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피 프린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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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


가로등 불빛이 창을 통해 우울한 방안을 흐릿하게 비추고 있었다.

 


한밤중인데도 시간을 잊은 매미가 밖의 어딘가에 있는 나무 위에서 밤의 적막을 깨면서 울고 있었다.


정훈은 등을 벽에 대고 방바닥에 쭈그리고 앉아서 캔맥주를 손에 들고 있었다. 

부족해서 쓸 곳이 많았던 만큼 생각이 많았던 돈이었지만 주머니에 있던 그 만원짜리 지폐 한 장은 원래 계획에 없었던 캔맥주 몇 개와 싸구려 오징어 한 마리를 그에게 남겨놓고는 수퍼 아저씨의 손으로 넘어가버렸다.



그렇게 기다렸던 화요일이었다.


점심시간에 회사 식당에서 식사를 끝내고 그는 윤선이 어머니에게 문자를 보냈다. 전업주부가 아닌 직장인인 까닭에 과외비 지불 날짜를 자주 잊게 된다고 그녀의 어머니는 그에게 날짜가 되면 문자를 보내서 알려 달라고 부탁을 했었다.


간단한 인사말과 함께 은행명과 통장번호를 그녀에게 문자로 알려주었다. 

그가 한 일에 대한 당연한 보수이기는 하지만 과외비에 관련된 문자를 오전부터 보내기에는 죄송한 생각이 들어서 항상 점심시간이 지나면서 보내곤 했다.

 


하지만 퇴근하면서 은행에 전화로 입금확인을 했을 때 은행의 자동응답기를 통해서 흘러나오는 “찾으실 수 있는 금액은 0원입니다” 라는 여성의 냉정한 말을 들었을 때 그는 심장이 내려앉는 듯 했다.


퇴근한 이후로 그는 거의 10분마다 은행에 전화로 확인을 했지만 똑같은 그녀의 목소리는 마치 비수처럼 그의 가슴을 찔러댔다.

  


저녁 9시가 넘어 혹시 핸드폰 문자를 받지 못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여러번을 망설이다가 마침내 그는 윤선이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귀에 바짝 댄 휴대폰을 통해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집에 일이 좀 있어서 준비를 못했네요. 죄송해요 선생님. 금요일에 윤선이 과외하러 오실 때 드리도록 할게요.”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대답을 하고 전화를 끊었지만 그의 마음은 이미 깊이를 알수 없는 절망 속으로 추락 중이었다. 


그렇게 삶이란 놈은 그가 남부럽지 않게 살아 갈 때에는 그의 편인 듯 보였다가 막상 그의 삶이 곤두박질치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그를 배신하고 잔인한 장난을 쳤다.


금요일 밤에 과외비를 받는다고 해도 아직 사흘이나 남아있었다.


  


비어있는 밥통을 애써 외면하면서 그는 주머니에 있던 돈으로 라면이나 사다 놓을 생각으로 수퍼로 향했다. 


포장된 라면 두 꾸러미를 손으로 들어 올리던 그는 형체모를 상대에게 화가 나기 시작했다.


‘그래 네가 나를 괴롭히기로 작정했다면, 실컷 나를 가지고 놀아라. 내가 너의 그 잔인한 만족을 위해서 폐인이 되고 희생을 해주마!’ 


그렇게 그는 오기가 발동해서 들고 있던 라면을 떨구고 맥주를 집어 들었던 것이다.

  


다 마신 캔맥주를 손아귀에 쥐고 힘을 주어 찌그러뜨린 다음, 그는 방의 맞은편 벽을 향해 내던져버렸다. 


“어지간히 좀 해라! 이 개 같은 인생아! 조-까튼 게, 내가 그리 만만하냐? 씨-팔!”


악다구니를 쓰면서 허공에 대고 한번 주먹질을 하는 순간, 그것에 대한 대답이라도 하듯이 핸드폰이 울렸다. 

  

“형, 언제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이 잔뜩 겁에 질려있는 듯한 동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무슨 일 있어?” 순간 숨이 막혀오는 것을 느끼면서 그가 물었다. 동생에게 오는 전화를 받을 때마다 그는 두려움에 심장이 조여왔다.


“엄마가 형한테 전화하지 말래서 몰래 나와서 하는건데, 엄마가 몸이 많이 안 좋은거 같애. 요 며칠 훨씬 더 그래.”


“왜? 엄마가 어떤데 그래?”


“아, 몰라. 그냥 빨리 형이 와서 봐봐. 나 엄마 죽을까봐 겁나 형.” 울음섞인 목소리로 성훈이 소리쳤다.


“다음주에 월급 나오니까 나오자마자 월차내고 내려갈게. 엄마 옆에서 꼭 있어!” 


“형, 월급 나오자마자 꼭 와. 꼭 와야해 알았지?” 정훈이 벌써 8주가 넘게 내려간다고 하고 약속을 번번히 어겨온 터라서 성훈이는 확실히 다짐을 받으려는 듯,  몇 번이나 정훈에게 다그쳤다.


“월급 나오면 그날 밤으로 갈게.” 


  


전화를 끊은 후에, 이해하려고 노력했던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솟구쳐 올라왔다. 도대체 어디서 무엇을 하길 레 가족을 내팽개치고 사라졌는지, 아버지의 무책임한 행동이 갑작스레 화가 나기 시작했다.


아니, 엄마는 아버지가 어디 있는지 무엇을 하는지 알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암에 걸린 아내를 두고 연락을 완전히 끊고 사라질 아버지는 아닐 것 같았다. 혹시 채권자들이 고발을 해서 경찰을 피해 다니다가 마침내 잡혀서 혹시 지금 감옥에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지 않다면, 엄마를 살리기 위해서 채권자들의 눈을 피해서 엄마의 병원비를 구하려고 백방으로 뛰어다니는 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이 어떤 것이든 엄마는 알고 있을 것 같았다. 


그러자 그의 생각이 아버지의 원망에서 갑자기 자기자신으로 옮겨와서 그는 자신의 비겁함이 부끄러워졌다. 자신이 감당하지 못할 것 같다는 얄팍한 생각에서 모든 짐을 엄마의 병든 어깨에 모두 올려놓은 채로 외면해 오지 않았던가. 


형제도 없는 엄마는 갑작스럽게 가족에게 찾아온 감당하기 힘든 짐들을 모두 혼자서 감당하고 있었다. 

복학을 포기하고 공장에서 일한다는 단지 그 이유 하나만으로 그 상황에서 자신이 할 몫은 다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는 정작 그의 병든 엄마가 매 순간을 직면하고 있을 그 무거운 짐의 무게는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던 것이다. 


그가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엄마에게는 큰 힘이 될 것이라는 사실마저도 자신이 피하고 도망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한두끼 굶는 것이, 며칠 더 빈털터리로 사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한일인가. 엄마는 지금 죽어가고 있는데....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의 가족이 그 상황을 벗어날 방법이 없었고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세상은 돈으로 시작해서 돈으로 끝나는 처절하고 무서운 곳이었다.


  


잠든 기억도 없는데, 휴대폰 알람소리에 간신히 눈을 뜬 정훈은 서둘러서 옷을 입고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그나마 과외비를 받자마자 제일 먼저 한달치 교통비를 대충 계산해서 넉넉하게 교통카드를 충전해 놓았던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버스에 올랐다.


  


일어나서 씻을때에는 정신이 좀 드는가 했는데, 며칠동안 불규칙한 식사와 수면부족으로 버스를 타자마자부터 정신없이 졸립기 시작했다.


그는 버스의 손잡이를 단단히 붙잡은 채로 서서 졸기 시작했다. 


으레 그렇듯, 그렇게 졸다보면 그도 모르게 다리에 힘이 풀려 무릎이 꺾여서 몸의 균형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렇게 순간적으로 몇 번을 무릎이 꺾이는 현상을 겪으면서도 밀려오는 잠을 견디지 못하고 있는 그의 셔츠 끝을 누군가가 슬쩍 잡아당겼다.


무거운 눈을 힘들게 뜨고 몽롱한 상태로 내려다보니 양복을 입은 회사원이었다. 그는 정훈을 올려다보면서 씽끗 웃더니 일어서서 그의 팔을 슬며시 끌어당겨서 자신이 앉아있던 버스의 좌석에 앉혔다.


“전 괜찮습니다.” 그가 당기는 힘에 끌려가면서도 몽롱한 상태로 정훈은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그러나 곧 “감사합니다” 라는 말 한마디와 함께 그 남자가 비워준 의자에 주저앉아 다시 잠 속으로 빠져버렸다.


‘깊이 잠들면 안 되는데... 버스 정거장을 지나치면 안 되는데...“ 마음속으로 불안함에 한두번 되뇌였지만 밀려오는 잠에게는 아무런 저항도 되지 못했다.


 


누군가가 그의 어깨를 건드리는 느낌에 순간 놀래서 그는 잠이 깨었다.


“정말 많이 피곤한가보다.” 경리과의 연희누나가 안쓰럽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내릴 때 다 됐어.” 그를 보고 일어나라는 표시를 해 보이면서 그녀는 몸을 돌려 교통카드를 센서기에 대었다.


  


“우연히 같은 버스에 타서 다행이다. 안 그랬으면 종점까지 갈 뻔 했는데, 그치?” 그녀가 그의 옆에서 발을 옮기면서 미소를 띠었다.


“네, 좀 많이 피곤하네요. 누나하고 같은 버스를 타고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어요.” 그가 그녀에게 고개를 한번 돌려보고는 쑥스러운 듯 한번 웃었다.


 


버스 정거장에서 내리면 약 150미터를 유수지를 끼고 돌다가 두 번째 골목으로 들어가서 두 번째 건물이 그의 회사였다. 


하지만 정훈의 피곤한 몰골과 힘없는 걸음걸이를 눈여겨 보던 그녀가 회사 근처의 휴게실 앞을 지나는 순간 갑자기 그의 팔을 잡았다.


“김밥이나 좀 먹고 들어가자. 난 꼭 아침을 먹고 다니는데 오늘은 좀 늦어서 못 먹었거든.” 그녀는 말을 끝내고는 망설이는 정훈의 팔을 잡고 휴게실 안으로 끌었다.

  


김밥을 입에 넣고 있는 정훈을 바라보면서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나도 너 만한 남동생이 있어. 스물 셋인데 지금 군대에 가 있지. 열심히 사는 널 보니까 내 동생 생각이 나서 말야.” 그녀는 뜨거운 물을 부은 컵라면 윗부분을 나무젓가락으로 툭툭 건드리면서 다시 말을 이었다.


“부모님 다 여위고 동생하고 둘이 사는데, 그래서 힘들수록 동생이 더 열심히 살아줬으면 하고 바라는데, 그게 내 뜻대로 되지가 않네. 난 다른 일 다 제쳐 놓고 동생이 자리잡을 동안 뒷바라지 하겠다고 열심히 뛴다고 생각하는데. 이 녀석이 공부는 안하고 말썽만 피우고...” 그녀의 입에 살짝 희미한 미소가 띄었다. 


“그래도 그 녀석 때문에 나도 이렇게 사는거지. 이 세상에 나 혼자 남겨진 거였다면 정말 힘들었을텐데. 그래도 그 철 없는 녀석이 내 의지가 되어주고 있어. 군대 갔다오면 철 좀 들었으면 좋겠다. 너처럼 공부도 해서 대학도 가고...” 그녀가 컵라면 뚜껑을 열고 젓가락으로 라면을 천천히 저었다.


“사실, 그 전에는 별 생각 없었는데, 네가 과외 아르바이트 전단지를 나에게 부탁했을때 그때  널 다시 봤거든. 처음엔 그냥 놀다가 먹고 살아야하니까 취업한 줄 알고....” 그녀가 배시시 웃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근데 네가 대학을 다니다가 이런 공장에 와서 힘든 일을 하는거라는 걸 알게 되니까. 그런 네가 다시 보이더라. 이러는 내가 좀 속물스럽지?”


“아니예요.” 그가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녀를 향해서 슬며시 웃어보였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면서 자신도 사발면의 뚜껑을 열다보니 사발면에 뜨거운 물을 붓고 기다리는 동안 김밥 두 줄을 혼자 다 해치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죄송해요. 제가 다 먹어 버렸네요.”  당황해진 정훈이 그녀를 보고 겸연쩍게 웃었다.


“너 먹으라고 산건데 뭐. 힘든 일 하는데 잘 먹어야지. 내 동생도 제대하고 나면 정훈이 처럼 열심히 살아줬으면 좋겠는데... 참 세상일이 뜻대로 안되네.” 그녀가 쓴 웃음을 한번 짓고는 젓가락으로 라면을 집어들어 입안에 넣었다.

  


‘나 처럼...’ 그가 속으로 슬며시 한숨을 쉬었다. 


그가 원망하던 아버지처럼 사실 그도 집을 도망쳐 나온 것이었다. 

일을 구하자면 대전근처에서도 충분히 구할 수도 있으련만 찾아보지도 않고 그는 서울을 택했고 그런 그를 어머니는 붙잡지 않았다. 서울쪽이 급여가 높을것이라는 그의 말에 그저 야윈 얼굴로 고개만 끄덕거릴 뿐이었다. 


그렇게 도망치듯 서울로 와서 이미 졸업하고 취업을 한 선배의 소개로 그의 먼 친척의 딸의 과외자리를 얻게 되었다. 그 여학생이 윤선이였고 그녀가 시흥시에 살고 있었기에 생활비나 모든 면에서 서울보다 저렴할 것이라는 생각에 오히려 다행이다 라고 생각을 했다. 

또한, 근처의 공단에서 쉽게 몸으로 때우는 일을 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그는 시흥시의 변두리를 사흘을 발품을 팔아 허름한 단독주택의 쪽방을 무보증에 15만원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었다.

  


‘나처럼....’ 그는 속으로 다시 한번 되뇌었다. 


‘가족을 버리고 혼자 탈출해서 떠나온 나처럼....’ 


지난 밤 동생의 목소리가 갑자기 떠올랐다. “엄마 죽을까봐 겁나 형!”


사실 지금 당장이라도 내려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이 낮선 도시에 그는 빈손이었다. 내려가려고 해도 돈이 필요했다. 


‘가난은 죄악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잊었던 그 전화번호가 다시 떠올랐다. 


‘너 미쳤구나!’ 라는 목소리가 머릿속 어딘가에서 들려왔다. 하지만 그는 그 목소리를 향해서 코웃음을 쳤다. 


어쨌든, 인생 다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겠냐고 그는 혼자 반문을 해보았다. 


돈으로는 살 수 없는 것이 없는 이 세상에서, 돈 없이는 생존하지 못하는 이 세상에서 자신의 몸뚱이 하나가 무슨 대수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자신의 현실과 분수를 깨닫지 못하고 자신이 무슨 대단한 인물이나 되는 것 마냥 알량한 윤리와 도덕을 내세우면서 잘난척을 해왔던 자신이 한심하다는 생각조차도 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그 전화번호가 자신의 유일한 희망 같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퇴근하면서 전화를 해봐야겠다고 마음을 먹고는 사발면을 두 손으로 들고 남아있는 국물을 마시기 시작했다.


 


 


 


(현준)


밤 늦게까지 회식을 하고 차를 회사에 두고 택시를 타고 집에 귀가했던 현준은 평상시 보다 한시간이나 일찍 일어났다. 


버스로 통근을 한 적이 상당히 오래 되었고 그 사이에 버스노선도 많이 바뀌어서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예상을 정확히 할 수 없었다. 

 


그의 집이 버스의 출발지에서 가까운 덕분에 그는 편한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그는 다이어리를 꺼내 그날의 할 일을 정리해 보고 있었다. 


지난 몇 년간 신뢰를 쌓아가던 해외의 거래업체에서 그의 회사의 서산 공장에서는 생산할 수 없는 상품을 주문을 받고 그것을 생산할 수 있는 업체를 얼마 전 간신히 소개를 받았다.


촉박해진 계약 만기일 때문에, 그는 우선 급하게 그 회사의 담당자에게 생산을 부탁해 놓았고,  그 담당자는 가능한 빨리 정식 서류를 보내 줄 것을 요청했다.


여러 가지 일이 겹쳐서 갑자기 생기는 바람에 그는 모든 일을 잊지 않기 위해서 다이어리를 펴고 그날 해야 할 일을 정리하고 있었다. 



어느 새 버스는 공단입구를 들어서고 있었다. 


무심코 고개를 들어 버스안을 돌아보던 그의 시야에 손잡이를 움켜쥐고 매달리듯 힘들게 서서 졸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스물 서넛 먹어보였다. 


청바지에 짙은 군청색 티셔츠를 입은 그는 그렇게 서서 졸다가 다리에 힘이 풀리면서 무릎이 꺾이면 놀란 눈을 뜨고 주위를 한번 돌아본 다음 또 다시 눈을 감았다. 그의 그런 모습이 안쓰럽기도 했지만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자신이 내릴 정거장도 이제 몇 개 남지 않았고 그의 그런 모습이 측은해 보여서 현준은 그를 작은 목소리로 불렀다. 


“학생... 학생!” 딴이 다른 호칭이 생각이 나지 않아 얼떨결에 나온 말이 학생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힘들게 선 채로 매달려서 졸고 있는 그는 그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에게 쏟아지는 눈길에 겸연쩍어하면서도 현준은 이미 사람들의 시선을 받고 있는 몸이라 생각하고 손을 뻗어 졸고 있는 그 남자의 셔츠의 끝을 슬쩍 잡아당겼다.


그제서야 그는 피곤함으로 핏줄이 서서 빨개진 눈을 힘들게 뜨고 현준을 바라보았다.

  


괜찮다는 그를 슬며시 끌어당겨서 앉힌 후, 다시 머리를 숙이고 졸고 있는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고개를 바짝 숙이고 조금 불안한 자세로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졸고 있었다. 차가 흔들릴때마다 그의 몸은 마치 앞으로 고꾸라질 것처럼 불안했다.


그가 의자 등받침에 편하게 대고 잘 수 있도록 손을 그의 어깨에 대고 살며시 밀어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잠자고 있는 그와 주변의 시선이 그의 그런 순수한 생각을 오해할 듯 했다.


 


그러는 사이에 차는 그가 내릴 정거장에 닿았다.


혹시 졸고 있는 그가 자신이 내릴 정거장을 지나쳐 지각이나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었지만, 잠이 들더라도 자신이 내릴 역이 가까워지면 저절로 눈이 떠지던 현준 자신의 경험을 떠올리면서 그는 다른 사람들을 따라서 버스에서 내렸다.

 


열시부터 시작된 협력업체와의 미팅에서도, 점심식사 도중 동료들과의 대화중에도, 퇴근 시간이 임박해서 걸려온 스웨덴의 바이어로부터 급하다는 연락을 받고 수출상품의 샘플을 준비하면서도 순간순간 그는 아침 출근 버스 안에서 잠들었던 그가 생각났다. 


버스는 알아서 잘 내렸는지, 그렇게 피곤하면서도 일은 잘 하고 있는지, 점심은 잘 먹었는지, 그도 퇴근 시간이 가까워졌다고 즐거운 마음으로 회사를 나서고 있을 지 궁금해졌다. 

문득 선애와 사귀면서도 이렇게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생각하는 마음이 들지 않았던 것이 생각이 나서 현준은 누군지도 모르는 그에게 향하는 자신의 마음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아마도 버스안에서 피곤함으로 몸을 가누지 못하던 그를 보는 순간 자신의 힘들었던 과거가 그를 그렇게 강한 연민으로 이끌었던 것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그렇게 관계의 차이에 따른 책임감의 무게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해 버렸다.

  


퇴근 시간이 다가오면서 잔뜩 흐려지던 하늘에서 마침내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우산을 준비하지 않았던 터라 그는 주차되어 있던 그의 차까지 냅다 뛰었다. 사무실의 김희연씨와 정소정씨가 버스정거장을 향해서 거리를 달리고 있었다. 


그녀들을 보자 문득 부모님과 싱가폴로 여행을 떠난 선애가 생각이 났다.


그래도 꽤 건실한 중소기업을 경영하시는 그녀의 아버지는 취미가 해외 여행이라고 할 정도로 자주 외국에 나가셨다. 그리고 그때마다 그녀가 통역 겸 말벗으로 동행하곤 했다. 


이번에는 어머님도 같이 가신다고 했다. 


해외여행이라는 것은 그에게는 남의 일과 같은 것이었다. 여권은 몇 년째 그의 책상 속에 있었지만 발급받은 그 날부터 아직까지 책상 서랍 속 한 구석이 마치 자기 자리인 양 동면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녀에게서 센토사 섬의 해변을 걷고 있는 중이라고 낮에 전화가 왔었다. 


그가 바이어에게 보낼 샘플을 준비하고 있는 때였다. 해변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물은 얼마나 맑은 지, 날씨는 얼마나 좋은지 그녀는 전화에 대고 재잘거렸다. 그런 곳에서 평생 살고 싶다고 말했다. 


“난 한국이 좋아. 말도 잘 통하지 않는 외국에서 산다고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거려.” 그가 샘플을 꼼꼼히 살피면서 전화에 대고 말했다. 


“남자가 말야. 야망이 있어야지.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 라는 말도 몰라? 그녀가 그에게 핀잔을 주었다.


“할 일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나 지금 좀 바뻐. 샘플준비 하느라고. 이따가 퇴근하고 밤에 통화하자.” 그가 재봉질 한 심의 한 부분을 손톱으로 긁어보면서 말했다. 예전에 심이 풀려서 컴플레인을 받은 후로 꼼꼼하게 살피는 것이 익숙해져 버렸다. 


“쫀쫀하게 샘플 준비한다고 애인한테 걸려온 전화를 끊자니. 알았어. 일이나 많이 해.” 그녀가 삐진듯한 투를 내면서 전화를 끊었다. 

  


그는 가끔 그녀의 부모님이 그를 사윗감으로 흔쾌히 받아들이신 이유를 생각해 보려했지만 전혀 알수 없었다. 그녀도 그와 동갑인 서른 하나였지만 부잣집 외동딸에 훨씬 더 똑똑하고 야망이 있고 더 잘난 남자들이 줄을 설테고, 그와 비교가 되지 않는 집안에서 중매자리도 꽤 들어왔을 것이 틀림 없었다. 어떻게 보던지 그와는 비교가 안 되는 집안이었다. 


그러나 그의 부모님은 그가 첫 인사를 드린 후 서너달이 지난 후에 그를 집으로 불러 그녀와의 교제를 공식적으로 허락하셨다. 그의 친구들도 그를 보고 미스테리라고 했다.


“새끼,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더니, 능력있네.” 친구 정철이가 한 말이 생각이 났다.


‘정말 나에게 그런 재주가 있는것일까?’ 그는 운전대를 잡고 전방을 주시하면서 중얼거렸다.


  


날이 어두워지면서 빗줄기가 점점 굵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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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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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것이 애잔하다.
힘내세요 정훈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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