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안의 그림자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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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다랗게 세워진 인조 절벽 위에서 쉴새없이 물줄기가 흰 물보라를 일으키며 쏟아져 내리고 있었고 그 아래의 투명한 물속에서 여러종류의 붕어들이 한가롭게 떼지어 다니고 있었다.
방금 지나간 붕어떼가 일으킨 가느다란 물결때문에 바닥에 깔려있는 자갈들이 일그러진 모습으로 흔들리고 언뜻언뜻 사람들이 던져 넣은듯한 동전 몇개가 고유의 색을 잃어가는 듯 뿌옇게 흐린 빛을 내고 있었다.
겨울 옷을 벗어버린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몸을 움직이다 보면 이마에 송글송글 땀이 맺혔다. 세월이 빠르다기 보다는 역시 말 그대로 봄이 실종된 듯 했다. 하지만 사라진 것이 어디 봄뿐이랴.
멍하니 그렇게 창밖을 바라보면서 망상에 잠겨 있는 중에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오래 기다렸지?" 한없이 웃는 밝은 얼굴로 형이 내 앞의 대리석으로 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날씨가 더워졌지?"
"먹고 사는거 그렇게 다 힘들지 뭐." 그렇게 서로 동문서답을 하고는 형은 목덜미의 와이셔츠 안으로 손가락을 넣고 넥타이를 느슨하게 잡아당겼다.
"형수하고 현이도 잘 지내지?"
"그럼, 다 잘있어."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형은 무의식적으로 양복윗저고리에서 담배를 꺼낸 후, 갑자기 주위를 돌아보더니, 다시 집어넣었다.
"커피숍으로 착각했다." 나를 보고는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웃었다.
"형네 회사 무쟈게 좋네. 라운지도 넓고." 오랜만에 만났는 데도 불구하고 특별히 할 말이 없어서 공연히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주위를 돌아보았다.
"너하고 저녁이라도 같이 먹으려고 했는데 장모님이 또 갑상선으로 병원에 입원하셨다고 연락와서 다음에 해야겠다." 말을 끝내면서 형은 양복 윗저고리 안주머니에서 흰 봉투 하나를 꺼내서 나에게 내밀었다.
"이게 뭔데?"
"이거 주려고 너 부른거야."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면서 내 얼굴 앞에서 봉투를 살짝 흔들었다.
"어서 받어 임마. 팔 떨어져!"
엉겁결에 받아들고 시선을 한번 준 다음에 다시 형에게 고개를 돌렸다.
"사실, 내가 형이라고 너한테 변변하게 해 준게 없었잖아. 너 독립한다는 말 들었을때에도 아무것도 못했고...." 말끝을 흐리면서 형은 슬쩍 고개를 돌렸다.
"나, 형이나 누나에 비해서는 별것 아닌거 알지만 혼자서도 사는데 문제 없어. 딸린 식구가 있는 것도 아니고.." 별일 아니라는 표정을 지으면서 봉투를 만지작 거렸다.
"나는 뭐 잘나서 집사고 딸린 식구들 다 먹여살리는거냐? 다 엄마 아버지한테 받아서 편하게 시작한거지." 잠시 말을 멈추고 시선을 내가 들고 있는 봉투에 주었다.
"그냥 전에 내가 부모님한테 받았던 것 중에서 너한테 조금 떼어주는거야. 너 혼자서도 잘살고 있는거 나도 아는데 월세, 그거 무서운거 너도 살아봐서 잘 알거 아니냐." 그리고는 말을 잠시 멈추고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얼마 되지도 않아. 그냥 월세 면하고 조그만한 전세집이라도 알아서 구해봐라."
대답없이 고개를 숙이고 들고 있는 흰봉투를 만지작 거리면서 구두 앞부분으로 툭툭 하고 바닥을 쳤다.
"형이 되서 너한테 해준게 없어서 정말 미안하다." 그 말에 고개를 다시 들어서 형을 바라다 보았다.
"결혼하면서 부모님이 도와주셔서 나는 정말 쉽게 시작했는데 너는 혼자 그렇게 고생하는걸 내버려 뒀으니...."
"내가 원한건데 뭘... 그리고 내가 무슨 고생을 했다고, 나 행복하고 내 생활에 만족해."
"그래 다행이다. 언제 집에 와라. 형수가 너 보고 싶다고 하더라." 말을 잠시 쉬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형수 너 정말 좋아해. 니 얘기 자주하고 그래, 얼굴 본지 오래됐다고. 너 오면 맛있는거 한다고 몇번 그랬어. 현이도 이제 말도 제법하고 말야. 너 조카한테 얼굴 자주 보여줘야지 안그럼 나중에 못알아본다."
그리고는 형은 다시 환하게 웃고는 내 어깨를 툭하고 쳤다.
"알았어. 시간 내서 한번 갈께."
"형네집에 오는데 시간을 내기는 무슨. 그냥 아무때나 오면 되는거지." 말을 마치고 슬쩍 손을 뻗더니 내 손을 잡았다.
"형이 무뚝뚝하고 표현력이 부족해서 그렇지. 항상 너 생각하고 있는 거 알지?"
"강민우 대리! 승진한거 진심으로 축하해!"
이미 눈이 반쯤 풀린 이부장이 와이셔츠 단추를 반쯤 풀어헤친 채로 나에게 잔을 내밀었다.
"네 능력도 좋지만 내가 너 잘봐줬다는 것도 잊으면 안되는거야. 사나이는 의리에 살고 의리에 죽어. 알아들어?"
"예. 잘 알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부장님" 내 앞에 놓여있는 술잔을 들고 부장의 잔에 슬쩍 부딪쳤다.
"완 샷!" 큰 소리로 외치면서 그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단숨에 들이켰다.
그런 그를 바라보고는 고개를 반쯤 돌려 간신히 잔을 비운 후 내려놓았다.
내 옆에서 김주임이 맥주가 가득한 잔안에 양주잔을 집어넣어 폭탄주를 신나게 만들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야. 김주임. 나 더 이상 못마셔!" 몽롱함을 느끼면서 김주임을 향해서 손을 내저었다.
"걱정 마십쇼. 이거 강대리님 드리려는게 아니라 부장님 드릴겁니다." 아직은 멀쩡해 보이는 그는 부장의 비위를 맞추느라 오늘의 주인공인 나는 잊어버린듯이 보였다. 다행이었다.
한번의 미역국을 먹은 후에 두번째에 운 좋게 대리라는 직함을 달게 되었다.
진행되던 프로젝트때문에 차일피일 미루고 있던 것이 마침내 오늘 오후 갑자기 이부장의 지시로 자리가 만들어졌다. 술 없이 못사는 사람인데 꽤나 술이 그리웠을 터였다.
그런 그에게 나의 대리축하회식은 좋은 구실이 되었다. 사무실 직원들의 강제적인 회식자리의 동원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간단한 저녁 식사가 끝나고 사무실 여직원들은 모두 집으로 돌려보냈다.
'터프녀'로 불리는 미스김이 남겠다고 부장에게 귀여움을 떨었지만 그는 무자르듯 단칼에 거절을 해서 그녀를 무안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남은 남직원들은 이부장의 단골인 룸살롱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래도 제잔은 한잔 받으셔야죠?" 오늘의 내 파트너로 지정된 그녀가 나에게 술잔을 내밀었다.
흐느적거리는 몸을 가누고 잔을 받아들고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나이는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나는 항상 여성의 나이를 가늠하는것이 마치 무슨 수학문제를 푸는 듯이 어려웠다.
어두운 조명과 짙은 화장으로 자신을 감춘 그녀가 나를 보고 웃었다.
"어서 드세요." 말을 마치고 '까르르' 하고 한번 웃고는 손을 뻗어서 수박 한조각을 들고 나를 바라보았다.
술잔을 비우고 그 잔안에 있던 얼음 한조각을 꺼내어 손안에 쥐었다. 술기운 속에서도 차가운 기운에 손바닥이 얼얼해졌다. 그러나 곧 그 작은 얼음조각은 내 손아귀 안에서 사라지고 나는 손을 들어 그 손으로 세수하듯 얼굴을 한번 문질렀다.
그런 나를 바라보면서 그녀가 수박을 건네면서 말했다.
"진작 말씀을 하시지, 물수건 새로 갖다 드릴께요." 말을 마치고 일어서려는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려 살며시 누르면서 고개를 가로 저었다.
"강대리한테 서비스 잘해줘야해. 유능한 친구야!" 이부장이 그녀를 향해서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렸다.
"우리 회사에서 제일 유능해."
그런 그의 말에 그녀가 나를 보면서 웃음지었다.
"맘에 들어?" 이부장이 나를 바라보면서 그녀를 턱으로 가리켰다.
"내가 마담한테 특별히 부탁한거야." 그가 나를 보고 만취한 속에서도 윙크를 했다.
"야!" 그녀에게로 고개를 돌리면서 이부장이 혀 꼬부라진 목소리로 소리쳤다.
"강대리좀... 데리고 나갔다 와아. 아직 총각이라 오지게 굶었을 거라구."
그녀가 웃으며 나를 한번 보고는 일어섰다.
"아. 좋겠다. 빨리 갔다오세요." 김주임이 내 등을 슬쩍 떠밀었다.
"강대리! 가서 죽여주고와! 참았던거 다 뽑고와!" 등 뒤에서 이부장이 쉰목소리로 고함 치는 소리가 들렸다.
좁은 방이었다.
"그냥 쉬는 곳이예요." 그녀가 문을 닫고는 내 앞에 서서 치마의 지퍼를 내렸다.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지 몰라 그저 그렇게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정말 총각인가봐?" 멀뚱한 나를 바라보면서, 그녀가 침대위에 몸을 뉘이면서 물었다.
"아니, 그냥 좀.... 술도 취했고, 어색해서..."
실실 웃으면서 나를 보던 그녀가 상체를 일으켜서 손을 뻗어 내 바지의 벨트를 풀렀다. 그녀의 가늘고 긴 손가락 끝에 핑크색의 긴 손톱이 반짝였다.
바지의 지퍼를 내리고 팬티속으로 손을 집어넣고는 나의 그것을 손에 쥔 채 그녀는 나를 올려다보았다.
"내가 맘에 안들어요?"
"아냐. 좋아."
흐릿한 불빛 아래서 그녀가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갑자기 그의 얼굴이 떠올라서 그녀의 모습과 겹쳐졌다.
그가 지금 나를 본다면 뭐라고 할까.
그가 어두운 차 안에서 나의 입에 깊게 키스한 후에 나의 사타구니에 손을 얹으면서 한 말이 떠올랐다.
"이 세상에서 나 말고 다른 누구한테 이거 주면 나한테 죽는다."
"너는" 내가 물었다.
"너는 어쩌고?"
"당연히 나도, 내꺼도 평생 니꺼지."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웃었다.
'개새*끼' 화가 치밀었다. '지새끼도 못지킬 약속을...'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녀의 손놀림 속에서 나의 그것이 점점 커졌다. 이미 단단해진 그것을 한손에 쥐고 그녀가 다른 손을 뻗어 침대옆에 있는 테이블 위에서 은박지를 찢어 그 속에 숨어있던 콘돔을 꺼내어 나의 그것에 씌우기 시작했다. 눈을 감았다.
분노에 차서 복수라도 하듯이 그렇게 몸을 흔들어댔다.
지저분한 와이셔츠 사이로 술에 범벅이 된 런닝셔츠가 그녀의 가슴위에서 흔들렸고 무릎근처에 걸린 바지의 벨트가 허벅지 사이에 끼었다.
나의 몸 아래에서 그녀가 나즈막히 신음 소리를 내고 있었다.
상자에 책을 정리해서 담고 있을 때 핸드폰이 울렸다.
"짐은 다 쌌냐?"
"지금 싸고 있는 중이다." 한 손으로는 핸드폰을 귀에 대고 다른 한손으로는 방금 상자속에 넣은 책의 커버를 만지작거리면서 말했다.
"도와준다더니 어떻게 된거야? 너 또 니 앤이 불렀다고 나몰라라 하고 내뺀거지?"
"친구를 어떻게 보고. 내가 넌줄 아냐 새꺄?" 그가 컬컬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야, 말도 마. 그 사장새끼가 나더러 세탁소 가서 지 와이샤쓰 찾아서 학교가래요." 그가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이었다.
"그리고는 거기서 기다리다가 지 새끼 나오면 집까지 모셔다 주고 오랜다."
"고생하네. 난 괜찮아. 짐도 거의 없는데 뭐. 책하고 컴퓨터 빼면 옷 몇가지뿐이라." 방안을 둘러보면서 말을 이었다.
"가구는 원래 다 여기 있던거고..."
"미안하다. 내일은 꼭 비누사가지고 이사한 집으로 찾아갈께. 근데 너가 불러준 주소 어디다 적었는지 도통 기억이 안나. 너 나 머리, 원래 닭대가린거 알지?"
"문자로 다시 보내줄께. 너 운전하는데, 운전이나 잘해. 끊자."
"그래. 야! 잠깐!" 핸드폰을 귀에서 떼다가 갑작스런 그의 외치는 소리에 다시 귀에 댔다.
"왜?"
"괜찮은 놈 하나 있는데 소개시켜줄께."
"아냐 그러고 싶은 생각 별로 없어. 나중에...."
"새끼 항상 나중에래.. 너 혹시, 아직 그 놈 생각해?"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아니. 헤어진지 벌써 일년도 넘었는데... 이제 얼굴도 잘 생각안나. 그냥 사는게 귀찮아서 그러지."
"새끼, 노인네 처럼 말하고 자빠졌네. 이번엔 안돼. 싫어도 만나. 내가 답답해서 너 못봐 새꺄. 이달말 안에 날짜 잡을테니 토달지 말고 만나." 그리고는 내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내일 봐" 하더니 전화를 끊어버렸다.
핸드폰을 내려놓고 부엌으로 들어가서 부엌창문을 열었다. 담배하나를 꺼내물고 불을 붙였다. 서늘한 초겨울 바람이 순식간에 작은 부엌 안으로 밀려들어왔다.
친구녀석에게 짐이 거의 없다 했지만 부엌을 돌아보니 들고 가야할 것들이 꽤 눈에 들어왔다.
포장이사를 부를껄 그랬나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얼마나 된다고' 혼자 속으로 핀잔을 주었다. 새파랗게 젊은 놈이 이 정도의 짐으로 포장이사하겠다고 한다면 정작 와서 보고는 기막혀 할 듯 싶었다. 그런데 정말 내가 아직도 새파랗게 젊긴 한걸까? 이제 이 겨울이 지나면 서른 다섯이 되는데..
밖이 어둑해졌다. 불빛이 창문을 통해 들어왔다.
침대 옆에 쪼그리고 앉아서 그가 누웠던 자리를 한번 쓰다듬었다.
'그는 지금 행복할까?' '나 없이?' '아니면 혹시 내가 없어서?'
구질구질한 내 자신때문에 머리가 무거워졌다.
퇴근 후에 술이 취해 들어올때마다 침대 위의 그가 누워자던 자리에 엎드려서 그의 체취를 찾으려 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심장이 찢어지는 듯한 통증은 이제 거의 사라진 듯 했고 무뎌지고 딱딱해진 감정만 남아 있는듯 했다.
이제 오늘 밤이 지나면 정말로 그와 공유했던 모든 것들이 눈앞에서 사라지고 먼 기억속으로만 남게 되는 거였다.
몸이 무거워져서 침대 속으로 천천히 기어들어갔다.
그의 베게에 얼굴을 묻었다.
버리고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짜피 그의 머릿속에는 나의 존재는 이미 오래전에 지워져 있을 거였다.
이제 정말로 나도 그를 완전히 보내야 할 때였다. 그렇게 그가 쓰던 모든 것들을 다 없애버려야 이 구질구질한 내 자신의 껍질을 완전히 벗겨낼수 있을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그렇게 낡은 베게를 품에 안고 쪼그리고 잠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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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그의 베개를 안아보고
이제 완전히 보내세요
힘듬 속에서도 회사생활 열심히 해나가는 민우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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