나를 데리고 와서 정말 이것만 물어보고 말 요량이었는지, 그가 더 이상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은 채 생각에 잠겨 전방만 지그시 주시하고 있다. 모든 것을 꿰뚫어보고 있는 그의 손바닥 안에서, 나 혼자만 바보가 되어 놀아나는 느낌. 무슨 배짱이었는지, 찰나의 궁금함과 오기를 참지 못하고 그에게 역으로 질문해버린다.

 

“...안 물어보십니까.”

?”

왜 엿들었는지. 그리고 제가 뭘 들었는지.”

 

퍼뜩 제정신이 돌아오자, 내가 방금 얼마나 모자란 짓을 저질렀는지 깨닫고 자책한다. 그냥 넘어갈 수 있을 때 넘어갔어야지, 현진오 이 멍청한 놈아. 그런데 오히려 이런 질문을 하고 있는 내가 다소 의외라는 듯, 그가 커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대답한다.

 

굳이 물을 이유가 없으니까.”

“...?!”

나를 찾아온 게 네 의지였다고 방금 말해줬잖니.”

.”

그러니까.”

“...?”

 

질문에 대한 답에 또 다른 질문이 꼬리를 문다. 내가 지금 대화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표정과 온몸으로 신호를 보내는 걸 그제야 봤는지, 그가 아, 하고 짧게 탄식한 뒤 자신의 생각을 덧붙여 자세히 설명해준다.

 

네 동기가 나였는지, 나를 둘러싼 주변요소였는지. 네가 정확하게 말해주기 전까지 그것은 알 수 없는 일이야. 그래도 어쨌든 내가 사무실에 있을지 없을지 여부도 모르는 상태에서 그곳까지 찾아왔을 정도면, 아마 강도가 약한 동기는 아니었을 거야. 그렇지?”

“......”

주변요소, 그러니까... 서 교수가 말했던 시험지 같은 게 목적이었다고 가정한다면, 내 사무실을 찾아올 동기로는 충분할지도 모르지. 그런데 그건 사실 가능성이 너무 희박해. 그럴 거였으면 그냥 내가 수업 중 자리를 비운 사이, 빈 사무실을 노리는 게 훨씬 편할 테니까. 휴강임을 알면서도 내 부재 여부도 모르는 사무실까지 찾아올 리는 없겠지.”

“...!”

심지어 진오 넌 청강 후 수강 정정을 통해 내 수업에 들어왔잖니. 내 주변요소를 노리는 사람이 굳이 자신의 존재를 내 앞에 먼저 드러내는 리스크를 감수할 필요가 있을까. 그건 자기 과시욕이 충만한 싸이코패스 연쇄살인범들에게서나 볼 수 있는 심리 양태야. 상식적으로 안 맞는 일이지.”

 

심리학이라는 학문이 원래... 이런 걸 익히는 분야였나? 무슨 탐정도 아니고. 몇 가지 주어진 단서로 일목요연하게 상황을 추리해내는 모습에,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다.

 

그런데 여기서 적어도 한 가지 전제만큼은 꼭 확인해 볼 필요가 있었다. 그 동기가 진오 너의 것이 아니라, 나와는 일면식도 없는 생판 남의 것이라면? 그건 내가 예측 가능한 동기들의 범주를 넘어서니까. 너무 많은 변수가 개입될 여지가 있거든.”

 

그래서 아까 내게... 그런 이상한 질문을 던졌던 건가.

 

헌데 넌 네 의지라 답했고, 그 말이 거짓말 같진 않았어. 그럼 남는 동기의 범주가 확 좁혀지지.”

“......”

카페에서의 행동, 이후 수업을 청강하러 왔던 네 의지. 그날 차 안에서 주고받았던 대화 내용까지. 모든 것을 바탕으로 추론해봤을 때, 그 강한 동기란 것이 높은 가능성으로... 내가 아닐까 생각해 본 거야. 그럼 뭐, 내 통화를 엿듣게 된 이유 또한 자연스레 설명이 되는 거고. 나에 대한 강한 동기를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나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게 당연하겠지. 통화 내용이야 내 입으로 한 말이니 다 알고 있는 마당에, 네게 물어야 할 이유가 전혀 없고. 혹시 여기까지 내가 말한 것들 중에 잘못 알고 있는 부분이 있나?”

 

단순히 느낌적인 느낌이 아니었다. 그는 정말로 내 심리를 훤히 꿰뚫어보고 있었다. 그것도 첫 만남 때부터 모조리 다. 이 정도면 그가 직접적으로 언급만 하지 않았을 뿐, 내 마음은... 이미 그에게 들킨 게 확실해 보인다. 마치 그의 앞에서 전부 발가벗겨진 기분. 다행스러운 점은, 그가 아직도 여유로운 미소를 잃지 않으며 이상하리만치 태연하다는 점이다. 그래도 이 정도면 생각했던 것보다는 훨씬 양호한 상황 아닌가. 비록 수업에서 물러나야 한다 해도, 앞으로 그를 다시 보지 못하게 될 지라도, 적어도 지난밤 악몽에서처럼 그가 내 앞에서 일갈하며 화를 내고 있지는 않으니까. 짝사랑을 정리하는 한동안은 가슴이 많이 쓰리겠지만, 적어도 태형주라는 사람이 좋은 사람으로 내 기억에 남을 수는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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