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피 프린스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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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
휴대용 가스렌지 위에서 두부가 듬뿍 들어있는 김치찌개가 끓고 있었다.
코를 자극하는 잘 익은 김치냄새에 정훈의 입안에서 침이 고이기 시작했다.
“정훈아 뭐해?”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서 연희누나를 바라보았다. 한 손에 소주병을 들고 있는 그녀는 정훈에게 소주잔을 들라는 눈짓을 보냈다. 그는 두 손으로 공손하게 술잔을 받아서 내려놓은 다음 소주병을 건네받고 그녀의 잔을 채웠다.
“그런데, 왜 목요일에 월차를 낸 거야?” 소주잔을 입에 대고 한 모금 마신 후 내려놓고, 국자를 들어 냄비 안에서 두부가 많은 쪽으로 푸짐하게 퍼서 정훈의 그릇에 담아 주면서 그녀가 물었다.
“뭐, 특별한 일이 있는 건 아닌데.. 왜요?” 그녀의 손놀림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그녀에게 시선을 돌리며 정훈이 물었다.
“사장님은 직원들이 급여일 바로 다음날 월차를 내는 걸 싫어하시더라구. 꼭 ‘돈 받았으니 놀아야지’ 하면서 인생을 계획 없이 사는 사람들 같으시다나......?”
“어머님이 아프시고 동생들도 저 오기를 기다리고 있어서요.” 낮은 목소리로 마치 중얼거리듯 말하고 그가 수저를 들어 두부 한쪽을 떠서 입안에 넣었다.
“실은 더 일찍 가보고 싶었는데....월급날 까지 기다린거예요.” 그가 뜨거운 두부를 입안에서 오물거리면서 말을 이었다.
“아, 집이 대전이랬지?” 반찬으로 나온 멸치 볶음으로 젓가락을 옮기면서 그녀가 물었다.
“엄마가 어디가 아프신건데?”
그녀의 질문을 받고 그는 잠시 망설였다가 소주잔을 들어서 비우고는 입을 열었다.
“암이예요.... 췌장암요.”
“아......” 예상치 못했던 병명에 그녀가 잠시 당황한 기색을 보이더니 소주병을 들어서 정훈의 잔을 채우면서 말했다.
“그렇구나. 공연히 물어봤네. 괜히 정훈이 마음만 아프게....”
“괜찮아요.” 그가 연희누나를 보면서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학교를 쉬고 여기서 일하게 된거구나.” 그녀가 그를 측은한 눈빛으로 한번 보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더 안 물어볼게. 남의 사생활 캐묻는 거 내 취미 아니거든...” 그녀가 미소를 한번 지어 보였다.
“있잖아. 오늘 오전에 사장님이 슬며시 물어보시더라구. 너 혹시 힘들어하냐고.” 잠시 말을 멈추고 있던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뜻밖의 말에 정훈은 입안에 김치 한 조각을 넣고 씹다가 멈추고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너가 거의 일년을 주말 빼고는 월차도 없이 쉬지 않고 일해 왔는데, 갑자기 급여 나오는 그 다음날부터 3일을 쉬겠다고 그러니까, 혹시 다른 생각 있어서 그러나 하고....” 그녀가 말을 멈추고 그를 보고 다시 미소를 지었다.
“나는 별 생각 없었는데, 사장님이 하신 말씀 들어보니까, 혹시나 해서 물어본거야.”
“사장님이 그만두는 건지 물어보래요?”
“아니야.” 그녀의 말에 갑자기 어두워진 표정으로 바뀐 정훈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그녀가 손을 내 저었다.
“내가 궁금해서...” 그녀가 소주잔을 들고 입에 대고는 한번 홀짝 마시고 다시 내려놓았다.
“회사에 이제 좀 친해지는 사람 생기나 보다 했는데, 너 그만 둘까봐 내가 좀 걱정이 되더라구.” 물티슈로 소주잔이 놓여있는 나무 테이블 위를 무의식적으로 문지르면서 그녀가 말을 이었다.
“다른 직원들이야 다 말 그대로 회사동료일 뿐이고, 나 말고 여직원이라야 영업부 소연인데, 걔는 사는것도 넉넉하고 그래서 여직원이라는 공통점을 빼면 서로 관심사가 너무 달라. 속 깊은 대화가 안 돼.” 그녀가 말을 멈추고 한번 쓴 웃음을 지어보였다.
“소연이는 부모님이 모두 밀어주시니까 그냥 월급으로는 자기 하고 싶은 거 하고 자기자신 꾸미고 그렇게 사는데, 너한테도 말했던 것처럼 나는 그렇지 못하니까.....” 말을 멈추고 그녀는 술잔을 들어서 마저 비웠다.
“너두 나랑 처지가 비슷하니까.. 마음 편하게 말하는건데... 넉넉한 사람들이야, 우리를 이해 못하잖아. ” 그녀가 소주잔에 입을 대고 반 정도를 마시고는 다시 내려놓았다.
“난, 대학도 못가보고 그냥 상고 졸업한 후에 여기 취직해서 10년을 다녔어. 회사에 충성이라는 것도 해보고.. ” 그녀가 말을 멈추고 희미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아픔이 담겨있는 슬픈 웃음이었다.
“난 내가 남자였으면 하고 바랐던 적이 수도 없이 많아. 10년을 한결같이 일했는데... 사장님의 다혈질적인 성격 때문에 오래 버티지 못하고 자주 바뀌는 경리과장....” 그녀가 말을 멈추고 쓴 웃음을 지었다.
“새로 들어올 때마다 회사에 대해서, 제품에 대해서, 그가 모르는 것 내가 다 알려주고.. 그런데 말야.” 그녀가 고개를 들어서 정훈을 바라보았다.
“솔직하게, 나, 생존하기 위해서라도 노력 많이 했다. 회사에 대해서도, 내 업무에 관해서도 공부 많이 했어. 우리회사 제품에 관해서도 그렇고.. ” 그녀가 고개를 다시 숙이고 소주잔을 들어 남아있던 소주를 들어 천천히 마셨다. “나보다도 일에 대해서 더 모르는 사람을, 남자이기 때문에 과장이라는 타이틀 달고.... 급여일 되면 내 급여 명세표를 보면 정말 가슴이 답답해.” 그녀가 빈 소주잔을 정훈의 앞으로 내밀었다. 정훈은 조용히 소주병을 들어 그녀의 잔을 채웠다.
“10년 동안 정말 열심히 일 해 왔는데, 백이십 만원. 이것 저것 다 떼고 나면 백 만원이야.” 그녀가 손에 들고 있던 소주잔을 들어 다시 입에 대었다.
“입사할 때에는 그래도 미래를 꿈꿨었는데.. 내 능력으로는, 여기까지라는 걸 이제 깨달았어. 다른 사람들은 나를 추월해서 자꾸 위로 날개짓을 하면서 올라가는데.. 내 머리 위에는 투명한 벽이 가로막고 있어. 그래서 가끔 생각해. 이게 차별이란 것이고 또 이래서 사람들이 ‘가난함은 대물림 되는 것이다’ 라고 말하는 거로구나 하고 말야.” 그녀가 다시 말을 멈추고 쓸쓸한 미소를 띠었다.
“가끔씩 현장 남자 직원들이 점심시간에 농담조로 ”어이 미스김! 회사 언제 그만둬요? 빨리 그만두고 시집이나 가요. 우리도 예쁘고 젊은 여사원 보고 싶다니까?“ 그렇게 말하지. 그러면 다른 직원들도 동조하는 말이나 고개를 끄덕이면서 나를 흘끗거리고.”
“........”
“나도 다른 남자들 처럼 내가 벌어서 생존해야 하는데 그들 눈요기를 위해서 퇴사를 암암리에 강요받고 있는 듯하게 느껴질 때에는 정말 견디기 힘들어.” 그녀의 눈꼬리에 마침내 눈물이 맺혔다. 검지 손가락 끝으로 눈꼬리를 살짝 문지르면서 그녀가 정훈을 바라보았다.
“아, 이런말이나 하다니 정말 미안해. 난 너가 회사 그만두는게 아닌가 하고 내심 걱정스러워서 물어보고 싶어서 같이 소주나 한잔 하자고 한건데...”
“아니예요. 누나, 하시던 말씀 계속 하세요. 제가 들어드릴께요.” 정훈이 뜯지 않은 물티슈를 집어 그녀의 술잔 옆에 놓았다. 그런 그를 보고 그녀가 희미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나, 가방끈 짧고, 가진 것 없는데다 나이까지 많아지면서, 항상 불안한 것을 느껴. 사장님은 내 월급보다 훨씬 더 낮은 급료로 갓 상고를 졸업한 여사원 뽑고 싶기도 할거야. 나의 노력과는 상관없이 그렇게 짤리겠지. 어짜피 난 소모품이니까. 여경리 나이 서른이면 유효기간만료란다.” 그녀가 말을 멈추고 소리를 내어 웃었다.
“이렇게 살다가, 내 주제랑 비슷한 사람 만나서 또 그렇게 아등바등하면서 살게 되겠지? 난 그러기 싫은데....” 그녀가 젓가락을 들어서 두부조각 하나를 들었다.
“나, 어려서부터 가난속에서 살다가, 부모 잃고 동생 뒷바라지 하면서 정말 죽어라고 열심히 살아 왔는데, 나 앞으로는 좀 더 나은 생활, 좀 더 풍족한 생활 하고 싶은데... 그게 이 세상에서는 나에게 허락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녀가 말을 잠시 멈추고 젓가락에 계속 들고 있던 두부조각을 입안에 넣었다.
정훈은 자신의 소주잔을 들어서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았다.
“나, 동생한테 목 메고 있는 거, 동생이 공부 좀 열심히 해서 대학도 가고 그러면 내가 어떻게 해서라도 졸업 시킬거니까. 정신 차리고 열심히 살았으면 좋겠다는 거... 그거 동생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서 그런게 아닌가 하는 생각 자주해.” 그녀가 국자를 들어서 찌개 국물을 조금 떠서 자신의 그릇에 담았다.
“내가 내 능력으로는 지금 내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못 나가니까. 동생이 잘돼서 날 여기서 끌어내어 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더 맞는 걸 꺼야.”
대전에서 살 때와 대학을 다닐 때에는 전혀 보이지 않던 사람들이었다. 존재하지만 그와는 전혀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 그와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고개를 돌려버리면 존재 자체도 알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시흥시에서도 가장 변두리의 마을에서 낡은 단독주택의 한 구석방에 몸을 뉘이고 살게 되면서 그는 힘들고 고단한 사람들의 군상을 발견했다.
아침 출근시간이 되면 굳어버린 잿빛 얼굴로 피곤한 몸을 이끌고 버스를 타거나 회사의 출퇴근용 미니버스에 몸을 싣고 공단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들. 노력하면 한 만큼 자신의 삶의 발전도 기대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투명한 존재.
‘인생이란게, 이렇게 살다가 이렇게 죽는 거지 뭐.’ 라면서 공장 밖으로 나와 마스크를 벗고 창백한 얼굴로 담배를 입에 물던 김씨 아저씨. 공장근무 5년인데 여전히 같은 월셋방에서 쓴 것도 없이 생활비는 항상 빠듯하고 통장잔고는 항상 한숨이며 한평생 그곳을 벗어나지 못할 것 같다며 한숨짓던 석현이형.
정훈은 모든 일이 정리되면 언젠가 다시 자신의 원래의 생활로 돌아갈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그 햇빛도 잘 들지 않는 쪽방에 들었었다.
하지만 일 년이 지난 지금, 연희누나의 말을 들으면서, 자신도 어쩌면 이곳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빚을 지고 도망친 아버지, 암으로 고생하는 엄마, 그리고 동생 둘.. 어쨌든, 운명은 언젠가는 가난한 그들로부터 엄마를 데려갈 것이다. 그러면 그가 가장으로서 두 동생의 인생도 책임져 야만 할 것이다. 지금보다 훨씬 더 그의 삶은 더 곤고해지고 그는 결코 그 쪽방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그를 덮쳐, 순간 그는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
그가 고개를 들어서 연희누나를 바라보는 순간 누군가가 그의 뒤쪽에서 그에게 말을 걸어왔다.
뒤를 돌아본 그의 시야에 그를 보고 웃고 있는 한 남자의 얼굴이 들어왔다.
환한 미소였다. 하얀 치아를 드러내면서 그는 정훈을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 정훈은 당황했다. 일 년을 이곳에서 살았지만, 공장과 집, 그리고 과외, 그것이 그의 삶의 전부였다. 그렇게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이 낯선 도시에서 그를 보고 그렇게 웃을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다.
어리둥절한 정훈을 계속 미소를 띠고 바라보고 있던 그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저 기억 안나요? 지난 주 금요일 밤에 내가 공단 앞까지 태워다 주었는데?” 말을 마치고 그는 연희누나 쪽을 향해서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를 하였다.
“아....” 정훈이 그제야 그를 알아보고서 표정이 바뀌었다.
“그때는 정말 고마웠습니다.”
여전히 미소를 얼굴에서 지우지 않은 그는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정훈과 연희는 서로 마주보고는 다시 그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아!” 그가 입을 떼고는 연희 쪽을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
“사실, 술 생각이 났는데, 같이 마실 사람이 없어서 어쩔까 하는 중이었거든요.” 그가 말을 멈추고 정훈과 연희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같이 합석하면 안 될까요? 남는 자리도 없는 것 같은데....”
그의 말에 정훈은 고개를 돌려 홀 안을 돌아보았다. 그의 말처럼 그리 크지 않은 술집에는 빈자리가 없었다.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을 때는 이미 그는 의자를 잡아당겨 정훈과 연희 사이의 공간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아, 예. 그러세요. ” 뒤늦은 허락의 말을 하면서 연희가 정훈을 바라보면서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현준)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정신없는 하루였다.
월요일 오전에 캐나다에서 도착한 워커씨와의 비즈니스를 끝내고 화요일에는 그를 뒷자석에 태우고 인사동 골목과 남산타워를 돌고는 오후에는 용인에 있는 민속촌으로 향했다.
이미 외국에서 방문하는 거래업체 바이어들과의 항상 정해진 루트를 도는 것이라 새로울 것도 없었고, 자신이 하는 멘트를 자신이 들어도 식상할 뿐이었다.
저녁은 사장님과 이사님이 미리 자리를 잡고 있는 고급 한식집으로 그를 데려갔다.
다행히도 부장이 같이 나와 있었다. 항상 그가 외국의 거래업체와 전화 통화 할 때에는 “자네 발음이 영....” 하면서 혀를 차던 부장이었다. 그러면서도 바이어가 오는 자리는 슬며시 빠져나가는 그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럴 수 없었다. 캐나다의 총 대리점은 회사에서도 가장 큰 거래업체 중에서 손꼽혔다. 그런 업체에서 대표가 한국을 처음으로 방문을 한 것인데 꼭 저녁식사에 참석을 해야 한다는 사장님의 말씀이 있으셨을 것이다.
부장은 불편함을 참으면서 버티고 있는 것이 한눈에 보였다.
그래도 영어로 워커씨와 인사를 할 때에는 그럭저럭 하는 듯 했지만, 현준은 마음속으로는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이 자리에 참석해야만 하는 것이 정해 졌을때, 기본적으로 해야 할 말들은 몇 번이고 연습을 하고 왔을 터였다. 그리고 조금 있으면 그의 알량한 본래 실력은 들통이 날것이 뻔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발음과 유창하지 않은 영어실력을 ‘퇴근하고 쉬는 날에는 영어 공부 좀 하라’ 라고 사사건건 트집을 잡아오던 부장이었다.
못된 마음으로 엿을 먹이려는 것은 아니었지만, ‘오늘 만큼은 너도 고생 좀 해 보라’ 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는 일부러 그 대화에 끼어들지 않았다. 그리고 사장님이 말을 하는 것도 일부러 부장의 눈치를 보면서 그에게 통역을 떠넘겼다.
역시 대화가 길어지자 그는 초조해 보였다. 점점 말끝 마다 ‘그런데, 저기“ 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저녁 식사 후에 고급 술집으로 워커씨를 모신다는 말을 듣고 현준은 부장에게 고개를 돌렸다.
“저, 부장님, 제가 어제부터 하루 종일 워커씨 모시느라고 일을 못했는데, 오늘까지 호주하고 싱가폴 거래업체 건을 마쳐야 하는 일이 있습니다. 저는 저녁식사 끝나면 회사로 들어가서 그 일 마저 끝내야 할 것 같은데요.”
현준을 보면서 부장이 일그러진 얼굴로 막 입을 열려는 순간 옆에서 듣고 있던 사장님이 먼저 그에게 입을 열었다.
“아, 그럼 식사 끝나면 정 대리는 회사에 들어가서 일 보게. 그리고 이틀 동안 꼬박 워커씨 태우고 운전하고 다니느라고 고생 했을텐데 일 끝나면 집으로 일찍 들어가서 쉬어.”
말을 끝내고는 사장님은 부장을 바라보았다.
“김 부장 그래도 되지? 뭐 영어야 부장이 더 잘하니까, 통역이나 대화도 부장이 하는게 낫고..”
“아, 그럼요. 김 부장이야 무역 쪽에서 일한지가 벌써 몇 년째인데요.” 이사님이 옆에서 거들었다.
“아니, 저!” 말을 걸면서 그를 바라보는 김 부장을 향해서 고개를 끄덕하고는, 다시 고개를 사장님과 워커씨에게 돌려 인사를 하고는 그는 한식집의 룸 밖으로 나왔다.
회사로 돌아가느라고 운전중이었다.
사실 딱히 오늘로 끝내야 할 일은 없었지만, 대충 일을 정리하고는 퇴근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야 내일 아침 부장이 혹시 어제 한 일이 무엇이냐는 질문이라도 던진다면 보여줄 것이 있어야 했다.
공단으로 진입해서 회사 쪽으로 향하는 사거리에서 신호등을 기다리다가 문득 눈에 익은 옷차림의 남자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청바지와 짙은 청색의 티셔츠를 입고 그의 앞의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는 남자는 지난주 금요일 밤에 그의 차를 얻어 탄 그 남자였다.
현준이 신호등을 기다리느라 멈춰 있는 그 차의 앞의 횡단보도를 그보다 좀 연상인 듯한 여성과 함께 건너서 이제는 인도로 올라서고 있었다.
“빵!” 뒤에서 있던 차가 경적을 울렸다. 신호등이 바뀌어 있었다.
비상등을 켜고 천천히 도로 가장자리에 차를 세우고는 현준은 그들의 뒷 모습을 바라보았다.
역시 그 남자는 지난주 금요일이 아닌 그 이전에 어딘가에서 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디서였더라..” 그는 미간을 찌푸리고 그의 뒷모습을 빤히 쳐다보면서 손을 들어 팔꿈치를 창문에 괴고 이마를 짚었다.
그러다가 도대체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지 하는 생각이 들어 뒷통수를 긁으면서 정신을 차린 다음 사이드 브레이크를 풀고 악셀을 밟았다.
그래도 그의 시선은 그 남자에게서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이 허름한 술집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대충 일을 보고, 책상정리를 한 다음에 그는 천천히 회사 창문의 창가로 걸어가서 창밖을 내다보았다.
왜 알지도 못하는 젊은 남자에 대한 호기심이 그의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는지, 그런 자신이 이해되지 않았다.
“이런 걸 ’대자부’ 라고 하는건가?“ 그는 혼잣말로 중얼 거렸다.
별것도 아닌 것에 자신이 신경을 쓰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조금 전에 본 그 남자의 뒷모습이 그의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문득 선애에게 전화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잠시 그의 머릿속에 끼어들었지만, 여전히 며칠동안 그의 전화를 받을 때마다 히스테리를 부리던 그녀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떠올라 그는 손에 들었던 휴대폰을 가방에 넣어버렸다.
그리고 그는 가방을 들고 사무실을 나섰다.
차문을 열고 좌석에 오른 다음에 시동을 건 후에도 그는 아직도 마음의 결정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작은 호기심으로 시작된 생각이 이제는 그의 머릿속에 박혀서 그 남자에 대한 궁금증은 점점 더 증폭 되어갔다.
그는 시동을 끄고 가방을 차에 놓은 채로 차에서 내려서 걷기 시작했다.
그들은 아직 그 선술집에 있을 듯 했다. 하지만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이 그냥 ‘저 혹시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라고 들이대는 것도 말이 안 되는 것 같았다.
“혹시 애인하고 있는 걸 내가 방해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우선 어쨌든 말은 걸어봐야 할 것 같았다. 그에 대한 궁금증을 풀기에는 지금이 기회일 듯 싶었다.
언제 다시 그와 마주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술집 문을 열고 슬쩍 안을 들여다 보았다. 그 남자는 홀 안쪽의 오른쪽 테이블에 그 여성과 함께 앉아있었다.
현준은 우선 자리를 잡고 앉아서 그들을 눈 여겨 볼 셈으로 빈자리를 찾기 위해서 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저녁식사 시간이 지나고 술 한잔 하기 위해서 공단 직원들이 몰릴 시간이라 빈자리가 없었다.
그는 잠시 서서 망설였다.
서빙을 하는 아주머니도 바쁜 모양인지 그를 한번 흘끗 보고는 “지금은 빈 자리가 없네요.” 라고 한마디 하고는 서둘러서 술과 음식이 담긴 쟁반을 들고 그를 지나쳐버렸다.
돌아갈 것인가 하는 고민을 하는 순간, 그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채로 그의 두 다리가 그를 성큼성큼 앞으로 이끌었다. 순간 당황하면서도 그는 우선 웃음을 짓기로 했다. 옛 말에 그런말도 있지 않은가. 웃는 낮에 침 못 뱉는다는..
현준을 먼저 본 것은 그가 서 있는 맞은편에 앉은 그녀였다. 현준은 미소를 띤 얼굴로 그녀에게 슬쩍 인사를 한 다음 그 남자의 등 뒤에서 말을 걸었다.
“오랜만이네요.”
현준의 말에 그가 돌아보았다.
확실히 어디에선가 본 아련한 기억을 그의 얼굴은 담고 있었다.
확실하게는 설명할 수 없는 그런 따뜻한 감정이 그의 마음속에서 스며나와 온 몸으로 번졌다. 그리고는 영문을 몰라하는 그런 그 어린 남자의 표정이 반가웠다.
우선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그들이 오해를 하지는 않을 까 싶어서 명함부터 두 장을 꺼내서 그들에게 하나씩 건네 주었다.
그의 명함을 들고는 여전히 당황해 보이는 그들을 번갈아 보면서 그가 슬쩍 말을 꺼냈다.
“혹시, 지난주 수요일에도 버스에서 보지 않았나요?” 현준이 그를 보면서 입을 열었다.
“소주 한병하고 잔 하나만 더 갖다 주세요.” 테이블로 다가와서 그를 바라보는 아주머니를 보고 현준이 말을 건네고는 다시 그에게 얼굴을 돌렸다.
“수요일 아침에 출근하는데 손잡이에 매달려서 졸고 있길레 내가 자리 양보해줬는데....”
현준은 여전히 미소를 지으면서 그를 바라보았다.
당황스런 표정에서 그의 얼굴이 점점 변해갔다. 그리고는 이제야 알겠다는 듯 드디어 그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아!” 한마디 뱉고 나서 그는 멋쩍은 듯이 얼굴에 홍조를 띠었다.
“네, 맞아요. 그러고 보니 제가 신세를 두 번이나 진 거네요.” 말을 끝내고 그가 그녀에게 고개를 돌리고는 그녀를 향해서 씨익 웃었다.
“왜, 누나 지난주에 내가 버스에서 졸다가 정거장 지나칠 뻔 했는데, 누나가 깨워줬잖아요.”
그러자 그녀의 얼굴의 표정도 밝아졌다.
“아. 그때 너한테 자리 양보해주신 분이 이분이야?”
말없이 고개를 한번 끄덕인 후에 그는 고개를 숙여서 현준이 건네준 명함을 다시한번 들여다 보았다. 그리고는 현준을 향해 손을 내밀면서 미소를 띠고 입을 열었다.
“두번씩이나 정말 고맙습니다. 전 오정훈이라고 합니다.”
현준은 내민 그의 손을 잡았다.
신입사원이면서도 자기 실속 다 찾아 먹어서 여우나 늑대같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무실의 직원을 보다가 정훈을 보았을 때는 순수하고 착해보였다
그러나 생긴 모습과 달리 그의 손은 상당히 거칠었다. 그의 손바닥에 번져오는 예상치 못했던 그 어린남자의 손바닥에 딱딱한 굳은 살의 느낌에 순간 현준은 당황했다. 공단이니 몸을 쓰는 일이 많은 것이 당연한 일인데도 왜 그런 느낌을 받았을까 스스로 당혹감이 들었지만 그런 그의 당황한 내색을 정훈이 눈치를 챘을까봐 순간 걱정이 되었다.
자신의 이런 생각을 감추기 위해서 그는 고개를 돌려서 그녀를 바라보고는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 셋 모두 오늘이 구면인 거네요.” 그가 환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런 인연도 만나기 어려운건데, 오늘은 제가 한턱 내도록 할게요. 드시고 싶은 것 있으시면 뭐든 말씀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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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pa…
- 작성일
정훈은 느끼지 못하고 있다.
현준은 호기심이었을까?
전혀 연관성 없는 남자인데
왜 다가가는 걸까?
반복된 우연을 필연이라고, 운명이라고
믿는 것도 아니고
여자친구에 대한 내면의 거부감, 그리고 본연의 성정체성을
깨달아가는 것을 보여주는 것일까?
인과관계는 다소 부족한 느낌이지만
정훈과 현준의 거리가 가까워지고
동일한 공간에서 대화도 늘어가는 관계가 그려낼 다음 작품이 사뭇 궁금해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