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랑새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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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연 안개속에서 그의 앞쪽에 걷는 사람의 흐릿한 실루엣이 보였다.
습도가 높아 눅눅하고 불쾌한 공기가 그의 폐속으로 들어왔다. 발을 한걸음 옮길 때마다 그의 운동화의 바닥에 찐득하게 붙어있는 진흙이 그의 걸음을 더디게 했다.
"형!"
점점 거리가 벌어져 멀어지던 그의 앞에 있던 남자가 승환의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얼굴에 희미한 미소를 한번 띄고 그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완전히 안개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왼쪽 볼에 무엇인가 닿는 느낌에 승환은 몽롱한 잠결의 가장자리에서 깨어나 눈을 떴다.
“집에 다 왔다.” 그의 눈 앞에 종석이 자신의 얼굴을 바짝 대고 웃으면서 그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멋쩍은 표정을 지으면서 자신에게 바짝 붙어있는 그의 몸을 느끼며 승환이 손을 뻗어 나른하게 기지개를 켜는 시늉을 해 보였다.
종석이 얼굴을 숙이면서 슬며시 승환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다 댔다.
“여기 동네사람들이...”
“아무도 없어.” 종석이 승환의 말을 막았다. 그리고는 다시 그에게 키스했다.
“자고 갈래요?” 여전히 입술이 맞닿은 채로 승환이 속삭였다.
“나도 그러고 싶은데 집안에 일이 있어서 오늘은 들어가 봐야해.” 종석이 얼굴을 들고는 아쉬운 표정을 지으면서 손가락으로 승환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주말에 종로에서 보자. 형 친구들도 좀 같이 보고...."
말을 멈추고 그가 슬며시 웃어보였다.
피곤할텐데 어서 들어가서 쉬어.” 허리를 굽히고 바라보는 승환을 조수석의 열린 창문 밖으로 내다보면서 종석이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리고는 그가 시선을 앞으로 돌리면서 차가 미끄러지듯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승환을 남겨두고 종석의 차는 건물 뒤로 사라져 버렸다.
“그래도 기일이라고 잠깐 동안이나마 꿈에 나타난건가 보네.” 현관문을 열면서 승환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가방을 방바닥에 던져 놓고 그는 옷을 벗기 시작했다.
셔츠와 바지를 침대위에 던져 놓고는 그는 의자를 끌어당겨 책상 앞에 앉았다.
그리고 서랍을 열고 그 안에 놓여 있던 사진을 꺼내 들었다.
“오늘 정현이 형 보고 왔다.”
그가 검지 끝으로 슬며시 미소를 짓고 있는 우현의 얼굴을 메만졌다.
“형 때문에 여러 사람 인생이 뒤죽박죽 되어버렸잖아.” 그가 사진속의 우현에게 핀잔을 주었다.
“근데 왜 거짓말은 했대?” 승환이 여전히 중얼거렸다.
“장마 동안 일 안할거라고 했잖아. 그날은 아침부터 바람이 심하게 불었는데,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 높은 작업대에는 올라간거야?” 마치 그가 진짜 그의 말을 듣고 있는 것 마냥, 승환은 사진속의 우현을 바라보면서 말을 이었다.
“나, 형 친구 종석이 형하고 사귄다. 이미 알고 있지?” 여전히 사진속의 우현은 미소를 띠면서 승환을 바라보고 있었다.
“섭섭해 하지마. 형이 먼저 나 떠난거야. 형이 먼저 나 버렸어.”
말을 마치고 실쭉해진 표정으로 승환이 다시 서랍을 열고는 사진을 그 안에 던지듯이 넣고는 다시 서랍을 닫아버렸다.
장마가 끝난 종로의 한낮은 마치 용광로와 같았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의 머리위에서 태양은 마치 그의 정수리의 머리카락을 바삭하게 구워버리겠다는 심산인 듯 잔인하게 이글거렸다.
도로의 시멘트 바닥에서 열기를 내뿜는 아른거리는 아지랑이가 올라와 땀이 모이는 턱밑을 스쳐 올라와 코를 자극하며 숨이 막히게 만들고 있었다.
피난민의 심정으로 승환은 길가에 위치한 커피전문점으로 들어와서 밖이 내다보이는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그가 방금 탈출한 공포의 거리를 힘겹게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승환은 느긋하게 아이스 커피를 한모금 마시고 있었다.
종석과의 약속시간은 아직 넉넉하게 남아 있었고, 귀에 꽂아 놓은 이어폰으로 몽환적인 알카자의 Transmetropolis 가 흘러나왔다. ‘텀타텀’ ‘텀타텀’ 비트에 맞추어 보라색과 청색이 번지는 음악과 보컬이 흘러나왔다.
창밖을 내다보면서 턱을 괴고 있던 승환의 눈이 어느 순간 슬며시 감기고 주위는 고요해졌다.
누군가 그의 어깨를 툭하고 건드리는 느낌에 그는 눈을 떴다.
“자냐?”
고개를 돌려서 올려다보았다. 주일이의 얼굴이 그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어? 어...”
반갑지 않은 생각에 어색한 표정으로 그를 보고는 슬며시 승환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나가다가, 너 여기 앉아있는 거 보이길레...미안하다고 사과하려고 들렀어.”
주일의 말에 승환이 다시 고개를 그에게 돌렸다.
“그래.” 승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는 안되지만, 뭐......”
그런 그를 주일이 물끄러미 내려다 보았다.
“알았어. 괜찮아. 그럼 그만 가봐.” 승환이 무심한 표정으로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래.”
몸을 돌리던 주일이 다시 고개를 돌려 승환을 내려다보았다.
“근데, 네가 이해 안되는게 당연한거야.”
“그게 무슨 말이야?” 승환이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면서 물었다.
“뭐, 한참 전의 일이고, 사람들은 모두 옛날 일이니 뭐니 하면서 다 지나간 일이라고 하겠지만, 또 어떤 사람에게는 그게 어제일 같이 느껴지고 잊혀지지 않을 수도 있는 거니까.”
주일이 점점 더 이해되지 않는 말을 늘어놓았다.
“...........”
승환은 아무 말 없이 주일을 계속 빤히 올려다 보았다.
“너, 우현이 형하고 대충 6년 사귀었지?”
“...........”
“너, 우현이 형에 대해서 다 안다고 생각해?”
“무슨 말이야?”
승환의 말에 대답대신 주일은 고개를 돌려 시선을 카페의 창 밖으로 두었다.
“뭔데?” 승환이 날이 선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너! 우현이 형 만나기 전에 우현이 형이 누구랑 사귀었는지 알아?”
“...........”
“아. 됐다. 그만두자.” 주일이 승환에게서 고개를 돌려 문쪽을 향했다.
“그래서?” 승환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게... 뭐... 그게 너라는 거야?”
주일이 가만히 서있더니 몸을 돌렸다.
“그래도....” 승환이 말을 잇기전에 침을 삼켰다.
“나 만나기 전이잖아. 그거야 그럴수 있는거지. 안그래?”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승환은 현기증이 느껴졌다. 전혀 생각도 해보지 못한 일이었다.
우현을 만나면서 그가 그 이전에 누구와 만났는지 물어본 적이 없었다. 그것은 그저 우현의 삶일 뿐이었고 우현의 과거일 뿐이었다. 창 밖을 지나가는 저 사람들 모두 과거가 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모두 그렇게 한곳에 머무르다가 다시 떠나게 되고 또 다른 곳에서 머무르는....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 아닌가? 과거의 일이 현재의 삶의 발목을 잡아야 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던 승환은 그렇게 쿨하게 우현의 과거를 들여다보지 않으려고 했다. 또한 그가 그럴만한 권리도 없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주일이 그의 과거의 연인이었다니, 당황스럽고 불편한 진실을 맞닥뜨리게 된 승환은 입을 다물수조차 없었다.
“그게 다였을 것 같냐?” 주일이 도전적인 말투로 승환을 노려보았다.
“너. 저번에 모임에서 나한테 내가 바람피웠다고 했었지?”
“...........”
“그게 누구였을거 같냐? 그 상대도 누구인지 알고 있냐?”
“...........”
주일의 말이 승환의 귓 속을 울렸다. 멍해진 진공 상태 속에서 승환은 마치 허공에 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머리는 그런데도, 가슴 아래쪽은 점점 더 무거워졌다. 심장은 무겁게 뛰고 있었고, 아릿한 고통이 가슴 한쪽에서 피어올라 목을 치고 올라왔다. 두 발은 쇳덩이가 붙어 있는 듯 땅 속으로 꺼질 듯했다. 몸을 가누기가 힘들어져서 그는 한 손으로 커피가 올려져 있는 테이블을 짚었다.
그의 눈 앞에서 주일이 피식 하고 한번 웃더니 몸을 돌려서 문가로 멀어졌다. 그리고 곧 그를 내보낸 문이 묘하게 흔들리더니 다시 멈추었다.
두 손으로 테이블의 끝을 짚고 승환은 간신히 엉덩이를 의자에 다시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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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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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를 가장한 긴장감이 바깥 날씨와 오버랩된다.
흥미롭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