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안의 그림자 (마지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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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까지만 해도 내리던 비가 그치고 언제 그랬냐는 듯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게 개어 있었다.  화창한 6월 중순의 토요일 이었다. 


지하철에서 내려 약속장소로 걸음을 옮기다가 건물의 쇼 윈도우에 내 모습을 비춰보았다. 어딘가 만족스럽지 않았다.


빌딩 내의 화장실로 들어가서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머리끝부터 자세히 훑어보았다.



어제는 퇴근 후에 명동까지 가서 잘한다는 소문을 들은 미용실에 들렀다.


한두달에 한번 단순하게 머리를 컷트하는 이외에 헤어 스타일을 바꿔보겠다고 머리에 돈을 써 본적은 어제가 처음이었다. 대학시절에도 그 흔한 염색한번 한 적 없었다.


어젯밤엔 꽤 괜찮아 보였던 헤어스타일 이었다.  약간 웨이브가 진, 머리끝이 살아있는 스타일이 꽤 맘에 들었었다.  내 머리를 만지던 헤어드레서는 현빈스타일이라고 했었다.



그렇게 괜찮아 보였던 모습이 하룻밤 자고 아침에 머리를 감고 나니 여간 어색하게 바뀐게 아니었다. 

그래도 그 전보다는 나아 보인다고 자기 위안을 하면서  거울 앞에서 몸을 돌려가며 옷차림을 비춰보았다.


체중이 조금 줄어서 좀 작게 느껴졌던 청바지가 썩 잘 어울렸다. 거울에 뒷모습을 비춰보았다.


'내 엉덩이지만 꽤 괜찮군'  혼잣말을 중얼거리다가 피식 웃었다.


 


지난 밤엔 새벽까지  뒤척이면서 잠들지 못했다.  


창밖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면서  헤어진지 일년 반이 지난 후에 그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는 것이 그냥 설레지만은 않았다.  


이제 내 마음속에 가까스로 그에 대한  감정이 정리된 상태였고 상처도 그럭저럭 아물어있었다.  배신감도 빛이 바래서 어쩌다가 그가 떠오를 때면 어딘가에서 그냥 잘 살고 있기만을 바랬었다.


궁금한 것은 그가 갑자기 나에게 연락을 한 이유였다.  헤어진 연인에게 보험이나, 자동차를 팔아달라고 부탁할 그도 아니었고 궁지에 몰려 도움을 청할 그도 아니었다.  그 정도는 그와 함께 하는 동안 '그'라는 사람을 알고 있었다.  차라리 혀를 깨물고 죽을 그런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에게 연락을 한 이유가 더욱 궁금해졌다.


떠오르는 것 없이 마냥 복잡해지는 생각을 지우기 위해 내 마음대로 한가지 결론을 내렸다.


그는 곧 결혼을 하게 되어 마지막으로 나에게 그 소식을 알려주려는 것이다.  나에게 어떤 여성의 이름이 그의 이름과 나란히 적힌 청첩장을 건네 줄 것이다.  아마도 예전에 공중전화로 그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다가 우연히 듣게 된 그 목소리의 주인공일 것이다.


이미 예전에 끝나버린 사이지만 그렇게 공식적으로 나에게 알리고 싶었을 것이다. 


혹시라도 어쩌다가 우연히 길에서 마주친다 하더라도 자신이 이제 유부남이란 것을 잊지 말고 알아달라는 그의 뜻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그를 마지막으로 쿨하게 보내고 싶었다.  예전의 내가 아니란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그러니 혹시라도 나 때문에 손톱만큼의 불안감이라도 가지고 있다면 말끔히 해소하고 자신의 길을 가도록 해주고 싶었다.


 


마지막으로 거울을 한번 더 보고 밝게 웃어보았다. 거울속의 나는 꽤 젊어보였다.  20대라고 한다 하더라도 사람들이 믿어줄듯도 싶었다.


약속시간이 빠듯해짐을 느끼고는 큰 길 대신에 공원의 샛길로 접어들었다.  어젯밤에 내린 비로 인해서 다시 눈부시게 푸르러진 나무 사이로 맑고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후련해진 마음에 기분까지 상쾌해졌다.



그 공원 끄트머리에 있는 건물 2층에 그와 만나기로 한 커피전문점이 있었다.  계단을 가뿐히 뛰어올라갔다.


"강민우!"  문의 손잡이를 잡으려는 순간, 나의 등 뒤에서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랫만이야."  돌아보는 나의 시야에 해맑게 웃는 그의 모습이 들어왔다.


얼굴이 새까매진, 그래서 눈의 흰자위와 하얀치아가 더 하얘보이는 그가 계단아래에서 웃으면서 서있었다.


"이리 와"  그가 여전히 웃으면서 턱으로 계단 아래쪽을 가리켰다.  그의 양손엔 커피가 들려있었다.


"왜 안들어가 있고?" 계단을  내려오면서 그에게 물었다.


"날씨가 좋잖아.  그 안은 답답할테고.."  다시 싱긋 웃어보이면서 그의 옆에서 걸음을 멈추는 나에게 그가 커피를 건네주었다.


"미리샀어?"


"어. 너 약속시간은 항상 정확했잖아.  저기 가서 앉자."  그가 이제 자유로워진 손으로 공원 한쪽에 있는 벤치를 가리켰다.


 


"잘 지냈지?" 다리를 꼬고 앉아 가방을 옆에 내려놓으면서 그가 물었다.


"그래.  너도 좋아보인다." 웃으면서 그를 바라보았다.


"근데 왜 그렇게 얼굴이 시커멓게 탔어?  아프리카라도 갔다온거야?"


"어?  아프리카는 무슨,..  그냥 어쩌다가 그렇게 됐어." 그가 말끝을 흐렸다.


커피컵을 잡은 그의 손을 흘끗 보았다.


"니 손에...."  손을 가리키면서 놀란 표정을 짓는 나를 보고  그가 자신의 손을 한번 펴보더니 멋적은 듯 웃었다.


"손이 좀 거칠어졌지?  그래도 괜찮아. 그냥 열심히 살았어."


나는 사실 그의 거칠어지고 굵어진 손마디를 말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손가락에 여전히 끼어져 있는 반지가 눈에 먼저 들어왔던 것이다. 빛 바래고 벗겨지고 거무스름한 색이 돌고 있었지만 틀림없는 그 반지였다.


"무슨 일을 하길레 손이 그렇게 거칠어진건데?"  그가 눈치를 채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시선을 돌려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아니, 그냥...." 그가 다시 말끝을 흐렸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서로 어떻게 지냈는지 얘기를 하면 좋잖아.  내 얘기도 해줄께. 시간 많잖아. " 그의 표정을 살피면서 넌지시 말했다.


"오후에 결혼식장에 가야 해." 말을 마치고 그가 싱긋 웃어보였다.


"아. 그렇구나." 대답을 하면서 그를 다시 훑어보았다. 새까맣게 타버린 그의 얼굴에 온 신경을 빼앗겼었지만 다시 보니 그의 말쑥한 정장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 너가 바쁘면 할 수 없고...."  커피를 손안에 만지작 거리면서 한번 웃어보였다.


"그래도 너 변한 모습보니까 너가 뭐하는지 궁금하긴 하다. 그건 말해줄 수 있지?"


"사실........"  커피잔을 만지작 거리면서 잠시 머뭇거리더니 무슨 굳은 결심이라도 한듯한 표정으로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너에게는 같이 있을 때에도 얘기 안했었는데....  우리 부모님 이혼하셨어. 내가 어렸을 때."  나에게 눈길을 한번 주고는 그가 다시 고개를 숙여서 커피를 내려다 보았다.


자신의 가족 이야기를 원래 잘 하지 않으려고 했고 아버지와 동생들 얘기만 대화중에 어쩌다가 한두번 흘린적이 있었을 뿐이어서 난 그의 어머니가 오래전에 돌아가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었다.


"아버지가 알콜중독이었어.  하루가 멀다하고 취해서 집에 들어오면 엄마를 두들겨 팼어.  그래서 아버지가 술이 취해서 들어오는 날이면 엄마는 아버지 눈치를 보다가 여차하면 손바닥을 싹싹 빌면서 무릎꿇고 '잘못했어요. 여보' 하고 흐느끼면서 엎드렸었지.  그런 엄마에게 아버지는 발길질을 하셨어."   


 멀리서 꼬마아이 서넛이 뛰어다니는 것을 보면서 그가 담담하게 말했다.


"미안,  상처되는 말이라면 안해도 되는데... 난 그저 네 얼굴이 너무 검게 탔길레...." 갑작스런 그의 힘들었던 과거의 가족사가 갑자기 그의 입에서 나오는 것에 당황해진 나는 그렇게 그의 말을 멈추게 하려고 했다.


"지금 그 얘기를 하는거야." 그가 고개를 돌려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나는 그때 너무 어려서 아버지한테서 엄마를 보호해주지 못했어.  겨우 열두셋이었거든." 그가 말을 멈추고 감정을 가라앉히는 듯, 낮은 한숨을 한번 쉬고는 목소리를 다듬었다.


"미안해. 괜히 물어봤나 보다."


"아냐. 괜찮아." 그가 얼굴을 돌려 나를 보았다.  먹먹한 눈빛이었다.


"그렇게 딸이 결혼해서 사위한테 매 맞으면서 사는 걸 보시면서 외할머니는 화병으로 돌아가시고, 보다 못한 외삼촌과 이모가 나서서 이혼을 시키신거야.“


”.......“


”그때 나는 중학생이었는데 당장 지내실 곳 없는 엄마는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이모네 집으로 가시게 되었어.  이모부가 사정을 잘 아셔서 엄마를 받아주신거지.  같이 살자고..."


그가 커피잔을 들어 남아있는 커피를 마저 마셨다.


슬며시 내 손에 들려있던 커피를 그에게 내밀었다.


"아냐 괜찮아."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그가 얼굴을 돌려 나를 한번 보더니 내 손에서 커피를 받아들고는 픽 하고 웃어 보였다.


"그때 엄마는 거의 반병*신이셨어.  팔과 다리도 잘 못쓰고..."  그의 표정이 다시 어두워졌다.


"엄마하고 같이 살고 싶었는데, 그때 엄마도 이모부네 얹혀사는 형편이라서 나하고 내 동생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  아버지가 싫어해서 이모네 집에는 거의 가보지도 못했고...  방학때만 어쩌다가 가서 하룻밤 자고 오고 그런게 다였어." 그가 다시 커피잔을 들어 한모금을 마셨다.


"고등학교 들어가면서 몸집 좀 커졌다고 아버지한테 반항하고 그랬어.  꼴보기 싫어서 가출할까 하고 생각도 많이 했었는데, 내가 나가버리면 동생들은 어떻게 하나 싶더라."


"아버지가 일은 하신거야?"  무의식적으로 그의 어깨에 슬쩍 손을 대면서 물었다.  


그가 그 나이에 돈까지 벌어야 하는 가장 역할까지 했을까봐 가슴이 아팠고, 몇년간을 그의 옆에서 나의 삶에 맞추어주는 그의 단면에만 만족하면서 곁에 없으면 죽을것 같다던 그의 과거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던 내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이미 오래전에 헤어진 연인의 고통스러운 과거를 이제서야 듣게 되다니 도대체 그 없이 못산다고 난리를 쳐대면서도 정작 자신의 힘든 부분을 모르고 있던 나를 그는 어떻게 생각했을까.


"큰아버지가 건설기계장비를 수리하시는 일을 하셔서 아버지도 거기서 같이 있었어.  생활비는 가끔 할머니가 오셔서 주시기도 하고 큰엄마가 오셔서 쌀하고 반찬하고 챙겨주시고.....  나는 집에 들어가기 싫어서 학교 끝나면 주유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어."  


날파리 한마리가 날아와 그의 무릎에 앉았다. 그가 컵을 들어 그것을 쫒았다.


"고3때  엄마가 많이 아팠어. 병명이 무엇이었는지 기억도 안나.  돈이 많이 든다던데, 그대로 돌아가시는가 했다.  그런데 그 때 그 동네 유지 한분이 병원비를 대 주셨어. 그래서 사셨지."


"좋은분이네." 내가 끼어들었다.


"글쎄.... 그렇지, 좋은 분이지,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 아저씨가 이모를 좋아하지 않았나 싶어.  이모가 꽤 예뻤거든. 그리고 그 아저씨는 다른 건 몰라도 여자관계가 좋진 않았나 보더라구. 동네에 소문이 돌았다고 했으니까."  그가 말을 멈추고 주위를 한번 돌아보고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역시 돈이 좋긴 좋은가봐.  그런 사람도 나중에 시의원인가 뭔가로 뽑혀서 신문에도 나더라."


"그럼 혹시 예전에 그 인터넷에서 기사가....."


"잊지도 않고 잘도 기억하네." 그가 나를 힐끗보고 씽긋 웃었다.  


한번 고개를 숙이더니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여튼, 그 사람 덕에 엄마는 목숨을 건진거니까 생명의 은인이지."


다 식어버린 커피를 한모금 마시고는 구두끝으로 내 발끝을 한번 툭 찼다.


"내 얘기 재미없지?"


"아냐. 미안해 내가 너에 대해서 하나도 몰라서...."


"내가 얘기 안한거잖아."  그가 사과하는 나의 말을 가로막았다.


"너랑 같이 살때.... 엄마가 위암이라는 연락을 받았어.  병원에서 수술 한번 해보라고 했는데 엄마가 싫다하셨어. 편하게 살다가 가고 싶다고....뭐 사실 다 돈 때문에 그러셨을테지만....."  말을 잠시 멈추고 들고 있는 커피잔을 내려다 보았다.


"사시는 동안  내가 편하게 모시고 싶었어.  그 때 학교 다닐때 공부 안한게 그렇게 후회가 되더라.  뭐 의사나 변호사는 아니더라도 엄마는  내가 초라하더라도 조그만 전셋집이라도 장만해서 모시고 싶었거든,  돌아가실때까지만이라도....  그런데 죽자고 살아도 손안에 있는 돈이 없으니...." 그가 고개를 숙이고 씁쓸한 웃음을 짓고는 허리를 구부리고 발치에 있는 돌을 집어들더니 옆에 있는 나무기둥을 겨냥해서 던졌다. 빗나갔다.


"엄마는 내가 게이인줄 모르셨어. 내가 말씀을 드린적이 없었으니까.   돌아가시기전에 내가 결혼하고 손자하나 보시는게 소원이셨지.  얼마나 그 소원을 들어드리고 싶었던지......"


말을 끝내지 못하고 그는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눈꼬리에 눈물이 맺혔다.


"너한테 죽일 놈 되는데도 어쩔수 없었어. 정말 미안해."  그가 눈물이 맺힌 눈으로 나를 슬쩍 바라보고는 고개를 돌렸다.


"대학교 동창중에 나 좋다고 죽자사자 따라다니던 여자애가 있었어. 미연이라구.  하도 괴롭히길레 커밍아웃해버렸다. 그런데도 옆에 있고 싶다고 그러더라구."  그가 다시한번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 애 한테도 몹쓸짓 한번 시켰다.  엄마가 몇개월 밖에 못사신다는데 갑자기 어디서 여자를 구하겠어?'  그가 나를 보고는 하릴없이 웃었다.


"대전에 내려가서 혹시나 해서 미친척하고 그 애한테 사정얘기를 했는데 뜻밖에 선뜻 그 애가 도와주겠다고 그러더라.  그러면서 다시 올라오는데 내 주변 사람들 다 괴롭히면서 살아가는 내 인생하고 내 자신이 불쌍하고 더럽고 어이가 없어서 집에 그냥 들어갈 수가 없더라.  니 얼굴 보기도 죽도록 미안하고....  그래서 알콜중독 아버지 보면서 '내가 살면서 술을 마시면 사람이 아니라 개새*끼다' 라고 의지 굳히면서 살아왔는데....  새벽에 포장마차에서 혼자 소주 마셨다.  마시니까 조금 나아지는것 같기도 하더라.  이래서 사람들이 술을 마시나보다 하는 생각도 들고....  몰래 들어가서 자려고 했는데, 너, 그때까지 잠안자고 나 기다리더라.  눈치없이... 일찍 잠이나 잘 것이지..."  그의 눈꼬리에 다시 눈물이 맺혔다.


"미안....." 가슴이 답답하고 말문이 막혀서 입이 제대로 떨어지지 않았다.


" 그 다음에도 넌 계속 눈치 없었어. 엄마가 언제 돌아가실지도 모르는데 내 발목 잡고 안 놔줬잖아."


"그냥 가지 그랬어! 한두달 더 있는게 뭐 그리 대수라고,  그냥 확 가버리면 될 것을.."  예상치 못했던 큰 소리가 내 입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나에 대한 자책이었는지, 나에게 이런 말을 하지 않고 버틴 그에 대한 원망이었는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나도...."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를....잃는다는게...너.. 정말.. 사랑했거든."


나는 고개를 돌려서 도로위에 있는 커피전문점 간판을 바라보았다.  지금 눈에 고이는 눈물을 그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는지, 헤어진지 일년 반이나 지나서야 그에게서 처음으로 듣는 '사랑고백'이 감당하기 어려웠는지 알수가 없었다.


"너랑 헤어지고 그 다음날로 김포로 갔어.  미연이는 내가 지낼 곳을 준비 다 한 후에 열흘정도 뒤에 왔고...."


"김포?"  뜻밖의 지명이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것에 놀라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혹시 그 김포가...."


"맞아."  내가 놀라는 이유를 눈치챈듯 그가 나를 보고 피식 웃었다.  


"이모네가 김포에서 농사를 지었어."


"그럼 전에 네가 말한... 김포에 비가 온다는 말은....“


그가 다시한번 피식 하고 웃었다.


"엄마는 봄에 농사를 지으시려고 기다리시다가 기다리던 비가 오면 기뻐하셨어. 그래서 나에게 전화해서 "얘, 비온다." 하면서 좋아하셨지.


"그럼 너가 전에 김포와 양다리를 걸쳤다는 건..."


"너가 우리 사이 지루하댔잖아. 돌부리에 한번 걸려야 한다면서."


".........."


"사실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었지.  너하고 김포에 계시는 엄마 사이에서 양다리 걸친 거니까."


그가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보고 웃었다.  간신히 잠을 재어 놓았던 내 안의 괴물이 깨어나는 것이 느껴졌다.  필사적으로 냉정함을 되찾으려고 애썼다.  아직까지의 노력이 물거품으로 돌아가면 안되는 거였다.


"아, 어쩌지?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한 후에 그가 나를 바라보았다.


"결혼식 때문에 지금 출발해야겠다.  너두 지하철타지? 같이 가면서 얘기하자."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나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누구 결혼식이야?  혹시 너 결혼해?" 발걸음을 옮기면서 짐짓 아무렇지 않은 듯 그에게 슬쩍 물었다.


"뭐?"  그가 기가막힌다는 듯한 표정으로 큰 소리로 웃었다. 


"아니야. 미연이가 결혼해. 학교 선배하고.  걔한테 말할수 없이 미안했는데 정말 잘됐지.  학교 선배가 걔를 또 죽자사자 따라다녔거든.  그래서 내가 커밍아웃 했을 때 그 선배는 쾌재를 부르면서 좋아죽었었어."


"너랑 결혼하는거 아니었어? 그 미연이란 사람?"  갑자기 혼란스러워졌다. 그와 미연이라는 동창이 결혼할 사이인 것처럼 그의 어머니곁을 지킨것이 아니었던가.


"내가?"  그가 나를 돌아보고 한바탕 크게 웃었다.


"설마, 너 나와 미연이 사이에 무슨일 있었을것으로 오해한거야?"    재미있다는 혹은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그가 나를 돌아보았다.


"어머니가 지난 해 3월에 돌아가셨어.  그리고 그 다음에 곧 미연이는 대전으로 내려갔고,  나는 그냥 남아서 그 전 해에 엄마가 하셨던 것처럼 이모부를 도우면서 농사일을 했고 말이야." 해맑은 웃음을 지으면서 그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어짜피 회사도 그만둔거고 딴이 다른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한 해 정도는 엄마가 하신일을 나도 한번 해보고 싶었거든,..”


“........”


“또 그때에는 너에게 감히 연락할 생각도 못했어.  무슨 낯으로 내가 널 볼수가 있었겠냐." 


빤히 내 얼굴을 한번 쳐다 본 후에 고개를 돌려서 바로 앞으로 지나가는 한무리의 초등학생들을 바라보면서 그가 말을 이었다.


"어쨌든, 미연이 한테는 너무 고마웠어. 진짜 며느리처럼 어머니에게 잘했거든.  미연이가 그러더라 '어머니가 조금 만 더 오래 사셨으면 오빠가 나랑 결혼할 수도 있었는데 아쉽다' 고...."   


그가 말을 끝내고 발을 멈추더니 나를 돌아보며 무엇인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앗, 참!  미연이가 그러는데 너가 전화했었다면서? 지난 해 구정 조금 지나서!"


"........."


"너 맞지?  미연이가 백프로 너일거라고 그러던데 뭐!  진짜 대학동창한테 대학동창이라고 거짓말을 하다니 너도 참 재수도 더럽게 없게 걸렸다. 그치?" 그가 나를 돌아보면서 크게 웃었다.


"그녀도...   너랑 나 알아?" 갑자기 소심해져서 웃고 있는 그에게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그럼,  내가 너 얘기 많이 했었어.  언제 너 한번 꼭 보고 싶다고 그랬는데."


그렇게 말 없이 잠시 걷다가 갑자기 감정이 북받쳐서 그에게 소리쳤다.


""그때 나에게 다 얘기하지 그랬어!  솔직하게 다 털어놨더라면 좋았잖아!"


그가 순간 나의 손을 잡더니 곧 다시 놓았다.


"너도 그때 가족들 때문에 힘들었는데... 그렇게 힘들게 사는데, 나까지 내 자신도 견디기 힘든 짐을 어떻게 네 어깨에 올려놓았겠냐.  미안해.  내가 생각하고 결정한 것이 옳다고 생각했었어."


 


승강장에서 지하철이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토요일이지만 날씨가 좋아서 사람들이 모두 시외로 빠져나간 듯 한산했다.


그가 나를 돌아보며 갑자기 무엇인가 잊고 있었다는 듯 메고 있던 가방을 가슴께로 들어올렸다.


"참! 너한테 이걸 주려고 만나자고 한거였는데 잊고 있었다." 하면서 가방에서 무엇인가 좋은 냄새가 나는, 종이로 포장된 주먹 두개만한 크기의 둥그런 것을 꺼내들었다.


"내가 올해 내 손으로 재배한 참외야.  그 중에서 제일 잘생긴 놈으로 따왔어.  다른걸 선물하려고 했는데 다른건 너가 다 살수있잖아."


"선물?  무슨 선물?" 의아해하는 나를 바라보면서 그가 웃었다.


"너 다음주 화요일이 니 생일인지도 모르고 있었냐?”


“.........”


“내가 월요일 오전에는 전에 다니던 회사의 거래처 몇군데에 이력서 넣고 오후에는 다시 내려가봐야해서 지금 줘야 할거 같아서.  또 지금이 싱싱하잖아."


그가 건네주는 참외를 받으려는 순간 고등학교 남학생 서너명이 뒤에서 뛰어오다가 그와 부딪쳤다.  


참외를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발버둥치다가 그의 다른 손에 들려 있던 핸드폰이 손에서 빠져나와 바닥에 떨어져서 내 뒤의 기둥쪽으로 밀려갔다.


발을 옮겨서 그의 핸드폰을 주워들고는 혹시 고장이 난 것은 아닌가 해서 슬쩍 열어보았다.


거기에 내가 있었다.


그의 핸드폰 액정창에 사승봉도의 빛나는 해변을 등에지고 내가 눈이 부시도록 밝게 웃고 있었다.


 


그가 내릴 역이 가까워졌다.


"생각해보니 내 얘기만 하고 니 얘기는 하나도 못들었네?"  그가 나를 보고 웃었다.


"다음번에 만나면 내 얘기 해줄께."  그를 마주보면서 나도 웃었다.


그가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너 그 노래 가사 기억하지?   지금 다른 사람만나 행복하겠지만. 기억해줘. 내가 잠시 네 곁에 살았다는걸...."


어색한 말투로 마치 속삭이듯 말끝을 흐리면서 그가 얼굴을 붉혔다.


팔을 뻗어 그의 손을 잡았다.


"나, 아직 혼자야."



 


신규계약은 결국에는 체결되지 못했다.


회의가 끝나고 사무실로 돌아온 이부장의 얼어붙은 표정때문에 사무실은 냉기가 돌았다.  


퇴근시간이 다가왔는데도 직원들은 서로 눈치만 보고 있었다.  


슬며시 화장실을 갔다 오니 책상위에 놓여있던 핸드폰에 문자가 와 있었다.


"거래처 한군데서 연락왔다. 여기 일은 이모부가 맡으시고 내일 올라가. 다음주부터 출근해. 다시 볼수 있는거지?"


이부장이 여전히 x씹은 얼굴로 퇴근을 하자 사무실 직원들도 하나둘씩 사무실을 나서기 시작했다.


"오면 전화해. 저녁먹고 술이나 한잔하자.  술 아니고 커피라도 좋아."


문자를 보낸 후에 나도 직원들의 뒤를 따라서 사무실을 나섰다.


오랜만에 엘리베이터 대신 비상구 문을 열고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앞으로 내 인생에 희철이와 태훈이는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수는 어쩌지?  아직 어리니 기회가 많을 것이고 영수의 인연은 내가 아닐 것이 확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1층에 도착해서 안내데스크 앞을 지날 때 문자 착신 신호가 왔다.


얼굴에 웃음을 짓게하는 문자내용을 확인한 후에 건물의 회전문을 빠져나왔다.


아직 6월 중순인데도 후끈한 공기가 밀려왔다.


저마다 한두개씩의 아픈 사연들을 가슴에 묻고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나도 그들이 살아가는 그 도시속으로 발을 옮겼다.


 


"까짓, 술을 같이 마셔도 좋지. 그런데, 설마 취한 나를 버리고 갈건 아니지? 최소한 택시는 잡아줄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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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아직 혼자야."
그토록 원하던 사랑이 완성 되신거군요.
등장 인물들과 하나되어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좀 쉬시고 다음 작품에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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