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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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아침,
먼저 눈을 뜬 그가 나를 불렀다.

" 자네 은행 계좌 갖고 있나...? "

" 예?... "

여기서 며칠 묵으려면 돈이 필요할테니 계좌번호를 불러달라는 것이었다.
어디서 돈을 입금이라도 시킬 모양인지,
내가 계좌번호를 적어준 메모를 받으며 전화를 한 통화 쓰자고 했다.

그가 어디론가 전화를 하는 동안,
혹, 불편해 할까 잠시 자리를 비워줬다가 들어오니,
저녁즈음에 은행에 가서 확인해보라고 하였다.

다소 미안한 마음도 들고,
당연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무튼 재정적인 부담이 없어진다는 것은 분명 괜찮은 사실이었다.

그는 말이 별로 없는 듯했다.
엄격하게 말하자면,
말이 없다기 보다는 말을 별로 하고 싶지 않아 보였다.
주로 수다를 떠는(?) 사람은 나였고,
생김과는 다르게 (나의 생김은 과묵한 편) 이것저것 챙겨주는
내 모습에 그도 미소를 띄우기도 하였다.

여관에서의 일과는 매우 단조로왔다.
아침에 일어나서 밥먹고,
(일찍 문을 여는 식당이 없는 터라, 내가 가게에서 사와야 했다.)
점심때와 저녁때는 시켜먹고,
늦게 일어나는 터라 늦게까지 잠을 들수 없었기 때문에,
밤참도 사와 먹었다.
시간마다 약바르고
(후에 먹는 약도 사와서) 약먹고,
그리고는,
티비를 보거나, 사온 신문을 보거나,
이런저런 얘기를 하거나...
그것이 전부였다.
나의 도움은 화장실 갈 때와 밥먹을 때,
필요한 것을 사오는 것 뿐이었다.

" 다녀올께요... "

은행 마감시간이 다 되어 근처 가까운 은행을 찾아갔다.
현금카드를 인출기에 넣고 비밀번호를 찍고 잔액을 조회했는데...

이상한 숫자들이 화면에 나타났다.

" 어? "

유난히 ' 0 ' 이 많았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이백만원이었다.

' 허...대단허네... '

내 돈이 아니니, 뭐 그다지 놀랄 것이 없었지만
단지 전화 한 통화로 바로 이만큼의 금액을 끌어 올 수 있는 그가
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불어 정상적이지는 않다는 확신이 강해졌는데,
한편으로는 그런 미지의 그가 더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모두 현금으로 인출한 후,
여관으로 돌아온 나는,
그것을 그대로 그에게 주었다.

" 나한테 줄 필요 없네."
" 작은 돈이지만, 자네가 갖게. 그것으로 여관비와 기타 비용에 충당하고... "

" 예? "

난 거부했다.
'인류애 실천자'로서의 상상에 찬물을 끼얹기 싫었을 뿐아니라,
내 자발적 동기가 왜곡되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결국,
쓰고 남은 것은 돌려 주기로 하였다.

그날 저녁은 푸짐했다.
평소 먹고 싶었지만 먹지 못했던 이름도 희한한 중국요리들을 여관으로 시켰고,
그 요리들과는 어울리지 않았지만,
편의점 등에 나가 썸씽스페셜등 평소 못먹어보던 술을 또한 사왔다.

그는 아직까지 팔을 움직이는데 어려움이 있었지만,
처음보다는 다소 나아진 모양이었고,
그래도 식사할 때는 나의 도움이 절대적이었다.

음식은 순전 나를 위해 시켜온 것이었다.
나, 두 젓가락에
그, 한 젓가락의 비율이었다.
(그는 음식을 천천히 삼켰고 나는 허겁지겁에 가까웠다)

" 저.... 형님이라고 부를께요..."

그가 부드러운 미소를 띄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 술 한잔 하시겠습니까? 형님? *^^* "

그가 고개를 저었다.
그런 그의 모습이 매우 귀엽게 보였다.
술기운 때문이었는지 기분이 좋았다.

침대 머리 맡에 등을 기대고 앉은 그가
잔잔한 미소를 띄며 나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미소 띈 그의 얼굴이 더욱 매력적으로 보였다.

" 자네 나이가 27이라고 했는가? "

" 예... "

" 어떻게 하다가 아직 졸업도 못했나? "

" 삼수하고 휴학하고 군대갔다오느라구요... "

" 음... "

잠시 무엇인가를 생각하던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 여러모로 자네에게 미안하네... 좀 나아지는대로 바로 나가겠네..."

" 아니에요, 괜찮아요... 다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인데요..."

학교 강의를 못들어가는 것에 대한 불안감도 없지 않았지만,
왠지 그와 함께 있는게 싫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두근거리게 하는 그였다.

나를 보는 그를,
마주 볼 수 없었다.
그냥 부끄러웠다.
술 때문인지 몰랐지만, 머리가 화끈 거렸다.

" 아.... 정말 잘 먹었다... 이만 치울께요. "

괜시리 부산을 떨며 음식을 치웠다.
티슈에 물을 약간 묻혀 그의 입술을 닦아 주었다.
비누 냄새였지만 가까이서 맡는 그의 향기가 좋았다.
안아 보고 싶다는 충동이 강하게 밀려왔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나는 질끈 눈을 감고 일어나,
다시 방을 정리하였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을 감은채 다시 침대에 누웠다.

" 시간이 많이 늦었어요... 그만 주무세요... "

바닥에 이부자리를 깔고 불을 끄고 나서는
나도 누웠다.

잠이 오질 않았다.
그냥 괜시리 마음이 꽁닥거렸다.
머리가 가끔 띵띵거렸고, 다소 현기증까지 일어났지만,
내 마음의 흥분은 가라앉지 않았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
그의 숨소리가 고루게 들렸다.

다른 생각을 하려해도,
그의 숨소리가 한번씩 들릴 때마다
나의 생각은 그에게 빨려들어가곤 했다.
나만의 실갱이를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왠지 답답함을 느끼고 나는 자리에서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창문 커튼 사이로 내온싸인의 불빛이 깜박였다.
그 깜박임과 동시에 그의 늠름한 얼굴과 듬직한 체구가 나타났다 사라지곤 했다.

내 의지가 아니었다.

나는 그냥 천천히 곤히 자고 있는 그에게 다가갔다.
그의 숨결이 고왔다.
나는 그의 얼굴에 내 귀를 가까이 했다.
내 귓볼에 그의 숨결이 느껴졌다.
난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가만히 그의 입술에 나의 입술을 갔다 대었다.
그는 미동도 없이 잠에 빠져 있었다.
그에게 다가가는 동안 내 심장은 터질 것 같았으나,
그의 입술에 내 입술이 닿는 그 순간,
난 오히려 어떤 잔잔함 속에 파묻히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를 있었던가...
고개를 천천히 돌려 내 볼에 그의 입술을 느껴보았다.
그의 숨결이 내 볼을 타고 흘렀다.

그의 귓볼이 탐스러워 보였다.
가만히 입을 맞추는데,
그가 움찔하는 듯 했다.

나는 놀라지도 않았다. 이유는 몰랐다.
그저 더이상 바랄게 없다는 생각 뿐이었다.

가만히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보았다.
그가 잠에서 깨었는지,
그냥 멍하니 나를 보고 있었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을까...
나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그의 입술에 내 입술을 대었다.
그가 숨을 멈추는 듯했다.

그러나...

뜻밖에,
그가 자신의 입술을 내게 열었다.
그의 혀가 내 입술에 느껴졌다.
처음 느껴보는 타인의 혀를 통해,
난 난생처음 낯선 감각의 세계로 빠져들고 있었다.

이런 모든 낯선 일들이
모두 예정에 있었던 듯이 자연스럽게 흐르고 있었다.

나도 입술을 열었고,
나의 서툰 혀는 그저 그의 혀만을 따라할 뿐이었다.

세상에 나는 없었다.
오직 나의 입술의 감각과 떨림, 숨막힘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가 몸을 옆으로 움직였다.
나로 하여금 올라오라는 뜻이었다.
난 그대로 침대에 올라갔다.
자연스럽게 그에게 내 팔 베개를 시키고
바로 누워있는 그를 옆으로 안으며
다시 그의 입술을 찾았다.

그의 체온이 따뜻했다.
나의 몸은 점점 달아올랐다.

내가 벗고 싶다는 충동을 느낀 것과,
그의 손이 허벅지 언저리를 더듬은 것이 동시였다.

그와의 첫 밤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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