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으로 난 길 (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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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나를 못살게 굴던 잠이란 놈이, 막상 침대위에 눕고 보니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버린다.
인생은 타이밍이라고 한다.
공부를 하던, 연애를 하던, 취직을 하던, 유학을 가던, 무슨 일이던지 꼭 그 시기가 있고 타이밍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 타이밍을 잘 노리고 있던 사람들이 돈을 벌고, 잘난 년놈들과 연애를 하고 가지고 있는 돈을 눈덩이처럼 불리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그런 삶을 산다고 한다.
역시 나도 그런 듯 싶다. 그런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일단 도망을 가 버린 그 잠이란 놈을 다시 불러오기 위해서 있지도 않은 양도 억지로 만들어서 세어보고, 인생에서 있어본 적도 없는 나에게 찾아 올 행운도 떠올려 본다.
잠을 자려면 좋은 생각이 필요하다.
무엇인가 상처를 받았던지, 기분이 나빴다던지, 억울하다는 생각이 한번 떠오르면 그 다음엔 그런 심장에 상처를 받은 일이 현재 진행형이 되어버려서 꼬리에 꼬리를 물어버린다.
그렇게 되면 잠을 불러오기란 이미 불가능해져 버리는 일이다.
눈을 감고 그렇게 필사적으로 잠을 불러내어, 간신히 잠의 경계선 안으로 한발을 옮기고 나른한 기운을 느끼는 순간 휴대폰이 울린다.
재수없는 인간은 이런 일에도 지지리도 운이 없다.
손을 뻗어 쥐고는 들여다 본 휴대폰의 화면에 모르는 번호가 떠 있다.
그냥 끊어버리려다가 어떤 재수없는 놈인지 욕이라도 한사발 쏟아 부으려고 통화버튼을 지그시 누른다.
“여보세요.”
일부러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상대를 부른다. 상대가 마음을 놓았을 때 뒤통수를 냅다 한방 갈기는 편이 더 화끈하고 시원하다.
“여보세요?”
전화를 건 남자의 느긋하고 푸근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한순간 노여움은 사라지고 호기심이 그 자리를 차지해버린다.
“나야 기상이. 박기상.”
“........”
“잘 지냈지?”
상대의 이름에 놀란 나는 윗몸을 일으켜 앉는다.
“......”
“오랜만이다. 네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그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그 천하의 박기상이가 나와 통화를 하면서 목소리가 떨리고 있다.
“많이 망설이다가 전화 하는거야.”
“.........”
“꼭 한번만 보고 싶은데....”
마치 나에게 사정하는 투의 그의 목소리는 간절함이 배어있다.
“왜?”
붙어있던 입을 간신히 떼어내어 그에게 묻는다.
“꼭 할 말이 있어서.... 한번 만나자. 응?”
“벌써 거의 20년이 흘렀네? 시간 빠르다.”
멋쩍게 웃으면서 그가 맞은편에 앉아있는 나의 앞에 커피잔을 내려놓으면서 입을 연다.
“네가 많이 보고 싶었는데..... 내가 너에게 지은 죄가 많아서 감히 연락을 하기가 힘들었다.”
씁쓸한 미소가 입주위에 번지던 그가 나에게서 자신의 커피잔으로 시선을 돌린다.
“너에게 잘못한 일이 너무 많아서 꼭 너에게 사과를 해야겠기에.......”
그가 다시 자신의 커피잔에서 시선을 돌려 나의 얼굴을 빤히 바라본다.
“그 애하고는 잘 지내?”
무슨 이유로 그런 말이 나의 입에서 나왔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그런 그의 시선이 부담스러웠을지도 모른다.
나의 그 말에 그가 슬그머니 고개를 젓는다.
“너랑 헤어지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녀석하고도 헤어졌어...”
그가 다시 씁쓸한 표정을 짓는다.
“다 잘 안되더라구. 뭐, 너에게 내가 한 짓이 다시 다 나에게 돌아온거지.”
“..........”
“그리고....”
그가 말을 잇기 전 자신의 아랫입술을 앞니로 슬며시 문다.
“그 다음에 너를 자주 생각했어. 너에게 속죄하는 생각으로 항상 미안해 하면서.... 그러다가 이제 나이가 마흔도 후반에 가까워지고 하다보니....... 어느 순간 다시 너에게 연락을 하고 싶다... 꼭 그렇게 해야겠다는 용기가 나더라구.”
그가 말을 끝내고는 나를 빤히 보면서 미안한 표정으로 웃음짓는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그는 여전히 싱그럽다.
나를 설레게 하던 해맑은 미소와 나에게 보여주던 그의 눈웃음도 여전하다.
웃을 때 눈꼬리에 생기던 주름살의 숫자가 몇 개 더 많아진 것 이외에는 그대로인 듯 보인다.
그런데 이제 그의 그런 모습에 어인일인지 더 이상 내 마음속에 설렌다는 감정이 사라져 버렸다.
나이가 들어버린 탓일까? 아니면 과거에 한때, 그를 원망하고 미워했던 감정이 여전히 내 마음속에 남아 있는 것일까?
그와 헤어진 후, 아파트의 주차장에 차를 대고는 아파트 건물 뒤에 있는 작은 공터로 발을 옮긴다.
벤치에 앉아, 늦은 시간에도 그네 주변에서 뛰어다니는 꼬마 녀석들의 외침 소리가 나의 귀에 날카롭게 박힌다.
하지만 어쩐지 싫지가 않다.
나이가 들면서 누군가의 존재가 그리워지는 것이 아닌가 싶다.
손을 뻗으면 닿을 만한 곳에 누군가 나를 보고 웃어주며 말을 건네주는 것이 그립다.
아니 그렇게 해주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지나가다가 우연히 마주친 시선으로 나를 한번 흘끗 봐 준다는 것조차 고맙다. 그것은 내가 존재한다는 의미이고 상대방이 나의 존재를 알아보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와의 사랑은 내가 서른이 다 되어서 시작되었다.
종로에서 우연히 만나 그렇게 우연히 시작했다.
나를 보고 많이 웃어주었다. 해맑은 눈빛으로 나를 보고 웃는 그를 보면, 속된말로 ‘심쿵’ 이라는 것을 느끼곤 했었다.
그리고 그렇게 잘난 그런 사람이 나에게 와 준 것이 너무 고맙고 행복했다.
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론, 그런 그를 잃게 될까봐 두려웠다. 주변에서 그를 아는 사람들이 나에게 그랬었다. 그는 그냥 바람같은 존재라고.... 아무리 붙잡아 봤자.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고 상처받는 것은 나일 뿐이라고.....
그를 잃기 싫어서, 그의 다른 행동을 보고도 모른 척 했다.
그가 다른 남자와 가까이 지낸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에도 나는 못들은 척 했다. 마치 내가 그렇게 모른 척 하면, 그게 사실이 아닌 일이 되어버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어느 날, 명동의 한복판을 걷다가 맞은편에서 그가 다른 남자와 다정하게 걸어오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한 순간, 놀란 나는 그를 피해서 건물의 안쪽으로 뛰어들고는, 숨어서 그들을 지켜보았다. 가슴 속에서 심장이 쪼그라드는 고통을 느끼면서도, 좌절감에 버티지 못하고 땅바닥에 쪼그리고 앉아서도, 그런 그와 마주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여전히 내가 모른 척 하면, 그 남자와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난 후에는 그는 다시 나에게 돌아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에 대한 배신감과 분노보다 그를 잃는다는 것은 내가 살아가는 이유를 잃어버린다는 것과 마찬가지 였다.
그는 마침내 어느 날 굳은 얼굴로 나를 불러냈다.
결국, 그렇게 그에게서 이별 통보를 받았을 때에도, 움찔 하면서 피하려 하는 그의 손을 잡으며 앞으로 내가 더 잘하겠다고 했다.
다른 것 다 필요없다고... 그저 가끔씩 만이라도 만나서 서로 얼굴을 보는, 그런 사이로라도 남아있고 싶다고 했다. 그게 전부라고, 나를 버리지 말라고 그의 발목을 붙잡고 애원했다.
그가 그런 나를 밀어 버리고 떠나버린 후에도 오랫동안 나는 그를 극복하지 못했다.
길거리에서 들려오는 모든 이별노래의 주인공은 나였고, 상처받고 눈물을 흘리는 연속극의 주인공을 보면서 그 또는 그녀에게 빙의했으며 집 앞의 포장마차 주인아저씨와 제일 친한 사이가 되어 있었다.
그가 이별을 통보 한 후, 여전히 그를 잊지 못하고 추억속의 그의 얼굴을 떠올리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기관지가 약해서 꽃가루 알레르기로 고생하던 나는 복용하던 시럽으로 된 약이 떨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처방전을 얻기 위해서 병원을 향하던 나의 머릿속에 그의 집에 놓아 두었던 물약이 떠올랐다.
서로 좋았던 때, 자주 그의 집에서 시간을 보내던 나는, 편하게 약을 복용하기 위해서 약병 하나를 그의 거실 선반위에 놓아 두었었다.
여전히 그를 보고 싶다는 갈망에 그 물약을 찾으러 가는 것이 그럴듯한 핑계가 될 듯 했다.
그러자 다시 가슴이 쿵쿵거리면서 뛰기 시작했다. 그냥 약병을 찾으러 왔다고 말하면서 그의 얼굴을 한번 보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의 얼굴을 잠깐 동안이나마 다시 한번 보는 것과 그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그 때에는 나의 영혼을 팔아서라도 내가 얻고픈 전부였다.
희망과 기대감에 부풀어, 떨리는 손가락으로 그의 현관문의 벨을 눌렀다.
잠시 후, 그는 현관문의 빗장쇠는 걸어 둔 채로 빼끔히 문을 열고는 나를 내다보았다.
“왜?”불쾌하다는 그의 말투에 일부러 더 부드럽게 나는 대답했다.
“선반에 두었던 약을 좀 가져가려고....”
“기다려.”
퉁명스럽게 그가 대답을 하고는 사라졌다.
다시 틈 사이로 얼굴을 비친 그는 문틈 밖으로 병을 든 손을 뻗었다. 그 병을 받으려고 잔뜩 긴장을 하고 나는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운이 좋다면 손가락 끝으로라도 한번 더 그의 피부를 건드려 볼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약병을 건네는 대신 그는 그것을 뒤집어 들었다. 그리고 나의 손바닥 위에 힘차게 흔들었다.
뚜껑이 열려있던 그 약병의 구멍을 통해 나의 손바닥위로, 현관 밖의 바닥으로 묽은 갈색의 액체가 쏟아져 나와 나의 신발과 바지로 튀었다.
깜짝 놀라는 나의 표정을 보고 그는 잔인한 웃음을 지으며 경멸스러운 투로 말했다.
“질척거리지 말고, 좋은 말로 할 때 좀 꺼져라. 응?”
꽝 하고 닫히는 문틈 사이로 언뜻 그의 새 애인의 비웃는 얼굴이 그의 모습 뒤로 희미하게 보이고 그들의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를 사랑했던 만큼, 그에게서 상처를 받은 만큼, 나는 내 자신을 가두고 세상과 단절 시켜버렸다.
마음의 문을 굳게 잠가버리고 아무도 나에게 접근을 허락하지 않았다.
더 이상 어떤 누구로부터 사랑이란 이름으로 상처를 받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단단하고 굳은 것일지라도 시간이 흐르면서 어디에서 부턴지 틈이 생기기 시작했다.
아니면 근본적으로 어떻게든 나는 타인의 존재가 필요한, 어쩔 수 없는 인간인 듯 했다.
살아가면서 내가 아닌 타인의 눈길이, 타인의 목소리가, 타인과의 접촉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은 어떠한 성적인 뉘앙스를 나타내는 것은 전혀 아니었다.
그저, 누군가 타인의 삶 속에도 내가 존재하고 싶었다. 친구처럼, 아니 그냥 알고 지내는 지인으로서, 누군가가 남아도는 시간을 죽이는 데 필요한 심심풀이 땅콩의 존재로서라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마흔이 다 되어서 종로를 다시 찾아, 사람들 속으로 섞여들어 갔지만, 또한 여전히 힘든 것이 바로 그 인간관계였다.
코드의 일치라는 것은 너무도 풀기 어려운 숙제였다.
관심과 우정을 원한다는 나를 많은 사람들의 의미없는 시선들이 훑고 지나갔다.
‘친구가 되려고 해도 외적인 매력이 필요하군.’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가끔씩 나에게 멈춘 시선은 급하게 관계를 원하는 것이 아니면 내 자신도 어떤 것인지 모르는 무엇인가를 바라는 의미심장한 표정을 한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적당한 인간관계를 찾는 것을 힘들어 하는 나에게도 어느 새, 남아 있는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번듯하게 잘 생긴, 나보다 띠동갑도 더 넘는 나이 어린 녀석이었다.
그 녀석은 잘 생긴 만큼 인기도 많아, 주변에 모여드는 녀석들도 꽤 있었다.
그런 그 녀석이 모임에서 혼자 소외되어 보이는 내가 안쓰러웠는지, 어느 새, 나를 그의 절친들 사이에 넣어 주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도 대화에 끼지 못하고 구석에 앉아 물끄러미 타인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나에게 가끔씩 다가와 말을 걸어주곤 했다.
“형님은 왜 연애 안해요?”
녀석의 말에 나는 피식하고 웃었다.
“혼자가 편해. 그런 걸 뭐하러.....”
“그래도 외로울 때도 있을텐데.....”
“외로운게 뭐 어때서?” 녀석을 빤히 보면서 나는 대답했다.
“누가 옆에 있다고 해서 외로움이 사라지는 건 아니더라구. 그래서 난 혼자가 편해.”
“그래서 앞으로도 계속 연애를 안한다구요?”
녀석이 어이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혼자서 편안하게 살거야. 남에게 정 주느니 내 미래 걱정이나 하는게 더 현실적이지.”
그런 나를 보면서 녀석은 안쓰러워 했다.
“그러지 말고, 형님도 좋다는 사람 있으면 그냥 만나봐요.”
나이답지 않게 녀석이 나에게 충고를 했다.
“그리고 나에게 소개도 시켜주고요. 이래뵈도 저 사람 보는 눈은 좀 있거든요.”
녀석의 말에 나는 피식 웃어버렸다.
그렇게 녀석에게 자신만만하게 혼자서 잘 살 것이라고 장담을 한 지, 벌써 10년이 지나고 있다 그리고 이제 이렇게 내 나이가 사십대의 끝자락에 걸려있게 되면서 사는 것에 대해 더 관대해지는 듯 느껴진다.
그것이 이제 헤어진지 거의 20년이 지난 후, 예전에 사귀면서도 나의 등 뒤에서 여럿의 남자들과 바람을 피며 나의 가슴에 비수를 꽂던 그 남자가, 헤어지는 것의 두려움에 떨던 나에게 온갖 모욕과 굴욕감을 안겨주며 나를 걷어차 버렸던 그가, 어느 날 갑자기 다시 나타나 나에게 한 말에 다시한번 흔들리는 이유인 듯 싶다.
귓전에 그가 한 말이 계속 울리고 있다.
“내가 이제 잘 할게. 너에게 예전에 내가 망나니 짓 했던 만큼, 살면서 너에게 아주 잘할게.”
“무슨일이예요. 이 시간에?”
나이 탓으로 돌리면서 열두시가 지나기 전, 집으로 향하던 나를 보다가 한시가 넘는 시간에 녀석을 부른 내가 녀석에게는 평범한 일은 아닐 듯 여겨질 것이다.
포장마차에서 이미 한잔 걸친 나를 보고는 녀석이 나의 맞은 편의 의자에 슬며시 앉아서 나의 표정을 살폈다.
“사실....그게....”
꺼내기 어려운 말을 시작하면서 왠지 녀석의 눈치가 보인다. 그렇게 당당하게 혼자가 좋다고 외치던 내가 정반대의 고민으로 녀석에게 의논을 한다는 것이 우습게도 자존심이 상한다.
하지만 나에게 이런 일에 대해 말 할 사람이 이 녀석 밖에는 없다.
“소싯적에 사귀던 사람이 있었는데 말야.”
“..........”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고 말할 수도 없었던, 나의 과거의 이야기가 나의 입을 통해서 나오고 있다.
욱한 감정에 표정도 바뀌고 그에 대한 미움에 눈물도 찔끔 나올듯도 하건만, 어찌된 일인지, 나는 마치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마음이 편안하다.
“그래도 나 좋다고 하는데, 그래서 다시 찾아왔는데, 사실 나 같은 놈을 누가 좋다고 하겠어.”
겸연쩍게 말을 하고는 내심 녀석의 표정을 살핀다.
소주잔을 들어 한번에 들이킨 다음, 녀석이 빤히 나를 바라본다.
술병을 들어 녀석의 빈잔을 채우고는 나는 멋쩍은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연다.
“그냥, 그 사람도 이제 많이 변했겠지. 그래 이제 확실히 많이 변했을거야. 나이도 이제 들만큼 들었으니....”
“............”
“몸이 나이가 들면 마음도 그렇게 되나 봐. 그냥 이해해주고 싶고, 그냥 살아가면서 편하게 대화하고.... 그러면 되는 거라는 생각도 들고....”
녀석이 빤히 나를 바라보다가 나의 잔이 빈 것을 눈치채고 소주병을 들고 내 잔을 채운다.
“그럼 정말 이제는 누구와 사귈 생각이 있으신 거예요?”
잔을 들어 나에게 건배를 청하면서 녀석이 나를 빤히 보고 묻는다.
녀석의 말에 갑자기 뭐라고 말해야 할지 순간 당황해진다.
아직까지 녀석에게 예전의 애인을 받아주는 듯한 뉘앙스로 방어적인 핑계만 댔다. 녀석이 정말로 궁금한 것은 정말 내가 누군가와 진지하게 관계를 갖기를 원하는 지를 묻는 것이다.
“그래.”
왜 그런지, 그렇게 대답하는 내가 초라해 보인다.
아니 아직까지 혼자가 좋다고 앞에 앉아있는 녀석에게 그렇게 오랫동안 위선이란 위선은 다 떨어놓고, 이제와서 누군가가 그립다고 속내를 드러내는 것이 쪽팔린다.
하지만 마음속에 쌓아두었던 무엇인가에 대한 그리움이 술기운을 빌어서 터져나와 버린다.
“나도 사람이 그립다. 누군가를 품에 안아보고, 누군가의 품에 안겨도 보고 싶다.”
그렇게 말하고는 내 스스로의 말에 감정이 북받치고 부끄러워져서,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난다.
“이제 가자. 너무 늦었다.”
그렇게 일어서서 포장마차 주인쪽으로 몸을 돌리려는 나의 팔목을 녀석이 붙잡는다.
“가지 마세요.”
녀석의 말에 놀라서 나는 고개를 돌려 녀석을 내려다 본다.
녀석은 굳어버린 듯, 고개를 숙이고 오른 팔을 뻗어서 나를 잡고 있다. 잔뜩 힘이 들어간 녀석의 팔 근육이 반팔 소매 밖으로 나와있다.
“그 사람한테..... 가지 마요.”
“............”
“내가........ 내가 그런 사람할께요. 형 곁에서.......”
“...........”
“저, 아주 오래 기다렸어요. 형을.....”
“...........”
“그러니까 가지마요.”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 녀석이 나의 팔을 잡은 손에 힘을 준다.
얼떨결에 나는 다른손에 쥐고 있던 지갑을 땅에 떨어뜨려 버린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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