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re Black christmas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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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반장은 별장 앞 도로에 나와 있었다. 조금 전과는 달리 그의 눈빛이 꽤 날카롭게 빛났다.
조금은 경찰다운 미더움이 보였다.
그는 차창이 파손된 제설차 이곳 저곳을 살피며 연신 고개를 저어댔다. 깨어진 유리조각들
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불길한 예감이 엄습해 왔다.
"이거 큰일 났습니다. 엉망으로 망가졌습니다."
"예? 망가지다뇨? 그럴 리가요……."
내가 인정할 수 없다는 듯 다가서자 박반장은 보기 흉할 정도로 일그러진 차량의 타이어들
을 가리켰다. 네 개의 타이어 모두가 바람 빠진 풍선처럼 푹 꺼져 있었다.
"누군가 고의로 이런 짓을 한 겁니다. 게다가 차 키는 물론이고 이씨도 사라졌어요. 차는 엉
망으로 망가져 있고, 우린 고립된 겁니다……!"
뼛속까지 시린 추위 때문인지 갑자기 온 몸이 떨려왔다. 영화나 소설 속에서만 보아왔던 그
런 극적인 상황이 현실로 연출되고 있음이 쉽사리 믿어지지 않았다.
박반장은 깨진 유리 조각들 사이에서 뭔가를 발견 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심상치 않은 기
운이 느껴졌다.
"보세요. 핏자국입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박반장은 깨진 유리조각 하나를 집어들어 나에게 보였다.
"이씨는 누군가에게 당한 겁니다."
"다… 당하다니요……?"
혀가 얼어서 말이 더듬어졌다.
박반장은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누군가가 이씨를 기습한 것입니다."
"그…… 그럴 리가……."
"이씨로선 시끄러운 소음 때문에 누군가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전혀 느끼지 못했을 겁니
다. 눈을 치우는 데에만 정신이 집중되어 있었겠죠. 놈은 그 허점을 노려 일시에 공격한 것
입니다. 흉기로 창문을 깨뜨림과 동시에 이씨에게까지 충격을 가했겠지요."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시는 거죠? 무슨 근거라도……?"
"그런 건 없습니다. 그냥 제 추측일 뿐이죠."
박반장은 일일이 따지지 말라는 투로 말했다. 나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어 그에게서 시선을
돌려 제 기능을 상실해버린 제설차를 망연자실하게 바라보았다. 마치 폭설의 추위에 못 이
겨 눈 위에서 동사한 시체 같았다.
잠자코 계시던 아버지가 탄식하듯 말했다.
"이보게 박반장, 이거 아무래도 상황이 심상치 않은데 우선 서에 연락부터 취해야 하지 않
겠나?"
박반장은 암담한 얼굴로 아버지를 주시했다.
"예, 어르신. 상황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최악입니다. 폭설 때문에 통신이 완전 두절 됐어
요. 유무선 모두 말입니다. 연락을 취할 방법이 없습니다. 눈 속을 헤치고 직접 걸어가는 수
밖에는요."
시간은 오후 두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점심 식사도 그른 채 우리 모두는 거실 소파에 모여 사태의 심각성을 논의했다. 박반장은
속이 타는 지 연속으로 줄담배를 피워댔다.
"자 지금부터 제 말을 잘 들으세요. 우선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부터 점검해 봅시다."
그는 마지막으로 길게 연기를 빨아들인 후 꽁초를 비벼 껐다.
"우선 분명한 것은 누군가 고의로 우리들을 이 곳에 고립시켰다는 것입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누군가가 이씨를 공격하고 제설 차량을 망가뜨려 우리들의 발목을 묶어 놓았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유무선 통신망이 완전 두절 된 상태입니다. 폭설 때문에 복구하는 데에는 상
당한 시간이 요소 될 것입니다. 한마디로 우리 모둔 이 언덕배기에 완전 갇혀 버린 겁니다."
그는 은주를 살짝 바라보며 계속 말을 이었다.
"은주씨 말에 의하면 조금 전……."
박반장은 잠깐 말을 멈추고 자신의 손목 시계를 바라보며 시간을 유추했다.
"그러니까 약 1시경에 은주씨는 식사시간임을 알리기 위해 이씨에게 갔습니다. 하지만 차량
이 엉망으로 망가진 채 이씨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딘 가로 사라진 거죠. 두 가지로 생각
해 볼 수 있겠죠. 누군가가 이씨를 공격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이씨 자신이 어떤 이유로 차
량을 망가뜨린 후 사라졌을 가능성."
그의 목소리는 점점 흥분되었다.
"만약 전자의 경우라면 누군가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우리를 이 곳에 고립시키기 위해 이씨
를 공격하고 제설차를 망가뜨린 것입니다. 이씨는 다른 곳에 감금되어 있던지 최악의 경우,
죽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죠."
죽음이라는 말에 민구와 민지는 겁을 집어먹고 몸을 웅크리며 유선에게 찰싹 달라붙었다.
아내도 잔뜩 상기된 모습이었다. 박반장은 말을 계속했다. 그의 말투는 마치 탐정 같았다.
"현재 우리는 제설차를 망가뜨린 장본인이 누구인지 전혀 짐작할 수 없습니다. 어쩌면 이씨
와의 개인적인 앙심 때문에 시비가 붙은 것 일수도 있습니다. 혹은 악천후를 노린 어떤 좀
도둑의 소행일 수도 있고요."
은주의 가녀린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그 옆으로 정영혜 역시 잔뜩 굳은 표정이었다. 박반장
은 잠시 말을 멈추고 다시 담배를 찾았다. 무겁고 서늘한 침묵이 감돌았다. 벽시계의 초침
돌아가는 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울렸다.
"혹시 그 살인마는 아닐까요……?"
침묵을 깨고 아내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말을 하는 그녀의 입술에 공포심이 가득 묻어
있었다.
"왜, 어제 밤에 정영혜씨가 보았다던 남자가 정말로 그 연쇄 살인마가 아니었을까요? 어젯
밤 산을 내려와 여기까지 도달한 게 아닐까요……?"
모두의 시선이 아내에게로 꽂혔다. 극심한 불안감이 우리 모두의 폐 속으로 스며드는 듯했
다. 정말로 그런 일이 생긴 거라면 상황은 정말 위험하다. 고립된 곳에 미치광이 살인마와
함께 있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갑자기 간밤에 꾸었던 불쾌한 악
몽의 이미지들이 떠올랐다. 절로 몸서리가 처졌다.
"자, 지나치게 상황을 나쁜 쪽으로만 몰아가진 맙시다. 그 연쇄 살인마가 하필 이 별장으로
흘러들었다는 것은 지나친 억측입니다."
박반장은 나름대로 침착함을 유지하려 애썼다.
"우선 저는 도보로 서까지 가서 연락을 취하겠습니다. 모두들 문단속 잘 하시고 절대로 밖
으로 나오지 마세요."
그는 연기를 내뿜으며 베란다 밖으로 시선을 보냈다.
"이 마을에서 어릴 적부터 자라왔지만 이런 폭설은 난생 처음입니다. 천지가 온통 꽁꽁 얼
어 버린 것 같네요."
잠깐의 침묵 후 박반장은 꽁초를 끄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굳은 표정으로 일관하고 있
던 정영혜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기 더 남아 계시겠습니까, 아니면 저하고 함께 내려가시겠습니
까?"
정영혜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다가 나와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왠지 호소하는 듯한 그
녀의 커다란 눈을 바라보며 나는 엉겁결에 말을 내뱉었다.
"영혜씨는 여기 좀더 계시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눈이 저렇게나 내리는데……."
그냥 일반적인 호의를 내비친 것뿐인데 어째서 내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시선을 누구에게도 둘 수 없었다. 그러한 나의 반응을 아내는 눈치 채버렸다. 그 모
든 미묘한 감정들을 간파한 듯 정영혜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내 호의를 사양
하듯 고개를 저으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아니에요. 그만 가 봐야죠. 너무 오래도록 폐를 끼칠 수는 없지요."
정영혜는 모두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는 박반장과 함께 떠날 채비를 했다. 박반장은
서에 도착하는 데로 지원병력을 데리고 다시 오겠다며 남은 이들을 안심시켰다.
우리는 그들을 대문 앞까지 배웅했다. 은주는 언제 가져 왔는지 두꺼운 솜털 옷을 정영혜에
게 건네주었다. 그녀는 은주의 따뜻한 친절과 배려에 감동하며 환한 미소로 보답했다.
이윽고 박반장이 먼저 저만치 앞서가기 시작했다. 정영혜는 은주가 건네준 솜털 외투를 단
단히 챙겨 입으며 마지막으로 아버지에게 다가갔다.
"정말 신세 많았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어르신. 저… 그런데, 아까 별장 안에 걸려
있던 사진을 우연히 보았는데 예전에 독립 운동가셨더군요."
아버지는 그녀가 말을 갑작스레 다른 방향으로 옮겨가자 조금 의아해 하셨다.
"실은 저희 아버지께서도 예전에 독립운동가로 활동 하셨거든요. 뭐 별로 거창하게 활동하
신 건 없지만……."
그제야 아버지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셨다.
"아, 그러셨군요. 이런 인연이 다 있군요. 사실 저야말로 말이 좋아 독립운동가지, 실상 아무
것도 한 게 없답니다. 혹시 아버님 함자가 어떻게 되시는지요?"
아버지는 마치 오랜 친구를 만나기라도 한 듯 반가워하셨다. 하지만 웬일인지 그녀는 허탈
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아마 말씀드려도 모르실 겁니다. 당시 열 여섯 밖에 안되셨고 의병대에서도 늘 잔심부름만
했으니까요. 어르신 앞에 이름을 올리기도 부끄럽습니다."
"저런, 무슨 그런 소릴 하십니까? 그렇게 어린 나이에 의병 활동을 하셨다니 대단하신 분임
에 틀림없네요. 한번 만나 뵙고 싶네요."
그러자 정영혜는 갑자기 슬픈 눈빛으로 아버지를 보았다.
"실은…… 몇 달 전에 돌아가셨어요."
"저런, 저런…… 제가 괜한 얘길 했군요."
아버지가 당혹스러워하자 그녀가 그럴 필요 없다는 듯이 세차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닙니다. 연세가 다 되셔서 운명하신 건데요. 어르신을 뵈니 갑자기 아버지 생각이 떠올라
서 두서도 없이 얘길 늘어 놓았네요. 제가 오히려 실례했습니다."
그녀는 멀리 앞서가는 박반장을 돌아본 후 기회가 된다면 다음에 또 한번 들리겠다며 마지
막 인사를 건넸다.
박반장과 정영혜가 저만치 멀어질 때까지 지켜본 후 우리는 별장 안으로 들어갔다. 아버지
는 멀어져 가는 정영혜의 뒷모습을 아득히 바라보며 뭔가 깊은 생각에 잠기신 듯했다.
아버지가 일제 침략기 때 의병활동을 하셨다는 것은 익히 들어서 잘 아는 사실이었다. 나는
어릴 적부터 그런 아버지를 매우 자랑스럽게 여겨왔다. 하지만 아버지는 어째서인지 독립운
동가로 불려지기를 꺼려하시는 눈치셨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나에게 의병활동 시절의 무
용담을 꺼내 놓는 일도 없으셨고 독립운동가였음이 세상에 알려지는 것도 무척이나 껄끄러
워 하셨다.
대충 짐작해 보면 아마도 의병활동 당시 좋은 기억보다 슬픈 기억이 더 많았기에 아예 그
시절의 일들을 모두 기억 저 편에 묻어버리고자 함이 아닐까 싶었다.
거실로 들어서니 벽시계가 정각 세 시를 알렸다. 모두들 심신이 지쳐있었다. 그래서 우선 어
영부영 그르게 된 점심부터 먹으며 기운을 차리기로 했다. 점심 겸 저녁을 일찌감치 먹어버
리고 저녁 즈음엔 케이크를 먹으며 조촐하게 크리스마스 이브의 파티를 열기로 했다. 제대
로 된 파티 기분이나 낼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지만.
은주는 식어버린 국을 데우며 다시 식사를 준비했다. 그 사이 아버지는 서재에 혼자 계셨고
나는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거실에서 휴식을 취했다.
베란다 밖을 유심히 살펴보던 아내의 얼굴에 걱정스러움이 가득 묻어 났다.
"여보, 저 담 좀 봐요. 저 정도 높이면 쉽게 뛰어넘을 수 있지 않을까요?"
"그 쓸데없는 소리…… 뛰어 넘긴 누가 뛰어 넘어 온다고 그래? 걱정하지마 아무 일도 없
어."
"하지만……."
아내는 여간해서는 불안함이 가실 것 같지 않았다. 사실 불안하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과
연 누가 제설차량을 망가뜨렸으며 깨진 유리조각과 핏자국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증명해줄 유일한 인물, 정원사 이씨는 어디로 사라져 버린 것인지 도무지 갈피가
잡히지 않으니 답답하고 불안할 따름이었다. 다만 그런 감정들을 아이들에게까지 내비치고
싶지는 않은 것이었다.
"여보 이씨 아저씨는 정말 어떻게 된 걸까요?"
아내가 다시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나는 아이들을 힐끔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별일이야 있으시겠어. 이제 그런 얘긴 그만하고 박반장님 오실 때까지 우리 크리스마스 트리나 꾸며볼까?"
그렇게 말하며 나는 거실 구석에 놓여 있는 트리용 소나무를 바라보았다.
"맞다, 민지가 아까 누굴 봤대요."
애써 분위기를 바꿔보려는데 이번엔 민구가 손뼉을 치며 소리쳤다. 기막힌 화젯거리가 이제
서야 생각났다는 듯이 민지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며 들떠 있었다.
"아빠, 민지가 아까 정원에서 누굴 봤다고 그랬어요."
형체를 알 수 없는 섬뜩한 공포가 가슴을 짓눌렀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리냐? 민지가 누굴 봤단 얘기야?"
그런 의도는 없었지만 민구는 내가 화를 내고 있다고 느꼈든지 이내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
로 민지를 가리켰다.
"민지가 봤다고 그랬어요……."
내가 민지에게로 시선을 돌리자 그 애는 마치 큰 잘못을 숨겨오다 들켜버리기라도 한 마냥
당혹스런 눈빛이었다.
"민지야, 아빠에게 자세하게 말해 줄래."
잠시 머뭇거리던 민지는 모든 시선이 자신에게로 집중되어 있음을 살피고는 느릿느릿한 말
투로 입을 열었다.
그것은 몇 시간 전의 일이었다.
거실에선 아내와 박반장이 담소를 나누고 있었고 나와 아버지는 뒤뜰에서 어머니에 대한 그
리움에 사무쳐 있을 때였다.
아이들은 2층 복도를 뛰어다니며 놀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간밤에 자신들이 잠깐 묵었던
방을 발견하고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안으로 들어섰다. 민지로선 어젯밤 오빠가 목격했
던 괴물의 정체가 무엇인지 궁금했을 테고 민구로선 그것을 재차 확인하고자 함이었을 테다.
하지만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창문 너머로 바라본 건너편 양옥에는 아무런 인기척도 발견되
지 않았다. 이내 실증을 느낀 민구는 방을 먼저 나와버렸다. 하지만 민지는 혹시나 하는 기
대감으로 창가에 더 머물렀다.
조금 후 민지는 시선을 돌려 도로 앞 제설 차량의 움직임을 관찰했다. 그런데 제설 차량의
움직임을 관찰하던 그녀의 시야 범위에 다른 어떤 것이 잡혔다. 그것은 정원 모퉁이의 큰
소나무 아래였다.
그곳에 낯선 남자가 몸을 웅크리고 있었던 것이다. 남자는 소나무 둥치에 몸을 바싹 기댄
채 휴대폰으로 전화 통화를 하고 있었다.
민지의 말에 의하면 대략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그는 호리호리한 체구에 짧은 스포츠머리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상하게 여긴 민지가 제 오빠를 데리고 다시 그곳을 내려다보았을 땐 어느새 소나무 아래
엔 아무도 없었다. 민구가 시시해 하며 금세 방을 나가자마자 민지는 또다시 그 낯선 남자
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번에는 아까 그 소나무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민지를 정면으
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민지가 다시 오빠를 부르려하자 남자는 재빨리 민지의 시야에서 벗
어났다. 그리곤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민지의 얘기를 다 듣고 나자 별안간 등줄기가 서늘해짐을 느꼈다. 민지의 말이 사실이라면
별장에 우리 식구들 외에 이미 다른 누군가가 무단 침입해 있다는 말이 된다. 위험천만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내는 어쩌자고 그런 이야기를 지금에 와서야 하느냐며 민지를 몰아 세웠지만 그렇게 아이
탓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나는 곧바로 아버지와 은주에게 사실을 알린 후 현관문의
관건상태를 재차 확인했다. 그리고 통로가 될 만한 모든 장소를 바삐 점검했다. 금방이라도
창문 하나가 스르륵 열리며 낯선 괴한이 침투할 것만 같아 심장이 두근거렸다.
점검을 마친 후 우리 모두는 거실 한가운데에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아내와 아이들은 물론
이고 아버지의 얼굴에도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은주는 거의 까무러칠 듯이 떨고 있었다.
나는 무기가 될만한 나무 배트를 손에 쥐고는 혹시나 해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하지만
휴대폰의 액정 화면에는 통화 불능 표시가 깜박거렸다.
휴대폰을 집어넣고 시계를 보니 세 시 반을 지나고 있었다. 박반장이 떠난 지 한 시간 정도
지난 상태였다.
나무 배트를 힘있게 고쳐 쥐고는 베란다 창을 통해 바깥을 살펴보았다. 정원에서는 어떤 인
기척이나 움직임도 감지되지 않았다. 눈발은 아까보다 훨씬 더 굵어져 있었다. 저렇게 내리
다간 아예 별장 전체가 파묻히지 않을까 염려스러웠다.
문득 뭔가가 가슴에서 응어리지듯 걸렸다. 불쾌한 느낌에 사로잡혀 민지가 들려주었던 얘기
들을 다시 한번 떠올려 보았다. 나도 모르게 간과해버린 어떤 사항이 서서히 떠올랐다.
낯선 사내가 웅크리고 있었다던 그 소나무 둥치로 재빨리 시선을 돌렸다. 어딘지 석연치 않
은 기분이 강렬하게 배어 났다. 그제야 나는 알 수 있었다. 그 소나무는 별장 지하실로 통
하는 외부 출입구와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남자가 잠깐 사이에 민지의
시야에서 감쪽같이 사라질 수 있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나는 본능적으로 뒤를 돌아 무언가를 찾았다. 이윽고 나의 시야에 지하실로 통하는 내부 출
입문이 보였다. 그 출입문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나직이 입을 열었다.
"아버지, 지하실을 점검해 보아야겠습니다."
내 말에 누구도 대꾸하는 이는 없었다. 그저 긴장된 얼굴로 나의 행동을 주시할 따름이었다.
나는 천천히 거실을 가로질러 지하실의 문을 열었다. 지하실 특유의 묵은 냄새가 코를 자극
했다. 배트를 수직으로 세우고 조심스럽게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 밑에서 놈이 웅크리고 숨
어 있다가 내 발목을 잡지 않을까 조마조마했다.
지하실 깊숙이 들어서서 실내등을 켜보니 여러 가지 잡동사니들이 산만하게 늘려 있었다.
신경을 곤두세우고 둘러보았으나 인기척은 없었다.
어디선가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바람의 움직임을 느끼며 외부로 통하
는 출입문 쪽으로 가보았다. 놀랍게도 출입문은 조금 열려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주변에
몇 개의 꽁초들이 떨어져 있었고 그것들 중 하나는 아직 연기가 채 꺼지지도 않은 상태였다.
바로 그 때 등뒤에서 미세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심장이 얼어 붓는 듯한 공포가 강렬하게
엄습해왔다.
조금은 경찰다운 미더움이 보였다.
그는 차창이 파손된 제설차 이곳 저곳을 살피며 연신 고개를 저어댔다. 깨어진 유리조각들
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불길한 예감이 엄습해 왔다.
"이거 큰일 났습니다. 엉망으로 망가졌습니다."
"예? 망가지다뇨? 그럴 리가요……."
내가 인정할 수 없다는 듯 다가서자 박반장은 보기 흉할 정도로 일그러진 차량의 타이어들
을 가리켰다. 네 개의 타이어 모두가 바람 빠진 풍선처럼 푹 꺼져 있었다.
"누군가 고의로 이런 짓을 한 겁니다. 게다가 차 키는 물론이고 이씨도 사라졌어요. 차는 엉
망으로 망가져 있고, 우린 고립된 겁니다……!"
뼛속까지 시린 추위 때문인지 갑자기 온 몸이 떨려왔다. 영화나 소설 속에서만 보아왔던 그
런 극적인 상황이 현실로 연출되고 있음이 쉽사리 믿어지지 않았다.
박반장은 깨진 유리 조각들 사이에서 뭔가를 발견 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심상치 않은 기
운이 느껴졌다.
"보세요. 핏자국입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박반장은 깨진 유리조각 하나를 집어들어 나에게 보였다.
"이씨는 누군가에게 당한 겁니다."
"다… 당하다니요……?"
혀가 얼어서 말이 더듬어졌다.
박반장은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누군가가 이씨를 기습한 것입니다."
"그…… 그럴 리가……."
"이씨로선 시끄러운 소음 때문에 누군가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전혀 느끼지 못했을 겁니
다. 눈을 치우는 데에만 정신이 집중되어 있었겠죠. 놈은 그 허점을 노려 일시에 공격한 것
입니다. 흉기로 창문을 깨뜨림과 동시에 이씨에게까지 충격을 가했겠지요."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시는 거죠? 무슨 근거라도……?"
"그런 건 없습니다. 그냥 제 추측일 뿐이죠."
박반장은 일일이 따지지 말라는 투로 말했다. 나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어 그에게서 시선을
돌려 제 기능을 상실해버린 제설차를 망연자실하게 바라보았다. 마치 폭설의 추위에 못 이
겨 눈 위에서 동사한 시체 같았다.
잠자코 계시던 아버지가 탄식하듯 말했다.
"이보게 박반장, 이거 아무래도 상황이 심상치 않은데 우선 서에 연락부터 취해야 하지 않
겠나?"
박반장은 암담한 얼굴로 아버지를 주시했다.
"예, 어르신. 상황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최악입니다. 폭설 때문에 통신이 완전 두절 됐어
요. 유무선 모두 말입니다. 연락을 취할 방법이 없습니다. 눈 속을 헤치고 직접 걸어가는 수
밖에는요."
시간은 오후 두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점심 식사도 그른 채 우리 모두는 거실 소파에 모여 사태의 심각성을 논의했다. 박반장은
속이 타는 지 연속으로 줄담배를 피워댔다.
"자 지금부터 제 말을 잘 들으세요. 우선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부터 점검해 봅시다."
그는 마지막으로 길게 연기를 빨아들인 후 꽁초를 비벼 껐다.
"우선 분명한 것은 누군가 고의로 우리들을 이 곳에 고립시켰다는 것입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누군가가 이씨를 공격하고 제설 차량을 망가뜨려 우리들의 발목을 묶어 놓았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유무선 통신망이 완전 두절 된 상태입니다. 폭설 때문에 복구하는 데에는 상
당한 시간이 요소 될 것입니다. 한마디로 우리 모둔 이 언덕배기에 완전 갇혀 버린 겁니다."
그는 은주를 살짝 바라보며 계속 말을 이었다.
"은주씨 말에 의하면 조금 전……."
박반장은 잠깐 말을 멈추고 자신의 손목 시계를 바라보며 시간을 유추했다.
"그러니까 약 1시경에 은주씨는 식사시간임을 알리기 위해 이씨에게 갔습니다. 하지만 차량
이 엉망으로 망가진 채 이씨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딘 가로 사라진 거죠. 두 가지로 생각
해 볼 수 있겠죠. 누군가가 이씨를 공격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이씨 자신이 어떤 이유로 차
량을 망가뜨린 후 사라졌을 가능성."
그의 목소리는 점점 흥분되었다.
"만약 전자의 경우라면 누군가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우리를 이 곳에 고립시키기 위해 이씨
를 공격하고 제설차를 망가뜨린 것입니다. 이씨는 다른 곳에 감금되어 있던지 최악의 경우,
죽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죠."
죽음이라는 말에 민구와 민지는 겁을 집어먹고 몸을 웅크리며 유선에게 찰싹 달라붙었다.
아내도 잔뜩 상기된 모습이었다. 박반장은 말을 계속했다. 그의 말투는 마치 탐정 같았다.
"현재 우리는 제설차를 망가뜨린 장본인이 누구인지 전혀 짐작할 수 없습니다. 어쩌면 이씨
와의 개인적인 앙심 때문에 시비가 붙은 것 일수도 있습니다. 혹은 악천후를 노린 어떤 좀
도둑의 소행일 수도 있고요."
은주의 가녀린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그 옆으로 정영혜 역시 잔뜩 굳은 표정이었다. 박반장
은 잠시 말을 멈추고 다시 담배를 찾았다. 무겁고 서늘한 침묵이 감돌았다. 벽시계의 초침
돌아가는 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울렸다.
"혹시 그 살인마는 아닐까요……?"
침묵을 깨고 아내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말을 하는 그녀의 입술에 공포심이 가득 묻어
있었다.
"왜, 어제 밤에 정영혜씨가 보았다던 남자가 정말로 그 연쇄 살인마가 아니었을까요? 어젯
밤 산을 내려와 여기까지 도달한 게 아닐까요……?"
모두의 시선이 아내에게로 꽂혔다. 극심한 불안감이 우리 모두의 폐 속으로 스며드는 듯했
다. 정말로 그런 일이 생긴 거라면 상황은 정말 위험하다. 고립된 곳에 미치광이 살인마와
함께 있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갑자기 간밤에 꾸었던 불쾌한 악
몽의 이미지들이 떠올랐다. 절로 몸서리가 처졌다.
"자, 지나치게 상황을 나쁜 쪽으로만 몰아가진 맙시다. 그 연쇄 살인마가 하필 이 별장으로
흘러들었다는 것은 지나친 억측입니다."
박반장은 나름대로 침착함을 유지하려 애썼다.
"우선 저는 도보로 서까지 가서 연락을 취하겠습니다. 모두들 문단속 잘 하시고 절대로 밖
으로 나오지 마세요."
그는 연기를 내뿜으며 베란다 밖으로 시선을 보냈다.
"이 마을에서 어릴 적부터 자라왔지만 이런 폭설은 난생 처음입니다. 천지가 온통 꽁꽁 얼
어 버린 것 같네요."
잠깐의 침묵 후 박반장은 꽁초를 끄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굳은 표정으로 일관하고 있
던 정영혜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기 더 남아 계시겠습니까, 아니면 저하고 함께 내려가시겠습니
까?"
정영혜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다가 나와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왠지 호소하는 듯한 그
녀의 커다란 눈을 바라보며 나는 엉겁결에 말을 내뱉었다.
"영혜씨는 여기 좀더 계시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눈이 저렇게나 내리는데……."
그냥 일반적인 호의를 내비친 것뿐인데 어째서 내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시선을 누구에게도 둘 수 없었다. 그러한 나의 반응을 아내는 눈치 채버렸다. 그 모
든 미묘한 감정들을 간파한 듯 정영혜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내 호의를 사양
하듯 고개를 저으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아니에요. 그만 가 봐야죠. 너무 오래도록 폐를 끼칠 수는 없지요."
정영혜는 모두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는 박반장과 함께 떠날 채비를 했다. 박반장은
서에 도착하는 데로 지원병력을 데리고 다시 오겠다며 남은 이들을 안심시켰다.
우리는 그들을 대문 앞까지 배웅했다. 은주는 언제 가져 왔는지 두꺼운 솜털 옷을 정영혜에
게 건네주었다. 그녀는 은주의 따뜻한 친절과 배려에 감동하며 환한 미소로 보답했다.
이윽고 박반장이 먼저 저만치 앞서가기 시작했다. 정영혜는 은주가 건네준 솜털 외투를 단
단히 챙겨 입으며 마지막으로 아버지에게 다가갔다.
"정말 신세 많았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어르신. 저… 그런데, 아까 별장 안에 걸려
있던 사진을 우연히 보았는데 예전에 독립 운동가셨더군요."
아버지는 그녀가 말을 갑작스레 다른 방향으로 옮겨가자 조금 의아해 하셨다.
"실은 저희 아버지께서도 예전에 독립운동가로 활동 하셨거든요. 뭐 별로 거창하게 활동하
신 건 없지만……."
그제야 아버지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셨다.
"아, 그러셨군요. 이런 인연이 다 있군요. 사실 저야말로 말이 좋아 독립운동가지, 실상 아무
것도 한 게 없답니다. 혹시 아버님 함자가 어떻게 되시는지요?"
아버지는 마치 오랜 친구를 만나기라도 한 듯 반가워하셨다. 하지만 웬일인지 그녀는 허탈
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아마 말씀드려도 모르실 겁니다. 당시 열 여섯 밖에 안되셨고 의병대에서도 늘 잔심부름만
했으니까요. 어르신 앞에 이름을 올리기도 부끄럽습니다."
"저런, 무슨 그런 소릴 하십니까? 그렇게 어린 나이에 의병 활동을 하셨다니 대단하신 분임
에 틀림없네요. 한번 만나 뵙고 싶네요."
그러자 정영혜는 갑자기 슬픈 눈빛으로 아버지를 보았다.
"실은…… 몇 달 전에 돌아가셨어요."
"저런, 저런…… 제가 괜한 얘길 했군요."
아버지가 당혹스러워하자 그녀가 그럴 필요 없다는 듯이 세차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닙니다. 연세가 다 되셔서 운명하신 건데요. 어르신을 뵈니 갑자기 아버지 생각이 떠올라
서 두서도 없이 얘길 늘어 놓았네요. 제가 오히려 실례했습니다."
그녀는 멀리 앞서가는 박반장을 돌아본 후 기회가 된다면 다음에 또 한번 들리겠다며 마지
막 인사를 건넸다.
박반장과 정영혜가 저만치 멀어질 때까지 지켜본 후 우리는 별장 안으로 들어갔다. 아버지
는 멀어져 가는 정영혜의 뒷모습을 아득히 바라보며 뭔가 깊은 생각에 잠기신 듯했다.
아버지가 일제 침략기 때 의병활동을 하셨다는 것은 익히 들어서 잘 아는 사실이었다. 나는
어릴 적부터 그런 아버지를 매우 자랑스럽게 여겨왔다. 하지만 아버지는 어째서인지 독립운
동가로 불려지기를 꺼려하시는 눈치셨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나에게 의병활동 시절의 무
용담을 꺼내 놓는 일도 없으셨고 독립운동가였음이 세상에 알려지는 것도 무척이나 껄끄러
워 하셨다.
대충 짐작해 보면 아마도 의병활동 당시 좋은 기억보다 슬픈 기억이 더 많았기에 아예 그
시절의 일들을 모두 기억 저 편에 묻어버리고자 함이 아닐까 싶었다.
거실로 들어서니 벽시계가 정각 세 시를 알렸다. 모두들 심신이 지쳐있었다. 그래서 우선 어
영부영 그르게 된 점심부터 먹으며 기운을 차리기로 했다. 점심 겸 저녁을 일찌감치 먹어버
리고 저녁 즈음엔 케이크를 먹으며 조촐하게 크리스마스 이브의 파티를 열기로 했다. 제대
로 된 파티 기분이나 낼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지만.
은주는 식어버린 국을 데우며 다시 식사를 준비했다. 그 사이 아버지는 서재에 혼자 계셨고
나는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거실에서 휴식을 취했다.
베란다 밖을 유심히 살펴보던 아내의 얼굴에 걱정스러움이 가득 묻어 났다.
"여보, 저 담 좀 봐요. 저 정도 높이면 쉽게 뛰어넘을 수 있지 않을까요?"
"그 쓸데없는 소리…… 뛰어 넘긴 누가 뛰어 넘어 온다고 그래? 걱정하지마 아무 일도 없
어."
"하지만……."
아내는 여간해서는 불안함이 가실 것 같지 않았다. 사실 불안하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과
연 누가 제설차량을 망가뜨렸으며 깨진 유리조각과 핏자국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증명해줄 유일한 인물, 정원사 이씨는 어디로 사라져 버린 것인지 도무지 갈피가
잡히지 않으니 답답하고 불안할 따름이었다. 다만 그런 감정들을 아이들에게까지 내비치고
싶지는 않은 것이었다.
"여보 이씨 아저씨는 정말 어떻게 된 걸까요?"
아내가 다시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나는 아이들을 힐끔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별일이야 있으시겠어. 이제 그런 얘긴 그만하고 박반장님 오실 때까지 우리 크리스마스 트리나 꾸며볼까?"
그렇게 말하며 나는 거실 구석에 놓여 있는 트리용 소나무를 바라보았다.
"맞다, 민지가 아까 누굴 봤대요."
애써 분위기를 바꿔보려는데 이번엔 민구가 손뼉을 치며 소리쳤다. 기막힌 화젯거리가 이제
서야 생각났다는 듯이 민지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며 들떠 있었다.
"아빠, 민지가 아까 정원에서 누굴 봤다고 그랬어요."
형체를 알 수 없는 섬뜩한 공포가 가슴을 짓눌렀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리냐? 민지가 누굴 봤단 얘기야?"
그런 의도는 없었지만 민구는 내가 화를 내고 있다고 느꼈든지 이내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
로 민지를 가리켰다.
"민지가 봤다고 그랬어요……."
내가 민지에게로 시선을 돌리자 그 애는 마치 큰 잘못을 숨겨오다 들켜버리기라도 한 마냥
당혹스런 눈빛이었다.
"민지야, 아빠에게 자세하게 말해 줄래."
잠시 머뭇거리던 민지는 모든 시선이 자신에게로 집중되어 있음을 살피고는 느릿느릿한 말
투로 입을 열었다.
그것은 몇 시간 전의 일이었다.
거실에선 아내와 박반장이 담소를 나누고 있었고 나와 아버지는 뒤뜰에서 어머니에 대한 그
리움에 사무쳐 있을 때였다.
아이들은 2층 복도를 뛰어다니며 놀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간밤에 자신들이 잠깐 묵었던
방을 발견하고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안으로 들어섰다. 민지로선 어젯밤 오빠가 목격했
던 괴물의 정체가 무엇인지 궁금했을 테고 민구로선 그것을 재차 확인하고자 함이었을 테다.
하지만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창문 너머로 바라본 건너편 양옥에는 아무런 인기척도 발견되
지 않았다. 이내 실증을 느낀 민구는 방을 먼저 나와버렸다. 하지만 민지는 혹시나 하는 기
대감으로 창가에 더 머물렀다.
조금 후 민지는 시선을 돌려 도로 앞 제설 차량의 움직임을 관찰했다. 그런데 제설 차량의
움직임을 관찰하던 그녀의 시야 범위에 다른 어떤 것이 잡혔다. 그것은 정원 모퉁이의 큰
소나무 아래였다.
그곳에 낯선 남자가 몸을 웅크리고 있었던 것이다. 남자는 소나무 둥치에 몸을 바싹 기댄
채 휴대폰으로 전화 통화를 하고 있었다.
민지의 말에 의하면 대략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그는 호리호리한 체구에 짧은 스포츠머리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상하게 여긴 민지가 제 오빠를 데리고 다시 그곳을 내려다보았을 땐 어느새 소나무 아래
엔 아무도 없었다. 민구가 시시해 하며 금세 방을 나가자마자 민지는 또다시 그 낯선 남자
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번에는 아까 그 소나무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민지를 정면으
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민지가 다시 오빠를 부르려하자 남자는 재빨리 민지의 시야에서 벗
어났다. 그리곤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민지의 얘기를 다 듣고 나자 별안간 등줄기가 서늘해짐을 느꼈다. 민지의 말이 사실이라면
별장에 우리 식구들 외에 이미 다른 누군가가 무단 침입해 있다는 말이 된다. 위험천만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내는 어쩌자고 그런 이야기를 지금에 와서야 하느냐며 민지를 몰아 세웠지만 그렇게 아이
탓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나는 곧바로 아버지와 은주에게 사실을 알린 후 현관문의
관건상태를 재차 확인했다. 그리고 통로가 될 만한 모든 장소를 바삐 점검했다. 금방이라도
창문 하나가 스르륵 열리며 낯선 괴한이 침투할 것만 같아 심장이 두근거렸다.
점검을 마친 후 우리 모두는 거실 한가운데에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아내와 아이들은 물론
이고 아버지의 얼굴에도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은주는 거의 까무러칠 듯이 떨고 있었다.
나는 무기가 될만한 나무 배트를 손에 쥐고는 혹시나 해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하지만
휴대폰의 액정 화면에는 통화 불능 표시가 깜박거렸다.
휴대폰을 집어넣고 시계를 보니 세 시 반을 지나고 있었다. 박반장이 떠난 지 한 시간 정도
지난 상태였다.
나무 배트를 힘있게 고쳐 쥐고는 베란다 창을 통해 바깥을 살펴보았다. 정원에서는 어떤 인
기척이나 움직임도 감지되지 않았다. 눈발은 아까보다 훨씬 더 굵어져 있었다. 저렇게 내리
다간 아예 별장 전체가 파묻히지 않을까 염려스러웠다.
문득 뭔가가 가슴에서 응어리지듯 걸렸다. 불쾌한 느낌에 사로잡혀 민지가 들려주었던 얘기
들을 다시 한번 떠올려 보았다. 나도 모르게 간과해버린 어떤 사항이 서서히 떠올랐다.
낯선 사내가 웅크리고 있었다던 그 소나무 둥치로 재빨리 시선을 돌렸다. 어딘지 석연치 않
은 기분이 강렬하게 배어 났다. 그제야 나는 알 수 있었다. 그 소나무는 별장 지하실로 통
하는 외부 출입구와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남자가 잠깐 사이에 민지의
시야에서 감쪽같이 사라질 수 있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나는 본능적으로 뒤를 돌아 무언가를 찾았다. 이윽고 나의 시야에 지하실로 통하는 내부 출
입문이 보였다. 그 출입문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나직이 입을 열었다.
"아버지, 지하실을 점검해 보아야겠습니다."
내 말에 누구도 대꾸하는 이는 없었다. 그저 긴장된 얼굴로 나의 행동을 주시할 따름이었다.
나는 천천히 거실을 가로질러 지하실의 문을 열었다. 지하실 특유의 묵은 냄새가 코를 자극
했다. 배트를 수직으로 세우고 조심스럽게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 밑에서 놈이 웅크리고 숨
어 있다가 내 발목을 잡지 않을까 조마조마했다.
지하실 깊숙이 들어서서 실내등을 켜보니 여러 가지 잡동사니들이 산만하게 늘려 있었다.
신경을 곤두세우고 둘러보았으나 인기척은 없었다.
어디선가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바람의 움직임을 느끼며 외부로 통하
는 출입문 쪽으로 가보았다. 놀랍게도 출입문은 조금 열려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주변에
몇 개의 꽁초들이 떨어져 있었고 그것들 중 하나는 아직 연기가 채 꺼지지도 않은 상태였다.
바로 그 때 등뒤에서 미세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심장이 얼어 붓는 듯한 공포가 강렬하게
엄습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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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적이네요..이런 소설 넘 좋아하는데..님아 빨리 담편두 올려주실꺼죠?^^ 새해복 많이 받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