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아저씨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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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형은 연락이 없었다.
날은 지독히 추웠고, 난 방학내내 아무일도 하지 못하고 방에 틀여박혀 있었다.
조그만 핸드폰을 손에 꼭 쥔채...
어디가 아픈거니? 쯧쯧쯧... 엄마는 내게 그렇게 물었고, 오빠 애인한테 차인거야? 동생은 그렇게 물어왔다.
아무 대답도 하기 싫었다.
가끔은 한 사람때문에 모든 일상이 정지된 내가 싫어져 거짓으로 힘을 내서 지내보기도 했지만...
머리속은 언제나 하얗게 아무생각도 없었다.

더 무서운 것은 형의 얼굴이 잘 생각나지 않는 다는 것이였다.

하루에도 몇번씩 형의 얼굴을 그려보았지만, 내 무딘 손끝은 형의 숨소리까진 살려놓지 못했다.

그렇게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집안 식구모두 자정미사를 드리러 성당에 간 크리스마스 이브...
라디오에서 나오는 캐롤송을 들으며 깜박 잠이 든 난 꿈을 꿨다.
사람이 가득한 전파사... 아줌마의 모습이 보이고, 유난히 북적이는 전파사의 낡은 선반사이로 형의 짧은 머리가 보였다.
난 미치도록 형을 불렀지만, 내 목소리는 어느새 기다란 꼬리로 변해 내 엉덩이에 달라붙었다.
자꾸만 길어지는 나의 꼬리. 형의 모습은 점점 작아져가고 아줌마는 가위를 들고 나를 향해 걸어왔다.

'싹둑싹둑...'

가위소리는 내 머리를 긁어댓고, 언제나 그렇듯 꿈속의 나는 도망칠수 없었다.
점점 커지는 가위소리... 난 땀에 젖어 잠에서 깨어났고, 손에 들려진 핸드폰의 불빛을 확인했다.
가위처럼 펼쳐진 핸드폰 속으로 들려오는 희미한 목소리 형이였다.
꿈은 아닌데...꿈은 절대 아닌데...

"나야..."

형은 울고 있는 듯했다. 나도 울었다.
왜 울지? 왜 울어 반가울텐데...서로 반가울텐데 왜 울지?
아주 낮은 흐느낌의 대화.

"많이 힘들지? 그럴꺼야 그지..."
"뭐야 오랜만에 전화해서 한다는 소리가..."
태연한척한다는 나의 대답

"전화하고 싶었어... 알지? 정말 전화하고 싶었는데..."
"하지 그럼 하면 되쟎아... 무슨 변명이 그래"
"그게 아니라..."
"형은 핸드폰이 없쟎아... 내가 할수 없으니... 형이 해야지. 내가 별로 안보고 싶었구나."
"그게 아닌데..."
그래 형 내가 하려는 말은 그게아닌데... 그래 형 알지?

형은 전화끝에 전화번호하나를 알려주었다.

"가게 전화번호야 아침엔 내가 혼자 있으니까 전화해도되... 전화할꺼지?"
"그래요..."

일곱자리의 숫자는 못으로 새긴듯 머리속에 박혀들었다.

전화를 끊고, 밖으로 나온 나는 교회 성가대들이 캐롤을 합창하는 어둑한 거리로 나왔다.
그리고 오리온 전파사의 맞은편 허름한 호프집에 들어갔다.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연인들로 가득한 호프집에서 난 홀로 앉아 맥주 한잔을 오래도록 마시며, 새로운 꿈을 꾸었다.
한마디를 중얼거리며...

'끝이 아니였어. 그것봐 끝이 아니였쟎아...'

남자와 여자, 행복한 그들의 모습. 내가 꿈꾸는 꿈이 그들과 다른 것일까? 그건 아닌것 같았다.
사라지는 불꽃속에 보이는 할머니를 쫓아 쉼없이 성냥을 그어대던 성냥팔이 소녀처럼 그렇게 난 그날 밤 처음으로 난 진짜 내몫의 꿈을 꾸고 있었다.

널부러진 방안, 그 가운데에 벌거벗고 서있는 한 남자 그리고 이제 막 방에 들어선 그의 부인

부인 : .........
남편 : 당신....
부인 : 아무말도 하지 말아요.잠깐 동안만...
남편 : 아니... 당신이 오해하는거...
부인 : 아무말도 하지 말라니까요! 잠깐만 제발요.
남편 : ......

침묵...침묵...

부인 : 언제부터였어요? 이렇게 된게...
남편 : 뭐가?....
부인 : 난 아무 의심도 안했는데...설마... 이런일은... 정말 이런건 상상도 안했는데...
남편 : ....
부인 : 바람을 피우지 차라리...이게뭐야...난 어떻게 하라구.... 난 어떻게 해야되는거야?
남편 : .....

울지않으려고 꽉다무는 부인의 입술
부인 : 한가지만 물어볼께요?
남편 : ....어떤건데?.......
부인 : 당신 그 아이 좋아해요? 아니....사랑해요?
남편 : ....그건....
부인 : 당신이 나 안사랑하는 건 참을 수 있지만.... 하지만 하지만....그건...

눈물을 터트리고 마는 부인.... 그녀가 흘리는 눈물은 그러나 슬픔이나 질투에서 흘러나오는 눈물은 아니다.
그 눈물은 자신이 만들어 내지 못했던 남편의 환한 얼굴에서 비치는 그 아이의 얼굴을 기억해내며, 밀려드는 두려움때문에 흘리는 눈물이다.

부인 : 그 아이 잊을수 있겠어요?
남편 : 난 그저 잠깐....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사이는 아니야... 그 아이와...
부인 : 그럼 우리 이사가요. 나 이동네가 왠지 싫어요.
남편 : 그건....
부인 : 나 살고 싶어. 당신과 함께... 사랑인지 뭔지는 모르지만, 이런식으로 내가 물러서는건 싫어...
당신 지금 나한테 얼마나 잔인한지 알아요?

벌거벗은 남자의 웅크린 몸위로 비추는 푸른 형광등

남편 : 그래...당신 하고 싶은대로 해....

조용히 방문을 열고 나오는 부인. 어두운 전파사 가운데 차가운 벽에 기대어 중얼거린다.

부인 : 그래 당신을 사랑하는 건 아니야... 처음부터 당신을 사랑하진 않았어. 하지만 이제와서 당신이 이럴줄은 몰랐는데...
이런건 적어도 아닐꺼라고 생각했는데....
다음날... 부인은 부동산에 가게를 내놓았고, 남편은 드문 말수가 아예 사라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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