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피 프린스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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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
버스정거장부터 집에까지 온 힘을 다해서 전력질주를 하긴 했지만, 예상치 못한 폭우로 인해서 말 그대로 물에 빠진 생쥐의 꼴이 되어서 집에 도착했다.
퇴근길에 버스 안에서 창밖으로 한두 방울씩 떨어지는 빗방울을 보면서 ‘집에 도착 할 때까지만 좀 기다려라’ 는 그의 바램에도 불구하고 그가 내리기 바로 전 정거장부터 가랑비는 폭우로 돌변해 버렸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흠뻑 젖은 그는 쪽문을 열고는 그가 부엌으로 쓰고 있는 비좁은 공간에서 청바지와 티셔츠를 벗어버렸다. 그리고 잠시 망설이던 그는 아예 팬티까지 벗어서 세숫대야 안에 넣어놓고는 여전히 빗물이 허벅지와 장딴지를 타고 흘러내리는 것을 느끼면서 발뒤꿈치를 들고 까치발로 방안으로 들어와 벽에 걸려있는 수건으로 몸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차라리 샤워를 할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는 계속 수건으로 그의 발등까지 문지른 후에 벽에 걸려있는 흐릿한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그의 안색은 생기가 없고 피곤한 몰골의, 꿈과 희망과 웃음을 잃어버린 마치 잿빛 사이보그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윤기없는 피부와 거칠어지고 여기저기 못이 박힌 손바닥은 이제 캠퍼스가 아닌 공단이 자신의 삶의 장소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과외비를 받을 때마다 좀 덜 먹더라도 스킨은 하나 사고 싶다는 생각으로 공단 앞 화장품 할인 매장을 기웃거렸지만 가격표만 보고는 뒤로 돌아서곤 했다.
비어있는 속으로 오늘밤을 버티는 것보다는 무엇이라도 속으로 집어 넣어야 할 것 같아서 그는 신김치 한움쿰을 냉장고에서 꺼내서 이빠진 접시에 담았다.
열린 창문을 통해 들려오는 쓸쓸한 빗소리를 음악 삼아서 김치를 한 젓가락 입에 넣고 있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과외를 소개시켜준 도현 선배였다.
“야! 지금 뭐하냐?” 정훈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그가 물었다.
“그냥... 집에 있어요.” 갑작스러운 도현의 목소리에 반가우면서도 경계하는 목소리로 정훈이 얼떨결에 하지도 않던 존댓말로 대답했다.
“지금 나 시흥에 와 있어. 저녁전이지? 밥이나 같이 먹자. 나와라.” 도현은 으레 그렇듯 담담하고 당당한 목소리로 말했다.
“형, 일 땜에 온 거 아니야? 바쁘면 나는 그냥......”
“너 보려고 서울에서 일부러 온 거야. 지금 나와.” 힘없이 느릿한 정훈의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도현은 그의 말을 중간에 끊고 말했다.
전화를 끊고 그는 들고 있던 김치접시를 다시 냉장고 속으로 집어넣고 간이옷장을 열었다.
세탁기가 없는 이유로 세탁을 자주 하지 않기 위해서 그는 청바지만 집에서 들고 나왔다. 티셔츠도 계절을 막론하고 모두 어두운 색 뿐이었다.
그가 군대에 가기 전, 그의 아버지의 사업이 한창 잘 나가던 때에는 누구나 이름을 대면 알만한 브랜드를 몸에 걸치곤 했었다. 그때에는 친구들끼리 만날 때에도 서로 옷을 잘입네 못입네, 코디가 어쩌네 하면서 살았었다.
이제는 그런 과거의 그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누군가를 만나기 위한 외출을 준비하면서 산뜻하고 보기 좋은 티셔츠라도 하나 있다면 좋으련만 하는 생각이 순간 들었다. 그러나 곧 그는 그렇게 생각한 자기 자신이 정말 재수 없다고 생각했다.
여전히 쏟아지고 있는 강한 빗줄기를 피해서 도현은 대형 마트 입구에 서 있었다.
정훈이 그에게 천천히 다가가자 도현은 그를 발견하고는 몇 걸음 앞으로 걸어와서 정훈의 손을 잡았다.
“정말 오랜만이지?” 말을 건네면서 도현은 환한 미소를 띄었다.
회사에 입사해서는 대학 다닐 때와는 또 다른 모습이더니 거의 1년만에 다시 보는 도현의 모습은 훨씬 더 세련되어 보였다. 마치 그와 도현은 서로 다른 세상에 속해 있는 듯 하다고 정훈은 생각했다.
“야, 우선 배고프다 밥부터 먹자.” 그는 여전히 한손으로는 정훈의 손을 꽉 쥔 채로 다른 손으로 우산을 펴서 들고 길 건너의 2층에 보이는 갈비집으로 향했다.
“미안하다.” 주문을 마치고 물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신 뒤에 도현이 입을 열었다.
“뭐가?” 갈비집 내부를 둘러보던 시선을 도현에 고정시키면서 정훈이 물었다.
“너, 혼자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버티면서 사는데 한 번도 찾아와 보질 않아서 말이야.” 잠시 말을 멈추고 도현은 손을 뻗어서 정훈의 손을 잡았다.
“바빠서 그랬다고 핑계를 대자면 내 얼굴이 화끈거릴테고....그냥 미안하다. 너가 그냥 날 너그럽게 봐줘라.” 말을 마치고 그는 정훈의 손을 슬며시 놓았다.
“무슨.... 형 덕분에 이곳에 자리잡을 수 있었던 건데.... 아니면 나 정말 어떻게 됐을지도 몰라. 내가 고마워해야지.”
“그렇게 생각해주면 고맙구.”
“근데 형, 정말 여긴 어쩐일이야?” 정훈이 도현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면서 물었다.
“너 보러 온거라니까.” 갈비집 아주머니가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반찬들을 다시 가지런히 놓으면서 도현이 말했다.
“사실은, 숙모가 전화했더라. 이번에 너 과외비 제때 못 줬다구. 시어머님이 병원에 입원하셔서 갑자기 그렇게 됐다고 내가 소개시켜준 거니까 내가 너에게 미안하다고 말해달라고 전화 하셨더라구.” 말을 잠시 멈추고 그는 카운터를 향해서 소주를 주문하고는 고개를 돌려 다시 정훈을 바라보았다.
"나 괜찮아 형. 그럭저럭 잘 지내." 그가 방금 도현이 집어가고 남은 두부조림 그릇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대답했다.
"잘 지내긴 개뿔. 내가 니 사정을 모르냐? 아니면 니 성격을 모르냐? 속아 넘어갈 놈을 속여야지." 도현이 젓가락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그가 다시 무슨 말인가 하려고 하는 순간 아주머니가 갈비판을 들고 와서 내려 놓고는 불판에 세 덩어리를 올려놓았다.
그녀가 다시 주방으로 돌아가자 도현이 다시 말을 이었다.
"너 힘든 거 뻔히 알면서도 신경도 못쓰고 그냥 있었는데 숙모한테서 그런 전화까지 받으니까 너가 너무 걱정되더라. 어젯밤에는 니 꿈까지 꾸었어 임마."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두부조림 한 조각을 젓가락으로 힘겹게 집어들면서 도현이 말했다.
“공장 다녀서 버는 거 다 집으로 고스란히 갈건 뻔하고, 너 꼴랑 그 과외비 20만원 가지고 생활할게 안 봐도 비디온데 월세내고 나면 뭘 가지고 먹고 사냐...... 너 이렇게 버티고 살아있는거 보면 참......." 도현이 말을 끝내지 못하고 소주병을 들어서 그의 잔을 채웠다.
"자 한잔해."
아무대꾸도 하지 못한 채 정훈은 자신의 소주잔을 들어 술을 받고는 소주병을 받아들어 도현의 술잔을 채웠다.
"저기, 정훈아." 도현이 목소리를 가다듬고 정훈을 바라보았다.
"이거, 얼마 안 되는데, 너 이거 그냥 주는거 아냐. 빌려주는거야. 나중에 아무때고 너 잘되면 갚아. 이자까지 듬뿍쳐서... 알았지?" 도현이 옆에 벗어놓았던 양복 윗저고리의 안주머니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정훈이 쪽을 향해서 밀었다.
"형!" 봉투를 한번 보고 다시 도현의 얼굴로 고개를 돌리면서 정훈이 입을 열었다.
"나... 나 말야..." 말을 마치지 못하고 정훈은 소주병을 들었다.
"형 앞에서 자작하지마. 이 녀석아!" 정훈의 손에서 소주병을 가로채면서 도현이 컬컬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다시 채워진 잔을 한입에 들이키고 나서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봉투에 손을 뻗으며 정훈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나 이거 고맙게 받을께."
봉투를 청바지 주머니속으로 깊이 찔러 넣은 후, 정훈은 다시 소주병으로 손을 뻗었다. 그렇게 얼마 동안을 서로 말이 없이 침묵 속에서 서로 술잔을 채우고 마셨다.
"형, 고마워." 술기운이 돌기 시작하는 것을 느끼면서 낮은 목소리로 정훈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 대신!" 갑자기 커진 도현의 목소리에 정훈은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보았다.
"너 하나만 약속해."
"뭘?"
"딴 생각 안한다고..."
"무슨 딴 생각?"
"................."
정훈은 다시 고개를 돌리고 소주병을 잡았다. 그러나 이미 비어있었다.
"천천히 마셔. 고기부터 먼저 좀 먹구." 말을 마치고 도현은 고개를 돌려 주방쪽을 향해서 빈 소주병을 들어 소주한병 더 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집에는.... 언제 내려가냐?" 도현이 잘 구어진 고기조각을 젓가락으로 정훈의 앞에 있는 그릇안에 골라 놓으면서 물었다.
"다음주에 월급 타면 내려가려고.."
"정훈아." 도현이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고 정훈을 불렀다. 정훈은 대답 대신 도현의 얼굴을 이제 술이 취해서 몽롱해진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언젠가, 버티다 보면 이 고비 넘길거야. 너가 버티기만 하면... 딴 생각하지 않고...." 그가 말을 얼버무리고는 고개를 숙이고 고기조각을 집어들었다.
"그 언젠가가 언제인지.... 그 언젠가가 오긴 올지..." 정훈이 술기운으로 감정이 스며들어 답답해진 듯 셔츠의 가슴 부분을 잡아당기면서 중얼거렸다.
도현이 대답을 하지 못하고 소주잔을 들고 입안에 털어 넣었다.
"형" 정훈도 자신의 소주잔을 비우고는 병을 들어 도현의 잔을 채우면서 입을 열었다.
"나, 사실, 오늘 회사 끝나고 퇴근할때..." 정훈이 잠시 말을 멈추고 소주잔을 들어서 입에 대었다. 자존심 때문에라도 말하기 싫은 내용이었다. 남에게 할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수치스럽고 더럽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힘든 고통속에서 혼자라는 것이 더 사무치게 마음이 아팠다. 누군가의 위로가 필요했다. 누군가에게 자신의 처지를 솔직하게 모두 털어놓으면 속에 가득 쌓아져서 뒤틀려진 이 슬픔과 분노를 조금이나마 덜어낼 수 있을 듯 싶었다.
"예전에 바에서 나더러 맘에 든다고 만나보자는 그 아저씨한테 전화했었어."
무슨말인지 순간 알아듣지 못한 도현이 혼란스러운 듯한 눈빛으로 정훈을 바라보았다.
"우리 갈때마다 바에서 자주 보던 아저씨 있잖아. 나더러 용돈 주겠다고 하면서 전화번호 건네준 그 아저씨... 형이 재수없다고 나에게 그랬었잖아."
그제서야 도현은 무슨 내용인지 이해를 하고는 정훈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래서?"
"월급 타는 날 저녁에 집에 가기 전에 잠시 서울에 들러서 커피나 같이 하자고..."
"커피 같은 소리하고 자빠졌네. 그 더러운 영감탱이!" 그리고는 어이 없다는 표정으로 정훈을 바라보았다.
"너 정말!" 큰 소리로 말을 내뱉기는 했지만 그 다음에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도현은 그냥 입을 벌린 채 눈을 크게 뜨고 정훈을 바라보았다.
정훈은 하고 싶은 말을 가까스로 누르고 있었다. 석 달째 밀려있는 월세 때문에 주인집 할머니의 눈을 피해 다니는 것부터 굶고 있는 현실까지 신세한탄을 늘어놓고 싶었다. 하지만 목구멍까지 기어나온 그 말들은 혀 끝에 매달려서는 더 이상 언어의 형태가 되지 못하고 입안에서 흩어져 버렸다.
구차하게 구체적으로 말을 하지 않아도 이미 대충은 도현이가 알아채고 있을 테지만 자신의 입을 통해서 털어놓고 싶은 욕구는 참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 만큼 자신의 밑바닥의 치부를 드러내놓는다는 것도 상처가 너무 컸다.
잠시 아무말도 하지 않고 있던 도현이 입을 열었다.
"내가 너가 아닌 이상에야. 어떻게 너를 다 이해하겠냐." 그가 말을 멈추고 다시 빈 소주병을 카운터 쪽으로 들어서 술을 주문했다.
"그런데. 나 그 사람 좀 알아. 그 사람 너가 정말 좋아서 너에게 접근한게 아니야.”
“........”
“너 군대 간 후로도 젊은 놈들만 보면 환장을 해서 용돈 준다고 찝쩍거리고.... 이미 알 사람은 다 알고 있는 자식이야. 그 더러운 놈은 애인 있다는데도 지 맘에 들면 들이대고..." 그가 말을 멈추고는 정훈을 바라보았다.
"인생에서 어떤 식으로든 엮여서는 결코 안 될 인간이야."
도현이 새로 가져온 소주병을 따고는 정훈의 잔을 채웠다.
"정훈아" 소주병을 건네받고 자신의 잔에 소주를 따르고 있는 정훈을 바라보면서 도현이 말을 이었다.
"내가 능력부족이라.... 너에게 큰 도움은 안되겠지만 그렇게까지 생각할 정도였으면 나한테 먼저 말을 해. 혼자 끙끙 앓지 말고..." 말을 마치고 도현은 소주잔을 들었다.
술기운으로 휘청거리는 다리로 간신히 계단을 내려와 밖으로 나왔을 때,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서울로 가는 버스 정류장으로 나란히 걸음을 옮기면서 도현이 팔을 뻗어서 정훈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평상시 같았으면 고개를 들어 주위를 한번 돌아보았건만 술기운이 오른데다 우산을 하나만 펴고 그 안에서 둘이 나란히 길을 가는 것이 이상하게 보일일은 아닌 듯 해서 정훈은 그저 가만히 있었다.
도현이 버스를 타고 떠난 후에도 그는 잠시 멍하니 그의 시야에서 멀어지는 그 버스의 뒤꽁무니를 바라보았다.
군대 입대 전, 한때는 도현이 자신을 좋아하는게 아닌가 하고 생각을 해 본적이 있었다.
바를 가던 술을 마시던 자신을 꼭꼭 챙겨주던 도현이였다. 그래서 입대 하기전 마지막 술자리에서 그는 도현에게 물었었다. 혹시 자신을 좋아하는게 아니냐고... 도현은 얼굴이 벌개지면서 대답했다. "시끼. 내가 미쳤다고 힘들게 병아리 키우고 자빠졌냐? 난 코 찔찔이들은 생각도 없어 이놈아."
비는 금요일 오후까지 완전히 그치지 않고 오락가락 했다.
혹시나 해서 윤선이 과외를 하러 가는 길에 우산을 들고 버스를 타서는 옆에다가 놓았다가 버스를 내릴때는 그냥 내려버렸다. 우산이 생각났을 때에는 이미 버스는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윤선이네 도착했을 때 과외비가 늦은것이 죄송하다면서 수업중에 드시라고 피자를 주문했다는 윤선이 어머님의 말씀을 듣고는 그것으로 우산을 잃어버린 것에 대한 아쉬움을 달랠 수 있었다.
새벽 한시에 수업이 끝난 후에 아주 잠시 동안 택시의 유혹이 있었다.
통장에는 도현이 건네준 백만원 중에서 월세 3개월치하고 당장 필요한 것들을 사고 남은 50만원이 들어있었고 방금 받은 과외비 20만원이 빳빳한 만원 짜리로 오랜만에 그의 주머니를 채우고 있었다. 잠깐 동안의 불량배 생각도 했지만 이 세상에 그 누구도 무섭지 않았다. ‘내 돈을 가져가려면 날 죽여야 할 걸’ 하고 그는 생각했다. 다른 날과 다르게 마치 부자가 된 듯한 느낌이었다. 정말 오랜만에 우울한 기분을 벗어나서 집으로 향했다.
공단으로 향하는 큰 도로로 접어 들었다. 이제는 공단 입구까지 도로 양편으로 인적이 없는 밭과 묵혀놓은 벌판만이 밤의 고요함 속에서 검은 입을 벌리고 있는 곳이었다.
길을 따라 걷다가 길을 미리 건너기로 생각했다. 끄트머리의 사거리에 있는 신호등은 너무 늦게 바뀌어서 기다리다 보면 조금 짜증이 나곤 했다.
차들이 지나가고 한가한 틈을 타서 무단횡단을 하려고 길 가에 서서 드문드문 그의 앞을 지나쳐 달려가는 자동차들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승용차 한 대가 그의 옆으로 천천히 와서 멈췄다. 그리고는 조수석의 창문이 열리더니 한 남자가 그를 향해서 소리쳤다.
“여기서는 이 시간에 택시 없어요. 잡기 힘들어요.”
그가 길가에 서서 지나가는 차들을 바라보고 있었으니 그 운전자는 정훈이 택시를 타려고 하는 것으로 생각했었던 듯 싶었다.
택시를 타려는 것이 아니라 길을 건너려는 것이라는 정훈의 말을 들은 그는 고개를 한번 끄덕하고 도로 건너편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다시 정훈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공단으로 가시는 거 아니예요? 그쪽으로 가시는 거면 타세요.” 그의 말에 정훈은 그의 얼굴을 좀 자세히 보았다. 단정하게 빗어내린 머리카락에 선한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나쁜 사람 같지는 않다고 생각했다가 강도라고 생긴 게 다르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자신처럼 후즐근한 차림새의 어린놈을 돈이 있을 듯해서 다른 꿍꿍이를 가지고 태우려는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아보였다.
게다가 그는 피곤했고 공단 앞까지의 길을 걷다보면 그를 괴롭히는 거미줄들을 피할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정훈은 그를 향해 고개를 한번 숙여보이고는 차문을 열고 조수석에 올랐다.
(현준)
금요일 오후 내내 캐나다의 총 대리점 대표의 방문을 준비하느라 눈코 뜰새가 없었다.
3년간의 에이전트 계약이 만기가 다 되어가고 있는 터여서 계약 갱신도 할 겸 한국이란 나라를 방문해 보고 싶다는 그의 전화를 2주 전에 받았었다.
원래의 스케줄에 맞추어 그의 방문동안 그에게 제시할 신규 상품 샘플도 준비하고 현지 지방 공장 견학부터 수도권의 볼만한 곳을 방문해보는 간단한 여행일정까지 준비하다보니 2주 라는 시간은 금방 흘러갔다.
그리고 다음주 월요일이면 워커씨는 공항에 도착하게 되어 있었다.
여전히 할 일이 많아서 책상 위에 해야 할 일의 목록까지 만들어 가면서 끙끙거리고 있을 무렵 선애에게서 전화가 왔다. 싱가폴 갔다오면서 그를 생각해서 선물도 사왔고, 또 저녁을 같이 먹고 싶다고 했다.
주말에 회사에 출근하지 않기 위해서는 야근이나 혹시 밤샘까지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던 그는 잠시 망설였지만 흔쾌히 그녀와 저녁을 같이 먹기로 약속했다. 역시 주말에 회사를 나와서 천천히 정리를 하는 편이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퇴근시간이 되기 무섭게 그는 사무실을 나와서 약속장소로 향했다.
해산물을 먹고 싶다는 그녀의 말에 해산물 전문 레스토랑의 근처에 있는 카페에서 여섯시 반에 만나기로 했지만 7시가 넘어도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비 때문에 길이 좀 막히나 보다 하고 그는 생각하고 가방에서 다이어리를 꺼내 들고 워커씨의 방문일정을 다시 한번 정리해 보고 있었다.
어느 순간 시계를 보니 7시 40분이었다.
전화를 해 보려고 휴대폰에 손을 뻗는 바로 그때 그녀가 카페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좀 늦었네?‘ 그녀가 그가 앉은 테이블로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 그가 한번 씨익 웃으면서 물었다.
“그래서 기분 나뻐?” 그녀가 말을 툭 내 뱉으면서 자리에 앉았다.
“아니, 비가 와서 길이 좀 막히겠다 예상했었어. 운전하는 것 힘들 것 같아서 걱정도 되었구.” 그가 그녀의 표정을 살피면서 멋쩍은 듯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가 밝지 않을 때마다 그는 그녀의 눈치를 보았다.
“샀던 물건이 마음에 안 들어서 바꾸러 갔었어. 어찌나 판매하는 사람이 내 말을 못 알아 듣던지 짜증이 좀 나더라구.” 말을 멈추고 그녀는 카페 내부를 한 바퀴 돌아보더니 그를 다시 바라보았다. “나 시원한 카페모카 마실래.”
저녁 식사 내내 그녀는 음식 트집을 잡았다.
이건 너무 짜다, 저건 너무 맵다, 이건 맛이 없다는 등, 나오는 음식마다 마음에 들지 않아 하는 그녀도 그녀 였지만, 식당에서 일하는 아주머니가 바로 옆으로 음식트레이를 가져와서 음식을 테이블에 내려놓는 도중에도 맛없다는 말을 계속할 때에는 그녀를 한번 바라보고 현준을 쳐다보는 그 아주머니에게 그는 공연히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먹을 만 한데 뭐.” 그가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자기는 이런 거 그냥 먹어? 내가 내 돈 내고 먹는데 꼭 이렇게 맛없는 음식 먹어야 해?
음식을 나르는 아주머니 두 분이 주방 앞에서 그들을 보고 서로 말을 주고 받고 있었다.
“나는 괜찮은데, 원래 이건 좀 맵잖아. 그리고 저번엔 카레라이스 먹으러 가서 일부러 매운거 시켜서도 잘 먹었잖아. 오늘은 그냥 먹자. 다음에는 다른 곳으로 가고.” 그녀의 눈치보랴 옆의 사람들 시선도 생각하고 일하는 아주머니들 생각하랴 공연히 그 자리가 불편했다.
“카레라이스하고 이거 하고 같애? 그건 인도 오리지날 매운 음식으로 일부러 고른거잖아. 이건 주방에서 대충 요리하다가 이렇게 된 거고!” 그녀가 지지 않고 계속 음식의 트집을 잡았다. 그러나 현준에게는 다른 어떤 해산물 식당에서 먹던 음식하고 별다를 것이 없었다. 특별히 맛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트집을 잡을 정도로 특별히 맛이 없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지금 자기 누구편이야? 내가 맛있는데 없다고 그래?” 계속 되는 그녀의 짜증에 그가 얼른 사과를 하기 시작했다.
“미안, 그런 뜻은 아니고... 나한테는 그냥 맛이...” 그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그녀가 가로막았다.
“그렇지! 자기한테는 이런 음식도 딱 맞겠지. 딱 자기 수준이니까.”
“그래. 미안해. 다음번엔 자기가 가고 싶은 곳으로 장소를 잡아. 오늘은 정말 미안해.” 말을 마치고 현준은 고개를 돌려 무의식적으로 물컵을 들어 입에 가져갔다.
원래 계획에는 저녁 식사후에 영화를 함께 보기로 되어있었다.
그러나 한번 뒤틀린 그녀의 심사는 그를 너무 불편하게 했다. 정말 무슨 일 있는 거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 질문이 그녀에게 또 다른 짜증을 불러 일으킬 수도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그는 그냥 잠자코 있었다. ‘아니 정말 그걸 몰라서 물어?’ 이런 말이 그녀의 입에서 나올 것이라는 것은 너무나도 자명했다.
저녁 식사후 일찍 집에 가서 쉬고 싶다는 그녀를 조수석에 태우고 그가 그녀의 차를 몰아서 그녀의 집 앞에 주차를 시키고 다시 음식점으로 택시를 타고 와서 자신의 차를 찾았다.
‘미안해, 화풀어. 다음번엔 더 좋은데로 가자’ 라는 문자를 보냈지만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도 그녀에게서는 답문자는 오지 않았다.
집에 도착해서 샤워를 하고 옷도 갈아입고 인터넷 서핑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어느 순간 일요일 오후까지 부산의 컨테이너 야드까지 출하가 되어 있어야 하는 수출품이 떠올랐다.
아산공장에서는 생산할 수 있는 시스템이 없어서 어렵게 구한 업체에 토요일이라도 특근해서 꼭 일요일 아침에는 출고를 시켜달라고 몇 번이고 부탁을 했었다.
구두로 주문은 했지만 퇴근하면서 공식적인 스펙과 다른 서류들을 전달해주겠다고 약속을 했었는데, 까맣게 잊고 있었다. 갑자기 이것저것 일이 많이 생겨서 그랬기도 했겠지만 그렇게 중요한 일을 잊고 있었다니 순간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양 혼미했다.
기존의 거래업체도 아닌데 공식서류도 없이 구두 약속으로만 3톤의 물품을 생산하고 있을거라고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우선 공장으로 찾아가서 책임자에게 전달하고 담당자에게 다시 전화하기로 생각을 하고는 집을 나섰다.
그의 차가 공단을 향하는 대로로 막 진입할 때 그는 한 남자가 길가에서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청바지에 짙은 군청색 티셔츠를 입고 있는 그는 그가 예전에 어디에선지 만났던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는 마치 택시를 기다리고 있는 듯 보였다. 하지만 평상시에도 택시 잡기 힘든 곳인데 그 시간에는 전혀 없을 듯 싶었다.
“여기 이 시간에는 택시 없어요. 잡기 힘들어요.” 현준은 조수석의 창문을 내리고 그에게 말을 걸었다. 그 남자는 현준의 차로 한걸음 다가서서 열린 조수석의 창문을 통해서 현준을 바라보았다. 역시 어딘가 낯이 익은 모습이었다.
그는 길을 건널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길 건너에도 집 한채 없는 황량한 벌판은 마찬가지였다. 가까운 동네도 꽤 걸어가야 하는 공단 진입 전의 양쪽에 있는 마을이었다.
공단입구까지 한참을 걸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던 그는 그 남자가 공단쪽으로 가는 길이면 태워주겠다고 그에게 제안했다. 그는 잠시 경계하는 표정을 지으며 머뭇거렸다.
그의 불편한 듯한 표정을 보면서 문득 상대방이 원하지 않는 호의를 꼭 베풀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어 그냥 지나칠까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 그 젊은 남자가 고개를 슬며시 숙여 인사를 하더니 차 문을 열고 들어왔다.
"공단 안으로 들어가나요?” 현준이 조수석에 앉아 있는 그에게 물었다.
“아뇨. 공단 입구 진입전에 내려주세요. 태워주셔서 감사합니다.” 그가 대답했다.
“여기서 공단입구까지도 꽤 먼데.... 차로야 뭐 금방이지만 걸어서는 30분은 족히 걸릴텐데...” 현준이 흘끗 그의 옆모습을 한번 훔쳐보고는 말했다.
“그런데 우리 혹시 전에 만난적이 있던가요?”
현준의 질문에 그가 고개를 돌려 운전하고 있는 현준을 바라보았다.
“글쎄요. 전 처음 뵙는 것 같은데요.”
“아. 네. 어딘가 모르게 그냥 어디선지 본 것 같아서요.”
한밤중에 지나는 차도 많지 않은 직진 대로를 타고 순식간에 공단 입구에 도착했다.
비상등을 켜고 조용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현준에게 그는 차에서 내려서 열린 창문을 통해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는 뒤를 돌아서 사라졌다.
공단에 들어서서도 현준은 어디서 본 듯한 그의 모습을 기억해 내려고 노력중이었다.
그러다가 언뜻 며칠 전 아침 버스에서 손잡이를 붙잡고 매달려 졸던 남자가 생각났다.
“아! 맞다 그녀석이군!” 그러나 곧 방금 차를 얻어 탄 그 남자가 그 사람과 동일인인지 자신이 없어졌다.
“아닌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면서 그는 회사앞에서 차를 세우고 천천히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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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큼 마음을 울리는 이야기 전개입니다.
제발, 정훈님 잘 되게 해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