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그리 버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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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모금 남은 맥주를 마셔 버리고 빈 캔을 손아귀에 잡고 일그러뜨리고는 쓰레기통에 처 넣었다.


  

뱃속에 뿌리를 내린 짜증이 가라앉기는커녕 오히려 더 끓어올라 여간해서는 사라질 것 같지가 않았다.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세번 두드리다가 끊으려고 다짐했던 담뱃갑을 움켜쥐고 집 밖으로 천천히 어슬렁거리면서 걸어 나왔다.


텅 빈, 어두운 놀이터의 그네에 쪼그리고 앉아 인기척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 담배 한 가피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그리고 다시한번 주위를 슬며시 돌아보았다. 

  


주위의 아파트의 창문에서 쏟아져나오는 불빛에 놀이터 앞에 서 있는 나무가 쓸쓸하고 희미한 그림자를 던지고 있었다.


“김과장 그 개애새끼.”


입 밖으로 욕이 튀어나왔다.


별 잘못이 아닌 것을 그는 사사건건 꼬장꼬장한 목소리로 사람을 들볶았다.


  

오늘 일도 별것은 아니었다.


재고 조사를 하면서 적어놓은 숫자가 8자인지 6자인지 내가 쓴 글씨인데도 언뜻 구분이 되지 않았다.


잠시 곰곰이 생각을 하다가 그냥 8자로 정하고 보고서를 올렸다.


원래 작은 숫자보다 큰 숫자가 더 그럴듯해 보이지 않는가. 남자가 배포라도 있어서 큰 것을 탐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김과장은 잠시 고개를 갸웃하더니 확실한 숫자냐고 나에게 다시 물었다.


속으로는 ‘쪼잔하게 그깟 숫자하나 가지고....’ 라고 말하고 싶은 생각이 가득했지만, 입 밖으로는 ‘아마 그럴걸요.’ 라고 대답을 했다. 


  

그럼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가면 될 것을 융통성없는 그 김과장은 얼굴이 벌개져서는, 나에게 그깟일도 확실하게 하지 못한다고 닦달을 하기 시작했다. 


8만8천원짜리 운동화가 80켤레인지 60켤레인지 재고조사를 해 놓고도 제대로 모르냐고 승질을 바락바락 내던 그 자식은 퇴근시간이 가까워지고 있는데도 재고조사를 다시 하라고 나에게 소리를 지르고는 자신은 양복을 집어들고 퇴근을 해버렸다.


  

창고에 쌓여있는 큰 박스를 들어 내려놓고 다시 그 안에 정리해서 쌓아놓은 상자를 하나씩 세고 있자니 슬그머니 그 김과장 자식을 향한 분노의 씨앗이 자라기 시작했다.


‘아니 재고가 80켤레이던 60켤레이던 그게 무슨 상관이야.’


화가 나서 나는 빈 창고에서 소리를 질렀다.


‘잘못 세었다고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이 새로 생기는 것도 아니잖아.’ 


굽혔던 허리를 세우고는 옆에 쌓여있던 박스위에 엉덩이를 대고 걸터 앉았다.


‘있는대로 팔아서 이익만 남기면 되지. 그것 좀 대충 적었다고 하늘이 무너져?’


 

당장이라도 그까짓 회사 때려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때마다 할머니의 목소리가 나의 귀에 들려오곤 했다.


“열심히 회사를 다니면 너한테 큰 것 하나 떼어주마.”



그 말을 할머니에게서 처음 들었을 때, 그게 무슨 말인지 엄마에게 물었었다.


“할머니가 영종도에 있던 땅을 골프업자에게 팔면서 번 돈, 그거 너에게 떼어주시겠다는 거야.”


지그시 미소를 지으면서 엄마는 내게 넌지시 말하셨다.


“할머니가 너 독립하는데 도움되라고 아파트 구해주신다고 하셨잖니.”


나는 엄마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그 아파트를 할머님이 나를 위해 사주신 걸 말씀하시는 거였다.


“그게 다가 아니고, 네가 회사만 그만두지 않고 열심히 잘 다니기만 하면, 좀 지나면 할머님이 너 평생 편안하게 살 만큼 유산을 물려주시겠다는 말씀이신거야.”


“정말?” 깜짝 놀라서 나는 물었다.


“할머니에게 그깟 아파트가 문제시겠니?” 엄마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시면서 말을 이으셨다.


“할머니 금고에 지금 들어있는 현찰이 얼만데.....”


  


그래, 할머니의 유산을 받을 때까지만 참고 버티기만 하면 인생이 바뀌는 것이었다.


 

그 꼰대같은 김과장의 면상에 사표를 내던지고 호탕하게 웃으면서 사무실 문을 발로 걷어 차면서 걸어나오는 나의 모습은 상상만해도 뿌듯했다.


‘그래 그때까지만 나 죽었다 하고 참으면 되는거지, 뭐.’


  

아마 그때 즈음이었던 것 같았다.


2년동안 사귀는 동안 그저 뜨뜻미지근 했던 그가, 내 앞에서 잘난체만 해대던 그가 조금씩 표정을 바꾸고 나에게 매달리기 시작하던 시기가 그때부터였던 듯 싶었다.



마치 내가 어딘가에 아파트 한 채가 기다리고 있고, 상속받을 유산이 있다는 것을 눈치채기라도 했다는 듯, 그는 점점 나에게 살갑게 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달착지근해 질수록, 어쩐 일인지 그를 향하는 나의 마음은 조금씩 더 식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 주머니가 가득해질 내 옆에는 그가 아닌 원래 나의 이상형이 있어야 한다는, 나의 이상형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스멀거리면서 스며들기 시작했다.

  


역시 이제 겨우 서른 주위의 설 익은 남자는 그다지 매력이 없었다.


남자라면 삼십 후반은 넘어 사십 초반의 나이가 되어야 남자로서 매력의 절정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이라는 믿음이 생겨났다.


 

인생의 쓰고 단 맛을 모두 맛 본, 마치 봄의 온화함과 여름의 장마와 폭염을 견뎌내고 마침내 황금의 가을이 되어 달콤한 즙이 가득 차 있는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은, 아주 풍성하고 탐스러운 과일과 같은 시기가 바로 남자의 40이란 나이이다.


  

그리고 그런 터질 듯 하고 농염한 나이의 멋진 남자가 나의 짝이어야 했다.


 

그런 생각으로 가득찬 나에게 나보다 두 살 더 많은, 이제 겨우 서른 셋인 그에게 만족을 느낄수가 없었다.


그저 그에게는 아직 여물지 않은 떫은 맛 밖에는, 그 이외에는 어느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의 인생에 나 이외에는 없노라면서 나에게 잘 하겠노라고 나의 팔을 붙잡고 하소연하는 그를 뿌리치고............ 헤어져 버렸다.


  


그러던 그 자식이, 창백한 얼굴에 눈물을 가득담고 나에게 영원을 약속하던 놈이, 이제 겨우 일년만에 다른 놈하고 동거까지 하고 있다는 사실에 기가 막혀 헛 웃음이 나왔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고개를 돌려 106동의 2층 쪽을 바라보았다.


거실의 통유리를 통해 언뜻언뜻 그의 모습이 보였다.


이제 쌀쌀해져가는 10월말의 날씨에 그 자식은 마치 밖에 다니는 사람들에게 보라는 듯이 알몸으로 거실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아마 방금 샤워를 마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겨우 2층에 살면서 커튼도 치지 않고 남사스럽게 알몸으로.....


고개를 돌려야 하지만 어쩐 일인지 나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나도 몰래 그네에서 슬며시 일어났다.


그리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고개를 돌려 아이들이 타는 미끄럼틀의 꼭대기로 올라갔지만, 그리고 발꿈치를 들고 목을 빼고 바라보았지만, 그의 허리 아래로는 보이지 않았다.


 

한순간 그렇게 서 있는 내 자신이 어이가 없었다.


그가 자신의 잘 발달된 근육을 보이면서 알몸으로 내 옆에서 누워있을 때에도 별 관심없이 휴대폰 게임만을 몰두했던 나였다.

  


‘내가 아무리 굶었어도....’


터무니 없이 처량한 생각에 고개를 돌리려는 순간, 그 젊은 녀석이 다가와 그와 후끈하게 키스를 하기 시작했다. 


  

“아. 씨*발. 못 볼걸 봐버렸네.”


그리고 뭐라고 저주를 퍼붓기 전에 그의 거실의 불이 꺼저버렸다.


    


집에 들어와서도,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의 벌거벗은 모습이 눈 앞에 떠올랐다.


하지만, 그것은 미련도 아니었다.


그는 나에게는 그저 신포도에 불과했다.


나는 그가 아닌 삶의 과정을 충분히 거쳐 잘 익고 농염한 빛을 띠는 섹시한 사십주위의 남자를 손에 넣을 자격이 있는 놈이었다.


 

편한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근처 마트에 들렀다 오는 길이었다.


컵라면과 계란두개, 그리고 과자몇개가 들어있는 비닐봉투를 달랑거리면서 손끝으로 잡고는 슬리퍼를 끌면서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발을 옮길 때마다 발뒤꿈치에서 마치 고양이에게 몰려 공포에 질린 쥐의 비명같은 ‘찍찍’ 소리가 울렸다.


어딘가에 공기가 들어갔다 새어나오면서 생기는 소리였겠지만, 난 그 소리가 좋아서 일부러 더 힘을 주어 발을 디디면서 슬리퍼를 끌고 걷고 있었다.


 

승용차 한 대가 내 앞을 가로질러 지하주차장으로 향하는 입구에 정차를 했다.


그리고 열려진 창문 너머로 운전석에 앉은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나와 한순간 눈이 마주친 그는 황급히 얼굴을 돌리고 올라간 가로막이 아래로 차를 몰고는 사라져 버렸다.


그에게 마치 안녕이라는 인사라도 하려는 듯이 어깨위로 올라가 있던 손을 황망히 내렸다.


그리고 슬그머니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생판 남도 아니고 옛 애인을 보았으면 ‘안녕’ 이라던가, ‘어디 갔다 와?’ 라면서 인사를 건네는 것이 인지상정 아니던가?


인간과 인간 사이의 기초적인 예의도 모르는 그의 앞날이 참 고달플 것이 당연했다


그런 기본적인 처세술도 몸에 익히지 않고 있으니 보지 않아도 그의 사회 생활은 피곤할게 틀림 없었다.


  

‘그리고 보니 그 차 번호가 뭐더라.?’


언뜻 눈에 들어왔던 그의 차량번호를 기억해내려고 했다.


69럴 18....


‘하여간 차번호도 생긴대로 참.....’


나 같은 표준의 아이큐를 가진 사람도 한번 보면 대충 기억해 낼만한 거시기한 번호였다.


하지만 그 다음이 생각이 나지 않았다.


“십팔 다음이 뭐였지?”


여전히 그 다음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 씨*발, 잘 좀 봐둘걸.”


  

하지만 한편으론 그것으로 충분할 듯 보였다.


그렇게 거시기한 번호를 한 차가 이 아파트에 또 있을 리가 만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예의없고 버릇없는 그의 성격을 고칠수 있는 방법이 떠올랐다.


  


나는 발걸음을 돌려 지하주차장으로 통하는 좁은 인도를 걸어 들어갔다.


  


한참을 돌아다닌 후, 마침내 한쪽에 주차되어있는 그의 차를 발견했다.


장난이라 해봐야, 나처럼 매너가 몸에 배어있는 사람은 차 표면을 긁는다던지 하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저 아무런 문제 없이 그에게 작은 교훈을 주려고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내가 예상했던 대로 빈 공간이 많던 지하주차장에 주차된 그의 옆자리는 비어있었다.


  


나는 얼른 지하3층으로 내려가서 주차되어있던 내 차의 문을 열었다.


운전할 것도 아니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차의 키를 가지고 나왔던 것은 나의 신의 한수였다.


  


시동을 걸고 천천히 그의 차가 주차되어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후진을 해서 그의 차와 기둥사이에 주차를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공간이 너무 좁았다.


역시 그는 매너란 껌씹다 버릴래도 없는 사람이었다. 어떻게 그렇게 좁은 공간을 옆 차량을 위해서 남겨놓았는지 이해불가였다.


  


두세번을 시도하다가 그냥 앞으로 정면주차해서 넣기로 했다. 안전하게 주차하는 것은 그 방법밖에는 없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주차를 끝내고 나서야 아차 싶었다.


나의 운전석문이 그의 차와 마주해 버린것이었다.


그래도 나중에 그가 차를 뺄 때 고생할 것을 생각하면서 흡족한 웃음을 지으면서 몸을 가능한 굽히고 간신히 조수석을 통해서 문을 열고 빠져 나왔다.


하지만 어딘가에 걸렸었던 듯, 비닐봉투의 찢어진 틈으로 계란 한 알이 빠져나와 바닥에 떨어졌다.


깨어진 껍질 사이로 흰자의 묽은 액체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래도 조심스럽게 들고 가면 될 듯 싶었다. 금방 끓여먹을 라면속에 집어넣으면 오케인 일이었다.


껍질 표면에 뭍은 먼지를 입으로 후후 하고 불면서 막 몸을 돌리려고 하는 때였다.


“너 지금 뭐하냐?”


놀라서 고개를 돌린 나의 시야에 어이없다는 표정의 그가 보였다.


그리고 그의 옆에는 무엇인가 작은 쇼핑백을 들고 있는 그 어린녀석이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그게...”


할 말을 잃고 나는 황망하게 차를 가리켰다.


“주차를......"


"주차장이 이렇게 많이 비었는데?“


그가 다시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피식 하고 웃었다.


“왜 그 좁은 구멍에다가 집어 넣느라고 고생이냐?”


“아, 원래 여기가 내가 주차하는 자리라서......”


“야,”


그가 더욱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나를 보고 피식 하고 웃었다.


“나를 엿을 먹일거면 제대로나 해야지.”


“..........”


“아오, 말을 말자 말을 마.”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자신의 차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몸을 굽혀 차에 오르기 전에 나를 어이 없다는 듯 한번 바라보고는 그 어린놈에게 시선을 돌렸다.


“야, 내가 차 앞으로 빼면 타라. 쟤가 조수석 자리 지 차로 막아놨다.”


  

차에 오르기 전에 그 어린놈이 나를 보고 빙긋빙긋 웃으면서 손을 흔들어 보였다.


  


들고 있던 깨어진 계란을 바닥에 떨구고는 나는 슬며시 그것을 한방에 짓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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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는 잊어야 하는데  ㅠㅠ안보고 살면 좋았을것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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