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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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에 대한 나의 사랑은 어느 누구에게도 한치의 틈을 줄 수 없을만큼 강렬하고, 애절하다.
그리고, 그 깊이만큼 아파해야 한다.
깊으면 깊을수록 더 멀리 달아나야만 하기에 애써 감추어야 하는 현실은 서글프다.
우리의 만남은 시작부터가 영원히 함께 할 수 없는 N극만이 존재하는 자석과도 같았기에…….


어느덧 달력의 첫장을 넘겨야 하는 순간을 향해 종종걸음 치고 있다. 간간히 날리던 눈발도 모습을 감춘 지 오래 되었다. 유난히 일찍 선보인 첫눈이기에 올 겨울 눈구경은 실컷 할 수 있으리라 내심 기대했었다. 그의 목소리를 다시 들을 수 있었던 그 해 겨울처럼. 하지만 그를 다시 볼 수 있을 거란 믿음이 약해지는 만큼 함박눈에 대한 기대도 조금씩 조금씩 삭여가고 있다.


병원 신세는 참으로 처량하다. 화장실에 조차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끼고 다녀야 하는 현실은 족쇄를 차고 다니는 죄수에 버금갈 만큼의 구속임에 틀림이 없다. 게다가 간병인을 두고 스스로는 용변조차 볼 수 없는 현실이란 끔찍하기 짝이 없다. 맛없는 병원밥을 먹어야 하는 신세도, 매일같이 혈관주사를 맞아야 하는 신세도, 간혹 들르는 자식들의 걱정어린 시선을 대해야 하는 신세도 달가운 것은 아니다. 게다가 흰 눈이 쏟아지고 있는 창밖을 바라보고만 있다는 것은 죄악이다.

[XX기상대 관측 사상 최고의 적설량을 기록한 오늘…]

병원 건물을 병풍처럼 둘러싼 산들을 온통 뒤덮고도 모자른지 뉴스에선 내일 또 눈이 내린다고 했다. 시가지에서 멀리 떨어진 이 곳까지 오는 교통편은 이미 두절되었다. 겹겹이 끼어 입고 선심쓰듯 들락거리는 문안객들을 한동안 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오히려 다행일 것이다. 이젠 누워계신 할머니보다 가끔 들르는 친척들이 더 귀찮게 느껴진다.

"어휴~ 내가 늙어서 여러 사람 고생시킨다.
늙으면 얼른 죽어야지."

또 시작이시다. 제발 그런 말씀만이라도 않으시면 괜찮을텐데……. 늙고 병든 게 죄가 아니라, 가난이, 사회가 죄인 것이다. 좀더 좋은 환경에서 치료받을 수 없는 현실이 죄인 것이다. 할머니께서 이런 말씀을 하실 때랑 식사를 많이 안하실 땐 막 화가 난다. 얼른 기운을 차리셔야 할 텐데, 죽지 못해 미안해하는 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내가 여기 있는 보람이 물거품처럼 사라지는 것 같다.

오늘 아침도 한참을 씨름을 하며 겨우 마쳤다. 하루 세 끼를 꼬박 이렇게 수발을 해야 한다. 그것은 별로 수고로울 게 없다. 잠깐 잠깐 운동을 위해 이동하는 것, 화장실 다녀오는 것 외에는 어쩌면 나에게 있어 이곳은 휴양원같게도 느껴진다. 그 동안 못 읽었던 책도 마음껏 읽을 수 있고, 먹을 것도 쌓여있다. 다만 한 가지, PC가 없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저기, 할머니 좀 봐주세요. 저 식사 하고 올께요."

옆 침상의 보호자분께 부탁을 드리고 병실을 나섰다.

승한병원. 이곳은 노인전문병원이다. 내 할머니께서 이 곳을 찾기 전까지는 그저 시외로 빠져나갈 때 얼핏 보곤 했던, 이름조차 기억할 수 없었던 곳이다. 할머니는 일주일 전 노인성 치매로 인해 여기에 입원하셨다.
병원에서 나는 503호 아저씨, 총각 내지는 애기로 통한다. 보호자들 중에서는 제일 어린 나이대에 해당하며, 가끔은 딸자식을 둔 아주머니들의 남자친구감, 사윗감 물망에 오르내리기도 한다.
워낙 넉살이 좋기도 하거니와 전역한 후로 왠만한 아저씨들은 저리 가라할 정도로 뻔뻔함에 있어서 도가 텄다. 때론 나의 이런 안면몰수식 농담으로 간호사들이 당황하기도 하지만, 내가 이 병원에 발을 들여놓은 10시간 만에 왠만한 간호사는 물론, 간호원장까지도 농담을 주고 받는 사이가 되었다.
사지 멀쩡한 젊은 녀석이 병원에서 지낸다는 것은 보호자 처지라도 너무 혹독한 시련이다. 그런 따분함을 달래기 위해 나는 503호 병실 안의 모든 할머니들과, 보호자들과 친구가 되어버렸다. 그곳을 드나드는 의사와 간호원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병실 안의 유일한 남자 보호자, 그것도 젊은 남자 보호자라는 존재는 그들에게도 낯선 모습임에 틀림없었다. 또한 제법 힘을 쓸 수 있는 마당쇠가 되어주는 것은 그들에게도 고마운 일이었는지, 먹성좋은 나는 병실안의 먹을 것들을 모조리 접수하고 다녔다. 할머니들은 그런 나에게 하나라도 더 챙겨주려 하시니 나에겐 지상낙원과도 같은 곳이다. 물론, PC만 있었더라면.

병원 건물 옆에 있는 식당이라곤 달랑 하나 밖에 없다. 가격은 둘째 치고서라도 공기밥이 너무 적어서 항상 두 공기는 더 추가시켜야 했다. 할머니께서는 자식들이 슬쩍 찔러놓고 간 지폐를 온통 쥐어주시며 '밥 먹고 오너라' 하시지만, 그 돈에 손을 댈만큼 궁핍하지는 않았다. 굶는 일이 있어도 손댈 마음도 없었거니와 내 식대는 응당 그들이 지불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하루 세끼 식사로 딱 맞아떨어질 정도 밖에는 되지 않았지만.

"잘 먹었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 현관은 눈이 녹아 얼어버렸는지, 짧은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거북이 걸음을 하게 만들었다. 곧이어 이어지는 마당은 구름 새로 빼꼼히 고개를 내민 해로 인해 이미 질펀해져 있었다. 신발만 튼튼했더라도 굳이 애먹을 필요까지는 없었겠지만, 눈밭을 한발 내딛기도 불안할 정도로 내 신발은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기에, 조심조심 자갈길을 찾아 금새 쓰러질 듯한 등나무 벤치로 향했다.

휴~.
식사 후의 담배 한 모금은 생각보다 꽤 상쾌하다. 답답한 병원 안에서만 지내다 가끔 찬바람 맞으며 빨아들이는 담배는 절로 콧노래를 나오게 한다. 노래를 흥얼거리며 병원 건물은 외면한 채 높이 솟은 뒷산을 바라보노라면, 그제서야 그 아이의 얼굴이 떠오른다. 지난 밤 그 모습을 떠올리려 갖은 애를 써봐도 쉽사리 떠오르지 않던 얼굴이 만지면 만져질 듯 산중턱에 아로새겨져 있다. 이제 목소리만 떠올리면 된다. 목소리만.

병실로 돌아왔다. 할머니 약을 챙겨드려야 하고, 각 침대의 휴지통을 다 비워야 하고, 침대 정리를 하고, 병실 청소를 해야 한다. 곧 할머니들을 물리치료실에 모셔다드려야 하고, 점심 준비를 해야한다. 생각보다 병원 시계는 참 빨리 돌아간다.

"야야~ 총각아!
니는 애인이 없나? 이리 좋은 주말에 세사 병원에서 이기 뭐하는 것고?
애인하고 데이트도 하고 그래야쟤."

경상도 억양이 강하게 섞인 경상도 할머니시다. 경상도 할머니는 내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부터 의사에게 나갈 날짜를 보채고 계셨고, 이제 정말 얼마 안있으면 나가실 분이다. 할머니는 유독 나를 귀여워하신다. 나 역시 그런 털털한 할머니께 때론 친구처럼, 때론 애인처럼, 때론 친손자처럼 살갑게 대했다.

"할머니, 저 애인 있을까요, 없을까요?"

얼른 대답은 않고, 얼굴에 함박 웃음을 머금으며 또 한바탕 할머니와 농담따먹기를 시도한다.

"와~ 키도 크고, 인물 좋고, 착하고, 저리 성격도 좋고 자상한데, 당연히 있긌재.
애인이 뭐하노? 몇살고?"

할머니들 눈에는 젊은 사람이면 죄다 인물이 좋아뵈는 가보다.

'그래요, 할머니. 이렇게 키 크고 인물도 좋은데, 왜 그 아이는 절 받아들일 수 없는 걸까요?'

"할머니, 저 애인 없어요. 얼마전에 차였는 걸요?"

"와! 우짜다가? 그 년이 눈이 삣겄쟤.
내가 참한 샥시로다가 소개를 해주까?"

"아니예요, 할머니.
저 애인 많아요. 시내에 나가면 길에 널렸는 걸요.
할머니, 저 목마른데 아침햇살 하나 꺼내먹을게요."

그렇게 핑계삼아 두 개를 꺼내어 따고선 할머니께 하나 건내며 침상에 걸터앉는다. 한모금 쭉 들이키신 할머니는 어깨를 쓰다듬고, 팔을 쓰다듬고는 이내 손을 잡으시며

"아이쟤? 니 애인 있쟤? 내 다 안다.
요 있다고 데이트도 몬하고 우짜긋노.
퍼뜩 할머니 나사가꼬 니도 데이트도 마음대로 하고 해야쟤" 하신다.

'그래요, 할머니. 저도 그러고 싶어요.'

공기밥을 추가할 돈이 없어 이번엔 비빔밥을 시켰다. 역시나 양은 턱없이 부족했지만, 이번엔 이걸로 때울 수 밖에 없었다. 담배가 떨어졌으니 담배값은 남겨야 했다. 얼마전 인상된 담배 가격이 그 날따라 더 부담으로 다가왔다.

산아랫동네의 겨울 저녁은 어둠이 일찍 찾아온다. 대충 껴입은 외투로는 사정없이 몰아쳐대는 바람이 부담스러워 곧장 들어갈까 했지만 발걸음은 또다시 예의 그 벤치로 향했다. 머릿속에 맴도는 Elgar의 "Salut d'Amour Op.12"를 흥얼거리며, 내 영혼은 저 멀리 시간여행을 떠날 준비를 시작했다.

감미로운 Elgar의 선율에 따라 새하얀 시트로 감싼 침대 위에서 아침 햇살에 눈뜨기를 기다리는 그를 바라보며 조용히 미소짓는 그와의 아침. 부시시 눈뜬 그의 이마에 조용히 입맞추며 '사랑해' 하며 속사이는 우리가 함께 하는 아침. 내가 그리던 그 아침.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아침.

콧노래가 끝이 났을 땐, 그의 얼굴이, 그의 목소리가 떠오르지 않아 또 한동안 당황했다. 발버둥칠수록 빨아들이는 블랙홀처럼, 내 기억의 끝자락에서 그의 존재가 흩어져가고 있었다. 그 끝을 잡아보려 악을 썼지만, 어느새 그는 내 기억에선 멀리 달아나 있었다.

뚜─.
심호흡을 하고, 그의 번호를 눌렀다.

[지금 고객께서 전화를…]

딸깍.
다행이다. 신호가 가는 동안 내 안에 자리했던 불안과 공포는 이것으로 일단락되었다. 나는 아직 그에게 다시 연락한 것이 아니니까, 아직 그가 거절한 것이 아니니까.
나는 해바라기다.

담배에 불을 붙이곤 병원 건물 뒷편으로 발길을 옮겼다. 구석진 곳엔 아직 녹지 않은 뽀얀 눈이 소복이 쌓여있었다. 찬바람에 찢어질 듯한 손을 비벼가며, 입김을 불어가며 대충 녹인 후 탄탄하게 눈뭉치를 만들기 시작했다. 너무 어두워지기 전에, 손이 얼어붙어 버리기 전에. 갓난애기 머리통만한 눈덩이에 주먹만한 눈덩이를 올리고, 눈을 붙이고, 눈썹을 붙이고, 코를 붙이고, 팔도 만들었다. 그리곤 벌겋게 얼어붙어버린 손을 뱃속에 품고 꼬마 눈사람을 조용히 바라보며 속삭였다.

사랑해.

다음날 기필코 전화를 했고,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여전히 건강했고, 밝았고, 맑았다. 바뀐 전화번호를 알려줬고, 언제 한 번 다시 보자는 얘기도 덧붙였다.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라는 것이 어떤 건지 알 수 있을 듯했다.
그날은 깊은 새벽 몇일 전 잠시 시내에 들렀다 사들고 온 책 중 한 권을 독파하면서도 그의 목소리를 기억하려 노력했다.

삐삐─.
삐삐─.
다른 책을 꺼내어 펼치는 순간 소리가 울렸다. 어디서 나는 소리인지 한참을 귀기울이다 내 휴대폰에서 나는 소리란 걸 깨달았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문자를 보내온 사람이 있을 리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떠오른 그의 얼굴. 조심스레 메시지를 확인했다.

[창문을 두드리는 바람이 너무 세요. 무서워.]

내가 받은 가장 행복한 문자 메시지. 그는 이렇게 사랑스러운데…….


"기억 나? 내가 결혼 허락하던 날, 그날도 이렇게 눈이 왔었어."
"그래 기억 나. 언니랑 셋이 눈싸움도 하고 눈사람도 만들고…"
"꼬마 눈사람도 만들었어. 딱 셋만 낳으라고."
"그래…"
"근데, 다음날 나가보니까 다 녹고 없어졌어."
"…그랬어?"
"형부, 나아… 가슴 속에 담아둔 사람이 있거든?
가슴 속에 담아두고 보고 싶을 때 꺼내보고 그랬거든?
그런데, 나 혼자 그러는게 너무 힘들어.
힘들어서 사람들한테 자랑도 하고 그러고 싶은데…
그러면 눈사람처럼 녹아버릴까봐 겁이 나.
녹아서 없어지면… 다시 꺼내보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잖아."

공효진. 연기를 잘하는 연기자. 개성 넘치고 깨끗한 이미지의 연기자. 그녀가 나오기에 오랜만에 드라마라는 것을 보기 시작했다. 형부를 사랑하기에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사랑. 꺼내놓으면 녹아 사라질까 겁나는 눈사람을 사랑하는 그녀는 참으로 불행한 사랑을 하고 있다. 남들에게 떳떳하지 못한 사랑. 스스로는 떳떳할 수 있어도 남들의 손가락질이 두려워지는 사랑. 그녀는 오늘도 그 사랑에 아파하고 있다.

친구들은 가끔 물어온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냐고. 나는 당당히 말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지만 혼자서 사랑하고 있다고. 하지만 누구냐고 물어올 땐 그냥 슬쩍 웃어넘긴다. 그리곤 멀리 떨어진 곳에서, 만나고 싶어도 쉽게 만날 수조차 없는 곳에서 살고 있을 그를 떠올린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떠올리고 있을 그를 떠올린다.
그리곤 이내 씁쓸한 미소를 짓는다. 말하고 싶어도 말할 수 없는 사람이기에, 자랑하고 싶어도 자랑할 수 없는 사람이기에, 그 해 겨울 녹아 없어져버린 눈사람처럼 내 기억에서조차 영원히 녹아 없어져버릴까 두려운 사랑이기에.
내 사랑은 드라마 소재로도 망설여지는 사랑이기에.

N극과 N극은 마주보지 않는다. 가만히 놓아두면 S극을 찾아 홱하니 돌려버린다. 나는 그런 N극을 사랑하는 N극이다. 함께 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하지만 내 생이 오로지 하나의 N극만을 쳐다보며 살았노라면, 후에라도 내 사랑에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영원히 멀리서 지켜보기만 해야 할 지라도.


하하하. 오랜만에 글 쓰려니 잘 안되네요.
여기에는 처음으로 올리는 글 같은데…….
다음에 기회가 되면 또 다른 글을 써보고 싶네요.
능력이 안따라줘서 문제지만. 하하.
배경음악은 Yuriko Nakamura의 "Winter romance"와 Edward Elgar의 "Salut d'Amour Op.12"입니다.

다들 좋은 하루 되십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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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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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pa…
  • 작성일
   저도 드라마 눈사람을 보며 가슴이 찡했어요..

 특히 형부에 대한 사랑을 눈사람에 비유하는 부분은 정말로 절묘한 표현이라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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