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안의 그림자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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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텔 밖으로 나왔을 때는 초겨울의 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부지런히 앞서 걷던 그가 자꾸 뒤쳐지는 나를 돌아보았다.
"왜? 너 비 맞는거 싫어하잖아. 왜 그렇게 느리게 걸어?"
"........."
"어디, 몸이 안좋아?" 그가 내 안색을 살폈다.
"그냥. 걷는 네 뒷 모습 감상좀 하느라고, 니 뒷모습 전체 다 보고 싶어서...."
"뭐?" 피식 하고 그가 웃었다. 볼 안쪽이 붉어진 듯도 싶었다.
"바람에 날리는 니 귀 옆에 머리카락, 걸을 때마다 귀엽게 접히는 청바지 엉덩이 선, 빗물이 튀는 니 발뒤꿈치 보고 있었어."
이제 보폭을 줄여서 내 옆에서 걷는 그의 손을 내 팔꿈치에서 느끼면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말했다. 하지만 내 볼이 붉어졌을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 하긴 내가 한 몸매하긴 해. 그렇게 잘난 남자가 니꺼라서 기분 좋았던 거야?" 그가 나를 향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와이퍼가 부드득 소리를 내며 규칙적으로 차 앞유리를 문질러 내고, 틀어놓은 라디오에서는 토이의 내가 너의 곁에 잠시 살았다는걸 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런채 살았어 늘 혼자였잖아 한때는 널 구원이라 믿었었어 멀어지기전엔...."
조그맣게 노래를 따라 부르다가 문득 왼손을 들어 운전하고 있던 그의 허벅지에 살짝 올려놓았다.
"뭐지... 이 느낌은? 아주 바람직한데?" 그는 시선은 차 앞에 고정한 채로 실눈을 뜨고 웃으면서 속삭이듯 말했다.
"어디 으슥한데 가서 포르노 영화 한번 찍어봐?' 낮고 느끼한 목소리로 그가 짖궂은 표정을 지으면서 나를 돌아보았다.
그의 말에 피식 웃으면서 그의 허벅지에 있던 손을 떼어서 짐짓 앞에 있는 시디 한장을 들어서 케이스를 열었다.
낮은 목소리로 그가 말을 이었다.
"너 말야. 알어? 가끔 보면, 먼저 나 흥분하게 만들고 정작 그 다음엔 꽤나 수동적이다, 영화속의 상대배우였다가 갑자기 관객이 된것처럼 멀찌감치 물러서서 말야. 그거 아주 아주 안좋아. 바람직하지 못해. 사람이 말야. 솔직하고 화끈해야지...."
신호등 앞에서 사이드 브레이크를 드드득 채우며 그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안그래?"
"일요일 오전에다가 비까지 오니 거리가 정말 한산하다. 그치?" 뚱딴지 같이 태연한 얼굴로 창밖을 바라보면서 혼잣말을 하듯이 읊조렸다.
"너는 꼭, 남들 얘기하는것도 아니고, 너랑나랑 얘기하는 건데. 항상 그런식으로 말 돌려. 우리가 뭐 못할짓해? 죄짓고 있냐?"
반은 서운한 뉘앙스를 풍기고 반은 화가 났다는 자신의 의지를 전달하려고 그가 목소리 톤을 짙은 갈색으로 채우면서 말했다.
지난 겨울, 주말마다 공원을 산책했었다.
눈이 올때에는 눈을 즐기는 사람들과 아이들이 있어서 좋았고, 그저 춥고 바람불면 나 혼자서 터덜거리면서 걷는 그 분위기가 좋았다. 귓볼을 마치 면도칼끝으로 그어대는 듯한 날카로운 겨울 바람도 견딜 만했고, 이미 오래전부터 그렇게 죽어있는 것처럼 서 있는건조한 나무들이 좋았다.
어느 날, 어느 주말에 그 나무들 중의 하나에 그 전에 보지 못했던 티눈이 보였다.
'죽은게 아니었군' 나는 중얼거렸다. '그래 죽은게 아니었지. 이 공원에서 죽은것 처럼 보이는 것들은 다 살아있고, 살아서 돌아다니는 것처럼 보이는 나만 죽어있는거야.' 새삼 그렇게 놀라운 대조를 느끼면서 그 티눈 하나가 나중에 얼마나 큰 아름다운 변화를 이 공원 전체에 가져올 것인가를 생각하니 가슴이 뿌듯해졌다. 내 눈앞에 갑자기 이 춥고 삭막한 공원은 활기찬 봄의 신록으로 뒤덮혀있는 모습이 펼쳐졌고, 아직까지 그 곳을 덮고 있던 차디찬 겨울바람은 내 눈과 입을 통해서 나의 폐 안을 채웠다.
그렇게 알게 모르게 봄이란 놈이 찾아올 무렵에 그를 만났었는데, 벌써 초겨울이라니, 내 옆에 앉아서 핸들을 잡고 쩝쩝 입맛을 다시면서 슬쩍 나를 곁눈질로 보고 있는 그에게 이제 익숙해질만도 한데 말이다. 이제 그냥 모두 그에게 다 맏겨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미술관옆 동물원에서 심은하가 그러지 않았던가, '사랑은 풍덩 물에 빠지는, 그런것인줄로만 알았는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내리는 가랑비에 온 몸이 젖는것도 사랑이라' 는....
"오늘은 이제부터 뭐할거야?" 그가 물었다.
"뭐, 집에 들어가서 외박은 했지만 들어왔다는거 보고하고, 좀 버티면서 티비나 좀 보면서 부모님하고 같이 점심 먹어드리고 , 그 담엔 누구한테 전화오기를 기다려야지 뭐."
"혹시 그 누구가......... 나?"
"천만에! 원빈이 전화한다고 했어."
피식 하고 그가 웃었다.
"원빵이나 원빙이겠지. 원봉이나." 그가 차를 아파트 입구에 세우면서 실실 웃으면서 나를 바라보았다.
혹시라도 아까 나의 반응때문에 기분상해서 돌아갈 그가 마음에 걸려 차에 내린다음에 한마디 더 거들었다.
"아 헤어지기도 전에 벌써 보고 싶으니 어쩌지? 이따가 꼭 전화해, 할일 다 하고."
"그래 알았어. 오후에 전화할께. 기분 풀어주려면 저녁때 만나서 갈비라도 사주던가." 그가 씨익 웃으면서 고개를 돌렸다.
"아버지는요?"
"친구분 집에 가셨다." 소파에서 일어나면서 어머니가 고개를 돌려 나를 노려보셨다.
"어떻게 너는 그렇게 토요일만 되면 한번도 안 거르고 꼬박꼬박 외박을....."
"일이 있었어요."
"일은 무슨일!"
"엄마가 어떻게 알아요. 회사일인데..."
"내가 눈감은 장님야? 아니면 귀머거리냐? 내가 바보냐구!"
내 방으로 따라 들어오시면서 어머니는 소리를 치셨다.
셔츠 단추를 풀다가 고개를 돌려 어머니를 어깨너머로 돌아보았다.
"너 저번에 우리집에 들락거리던 그 놈하고 뭐하면서 돌아다니는지 내가 모를줄아니? 나 다 알고있어! 너 그놈 왔을때 방문만 잠가 놓으면 내가 모를줄 알았니?"
말을 끝내고 어머니는 방에서 나가셨다.
조용히 문을 닫고 침대 끝자락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창문 유리에 다시 거세지는 빗방울이 마치 전투중에 쏟아지는 총알처럼 튀었다.
하늘은 먹구름으로 다시 어두워지고 어딘가 멀리서 우르르릉 하는 천둥소리가 들린듯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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