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남자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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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쓸한 가로등 불빛에 흰 눈이 날리고 있었다. 


자정에 퇴근할 때만 하더라도 그저 어두운 적막속에서도 여전히 살아 꿈틀거리는 생명체들의 힘든 몸짓만이 보였을 뿐이었는데, 겨울 바람의 차가운 속삭임 속에서 무엇인가 눈에 띄는 것이 하늘에서 내려오기 시작했다. 


마치 어둠과 추위만이 겨울의 전부가 아니라는 양, 그렇게 큼직한 하얀 눈이 탐스럽게 내리고 있었다.


연수구청 앞에서 횡단보도 맞은편의 연수경찰서 방향을 보고 있던 나의 시야에, 사거리를 속도를 높이고 지나치는 차량들에 흩어져서 하늘거리던 눈발이 사뿐히 횡단보도위에 내려 앉고 있었다. 


그리고 그 건너편의 인도와, 줄 지어 서 있는 앙상한 나뭇가지 위에도 어둠 속에서도 하얀 빛을 발하면서 소리 없이 흰눈이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무엇이든 제일 먼저 앞장 서는 존재들은 자신들의 희생을 치루는 것처럼, 그것들은 곧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희생이 결코 헛된 것은 아니다. 뒤에 오는 존재들을 위한 가슴시린 행동이다. 이제 곧 그들의 그런 자취 위로 그들 뒤로 내려오는 눈은 보금자리를 틀 것이고 두툼하게 쌓여 세상을 흰색으로 바꾸어 버릴 것이다. 


마치 의미 없어 보이는 작은 슬픔조각들이 모여서 한사람을 절망에 빠뜨리기도 하고, 작은 희망이 모여서 터무니없이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것을 바꾸는 힘이 되는 것처럼...



신호등에 들어와 있는 붉은 색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사이에 나의 주머니에서 휴대폰이 울렸다.


액정창에 그 아저씨의 이름이 떠 있었다.


아주 잠깐 동안의 망설임 뒤에 휴대폰을 귀에 대었다. 그리고 그 순간 또한 횡단보도의 신호등에 초록색이 들어왔다.


“여보세요.” 발을 천천히 옮기면서 입을 열었다.


“뭐하고 있냐?” 그가 물었다.


“이제 퇴근하고 집에 들어가고 있어요.” 느릿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맞은편 인도에 도착할 무렵, 서너명의 고등학교 남학생들이 어둠속에서 튀어나와 큰 소리로 떠들면서 내가 지나온 횡단보도를 순식간에 달려갔다. 모두 곧 그들 앞에 펼쳐질 꿈을 찾아 이리 늦은 시간까지 독서실에서 있었을테지. 


“이번 주말에 뭐하냐? 약속있냐?” 그가 다시 물었다.


“이번 주말에는 회사 나가요. 근무조예요.” 


“그러게. 공부 좀 열심히 했으면 좋은데 취업을 했을텐데..” 그의 말이 마치 부모나 선생님의 책망처럼 들렸다.


“할 수 없지 뭐. 그럼 다음 주말에 시간 되면 보도록 하자.” 그의 목소리가 의식적으로 부드러워졌다는 것이 느껴졌다.


“친구들하고 같이 보내기로 약속이 되어있어요. 12월 마지막 주 토요일에는 그렇게 하기로 미리 약속을 잡아 놨거든요.”


“일요일은?” 그가 입맛을 쩝쩝 다시면서 다시 물었다.


“아직 특별한 약속은 없어요.”


“그래? 그럼 미리 나하고 약속하지 뭐. 다른 약속 잡지 말고 나하고 데이트 하자.”


“네?” 그의 말 속의 표현이 낯설어서 그에게 물었다. ‘데이트’ 라니...


“왜? 데이트 하자는데. 싫어?” 그렇게 묻는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아니, 그게 아니고 아저씨 같지 않은 말투시라서...”


“나 같은 말투가 뭔데?” 그가 말을 꺼내고 슬며시 웃었다.


“내가 곰곰이 생각해 보다가, 뭐 자존심 그런 거 다 꺾고, 너하고 한번 사귀어 볼까 하고 결정을 했다.” 그의 목소리 속에 여전히 거만함이 살아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너 운 좋은 거야. 감사하게 생각해야해. 나 좋다는 젊고 잘 생긴 놈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가 말을 덧붙이고는 크게 웃었다.


“그럼 조심해서 들어가고. 난 이제 잔다.”



황송해야 하는 걸까? 수준이 비교가 되지 않는 그런 그가 나에게 손을 내밀면서 한번 사귀어 준다고 하면 무릎을 꿇고 그의 손 등에 입을 맞추며 감사해야 하는 걸까? 기쁨의 눈물을 한방울 흘리면서? 그런데 그런 상황을 어디에서 봤더라? 유럽의 기사에게 작위를 내리는 어느 왕의 모습인가?


그래도, 이 남자는 나를 제 멋대로 혼자 남겨놓고 버리고 가진 않겠지? 예전의 그 아저씨처럼? 


꼭 누군가를 사랑해서 사귈 필요가 있을까? 사랑이란 것이 무슨 소용이지? 자신의 다른 고통이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서 버리고 가 버릴 그런 정도의 사랑이라면 차라리 내 곁에 이렇게 건방지고 뻣뻣하게 존재하는 돌기둥 같은 현재의 아저씨가 백배는 더 낫지 않을까? 


그나 지금의 이 남자나 나에게 본질적인 행복을 주지 못할 것은 마찬가지 아닌가? 


그들이 그렇게 적당하게 나에게 접근한다면 나도 그들이 오는 만큼 적당하게 그들을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다. 손해보는 장사는 할 필요가 없다. 


이 아저씨들은 살만큼 살았고, 세상의 풍파 모두 겪었으며 연인이라는 관계에서도 능수능란하게 대처할 것이다. 마치 사람들이 말하는 능구렁이 처럼..... 겉과 속이 다른 존재로.... 


예전의 아저씨도 그랬지. 자신이 가는 길이 편하도록 나를 이용했어. 강아지를 맡길 사람이 필요했던거지. 


어쩌면 나는 그에게는 그의 강아지만도 못한 존재였을 것이다. 차라리, 그렇게 갈 거면 차돌이는 왜 나에게 맡겼던 것일까. 남에게 맡겼더라면 이렇게까지 그가 나를 이용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을 것 아닌가.





“자 먹어.”


손바닥에 사료를 몇 개 올려놓고는 차돌이의 코 앞에 들이밀었다.


녀석은 코로 몇 번 내 손안에 있는 사료 알갱이를 킁킁 거리더니 간신히 하나를 입에 넣고 아사삭거리면서 씹기 시작했다.




남들이 알지 못하는 혼자만의 상처는 감당하기가 특히 힘들었다.



어떻게 그의 영안실에 도착했는지, 그리고 그렇게 정신이 없는 상황에서도 지갑을 뒤져서 그 안에 있던 만원짜리 한 장을 봉투에 넣어 입구에 있던 사람에게 건네 주었는지, 믿기지 않는 그의 사진을 들여다 보고는 또 어떻게 향을 피울 수 있었는지, 한쪽 구석에 차려진 상 앞에 앉아 그 와중에서도 떡 한 조각을 입에 넣고 어떻게 그렇게 벽에 기대고 앉아 있었는지 모르는 일이었다. 


마치 내가 아닌 듯 했다. 


나는 병원 저 밖의 어딘가에서 나의 아바타를 영안실 안으로 보낸 듯 했다. 


누군가 어떻게 왔냐고 물었던 듯 했다. 생각지도 못했던 ‘후배’ 라는 말이 입안에서 튀어나왔다. 어떻게 그에게 스물 넷 먹은 후배가 있을 수 있으며, 그게 무슨 의미인지 그 안의 사람들은 모를 일이었겠지만, 아무도 나에게 그 이후에 묻는 사람은 없었다. 


그저 그 와중에서도 주위의 대화가 언뜻언뜻 들려왔는데, 마치 귀를 통해 들리는 것이 아닌, 꿈결이나 영혼을 통해 번져오는 듯 느껴졌다.


화장터에서 화장을 하고 어딘가로 가져가서 그의 뼛가루를 뿌릴 것이라는 얘기가 오고 갔다. 


모두 남의 이야기를 하듯 했다. 주위를 돌아봐도 우는 사람은 커녕 얼굴의 눈이 부어 보이는 사람조차 없었다. 도대체 그는 어떤 사람들에 둘러싸여 어떻게 살아왔던 것일까? 


이런 상황이 너무 억울해서 사람들에게 따져 묻고 싶었다. 


당신들과 관계가 있는 사람이 죽었는데, 그가 가족이던 친척이던 친구이던, 그냥 지인이던... 왜 당신들은 그렇게 생전 모르는 남의 얘기를 하듯이 그렇게 할 수 가 있냐고.... 하지만 나는 누구인가? 그에게 어떤 존재인가? 오히려 나는 이곳에 있는 어떤 사람보다도 그에게 관련이 없는 사람이 아닌가? 그들 입장에서는 생전 처음 보는 어린 녀석 하나가 굴러들어와서 뻘 짓 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을까? 



주형이가 차를 가지고 병원의 영안실로 찾아왔다.  


녀석의 차 안에서 그의 어깨에 대고 예상치 못하게 눈물이 터져 나왔다. 얼마나 울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녀석은 계속 나의 등을 두드렸다. 실컷 울라고 했다. ‘여기 내 앞 아니면 니가 어디서 울겠냐.’ 라고 그 녀석은 그렇게 나를 위로했다. 



휴대폰은 꺼 놓고 침대에서 하루 종일 눈을 감고 누워있었다. 


엄마에게는 2박3일 엠티를 가는 동안에 나는 피곤해서 며칠 동안 밀린 잠이나 자겠다고 했다. 


머리카락 한 올도 움직이고 싶지 않았고 움직일 힘도 없는 듯 느껴졌다.


그렇게 누워있는 나를 보고는 ‘니가 데려온 개는 네가 돌봐야지.’ 하고 엄마가 말했다. ‘목욕도 시키고 똥도 치워. 집안이 온통 개 냄새 때문에 못살겠다.’ 고 엄마가 나무랐다. 



움직이기는 커녕 숨쉬기도 싫은 그런 순간에서도, 자리에서 일어나 차돌이의 목욕을 시켰다. 마치 좀비처럼 외출해서 개 껌과 사료를 사왔다. 베란다 뒤에 있는 선반을 뒤져서 해묵은 신문지를 꺼내고 아파트의 재활용 보관소에서도 버려진 신문지를 주워왔다.


일본의 어떤 개는 주인이 죽은 후에도 자신이 죽을 때까지 주인과 헤어진 자리에서 기다리다 죽었다는 개 이야기도 들은 적이 있었지만, 차돌이는 마치 내가 원래 주인인 것 마냥 나를 따라다녔다. 


그런 그 녀석에게도 섭섭한 생각이 들었다. 이제 그가 존재했었다는 것은 그저 내 기억속에서만 남아 있었다. 



며칠이 지난 후, 다시 부평의 원룸으로 가 보았지만, 그 사이에 이미 아저씨의 방은 비어있었다. 아저씨의 친척이 와서 짐을 다 옮겨갔다고 했다. 


그렇게 쌓여있던 책은 모두 버려졌다고 했다. 폐지를 줍는 할머니만 기쁜 얼굴이었다고 했다. 그래, 그래도 누군가에게 작은 행복을 주고 갔네. 아저씨가...... 비교할 수 없는 고통은 나에게 남겨놓고....



이제, 그는 이 세상에 없었다.


무덤이라도 있다면 찾아가 볼 텐데, 그는 무덤은 커녕, 납골당에 주먹만한 공간도 차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인간의 존재의 허무함이 느껴졌다. 


그에게 원망의 말을 실컷 쏟아 놓고 싶었다. 그러나 그의 자취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는 그렇게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토요일에 아빠의 차를 빌렸다. 


친구중 하나가 시골로 이사를 해서 찾아가는데 교통이 불편하다고 했다. 가서 꽃과 나무도 심어보고 올 것이라고 계절에 맞지도 않게 꽃삽과 비닐도 챙겼다. 그리고 아저씨의 신발과 양말을 비닐 속에 넣어 놓았다.



부모님이 집 근처의 공원으로 산책을 가신 후, 한손으로는 차돌이를 안고 다른 손으로는 삽과 아저씨의 신발이 들어있는 비닐봉투를 들고 집을 나섰다. 




아저씨는 항상 바다를 좋아했다.


섬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바닷가에서 살다시피 했다고 했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실려오는 끈적거리는 이야기속에는 항상 그리움이 묻어 있다고 말했었다.



전에 아저씨와 같이 왔던 용유도의 바닷가 한쪽 언덕 끄트머리에 정성들여 땅을 팠다. 


바닷바람이 불어와 나의 머리를 헝클어뜨리고 멀리서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랜만의 외출에 차돌이는 언덕의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며 코를 킁킁거리면서 신세계를 탐험하고 있었다. 


아저씨의 양말과 신발이 들어있는 비닐봉투를 파 놓은 구덩이에 넣고는 다시 그 위에 흙을 덮었다. 


“아저씨, 갈 데 없으면 이리 와서 여기서 쉬어요.” 손으로 흙을 다지면서 나지막히 말했다.


“그리고 가끔 내가 와서 아저씨 원망을 하면, 화내지 말고 꼭 들어줘요.” 눈꼬리에 눈물이 맺혔다.


“아저씨 진짜 못 됐다는 거 알아요?” 차돌이가 뛰어와서 나의 손등에 코를 박고 킁킁거리고는 나를 올려다보고 꼬리를 흔들었다. 


“차돌이를 맡길 사람이 필요했던 거예요?” 원망섞인 목소리로 그에게 불평했다.


“사실.....” 말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해변가로 밀려오는 파도를 바라보았다.


“나, 여기에 아저씨 버리고 가는 거예요.” 손을 뻗어 옆에 놓여있던 꽃삽을 손에 쥐었다.


“그러니 나 따라오지 말고, 여기에서 살아요. 나 이제 아저씨 없이 잘 살거예요.” 발에 힘을 주고 슬며시 일어났다.


“그렇게 내가 사랑해줬는데, 끝끝내 불행했으면 어쩔 수 없지. 어쩌겠어. 그렇게 도망을 가버려서 이제 좋겠네. 남은 짐은 다 나에게 버리고 간 거지?”



차가 세워져 있는 길로 몸을 돌렸다.


“차돌아 가자.” 내 말에 차돌이가 쪼르르 내 발 주위로 와서 나를 올려다보면서 뛰어다녔다.


그렇게 나는 그를 그가 좋아하는 바닷가에 버리고 그곳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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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루지 못한 슬픈 사랑을 보내드렸군요
1화에 나왔었던 그 바다가에서
첫 장면과 아귀가 짝 맞춰집니다.
사랑이란 무엇인가를 일깨워주시는 명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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