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피 프린스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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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


끝없이 계속 되는 폭염이었다.

 


하루종일 땀을 흘리면서 작업을 끝내고 퇴근시간에 찬물로 샤워를 하고, 다시 옷을 입고 밖으로 나오자마자 등줄기를 타고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두꺼운 청바지에 삼일동안 계속 입고 있던 셔츠의 겨드랑이에서는 코를 찌르는 불쾌한 냄새가 진동했다.



현장 사람들끼리 회식 자리가 있다고 기다리라는 현장 반장의 말을 들었지만 그는 몸이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빠져나왔다. 엄마가 돌아가신 이후로 정훈은 몰라보게 수척해졌다. 몸에 잘 들어맞던 청바지가 이제는 너털대는 면바지를 입은 듯 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피곤함에 몽롱한 상태로 버스 정거장의 퇴근 후에 몰려나오는 사람들 속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코너를 돌아서 다가오고 있는 버스를 보고 그가 주머니에서 버스카드를 막 꺼내려고 할 때 휴대폰의 진동이 느껴졌다. 




지난주 금요일에  집 앞에서 보낸 후에 현준으로부터 연락이 없었다. 


행동과 마음에 선을 그을 것을 현준에게 말을 해 놓고도, 마음속에서 그를 지워야한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무의식적으로 휴대폰을 손에서 놓지 못하고 있던 그였다. 혹시나 알아채지 못할까봐 그가 잠결에라도 쉽게 받을 수 있도록 머리맡에 휴대폰을 놓고 잠을 청했었다.


‘잘 지내는지 궁금해서 문자 보낸다.’


휴대폰 액정창에 현준이라는 이름이 찍힌 것만 으로도 설레는 자신이 어처구니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는 현준이 보낸 그 단 한 줄의 문자를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읽어보았다.

  


느닷없는 자신의 차가워진 모습에 그는 많이 놀랐을 것이고 또 상처도 받았을 것이다. 


입장을 바꿔서 생각을 한다면 결코 그는 다시는 연락을 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베푸는 입장에서 그런 어처구니 없는 대접을 받는다면 욕을 한바가지 퍼붓고, ‘재수가 없어 똥 밟았다’고 생각할 것이었다.


그러나, 현준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그렇게 안부 문자를 보내준 것이다. 



버스에 올라서 에어컨 바람이 나오는 곳에 자리를 잡고 서서 그는 떨리는 손으로 통화버튼을 슬며시 눌렀다.


“여보세요?” 마치 전화가 올 것을 기다렸다는 듯 신호가 가기가 무섭게 현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자 받았어요. 형, 잘 지내셨죠?”


그렇게 인사를 하면서 정훈은 그런 자신이 현준에게 얼마나 이중적으로 보일 것인가 하는 부끄러움이 몰려와 비참한 생각이 들었다.


“어, 너도 잘 지내지?” 그럼에도 현준의 따뜻하고 자상한 목소리가 버스 속에서 서 있는 정훈의 귓속으로 헤집고 들어왔다.


“저번에 제가 말이 너무 심했어요. 미안해요. 형.” 정훈이 핸드폰에 대고 중얼거리듯 속삭였다.


“아냐. 괜찮아.”


“편하게 연락하세요. 저도 편하게 형 대할께요.” 그 말을 간신히 하고는 정훈은 스스로 한 말에 겸연쩍어져서 “버스안이라서.... 안녕히 계세요” 라는 어색한 인사를 해버리고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의 심장이 너무 크게 뛰어서 버스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을 듯 싶었다. 낮은 한 숨을 간신히 내 쉬고는 그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버스에서 내려서 집으로 들어가는 구불거리는 골목길을 따라 발을 옮기고 있을 때 전화기를 꽂아놓은 청바지의 뒷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여보세요?”


“근데, 지금 어디냐?” 현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퇴근해서 이제 집에 들어가고 있어요.”


“할 얘기가 있어서 좀 봤으면 하는데.....”


“어디신데요?”


“외근 나왔다가 이제 회사 들어가는 중이야.” 현준의 목소리와 함께 귓속으로 희미한 자동차의 경적소리가 들려왔다.


“잠깐이면 되는데...” 그가 잠시 말을 멈췄다.


“장소를 말씀 하시면 제가...”


“집에 다 간 거 같으면 그냥 내가 니 집으로 갈게.” 현준이 우물쭈물거리던 정훈의 말을 끊었다.


“나도 지금 공단입구 근처거든.”  


 


집으로 부지런히 발을 옮겨서 들어가서 그가 냄새나는 셔츠만 갈아입고 밖으로 나오자 마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골목의 코너를 돌아서 현준이 나타났다.


“차는요?”


“입구 공터에 세웠어.” 환한 웃음을 지으면서 현준이 다가왔다.


“여기 온 김에 커피한잔 줄래?” 여전히 밝게 웃으면서 현준이 넌지시 묻고는 그의 표정을 살폈다.


“불편하면 다른 곳으로 가던지...” 


정훈은 잠시동안 결정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초라한 자신의 방안을 결코 현준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지만 누굴 좋아한다는 감정이 무 자르듯 할 수 있는 것이 아닌것을, 그래서 현준이 여전히 자기를 마음속에 담아놓고 있을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자신도 먹고 살아야 한다는 이유로 그를 보내려고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항상 그를 향하고 있지 않은가. 


더 명확한 현실을 현준에게 보여준다면 그가 알아서 그를 포기하고 떠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 먼저 발을 돌리면 자신도 마음을 정리하기가 훨씬 쉬울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조용히 자신을 지켜보면서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현준에게 정훈은 고개를 돌렸다. 


“여기까지 오셨는데 들어가세요. 집에 얼음이 없어서요. 이 더운 날씨에 뜨거운 커피를 드릴수는 없고....” 그가 잠깐 말을 멈추고 그를 보았다. “커피 대신 물 한잔 드릴게요.”


“더워도 너가 타주는 커피한잔 마시고 싶은데?” 그의 앞에서 쪽문을 열고는 현준이 들어가도록 입구를 비워주는 정훈을 바라보면서 그가 씨익 웃어보였다.


 


현준을 방으로 들여보내고 정훈은 그가 부엌으로 쓰고 있는 작은 공간에 있는 선반에서 휴대용 가스렌지를 꺼내고 그 위에 낡은 냄비에 물을 담아 올려놓고 불을 켰다. 


그의 좁고 초라한 방 안을 돌아보고 있을 현준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빠진 머그잔을 꺼내면서 그는 예전, 그가 군대 가기 전 같이 어울려 다니던 사람들 중에서 그래도 꽤 친했던 한 형이 한 말이 생각이 났다. 

  


그때 그는 우연히 만난 한 살 어린 휴학생을 만나고 있었다. “여간 해야 말이지. 웬만하면 계속 사귀어 볼까 생각도 했는데, 너무 없이 살더라. 어떻게 좀 도와주려고 했는데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이고 또 좀 이것저것 사주고 했더니, 처음에는 고마워하더니 나중엔 은근히 바라고 말이야.” 


그때에는 그의 말에 수긍이 가서 고개를 끄덕끄덕 거렸었다. 


오히려 ‘없는 사람은 뭘 해주면 바라게 된다’ 는 것이 무슨 진실이라도 되는 것처럼 생각이 들었었다. 하지만 이제 정훈의 기억속의 그 말은 고스란히 뾰족한 송곳끝이 되어서 그의 심장을 찔러댔다. 


“그래, 피차 빨리 현실을 깨닫고 각자 길을 가는 게 최선이지.” 선반 구석에 놓여있던 검은 비닐 속에 들어있는 커피믹스 한 움큼 중에서 하나를 꺼내면서 정훈은 중얼거렸다.


 


커피잔을 들고 방에 들어섰을 때 신 김치 냄새가 온 방을 진동했다.


현준이 냉장고를 열어보았음이 틀림 없었다. 태연하려고 노력하면서 그는 현준에게 커피잔을 건네고 그 옆에 앉았다.


현준의 표정을 보면서 정훈은 그가 할 말이 너무 많으면서도 또한 할 수 있는 말이 없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무 말 없이 커피를 몇 모금 마신 후에, 현준이 고개를 돌려 정훈을 바라보았다.

 


“너 만나자고 한 이유는....” 현준이 입을 열었다. 


더운 날씨에 선풍기 하나 없는 방에서 넥타이를 단단히 매고 앉아있는 현준의 콧잔등 위로 땀이 송글송글 맺히더니 그의 얼굴 여기저기에서 땀이 배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정훈은 한 구석에 놓여있던 두루마리 화장지를 손바닥으로 몇 번을 감아서 끊고는 그에게 건넸다.


“우리 회사 거래처에서 예전부터 사무실 컴퓨터 관리 좀 해주고 관리과 업무 보조좀 해 줄 아르바이트 사원을 뽑는다고 했거든.” 그가 건네받은 화장지로 얼굴을 문질렀다.


“너가 우리 처음에 만났을 때 컴퓨터공학이 전공이라고 말한 것이 생각이 나서 너 소개 좀 하려고 하는데....” 현준이 말을 멈추고 정훈의 표정을 살폈다.


“저 컴퓨터 잘 못해요.” 정훈이 입을 열었다.


“관심은 있었는데 겨우 1학년 마치고 군대 갔다가 제대하고 여기로 바로 온거라.....”


정훈의 말에 현준은 슬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그래도 기본 지식은 있을 거 아냐? 어렵고 그런 일은 아닌 듯 하니까 말야.” 


“잘 모르겠어요.”


현준이 들고 있던 커피잔에 시선을 두고 있던 정훈이 고개를 돌려 현준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르바이트면 몇 개월 일하다가 그만두어야 하는 거 아니예요? 전 먹고 살 직업으로 필요한데...” 정훈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흘렀다.


“내가 한번 더 그쪽 하고 얘기해 볼게. 그리고 그일 하면서도 여기저기 알아보면 또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있을거야.” 현준이 그의 표정을 살피면서 말을 하고는 슬며시 일어섰다.

  


현준을 따라 자리를 일어나면서 얼떨결에 정훈은 현준의 얼굴로 손을 내밀다가 흠칫 멈추었다.  화장지로 땀을 닦은 것이라서 화장지의 부스러기가 현준의 콧잔등과 턱 주위에 붙어있었다.


“왜?” 현준이 물었다.


“화장지 부스러기가....”


“어디?”


정훈은 말 없이 손을 들어 손가락으로 현준의 콧잔등과 턱을 쓸었다.



“한번 생각해 봐. 너 공부하고 싶잖아.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봐야지.”


공단입구를 향해서 골목을 걸어 나오면서 현준이 옆에서 아무 말 없이 걷고 있는 정훈을 보면서 나직하게 말을 건넸다.


“내가 다른 마음 품을 것이라고 오해는 하지 말고...” 다시 현준이 말을 이었다. “동생이 고생하는데 형이 그 정도는 당연히 알아 봐줄 수 있는 거니까.” 


여전히 대답이 없이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자신의 발등만 바라보면서 걷는 정훈을 바라보다가 현준도 입을 다물었다.



차를 시동을 걸고는 현준이 다시 차 밖으로 몸을 일으켜 세웠다.


“정훈아.” 빤히 자신을 바라보는 정훈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현준이 입을 열었다.


“한가지 물어보고 싶은게 있는데.....” 말을 꺼내고는 현준은 그 뒤를 잇지 못하고 정훈의 눈치를 보았다.


“괜찮으니까 물어보세요.” 무슨 말이든 상관없다는 표정을 지어보이고는 정훈이 물었다.


“아까 방 둘러보니까....” 다시 그가 말을 멈추고 정훈의 눈치를 보았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방안에... 침구가 없더라.” 현준이 다시 한번 말을 멈추었다..


“지난 겨울에 어떻게 보낸거냐?” 뜻밖의 현준의 질문에 당황해진 정훈은 대답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너가 겨울동안 보일러를 켜 놓고 살았을리도 없을 것 같고...”


“옷장 속에,” 가능한 태연한 표정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면서 정훈이 슬며시 입을 열었다. 


“야외용 침낭 있어요.” 당당한 표정으로 웃음을 지으려는 그의 노력에도 쓸쓸한 웃음이 그의 얼굴에 나타났다.


현준의 눈을 피해서 그는 자동차가 향하는 앞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오리털 파카도 하나 있구요.”


여전히 무슨 뜻인지 몰라 당혹해 하는 현준의 시선을 느끼다가 정훈이 다시 설명했다.


“오리털 파카를 입고 침낭 속에 들어가서 누우면 그렇게 춥진 않아요.”


잠시 그렇게 가만히 서 있던 현준이 한걸음 정훈에게 다가오더니 손을 뻗어서 정훈의 어깨를 다독였다.


“공연이 쓸데없는 것 물어봐서 미안하다.”

  


차의 운전석에 올라 현준이 자동차의 앞 창문 유리를 통해서 한번 정훈을 올려다보고 손을 흔들고는 후진을 했다. 


차의 앞 유리창 너머의 현준에게 한번 희미한 미소를 짓고 정훈도 그를 향해 손을 들어 한번 흔들고는 돌아섰다.


“정훈아!”


정훈이 막 몸을 돌려 한 걸음 내 딛었을 때 뒤에서 현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같이 저녁이나 먹으러 가자.” 자동차의 창문 밖으로 현준이 고개를 내밀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주저하던 정훈은 천천히 발을 옮겨서 조수석 쪽으로 향했다.



 


 


(현준)


정훈의 방안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방안을 한번 둘러본 현준은 할 말을 잃고 가슴이 막혀왔다.

  


어둡고 좁은 방 안에는 밖에 내다 버려도 아무도 가져가지 않을, 너무 낡아서 대낮인데도 소음이 귀를 자극하는 작은 냉장고 하나와 앉은뱅이 책상하나 그리고 조립용 미니 옷장하나만이 있을 뿐이었다. 


티비나 컴퓨터는 커녕 라디오도 없었다. 


벽에 어지럽게 박혀있는 못에는 청바지 두 개와 검은색 티셔츠하나 그리고 보풀거리는 올이 다 닳아버린 낡은 수건 두세개가 걸려 있었다.


작은 창문은 하나 있었지만 열려 있는데도 통풍이 잘 되지 않는 듯 방안 공기가 답답했다. 


  

그는 슬며시 냉장고를 열어보았다.


빨간색 플라스틱 통 안의 검은 비닐 봉지 속에 신 냄새가 진동하는 배추김치가 담겨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가정에서는 그 정도이면 내다 버릴 듯 싶었다. 


그리고 그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았다.

 


냉장고 문을 다시 닫고는 그는 다시 한번 방안을 돌아보았다. 


창문 아래에 있는 빛바랜 작은 쿠션은 아마 정훈이 베개 대용으로 쓰는 것인 듯 머리카락 몇 가닥이 붙어 있었고 잠을 자면서 깔거나 덮을 만한 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정훈이 일 년을 버티면서 살았다는 것이 직접 눈으로 보면서 피부로 느껴지자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정훈에게 남아 있는 것이라곤 그를 버티게 하고 있는 자존심 뿐일 것이라고 생각하니 그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도움의 손길을 준다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몇 개월 전, 그는 회사에서 관리와 인사를 담당하고 있는, 그의 회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같은 공단 안에서 근무하는 친구를 만났던 적이 있었다. 


지나가는 말로 그는 그 친구로부터 자신의 회사에서 컴퓨터에 능통하고 관리를 담당해서 일할 직원을 구하고 있다는 말을 얼핏 들은 적이 있었다.


그때에는 그냥 지나쳤던 그 친구의 말이 정훈의 사정을 알게 되면서 떠올라, 그에게 다시 연락을 했었다. 


  


직원을 뽑아서 실무에 익숙하게 되면 그만 두고 이직하는 일이 몇 번 반복이 되면서 아예 채용 자체를 포기하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이제는 그런 일을 피하기 위해서 채용한다고 하더라도 아르바이트 생을 구하기로 회사 방침이 정해졌다고 그 친구는 말했다.


하지만 현준의 생각에는 정훈은 어떻게든 현재의 삶에서 벗어나야 했다.


한번에 큰 도약을 하는 것이 힘들다면, 작은 징검다리라도 밟고 건너서 지금 그가 속한 지역을 벗어나야 한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렇게 그는 정훈이 접어두고 있는 꿈을 되찾아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를 그가 여전히 꿈꾸고 있는 대학의 캠퍼스 안으로 돌려보내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의 다른 삶을 찾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었다.


어떻게든 노력을 한다면 징검다리는 만들어 질 듯 했다. 그만큼은 자신이 어떻게든 정훈을 위해서 만들 수 있을 듯 싶었다.   



운전중에 조수석에 앉아 있는 정훈을 흘끗 곁눈질로 보면서 정훈이 원하지 않는 자신의 감정은 차곡차곡 가슴 깊이 묻어두고 그저 순수하게 정훈이 다시 그가 원하는 궤도로 올라설 수 있도록 하겠다고 현준은 생각했다.


그러는 사이에 예전에 정훈이와 같이 식사를 했던 음식점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정훈과 헤어져 집에 와서 옷을 갈아 입는 중에 다시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 




다시 외출한다는 말을 건네고는 구두를 신고 있는 현준을 향해서 내용을 모르는 그의 어머니가 드디어 폭발을 했다.


“이 밤중에 또 어딜나가? 너 이 새끼 정훈인지 뭔지 그 놈 만나러 가지?” 방안에 계시던 엄마가 현준의 방문 열리는 소리를 듣고 고개를 밖으로 내미셨다가 현준을 따라 현관으로 나오면서 악을 지르셨다.


어머니의 시선을 무시한채 구두를 신고있는 그의 표정은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차라리 나를 죽여라 이놈아!”


현관문을 열고 나가는 현준의 뒤통수에 그의 어머니가 소리를 지르셨다.


“꼴도 보기 싫으니까, 나가서 들어오지마 이 새끼야!”


엄마의 목소리를 뒤로 하고 현준은 엘리베이터가 서 있는 층 숫자를 한번 흘끗 본 후에 계단을 천천히 걸어 내려왔다.




열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자신이 죽는 일이 있어도 그녀와 결혼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그의 말에 이제는 그의 마음이 완전히 돌아섰다는 것을 마침내 선애도 받아들이는 듯 했고 지난 주말의 일요일 저녁에는 끝맺음도 정식으로 하는 것이 도리일 듯 해서 그녀의 부모님을 만나서 결혼할 의사가 없다는 것도 이미 말을 해 놓은 그였다. 


뺨을 맞거나 얼굴에 찬물 세례를 받는 드라마에서 자주 벌어지는 그런 일은 없었다. 오히려 그녀의 아버지는 헛기침을 두세번 할 뿐이었고 어머니는 그의 말이 끝나자 마자 안방으로 들어가 버리셨다. 


그의 말을 들은 그녀의 아버지의 표정에는 웃음을 감추고 있는 듯한 미묘한 빛이 감도는 듯해 보였다.   어쩌면 그녀의 무보님에게는 다행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귀하게 키운 그들의 외동딸이 별볼일 없는 현준과 같은 아무것도 볼것이 없는 남자와 절대로 인연을 맺도록 하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커피숍에 들어서자 웨이터가 기다렸다는 듯이 그를 선애가 기다리고 있는 칸막이가 쳐진 방 안으로 안내했다. 


그녀의 맞은편 의자에 앉으면서 그는 그렇게 자존심이 강한 선애의 눈이 부어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주문하기를 기다리면서 서 있는 웨이터에게 커피를 시키고는 현준은 선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제 만족해?” 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침울 했다.


“미안하다.... 정말..” 그가 힘들게 입을 열었다.


“다 끝난걸 알면서도 자기한테 만나자고 전화를 한 건....” 그녀가 자신의 앞에 놓여 있는 커피잔을 들고 입에 갖다 댔다.


“이렇게 헤어지고 나면 자기가 나를 죽을 때까지 알지 못하고 오해하게 될 것이 마음에 걸렸어.” 그녀가 커피잔을 다시 내려놓았다.


“나 자기한테 막 대했다는 거, 자주 심하게 대했다는 거 알아.” 그녀의 말을 들으면서 현준이 양복 안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


“자기 만나기 전에 다른 남자들도 꽤 만났었어.” 그녀가 고개를 돌려 어둑한 창 밖을 내다보았다. “연애라기 보다는 대부분 부모님 통해서 소개받은 남자들이었는데....” 그녀가 한숨을 내 쉬고는 그에게 고개를 돌렸다.


“하나같이 잘 났더라. 똑똑하고 많이 배우고 다 잘나가고 돈도 많고 집안 좋고...” 그녀는 현준이 담뱃불을 붙이는 것을 바라보았다.


“부모님이 워낙 금이야 옥이야 키우셔서 나는 완전히 응석받이로 자랐어.” 현준이 고개를 돌려 창문 쪽으로 담배연기를 뱉어냈다.


“그런데 그런 남자들은 만날 때마다,  여자는 이래야 하고, 여자는 저래야 하고..... 자기들이 잘난만큼 자기들이 결혼할 여자는 자신들에게 이런 희생을 해야하는 것은 당연하다면서 내 말과 행동에 하나하나를 다 제약하면서 내가 무슨 상품이나 되는 양 자신들의 입맛에 맞추려고 드는 것을 보면서 숨이 막혔었어.”

 


노크 소리가 들리고 문을 열고 웨이터가 커피를 탁자위에 놓고 꾸벅 인사를 하고는 다시 문들 닫았다.

 


“나 말야. 지연이한테 우연히 자기 소개 받은거잖아.” 그녀가 커피잔을 드는 현준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사실 그 전에 걔네 회사 놀러갔다가 그때 자기랑 한번 마주쳤었어. 기억 안나겠지만...” 그가 커피잔을 내려놓고 그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지연이랑 같이 퇴근하려고 지연이 책상 옆에 같이 앉아있었는데, 그때 자기가 커피 뽑아다 줬었어. 혹시 기억나?” 그녀의 말을 듣고 잠시 가만히 있던 그가 고개를 슬며시 저었다.


“그래, 기억 안나겠지.” 그녀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처음엔 자기가 그렇게 손님이라고 커피를 직접 뽑아서 대접하길레 신입사원인줄 알았어. 그래서 지연이 한테 ‘야, 너네는 남자 신입사원한테도 커피 심부름 시키는구나.’ 그렇게 말했었어.” 그녀가 희미한 미소를 띄었다.


“그런데 지연이가 아니라고, 무역실무 총괄 담당자라고, 입사한지도 3년이 다 된다고 하면서, 다른 남자 직원들은 ‘미스 한!’ 이라고 부르면서 ‘커피한잔 주지?’ 하면서 같은 직원인 자신을 쉽게 생각 할 때에도 자기는 ‘한지연씨’ 하고 깍듯하게 대하면서  마치 자신이 회사에서 꼭 필요하고 존중받을 존재처럼 느끼도록 해준다고 하는 말을 들었었어.”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고 자신의 손가락 끝으로 커피잔을 살짝 문질렀다.


“자기 사실 첫눈에도 괜찮게 보였는데, 지연이 말 듣고 일부러 두세번 더 놀러갔다가 자기를 좀 눈여겨 봤었어.” 다시 그녀가 얼굴에 희미한 미소를 띄면서 그를 바라보았다.


  

“그때 지연이가 결혼하면서 곧 회사를 그만두기로 했었기 때문에 그전에 자기 소개 좀 해달라고 내가 지연이 따라다니면서 협박도 하고 사정도 하고 그랬었어.” 말을 멈추고 그녀가 입을 살짝 벌리고 이를 드러내면서 웃었다.


“소개팅 후에 자기랑 자주 만나게 되고 자기한테 익숙하게 되면서 나의 그 자기중심적인 생각하고 이기적인 말투, 그런거 모두 다 얼떨결에 드러내고 그랬는데도 자기가 모두 다 받아주더라.” 그녀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래서 드디어 정말 나에게 맞는 사람이 나타났다고, 절대로 놓치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자기와 사귀기 시작한 거였어." 그녀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항상 나한테 잘해주는 자기 생각하면서 나도 잘해주고 착해져야지 하는데도 워낙 어렸을때부터 자기 중심적으로 살았고 자기가 또 너무 잘해주는 것에 익숙해지다보니 내가 그렇게 자기를 대하고 말하고 행동해도 언젠가부터 당연한 것처럼 여기게 되더라구.....” 말을 멈추고 그녀가 고개를 들어 현준을 바라보았다.

  


“미안해.” 잠깐동안의 침묵 후,  갑작스러운 그녀의 뜻밖의 사과의 말에 현준이 그녀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내가 이제야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아무 소용 없겠지? 이미 나에게서 그렇게 멀어져버린 자기마음을 다시 돌릴수는 없겠지?” 그녀가 마치 사정하듯 그를 호소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내가 미안해.” 그가 고통으로 일그러진, 아픈 눈빛으로 그녀를 보았다.


그런 그를 보고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여자 생긴거 아냐.” 그가 빤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전에 너에게 말한 거 사실이야.”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녀가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정말 우연히 만났어.” 그가 그녀의 눈을 피해 고개를 숙였다. 


“나도 이기적이야.”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다 자신을 위해서 살아가는 거지,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그가 다시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 녀석을 알게되면서.... 어느 순간 이 세상에서 나를 정말로 필요로 하는 사람이 바로 이 녀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 현준이 다시 고개를 숙여 커피잔을 바라보았다.


“그 놈이 너무 힘든상황이라서... 녀석이 행복해진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다보니......” 그가 말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처음으로 진정 나를 필요로하고 또 나의 마음이 향하는 존재를 만난 듯한 듯 해서.... ” 선애가 커피잔을 꼭 쥐고 그를 계속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다보니 어느 순간 그 녀석이 내 전부가 되어 버렸어."


"..........."


"미안해. 나도 이런 내 자신을 어쩔수가 없어.”


“어떻게 그럴수가...” 그녀가 고개를 숙였다. 


“왜 하필 자기가...” 그녀의 머리카락이 쏟아져 얼굴을 가렸다.


“왜 하필 나한테....” 그녀가 손을 들어 자신의 이마를 짚었다.

 


“미안해.” 마치 고통으로 한숨 섞인 목소리를 내면서 그가 괴로움에 얼굴을 찌푸리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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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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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일
11화도 잘 읽었습니다.
발에 맞는 신발을 신어야 발이 편하듯
자기에게 맞는 사람을 만나야 행복해지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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