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안의 그림자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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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립 도서관의 창 밖으로 보이는 그 앞의 정원의 나뭇잎들이 형형색색의 옷으로 갈아입기 시작하고, 그 주위를 산책하는 사람들이 긴 소매 옷을 입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계절이 바뀌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했다.  그 위의 보이는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푸르른 주말이었다.

 

그렇게 주말마다  근처의 시립도서관에 다니기 시작했다.


승진 시험 준비를 한다는 술자리에서의 동기들의 말을 웃으면서 뒤담아 듣지 않았다.  하지만, 토익학원을 등록하고 열심히 다니고 있는 옆자리의 동료를 보면서 나도 준비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슬며시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혹시나 하는 생각에 집에서 책꽂이 위의 책들을 모두 뒤엎어서 찾아낸 토익 성적표는 이미 그 기간이 지나서 효력이 상실되어 있었다.

 

처음에 그가 읽을 만한 책을 찾아본다고 책꽂이의 책들을 뒤적여보다가 그 중 한 권의 페이지 속에 끼어있던 내 토익성적표를 찾아냈었다.   그것을 손에 들고 그는 처음엔 빙긋 웃더니 점점 쓴웃음으로 바뀌면서 투덜거렸다.


"뭐야 이거,   왜 남의 성적에 니 이름이 붙어있냐?"  씨익 웃는 나를 한번 돌아보더니 그는 말을 이었다. 


"대개 공부 못하는것들이 시험은 잘본다니까.  그치?  정말 잘찍었다."  말을 끝내고 그는 내 표정을 살피면서 히죽거렸었다.

 


그 없이 살아가는 것에 조금씩 익숙해지기 위해서 그렇게 주말이면 도서관에서 씨름을 했다.  가슴이 시리도록 그의 생각이 간절해지면 3층 도서관의 라운지로 나가서 창밖을 내다보며 이어폰을 귀에 꽂고 음악을 들었다.


주말에는, 그렇게 나는 도서관으로 그리고 그는 내가 어디인지 모르는 곳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그가 술을 마시는 일은 그 다음에는 다시는 없었다. 그리고 대부분 일요일 밤에는 자정을 넘기지 않고 집으로 돌아왔다.

 


구질구질 해지고 싶지 않았고 구차해지고 싶지 않았다.  쿨 하고 싶었다.


누군가의 말처럼 나 싫어 떠나는 사람 잡지 않으리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아침에 일어나서 토스트를 굽고 계란 후라이를 하고 커피를 끓여놓은 후에,  그를 깨우기 위해서 방문을 열고 침대위에 엎드려서 잠들어 있는 그를 볼때마다, 이젠 그런 그를 볼수 있다는 작은 행복감도 곧 박탈당할 것이라는 생각에 간신히 억누르고 있던 감정이 밖으로 새어나와 가슴을 찌를때면 그를 보낼 자신이 없어졌다.


이미 마음이 떠난 그의 앞에서 애원을 했다.  준비가 아직 안되었다고 그 흔해빠진 '옛정을 생각해서' 시간을 좀 달라고,  다시 혼자가 되는 것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원하지 않는다면 그의 몸에 손끝하나 건드리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냥 지금처럼 얼마동안만 같이 살아달라고 구차하게 매달렸다. 그러는 나를 그는 슬픈 눈으로 바라보았다. 마치 아픈 강아지 같은 눈빛이었다.  그도 그런 상황이 불편하고 힘들었겠지만 이 끈을 놓치면 완전히 끝인거라는 생각에 필사적으로 그의 동정심에 매달렸다.


우린 그렇게 아무 말없이 그 좁은 원룸에서 꼭 필요한 말만 주고 받으면서 숨도 낮게 쉬며 살았다.  


그에게는 감옥안에서의 고문과 같았을 테지만 나는 그의 고통을 지켜보면서도 변심한 배신자는 그 정도의 죄값은 치뤄도 된다고 내 이기적인 마음을 정당화 하려했다.


잠자리에서도 일부러 이불을 그와 나의 사이에 경계선 마냥 늘여놓았다. 


그를 위한 배려인지 내 자신을 나의 감정으로 부터 억누르고 보호하려는 본능적인 행동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고  그도 나도 일부러 서로에게 등을 돌리고 누웠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12월 1일 이었다.


회사직원과 회식을 하고 술이 알맞게 취한 다음에 집에 들어왔다.  


그는 방바닥에 여기저기 널려있는 비닐 조각과 풀, 테이프, 그리고 형체를 알 수 없는 금속조각들을 치우고 있었다. 영문을 모르던 나는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런 나를 그가 한번 돌아보더니 아무말 없이 손가락으로 방의 창문을 가리켰다.  창문은 비닐로 밀봉이 되어있었고 비닐은 창문틈으로 들락거리는 실바람에 가볍게 흔들거리고 있었다. 

 

그가 나와 동거를 시작한 첫해의 겨울부터 침대의 창가쪽에 자리를 잡고 누워서 한겨울에 추워하는 나에게 자리를 바꾸자고 그가 말을 꺼냈지만 한사코 창가쪽을 고집하는 나를 설득하다가  그가 생각해낸것이 겨울동안 그렇게 해서 보온효과를 높이는 거였다.

 

그렇게 나의 눈 앞에서 그는 주섬주섬 쓰레기 조각을 모아서 쓰레기통에 넣었다.


그의 그런 행동에 혹시나 그가 마음이 바뀌지나 않았을까 하는 헛된 기대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그 좁은 방 안에서도 나의 얼굴을 마주하는 것을 피했고 반드시 필요한 대화를 제외하고는 서로 입을 벌리지 않았다.

 


누워서 뒤척이다가 나의 구부린 무릎이 우연히 그의 다리 어디엔가에 닿은 느낌이 들었다. 그 따뜻한 느낌이 너무 오랜만이어서 잠시 그대로 있었다. 그도 몸을 떼지는 않았다. 살며시 몸을 돌려 그를 향하면서 손가락끝을 그의 팔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자 반드시 누워있던 그가 슬며시 나에게서 빠져나가 내게 등을 보이면서 돌아누웠다.

 

 

 

입가에 뭍은 토스트가루를 털어내고 커피를 한모금 마시고는 서둘러 출근하느라 두구를 신는 그를 보면서 담담하게 말을 건냈다.


"이제, 나 괜찮아.  너 이제 편한대로 해."


기뻐할줄 알았던 그가 먹먹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았다. 차라리 슬픈 표정이었다.

 

"어" 간단하게 대답하고 그는 고개를 돌리고 현관문을 열고 나갔다.


접시 위에 남아있던 토스트 한조각을 입안에 구겨 넣었다.


그래도 대놓고 기뻐하지 않는 그가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제 내 자신도 혼자서도 충분히 나의 인생을 새롭게 내 마음대로 그려나갈 준비가 된 듯도 싶었다.


사실, 그 뿐만 아니라 내 자신도 이 방에서 그와 같이 감옥생활을 하고 있던 거였다. 그를 해방시켜 줌으로서 나도 마침내 자유를 얻게된 것이었다.

 

 


크리스마스는 충청도의 부모님 집에서 보냈다.


위가 좋지 않았던 아버지가 병원에 며칠 계셨다가 퇴원을 하셔서 얼굴이나마 잠시 비추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내가 도착했을때에는 친구 좋아하시는 아버지는 이미 외출중이셨다.


점심을 간단히 끝낸 후에 어머니는 전화를 받았다.

 

"왜?  그래서 현이는 괜찮고? 알았다. 애 잘봐! 구정에는 올거지?  신정에는 올것도 없어. 왔다갔다 길에서 시간 다 버리지 뭐. 그래 알았다."  전화통화후 어머니가 주방으로 들어오셨다.


나는 막끓인 커피를 홀짝거리면서 주방 창문을 통해서 하나둘씩 떨어지는 눈을 내다보고 있었다.


"형은 오늘 못온단다. 애가 감기라고.  너는 오늘 자고 갈거지? 연휴잖아?"


"내일 일이 있어서 일찍 출근해야 해요."  뒤돌아 보지 않고 여전히 창밖을 내다보면서 대답했다.


"그 녀석하고 헤어졌다면서?"


내 귀에 박히는 어머니의 그 말에 반사적으로 어머니를 돌아보았다.


"엄마가 그걸 어떻게 알아?"  화를 내려는 것은 아니었다. 그 사실을 어머니가 알고 계시다는 사실이 놀라워서 목소리가 커졌다.


"이놈이 왜 성질을 내고 그래!  너 월세나 제대로 내고 사는지 집주인 한테 전화해봤더니 같이 사는 친구가 얼마전에 짐싸고 나간거 같다고 그러더라!"  그 말을 마치고는 잠시 머뭇거리시더니 한층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을 꺼내셨다.


"그래서 얘긴데, 아버지 친구분 친척중에서 마땅한 처녀가 있다는 구나.  대학 졸업하고 유치원 아이들..."


"엄마!!"


"너, 그 애랑 헤어졌다면서!"  어머니가 내 팔을 잡고 나를 올려다보셨다.


"이제 이쯤해서 엄마 소원도 한번 들어줘 이놈아!"

 

"엄마,  조금만 더 기다려 줘." 밀려오는 감정을 억제하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왜? 얼마나?"  혹시나 하는 희망의 빛이 어머니의 눈에 순간 반짝이는듯 싶었다.


"한 십년정도?"  갑자기 내 스스로 웃음이 나와서 꾹 참으면서 어머니에게서 고개를 돌려 문가를 보면서 대답했다.


"나, 그 놈이 전부가 아니거든.  엄마한테도 전에 말했었는데 기억안나?  나 그 놈 말고도 세놈 더 있어.  영수, 희철이 그리고 또 태훈이.  걔네들 다 정리하려면 십년은 걸릴거 같아. 그러니까 엄마도 그 동안은 공연히 힘빼지 마세요. 그러면 빨리 늙어. 아버지한테나 잘 해 드리세요."


"이놈이, 너 지금 엄마하고 장난하냐?" 어머니의 목소리가 커졌다. "이 나쁜새끼야!"


"엄마, 자꾸 이러시면 저 지금 집으로 가요?" 사뭇 심각한 표정을 지으면서 나의 가슴을 치는 어머니를 살며시 한번 안고는 문가로 향했다.


"그래 가라 가!  나쁜 놈. 다신 내려오지 마!"

 

 

 

어느 덧 1월도 거의 다 지나가고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남들은 모두 다 쉽다고 말하는 어묵국이 정작 나는 끓일때마다 만족스럽지가 않아서 퇴근 후에 다시 시도를 해보았지만 여전히 맛이 없었다. 인터넷 여기저기서 좋다는 덧글이 달린 레시피를 모아서 똑같이 해보았지만 여전히 사람이 맛있게 먹을만한 맛은 나지 않았다.  어짜피 만들어 놓은 거, 먹어치우자고 생각했지만 입맛도 없는데다가 도저히 그 흐리멍텅한 국물맛에 건더기까지 손이 가지 않았다.


큰 그릇에 쏟아넣고 설거지를 대충 다시해서 라면이나 끓여먹을 생각으로 싱크대 위의 선반을 열었다.


샐러드 보울을 꺼내면서 그 옆에 있는 박스에 눈이 옮겨졌다.


포장도 뜯지 않은 새 박스였다.  슬며시 꺼내 보았다.

 


그가 떠나기 전날 밤 퇴근할 때 였다.  된장국을 끓이다가 현관문 열리는 소리에 나와보니 그가 상자를 하나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게 뭐야?"  목소리에 가능한 한 감정을 빼고 남의 말 하듯 관심을 가능한 보이지 않게 물어보았다.


"토스트기.  집에 있는 게 너무 낡아서 식빵이 자주 타잖아." 그도 또한 그렇게무표정한 얼굴로 대답을 했다.  상자를 들고 부엌으로 향하면서 혼잣말로 그에게 들리지 않게 중얼거렸다. "지금 식빵이 문제니? 너 때문에 내 속은 숯덩이다. 나쁜넘."

 

 

상자를 열어서 토스트기를 꺼냈다. 


비닐을 벗기자 윤기나는 표면이 불빛에 반짝였다.  어떤 감정이 생긴것도 아닌데 갑자기 눈꼬리에 눈물이 맺혀서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누군가가 그랬다. 실연 후의 눈물은 기쁘고 편안하게 받아들이라고.  그 눈물 한방울 한방울 속에 아픔이 담겨져서 몸에서 빠져나와 마침내는 편안하게 되는 거라고...


여자친구를 잘난 부자선배에게 빼앗긴 후에 대학교때의 절친이 술이 취해서 내 어깨에 기대어 흐느끼던 때가 기억이 났다. 그때에 난 위로랍시고 그의 어깨를 두드리면서 말했었다. "울지마.  사내놈이 그깢 사랑따위로.."


갑자기 다리에 힘이 풀려 더 이상 서 있을 수가 없었다. 그 토스트기를 품에안고 부엌바닥에 쪼그리고 앉았다. 이젠 목구멍 저 아래 어딘가에서 뜨거운 불덩어리하나가 툭 하고 치밀었다.  입이 벌어지고 뜨거운 한숨이 튀어나왔다.


고3때 수학을 가르치시던 담임선생님의 말씀이 생각났다.


"너네들 말야. 사랑때문에 한번쯤 밤새도록 울어보지 못한 놈들은 사랑에 대해서 얘기도 꺼내지 마라."

 

 

 

구정을 보낸 후에 다시 동네 공원에서 산책을 시작했다.


여전히 매서운 날씨 속에서도 꽤 많은 나이드신 분들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완전 무장을 하고 조깅을 하고 계셨다.  누우렇게 말라버린 잔디와 앙상한 나무 속에서도 여전히 삶이 용솟음 치고 있을 것이고 이제 나 또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준비가 된 듯 보였다.


내 인생에서는 그가 처음이겠지만 결코 마지막은 될수 없는 것이었다.


어딘가에서 영수가 나와의 인연을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또 그가 내 인연이 아니면 어떠랴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내게는 여전히 그 뒤로도 희철이와 태훈이가 기다리고 있을테니 말이다.

 


집으로 오는 길에 건널목에서 신호등을 기다리다가 우연히 공중전화박스가 눈에 들어왔다. 핸드폰이 손에 들어온 이후로 거의 써보지 않던 공중전화는 형태가 마치 외국의 거리에나 어울릴듯이 낯설어 보였다.


아무 생각없이 가까이에서 구경을 하다가 수화기를 슬쩍 집어들어 귀에 대고는 속삭였다.


"오늘 나 늦어.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  그리고는 그 말을 한 내 자신의 목소리에 스스로 놀라 수화기를 얼른 제자리에 내려놓고 한발 물러섰다.  그리고는 주머니의 핸드폰을 한번 만지작거렸다.


그의 목소리가 그리웠다.  딱 한번만 듣고 싶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간절함이 북받쳐 올라서 앞이 아득하고 손끝이 떨렸다.


다시 공중전화 수화기를 들었다.  목소리만 듣고 그냥 끊어버리면 되는 거였다.  그에게는 그냥 누군가 미친놈이 공중전화로 장난한 것에 불과할 것이었다.


신호음이 들려왔다.


"여보세요?"  뜻밖에 갑작스러운 한 젊은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여보세요. 말씀하세요."


"저.... 이준호씨 핸드폰 아닌가요?"  계획과는 다르게 입에서 말이 튀어나와 버렸다.


"예. 맞는데 핸드폰을 두고 잠깐 나갔네요 금방 들어올텐데. 누구신데요?" 그녀가 물었다.


"아, 대학 동창인데요. 나중에 다시 전화하겠습니다." 서투른 거짓말이 갑자기 입에서 튀어나왔다.


"저, 잠시만요!"  그녀가 소리쳤다.


"제가 준호씨 대학 동창분들은 대부분 알고 있는데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그녀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한 나는 할말을 잃었다.


"아, 예, 아닙니다.  나중에다시 전화하겠습니다."  황급히 전화를 끊고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 추운 날씨에 등짝이 후끈하고 식은땀이 흐르는 듯 했다.

 


그렇게 한숨을 내쉬면서 정신을 가다듬고 있는 사이에 '띠디디디.. 띠디디디.." 하고 보행신호가 울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발걸음을 두어 발자국 옮겼을 때 이미 신호등은 주황색으로 바뀌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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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span class="sv_wrap"> <a href="https://ivancity.com/bbs/profile.php?mb_id=monkey1122" data-toggle="dropdown" title="maneating 자기소개" target="_blank" rel="nofollow" onclick="return false;"> maneating</a> <ul class="sv dropdown-menu" role="menu">님의 댓글

  • <spa…
  • 작성일
스산한 계절만큼이나 기분이 정말 스산하네요
서로 헤어진 후, 빈 마음의 한 구석을 다른 것으로 채우기 전에
헤어짐 자체를 받아들여야하는데...
쉽지가 않죠...시간이 걸리죠....^^
잘읽고 갑니다.
ps: 글을 바로 바로 올려주셔서 기다림의 지침이 없이
     연계가 잘되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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