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안의 그림자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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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 내리면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9월이 시작 되었지만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는 무더위도 이 비가 그치고 나면 한걸음 물러설 것이라는 기상캐스터의 또랑또랑한 말 소리가 티비에서 흘러나왔다.
저녁으로 그가 사온 피자를 먹었다. 후덥지근한 날씨에 국을 끓이느라 불 피울 필요 없다고 퇴근전에 그가 전화를 했었다.
덕분에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퇴근하면서 현상소에서 찾아온, 휴가동안 그와 함께 사승봉도에서 찍은 사진들을 들고 침대에 기대고 바닥에 앉았다. 그 중에서 제일 잘 나온 사진을 하나 골라 확대해서 액자에 넣을 작정이었다.
사실 여름 휴가동안 어디 갈 예정이 딱히 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회사 동료중에 한 사람이 이번 휴가동안 멀리까지 가지 않고 재미있게 보낼 깨끗한 곳이 있다고 재미로 들어본 곳이었다.
인천에서 얼마 걸리지 않은, 비단결 같은 모래사장에 정말 에메랄드색깔의 바다색과 나즈막한 언덕위의 푸른 소나무 숲을 볼수 있다고 추천을 한 것이었는데, 어쩌다 그에게 지나가는 말로 한번 말을 한적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 말을 듣고 그는 갑자기 얼굴에 홍조를 띄면서 가야한다고 말했었다.
그 이전부터 얼마동안 미묘한 그의 변화된 모습이 상당히 신경이 쓰여져 있던 터라서 그와의 여행을 위해서 부랴부랴 그의 휴가기간에 맞춰 다른 직원하고 날짜까지 바꾸는 수고를 했다.
그곳의 풍경은 기대와 상상 이상이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그의 표정에서 가장 큰 기쁨을 얻었다. 그와 나 사이의 이유를 알지 못하는 살얼음 판 위를 걷는 듯한 긴장이 감도는 얼마동안의 시간동안의 힘들었던 시간은 끝이나고 다시 예전의 밝은 그의 모습을 내 곁에서 되찾게 된 것이 다행이었다.
그렇게 오랫만에 오래전의 그와 나로 돌아가서 보낸 시간의 추억을 내 손안에 쥐고 한장씩 자세히 들여다 보고 있었다.
드넓고 맑은 모래사장을 뒤로 하고 함박 웃음을 지으면서 해맑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그의 얼굴은 눈이 부셨다.
그렇게 사진속의 그와 지금 내 앞에서 온라인 게임에 몰두하고 있는, 아니 몰두하고 있는 듯한 그의 옆모습을 번갈아서 바라보았다.
퇴근하고 거의 두시간동안을 아무말도 없이 그는 그저 그렇게 모니터 앞에서 앉아있었다.
몬스터를 때려잡는 꼬맹이 캐릭터의 기합소리와 여러 음향효과들이 스피커를 통해서 흘러나왔다. 그의 무표정속에서 그의 마음은 모니터 속이 아닌 다른 어딘가를 헤메고 있는 것이 틀림 없어 보였다.
그의 얼굴은 방의 형광등과 모니터에서 나오는 빛에 반사되어 엷은 잿빛이었고 우울해 보이는 그의 눈가는 보는 이로 하여금 먹먹하게 만들었다. 퇴근때만 하더라도 기분 좋은 듯해 보였는데, 갑작스런 그의 표정의 변화는 나를 불안 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침묵을 지키던 그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너, 나랑 행복해?"
"........."
갑작스런 그의 예상밖의 질문에 아무 말도 못하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래?" 시선은 모니터를 고정한 채로 그가 재차 물었다.
"행복하지. 당연히.... 근데 갑자기 왜 그런말을 해?"
"나랑 같이 사는 거 아니었으면..."
그가 말을 끊고 잠시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들어 모니터를 보았다.
"어머니 말만 듣는다면 작은 아파트라도 하나 구해주겠다고 그러셨다면서..."
"그런데?" 나의 목소리 톤이 조금 높아졌다.
여전히 그는 표정의 변화가 없이 마치 석고상처럼 그렇게 앉아있었다.
그의 손 만이 마치 그의 몸과 분리된 것 마냥 마우스 위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이렇게 살면 돈 모으기도 쉽지 않고, 당장이야 괜찮다지만 점점 더 나이먹어가고...."
그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가 마우스를 움직이는 대로 꼬맹이 캐릭터가 몬스터 들로 부터 멀어져서 안전한 곳에서 쪼그리고 앉았다.
"그래서?"
그가 한번 헛기침을 하고 무릎을 세워서 두팔로 감싸 안았다.
"그래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건데?" 목소리를 낮춰서 내가 물었다.
"월세도 너가 다 내고..."
"내가 구한 집이니 내가 내는 건 당연한 거잖아." 그의 말을 잘라말했다. 침착하려고 하지만 온몸이 긴장되고 입술이 떨려왔다. 흥분으로 빨라지려는 말을 억제하려고 심호흡을 했다.
여전히 그는 모니터에 눈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데?"
갑자기 텅빈 백짓장 처럼 아무 생각이 없으면서도 또한 너무 복잡해진 정신을 가다듬으면서 목소리를 부드럽게 하려고 노력하면서 물었다.
"집에..... 다시 들어갈까 해." 그가 들릴락 말락한 작고 낮은 목소리로 입술의 움직임 조차 거의 없이 읊조렸다.
예상치 못한 상대에게서 무방비 상태에서 뺨을 힘껏 맞은 듯한 느낌이었다. 뺨도 얼얼했고 입안도 얼얼했고 머리도 핑핑 돌았다.
"왜?"
"........"
"너 못가!" 나의 말에 숙였던 고개를 들고 그가 나를 바라보았다.
"나 너 못보내. 여기가 니 집이야."
"여긴, 그냥 월세 원룸이야." 그가 고개를 돌려서 다시 모니터를 보면서 말했다.
"그래도! 우리집이야."
말을 마치고 그가 다른 말을 다시 꺼내기전에 부리나케 들고 있던 사진들을 방바닥에 내려놓은 다음 부엌으로 들어갔다. 싱크대 안에 어제 저녁식사의 자취가 남아있었다.
수세미를 들고 설거지를 하기 시작했다.
손 안의 수세미 표면에 식기 세정액의 거품이 배어나오고 틀어 놓은 수돗물이 접시를 타고 흘렀다.
이 망할 대화를 피하기 위해 설거지를 하기 시작했지만 아무리 느리게 손을 움직여도 몇가지 되지 않는 그릇은 금방 선반위의 제자리에 돌아가 버렸고 내 손은 비어있었다.
침묵이 견딜수 없이 두려워져서 쏟아지는 수돗물을 잠그지 않은 채로 부엌창문을 열었다. 기분나쁜, 습도높은 후질근한 바람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시멘트 바닥에, 홈통에 철판계단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가 들렸다.
망할 놈의 담배도 없었다. 방안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그가, 그의 입에서 나올 말을 들을 것이 두려웠다.
지난 얼마동안 그의 표정과 행동속에서의 변화를 감지 했지만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회사에서의 스트레스일 것이라고 생각해버렸다.
그는 너무 가정적이어서 나 아닌 다른 누구를 만나고 있을 것이라는 것도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 아니 그에게는 그럴 시간도 없었다. 그는 회사에서 근무하는 시간 이외에는 거의 항상 나와 함께 있었다.
가슴이 답답해서 숨이 쉬어지질 않았다. 간신히 마음을 진정시키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도 모니터 안의 꼬맹이도 바로 그렇게 마냥 그대로 앉아있었다.
그의 옆에 무너지듯 무릎을 꿇고 앉아 마우스 옆에 올려져 있는 그의 손을 잡았다. 그가 무거운 시선을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혀가 얼어붙고 입이 굳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지만 말할 능력을 잃어버린 듯 그렇게 그 앞에 주저앉아 그의 두 눈만 바라보았다. 그가 마치 구름사이에 있는 듯 눈앞이 몽롱해졌다.
눈물 때문이었는지 착시현상인지 구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물끄러미 나를 마주 바라보는 그를 쳐다보았다.
서른 셋의 나이에 내가 가진 것은 그가 전부였다.
몸 안의 힘이 다 빠져 나간 듯한 나의 몸뚱아리는 나의 의지와 상관 없이 상체가 앞으로 천천히 굽어져서 마침내 이마가 그의 무릎에 닿는 것이 느껴졌다. 그렇게 그에게 기댄 채 엎드려서, 막혀있는 가슴을 비벼서 크게 한숨을 쉬었다.
번지점프를 하듯, 앞이 아득해져서 두 눈을 감았다. 창밖에서는 굵어지는 빗 소리 사이로 개가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게 등을 돌리고 누워있는 그를 어둠 속에서 바라보았다. 그렇게 바로 옆에 누워있으면서도 너무 멀리 떨어져있는 듯이 느껴지는 그가 안타까워서 손바닥을 펴서 그의 등을 어루만지고 싶었다.
그렇게 내게 등을 돌린 채로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학교 다닐 때 열심히 공부 좀 할걸 그랬어."
뜻 모를 한마디를 남기고 그는 다시 입을 닫았다. 계속 해서 침묵이 흐르고 그렇게 누워서 그가 하는 말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다시 그가 입을 열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잠시 가만히 있다가 얼굴을 베게에 묻었다.
그리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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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해피엔딩의 희망을 가져도 될지요~~^^
잘 읽고 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