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랑새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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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길에 서점에 들러 승환은 ‘여행 일본어’ 라는 작은 책을 한권 사가지고 집으로 들어왔다.

  

물론 일본어라면 기본적인 히라가나조차도 전혀 깜깜한 그였지만 그래도 종석과의 첫 외국 여행에서 무엇인가 자기가 준비한 것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오랜만에 책상위에 책을 올려놓고 의자에 앉았다.

책의 겉표지에 홈페이지의 주소가 적혀있고, 그 곳에 로그인 하면 책의 내용을 엠피쓰리 파일로 다운로드도 가능하다고 친절하게 적혀있었다.

책장을 넘기고 일본어의 문자가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옆에 다시 친절하게 적혀있는 한글 발음을 따라서 떠듬거리면서 승환은 글자를 읽어보기 시작했다.


‘노력이 가상하지만 아무 소용없을 걸. 넌 공부할 머린 아니잖아.’

친숙한 목소리가 그의 귓속에서 울렸다.

“그건 형도 마찬가지였잖아. 공부하기 싫어서 중학교때부터 격투기로 나갈까 생각했다면서!” 눈은 여전히 책 위의 글자에 두고서 승환이 중얼거렸다.

‘종석이가 일본어를 잘 하니까 걔만 잘 따라다니면 돼.’

“그래도 뭐라도 하는 척이라도 보여줘야지.” 승환이 손가락으로 뒷통수를 긁었다.

“연애하다 헤어진 사람이 나 혼자도 아닌데, 형은 왜 내 주위에서 맴도는 거야?” 쓸쓸한 말투로 승환이 중얼거렸다.

“이제 일년이 넘어가는데.... 형도 참 유별나게 버티네.” 그가 고개를 들어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형 사진 때문인가? 나를 떠나가지 못하는게? 하나 남아있는 형 사진을 버려야 하는거야?”

‘그것 때문이 아니야.’ 목소리가 대답했다.

‘우린 남들처럼 둘 중에 하나가 싫어져서 헤어진게 아니잖아. 그래서 서로에게서 등을 돌린다는 것이 쉽지가 않은거야.’

  


자리에서 슬며시 일어나 승환은 창가로 향했다.

열린 창 밖은 어둑해지면서 하나 둘씩 쓸쓸한 빗방울이 툭툭 하고 떨어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보도블록위에도 앞집의 낡은 지붕위에도 마치 남몰래 그렇게 누군가가 눈물을 흘리듯, 빗방울들이 서러운 소리를 내면서 떨어지고 있었다. 

“그래도 이제 나 보내줘야지. 나 이제 형한테서 자유로워지고 싶다."

그가 손을 들어 검지 손가락으로 콧등을 슬며시 긁었다.

"이런 말 해서 정말 미안해.”  손을 슬며시 창 밖으로 내밀었다. 그의 손 위에도 빗물이 떨어져 그의 손바닥을 간지럽혔다. 

그리고 그의 가슴 한 귀퉁이에 그만큼의 안타까움이 젖어들었다. 


“그때, 그 날, 형이 작업대에만 올라가지 않았더라면...” 멍하니 어두워진 밖을 바라보면서 승환이 중얼거렸다. 아무 소용없는 이야기지만 습관적으로 승환은 그런 생각을 입 밖으로 읊조렸다. 

‘일어날 일은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거야.’ 목소리가 승환을 위로했다.

‘그건 우리의 능력 밖의 일이야. 힘들지만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해. 운명이니까.“


“정을 떼는 일이 너무 어렵다.” 승환이 중얼거렸다. 

“형이 나에게 첫사랑이었는데 말야. 6년동안 형이 내 삶의 전부였었는데.... 6년.. 짧은 시간은 아니지...” 말을 멈춘 그의 입술이 슬며시 씰룩거렸다.

“그래도.. 그래도, 다시 시작해야지. 다른 책으로 페이지를 넘겼으니, 다시 다른 인생을 써봐야지. 형도 이해하지?”

다시한번 쓸쓸한 표정으로 승환은 이제는 제법 굵어져서 소란스럽게 쏟아지는 창 밖을 내다보았다.



토요일 오후였다.


카페의 한쪽 구석에 앉아서 비싸고 맛없는 커피를 홀짝거리면서 승환은 휴대폰에서 ‘2시의 인기글’을 읽고 있었다.

옆 테이블 에서는 이제 간신히 스물을 넘긴 듯 보이는 여섯명의 게이들이 누가 더 끼를 부릴수 있는지 시합이라도 하는 듯 '오모나', '온니이'  라는 간드러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끔씩 간간히 들려오는 그들의 대화 내용에 피식하고 웃음을 지으면서 휴대폰을 들여다 보고 있을 때 그의 이름을 부르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원수는 항상 외나무 다리위에서 만난다고 했다.

“요새 자주 본다? 누구 기다리냐?” 주일이 승환을 내려다보며 씨익 웃더니 맞은편 의자위에 앉았다.

친구인 듯 보이는 서녀명의 낮선 얼굴을 한 일행이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그의 뒤의 통로에 서서 그와 승환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승환이 무슨말을 하려고 입을 여는 순간 그의 친구들 뒤편에 있는 카페의 문이 열리더니 종석이 걸어 들어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그의 시선은 승환과 마주쳤다.

“아, 종석이 형 왔네.”


단순하게 그 말을 했을 뿐인데 갑자기 시퍼렇게 질린 얼굴로 주일이 황급히 일어서다가 중심을 잃고 의자의 팔걸이에 걸려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주일이도 있네? 오랜만이다.” 바닥에 팔을 짚고 일어서는 주일이를 종석이 씨익 웃으면서 내려다보았다. 

“아. 예.. 안녕하세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종석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구부정하게 있던 그가 몸을 돌리고 문쪽을 향해 부지런히 걷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있던 그의 친구들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의 뒤를 따랐다. 

“야! 니 전화번호 바뀌었더라?” 그런 그의 등 뒤로 종석이 큰 소리로 물었다.

여전히 구부정하고 부자연스러운 행동으로 몸을 돌리지도 못하고 고개를 한번 엉거주춤하게 숙여보이고는 주일은 문 밖으로 사라져 버렸다.

  


“쟤, 왜 저러지?” 갑작스러운 주일의 행동에 승환의 두 눈이 둥그래졌다.

“뭐 급한일 있나보지 뭐. 화장실이 급했다던가.” 큰 소리로 웃으면서 종석이 자리에 앉았다.

“형, 주일이 전화번호도 가지고 있었어?” 승환이 놀란 듯 물었다.

“아. 뭐. 아주 예전에 어쩌다 알게 됐었어.” 별일 아니라는 듯 종석이 대답했다.

“근데 왜 걔한테 전화했었어?” 

“아. 그거.” 종석이 다시한번 웃었다.

“너 하고 잘 좀 지내라고 부탁이라도 좀 하려고 했더니, 번호가 바뀌었더라고.”

“쟤는 형이 좀 무서운가보다. 저렇게 줄행랑을 치는 것 보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승환을 보면서 종석이 피식 하고 웃었다.



“근데 갑자기 어쩐일로 대전 지사로 발령이 난거야?” 화장실에 다녀 온 후 물티슈에 손을 닦으면서 승환이 물었다.

“아. 원래는 다른 사람이 가기로 되어 있었는데, 그 사람이 집안에 사정이 생겨서 갑자기 퇴사를 하게 되어서 당장 급하게 가서 일 할수 있는 사람이 나 밖에 없었거든. 노총각에 혼자 살지. 부양가족 없으니 급한대로 몸만 대전지사 기숙사에 들어가서 얼마동안 지내도 되니까 말야.”

말을 마치고 종석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너 보고 따라내려오라고 말하고 싶지만 안되겠지?” 말을 하고는 종석이 겸연쩍은 표정으로 웃어보였다.

“나도 형하고 같이 있고 싶긴 한데.....” 말을 끝내지 못하고 승환이 머뭇거렸다.

“알아. 그냥 해본 소리야.” 

“.......”

“그래도 전에 말한 것처럼 KTX 타면 금방이니까 어쩌면 지금보다도 더 자주 볼 수도 있어.”

“그건 그렇고 후쿠오카는?” 갑자기 얼굴에 생기가 돌면서 승환이 물었다.

“어쩌다가 형이 후쿠오카를 생각해 낸거야?” 

“그거.. 사실...” 종석이 씨익 웃었다.

“회사일로 출장가는거야.”

“아. 그런거였어?” 실망했다는 표정을 승환이 지어보였다.

“그래도 얼마나 좋은 기횐데. 내 비행기표하고 호텔비는 다 회사에서 내는 거고, 니 비행기표만 내가 사 주면 되는건데. 돈도 절약되고...” 종석이 다시한번 씨익 웃었다.

“왜 실망했어?”

“설마. 그럴 리가.” 승환이 큭 하고 웃었다.

“그냥 투정한번 부려본거지. 나야 너무 좋고 황송하지. 형하고 같이 가는건데. 어디는 못가겠어?” 

“으이그, 이 귀여운 자식.” 승환의 말에 종석이 손을 뻗어 검지와 중지 사이로 승환의 코를 잡고 슬며시 흔드는 척 해보였다.

“넌 토요일 12시 비행기 예매해 놨다. 일요일 오후까지 놀고 저녁 비행기로 돌아오는거야. 알았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승환이 활짝 웃었다. 

  


삶에서 어두운 통로를 만났을 때에는 그저 멈추지 말고 침착하게 앞으로 걸어가면 되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다른 방으로 들어가는 문틈으로 밝은 빛을 볼 수 있게 된다.

그러면 용기를 내고 손잡이를 잡고 당기면 되는 일이다.


그 방에서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가 될지는 모르는 일이다.

그저 순간순간을 그 방속에서 나를 환대하는 그와 감사하면서 소중하게 보내면 되는 것이다.

내 능력의 밖에 있는 것 때문에 조바심을 낼 필요는 없다. 

그러기엔 그 방에 있는 동안 내 옆을 흘러지나가는 시간이 너무 아깝다. 

 


커피잔을 들어서 입에 갖다 대면서 그렇게 고마워 하는 눈빛으로 그의 앞에서 그를 보고 미소짓는 종석을 승환은 기쁘게 바라보았다.


    


일요일 밤, 잠자리에 눕기 직전에 승환의 전화가 울렸다.

정현이었다.

“안녕하세요?” 목소리를 가다듬으면서 승환이 인사했다.

“어. 그래. 잘 지냈지?” 정현의 목소리는 밝아보였다.

“네. 형님도 잘 지내셨지요?”

“그래. 종석이 지방으로 간다고 하던데, 얘기 들었니?”

“예.”

“그 녀석이 우리 우현이 하고 제일 친했었는데, 제일 오래된 친구고, 그래서 나도 알게 모르게 그 녀석한테 의지도 하고 그래왔는데, 좀 떨어진 곳으로 간다니깐 섭섭하다.” 그의 너털웃음 소리가 수화기를 통해서 들려왔다.

“그래도 차타면 금방이라서....”

“그렇긴 하지.” 정현이 다시 입을 열었다.

“다음 주말에 오라고 하니까 외국으로 출장 간다네? 얼굴이나 보고 싶어서 부르려고 했더니...” 그의 아쉬운 목소리가 잠시 멈추었다.

“그래서. 혹시 너라도, 시간 괜찮으면 놀러왔으면 좋겠다고 전화했다. 시간 되니?”

“아. 저도..후쿠오카에...” 말을 꺼내려다 승환은 아차 싶었다. 혹시 그가 종석이와 자신이 사귀고 있다는 것을 눈치라도 챈다면 불편한 일이었다.

“기분전환이나 하려고 다녀오려고 준비를...”

“아. 그랬구나.” 그가 섭섭하다는 듯 혀를 찼다.

“어쩔수 없지 뭐. 그래 언제 출발해?”

“예, 토요일 12시 비행기예요.”

“그래. 잘했다. 기분 전환 잘 하고 오고....” 그가 말을 멈추고 아내에게 승환이 주말에 일본 놀러가게 되어서 못온다고 음식 준비 할 필요 없을 것 같다고 전하는 말이 들려왔다.

그러자 무슨 말인가 그녀의 목소리가 나른하게 들려왔다.

“아. 인천 공항이지? 내가 태워다 줄까?” 그가 다시 전화에 대고 승환에게 물었다.

“아닙니다. 저 혼자 가도 되요. 여기 버스 한번에 가는게 있어요.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그래. 그럼 잘 다녀와.”

“예. 다녀와서 뵙겠습니다.” 그가 전화를 끊는 소리가 들려왔다.



전화를 내려놓으면서 승환은 ‘휴우’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자신과 종석의 관계를 숨길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언젠가 그가 알게 된다면 얼마나 화를 내고 노여워 할 것인지, 불 보듯 뻔해 보였다. 


하지만 곧 그는 고개를 저었다.

자신의 손 안에 들어온 행복을 꽉 붙잡고 놓치고 싶지 않았다. 

철 없는 자신에 비해서 종석은 너무나도 큰 거목 같았다. 그리고 자신도 그가 자신에 비해서 너무 과분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의 곁에서 그와의 삶을 누려보고 싶었다.


 

이번만은 하늘이 꼭 그의 바램을 뺏어가지 않기를, 마치 기도하는 마음으로 그는 휴대폰 화면에서 웃고 있는 종석의 얼굴을 오랫동안 들여다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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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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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pa…
  • 작성일
새로 시작하신거 뒤늦게 알고 달리는 중입니다
주일이와 종석이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지네요...
언제나 기다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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