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안의 그림자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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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시리도록 하얀 아카시아 꽃송이들이 탐스럽게 달린 나뭇가지 사이로 참새 몇마리가 분주히 날아다니고, 흙먼지가 살포시 날리는 비포장도로가의 풀잎에  아직 아침이슬이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아직 채 가시지 않은 얇은 안개 속에서 회색의 승용차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아직 먼 발치였지만 자동차 앞 유리창 너머의 운전석에 앉아있는 그가 피곤한 표정속에서도 웃고 있다는 것을 알수 있었다.


낮선 곳에서도 그의 존재가 내 시야에 들어오자 어둠을 뚫고 솟아오르는 아침의 태양을 맞는 해바라기 처럼 그렇게 따뜻한 기운이 가슴속에서 떠 올랐다.

 


"미안. 잠도 제대로 못자게 일찍 오라고 해서...."  조수석에 엉덩이를 붙이면서 그에게 커피한잔을 내밀었다.


"아냐. 오면서 벌써 마셨어."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그는 나에게서 컵을 받아서 한모금 마시고는 컵 홀더에 올려놓았다.


"근데 벌써 올라가려고? 연휴인데 하루 더 있다가 올라오지 그래.  겨우 하룻밤 자고 이렇게 가버리면 부모님 섭섭하실거 아냐."  그가 내 눈치를 살폈다.


"무슨 소용 있다고..  하룻밤 만으로도 엄마하고는 충분히 싸웠어." 심드렁 하게 커피 한모금을 마시고 그의 얼굴 너머의 운전석 밖에 서있는 나무들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말했다.


"누가 막내 아니랄까봐...  좀 뭐라고 하셔도 참아주지." 그가 얼굴을 약간 찡그리더니 다시 미소를 띠었다.


좁은 길에서 차를 돌리느라 후방거울을 연신 바라보면서 그가 말을 이었다.


"아버님은 많이 섭섭하셨겠다. 이렇게 일찍 아들이라는 놈이 가버리니 말야."


"아들은 다 그래. 며칠전에 누나가 매형하고 와서 하룻밤 자고 갔나보던데 뭐."  여전히 무표정하게 말대꾸를 하고는 몸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근데 찾아오기 힘들지는 않았냐?"


"딴청 피우긴.....아니. 저번에도 같이 왔었잖아.  그건 그렇고 제발 운전좀 조심해서 해. 음주운전도 아니면서 왜 가만 서있는 덤프트럭을 가서 박아?"  그가 곁눈질로 나를 보면서 핀잔을 주었다.


"한밤중이라 잘 안보였어. 그냥 살짝 범퍼만 긁힌건데 뭐."


"수리하는데 5일이나 걸렸는데 살짝 범퍼만 긁힌거야?" 그의 목소리가 커졌다.


"아마 이번 사고때문에 보험회사에서 기피대상고객으로 찍혔을거다.  그러면서 몸은 말짱한거 보면... 참.. 남의 속은 숯덩이로 만들면서.."
"미안해.  나 걱정해줘서." 빙긋 웃으면서 그의 어깨를 한번 쓰다듬었다.


그렇게 좁은 시골길을 이러저리 돌아 고속도로 입구에 닿을때까지 아무 말이 없었다.

 


그냥 한번 속는셈 치고 정해주는 여자와 결혼한번 해보라고 밤새 어머니는 나를 몰아세웠었다.   


널더러 이성애자가 되라는게 아니라는,  그냥 결혼하고 한번 여자하고 살아보라는, 그러다보면 해결방법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어머니의 고집은 나같은 엉덩이에 뿔난 자식도 감당이 되질 않았다. "애 한번 낳아보면 달라질지도 모르잖아. 이자식아."  라고 엄마는 애원했었다.


"엄마 그 여자 인생은 어떻게 하고?  엄마는 그 여자 생각은 안해봐?" 나는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소리쳤지만, 엄마는 굽히지 않으셨다.


"다 지 팔자지!  너같은 놈 만나서 살게되는것도 팔자인거야!  이 세상이 다 그렇게 흘러가는건데 넌 왜 자꾸 거스르려고만 그래 이자식아!"


그렇게 계속된 어머니와의 전쟁은 친구분들하고 밤낚시 가셨다가 들어오시는 중이라는 아버지의 전화가 올때까지 계속되었다.


하루 더 묵어서 내일 가려고 한 거였지만, 더 이상의 정신적인, 체력적인 소모전을 피하려고 새벽에 그에게 전화를 했었다. 나를 데리러 와 달라고.


교통사고를 낸 직후라서 자동차 수리가 끝나지 않아 시외버스를 타고 또 그 마을 입구에서 맨 안쪽에 위치해 있는 새로 지어서 번듯한 부모님의 집에까지 터덜거리고 걸어왔던 거였다.


 어떻게든 마음 상하실 말은 꺼내지 않고 좋게 보내다 가려고 했지만, 어떤 말을 꺼내더라도 결혼으로 연결시키는 어머니의 놀라운 말솜씨에 손발을 다 들수밖에 없었다.  어머니의 사전엔 결코 불가능이란 없었다.


 

"차는 제대로 잘 고쳤나 보네?" 나 처럼 다른 생각에 몰두하고 있는 듯한 그의 옆얼굴을 바라보면서 말을 던졌다.


"어.  한바퀴 시운전도 해보고..  괜찮더라구.  지난번처럼 엔진은 들어먹지 않아서 다행이지."  그가 입꼬리를 내리면서 찡그렸다.


어두운 터널을 지나고 다시 따스한 봄볕을 느끼기 시작하면서 차가 막히기 시작했다.


"사고났나?" 그가 전방을 주시하면서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앞유리 밖으로 고속도로에 꽉찬 자동차들의 물결이 보였다.  차라리 그 모습은 아름답기까지 했다.  그 수많은 차량위로 아지랑이가 어지럽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 많은 사람들 모두 이렇게 제각기 자신들의 목적지를 가고 있겠지. 이 철판으로 된 사각박스 안에 들어있는 모든 사람들도 마음속에는 모두 하나둘씩 눈물나는 사연은 가슴에 묻고 살고 있을것이었다.


"엄마가...... 너 아직 만나냐고 물어보시더라." 짐짓 남의 말을 하듯 고개를 숙여 씨디 보관함에서 씨디를 훑어보면서 말했다.


"그래서?"


"그래서, 너도 만나고, 영수도 만나고, 희철이도 만나고, 태훈이도 만난다고 말씀드렸어."


"걔네들은 다 누군데?"


"글쎄.  엄마가 기대했던 대답. 엄마의 기대에 부응해야 하지 않겠어?"


'참, 어째 사람이 그래?! 그렇게 막내 티를 내야하는거야? 언제 철들래?"   한심하다는 듯 표정을 짓는 그의 손목을 툭쳤다.


"야. 내가 형이야!"


"형이 뭐? 나이만 서른 둘이지 철딱서니 없잖아!"


"너 그러다 형한테 맞는다." 짐짓 화난듯 목소리 톤을 낮추면서 말했다.


"왜, 내말 틀려? 아직도 엄마한테 어리광 부리고 그러지?" 그가 표정을 바꾸고 싱글거리면서 나를 흘끗 보았다.


"그래 내가  사실 철이 없긴 하다. 나 막내 같냐?"


"어. 막내 티 너무 많이 나.  엄마속은 다 긁으면서 엄마한테 다 의지하는 전형적인 마마보이지 뭐."


"그래. 뭐, 어쩌겠어. 그게 난데......" 좌석 등받이를 뒤로 젖히고서 조금 편하게 누웠다. 이내 차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따스한 햇볕아래에서 온몸이 노근해졌다.


"날씨 참 나른하다.  꼭 우리 사이 같다."


"우리 사이가 나른해?" 그가 운전석 창문을 살짝 내렸다.  바람에 그의 머리카락이 날렸다.  손을 뻗어 슬쩍 그의 뒷통수를 쓰다듬었다.


"뭐. 그냥 그렇다고. 좀 지루하잖아. 다른 사람들처럼 사연도 없고 말야."


"정말?  그럼 사연하나 만들어 줘?  나 만나면서 가족들하고 생기는 문제만 해도 머리 아플줄 알았는데 나와의 사이도 강물건너고 돌뿌리 걸리고 그러고 싶었던 거야?"


"아니. 뭐.  그냥... 사실 우리 너무 평탄하니까..."


"그럼 우리 사이에도 긴장좀 넣을까?" 그가 웃으면서 바라보았다.


"앞에 잘봐. 사고내지 말고!" 일부러 말을 바꾸려고 정색을 하는척 했다.


"걱정마. 누구처럼 사고는 안내니..... 음.. 따뜻하고 좋기만 했는데, 우리사이를 그렇게 생각했단 말이지?" 그가 빙긋 웃었다.


"아니 그냥 그렇다고, 다른 커플들은 만나고 찢어지고 하는데 우린 꾸준하잖아.  내 대학교2학년 사촌 여동생은 1년만에 남친이 다섯은 바뀐것 같은데 말야."


"그럼 우리 사이에도 긴장좀 넣어 줘?"  그가 내 손을 잡았다.


"너 설마 바람피우겠다는 얘기는 아니지? 나 그런뜻으로 얘기한거 아니다."


"그럼 너가 한번 피우던가."  아무렇지도 않은듯 그가 전방을 주시하면서 말을 이었다.


"아니면 한번 아무거나 꼬투리 잡아서 대판 싸우고 한번 헤어져?"


"허, 참!" 어이 없다는 듯이 한번 웃고는 그의 어깨를 쳤다.   그가 어깨를 한번 펴더니  나를 돌아보고는 킥킥거렸다.



저녁을 먹고 그는 설거지를 하고 나는 사과를 깎고 있었다. 껍질에 영양분이 있다면서 깨끗이 씻어먹자는 그를 만류하고 나는 꼭 깎았다. 그것도 두툼하게 말이다. 그런 나를 보면서 그는 왕고집이라고 놀렸다.


포크로 사과를 찍어서 입에 넣던 그가 나를 보았다.


"기억나? 왜, 예전에 우리 처음 만나서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김포 얘기 했었잖아."


"어. 그때 김포에 비온다고 그랬지.  근데 그게 왜?"  인터넷 게임속에서 내가 만든 캐릭터는 마을을 막 벗어나고 있었다. 마을 근처 구릉지에서 몬스터를 잡으러 가느라고 열심히 뛰고 있는 캐릭터를 보면서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답을 했다.


"우리 처음에 만났을 때, 나 너만 만난거 아니었어."


"그래?"  척추 어딘가에서 쿵 소리가 났지만 나는 쿨한 모습을 보여주려고 했다.  뭐 사실 별것도 아닐것이었다.  과거 없는 사람이 어디있으랴.  나만 빼고 말이다. 나는 옆에 앉아있는 녀석이 첫사랑은 아니더라도 첫경험이었다. 


"양다리 걸치려는 건 아니었는데,  사실 그냥 둘 중에 한사람이라도 나 좋다고 하면 그 사람 사귀어보려고... 근데 너보다 그 사람이 먼저 나한테 들이댔거든."  그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을 이었다.


"나이는 좀 많았지만 나한테 정말 잘해줬거든.  사랑한다고 말했고 말야. 그러는 동안에 너도 만나게 되서.  의도하지 않게 양다리 걸친 격이 되어버렸어." 


캐릭터는 산길을 뛰어서 버그베어들이 모여있는 곳에 다다랐다. 선공 몬스터 들이다. 이제 몇발자국만 더 가면 그 놈들이 먼저 내 캐릭터를 공격할 것이었다.


"그런데 어쩌다가 나를 선택했냐?"


"너가 나한테 넘어오지 않아서. 너는 항상 나랑 거리를 유지해서...." 그가 포크를 접시 위에 내려놓았다.


"나 사실 너 만나기 전에 서너명하고 경험있었어.  근데 하나같이 좀 깊게 사귀게 되면 내 목을 조르는 듯이 매달려서 숨이 막혔었거든.  근데 너는 오히려 내가 매달리지 않으면 나에게서 떨어져서 사라져 버릴거 같더라."  그가 다시 사과를 포크로 찍었다. "조심!  몬스터가 때리잖아!"


그의 말에 몽롱해 보이던 모니터에 다시 촛점이 맞춰졌다. 캐릭터의 피가 다 빠져 있었다.  몬스터 들로부터 뒤로 도망치게 하고는 생명물약을 빨았다.


"기분 나뻐?" 그가 나를 바라보았다.


"아니!  기분이 왜 나빠?  나도 너 만나기 전에 몇명 사귀었었는데, 뭘.  내 나이가 몇인데.  나도 나 좋다는 사람들 많았어."


"그래." 그가 나를 보고는 씨익 웃었다. "너 꽤 잘생겼으니까. 나도 너 만나면서 그러려니 했었어."


"그래서, 그 김포는 어떻게 됐어?"  아무렇지도 않다는 양,  캐릭터에 피를 가득 채운 후,  죽이려 했던 몬스터에게 복수를 하게 하면서 말을 꺼냈다.


"아. 뭐. 그냥.  계속 연락하더만, 그냥 씹었어. 너가 더 좋았거든."


"내가 선택받은자였네?"  굳은 얼굴에 짐짓 미소를 띄우려고 노력하면서 그에게 묻듯이 대답했다.



새벽에 그의 손이 내 가슴에 올라왔다.


한참 잠 속에 빠져있던 나는 그의 손을 느끼고 내 손안에 꽉 잡았다.  그가 얼굴을 들어 내 볼에 키스했다. 점점 잠이 깨기 시작했다.


그가 내 위로 올라왔다.  그의 입술이 내 목에서 가슴으로 젖꼭지로, 그리고 다시 아래로 내려가서 배꼽 주위를 맴돌았다.  마침내 그 아래로 내려가는 그의 머리를 붙잡고 나의 가슴 위로 끌어올렸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 김포하고도 했어?"


"너 정말!" 어두운 방 안에서도 그의 굳은 얼굴이 보였다. 그가 손을 내 몸에서 떼고 일어나려고 했다.


달아나는 그의 손을 꼭 붙잡아서 당기고 끌려오는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아직 굳어져 있는 그의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면서 그의 입술에 키스했다.


"미안해. 해줘." 나즈막히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한숨을 한 번 쉬고 그의 입술이 내 귓볼근처로 내려오는 것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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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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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백이 흐르는 동양화의 한폭을 보는 듯한
서술의 힘.
참 담백하고도 질리지 않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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