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피 프린스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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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
공단내에 있는 은행 앞에서 서성거리는 정훈의 앞에 승용차가 한 대가 다가오더니 멈췄다.
“오래 기다렸어?”
현준이 조수석의 창문을 내리고는 밝게 웃으면서 정훈을 내다보며 물었다.
“아뇨. 저도 방금 왔어요.”
“그래. 주차만 하고 올테니 잠시만 기다려.”
말을 마치고 현준은 다시 차를 몰고 코너를 돌아 정훈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일이 끝나고 샤워를 한 후, 확인한 휴대폰에 현준의 문자가 와 있었다.
문자를 확인하면 잊지말고 전화를 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로부터 형식적인 위로의 말을 할 것이라는 예상을 했었다.
그래서 아무 생각없이 그의 번호를 눌렀다. 하지만, 그는 집에 가기 전에 만나서 저녁이 하자고 정훈에게 말을 했었다.
그렇게 현준이 주차를 끝내고 다시 나타나기를 기다리다가 정훈은 순간 아차 싶었다.
군대에 간 동생이 휴가를 나와서 연희누나가 오늘 조금 일찍 퇴근 한 사실을 현준은 모르고 있을 것이고 혹시 그녀가 같이 오기를 기대했을지도 모르는 현준이 실망을 할 것이 뻔할 듯 했다.
전화 통화중에 현준에게 그 사실을 미리 말하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리기 시작했다.
만나면 그 말부터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여전히 함박 웃음을 지으며 현준이 코너를 돌아서 부지런히 그를 향해 걸어왔다.
“고생해서 얼굴이 좀 많이 상했네.” 현준이 정훈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아니예요.” 현준이 자신을 똑바로 바라 보는것에 민망한 느낌이 들어서 얼굴을 돌리면서 그가 대답했다.
“저, 그런데 오늘 연희누나는 동생이 휴가를 나와서 못 왔어요.”
정훈의 말을 들은 현준이 한번 고개를 갸웃하더니 다시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너 고생해서 저녁이나 사주려고 전화한거야.” 환하게 웃으면서 그가 손바닥으로 정훈의 어깨를 툭하고 쳤다.
“뭐 먹을래?”
“그냥,” 말을 멈추고 정훈이 근처를 한번 돌아보았다. “저기서 비빔밥 같은 거 먹죠, 뭐.” 그가 길 건너편에 있는 분식점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정훈이 가리키는 곳으로 한번 시선을 주더니 현준은 정훈의 팔꿈치를 슬며시 잡고 끌었다.
“이리와. 저기로 가자.”
“술도 한잔 할래?”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도는 큰 전골냄비 안에서 끓고 있는 소고기와 버섯을 그릇에 담아서 건네주면서 현준이 정훈을 한번 바라보고는 물었다.
“운전하시려면....”
“대리 부르면 돼.” 현준이 머뭇거리는 정훈의 말을 중간에 잘랐다.
“저 오늘밤에 과외가 있어서요.”
“아.” 현준이 생각을 못했다는 듯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는 말을 이었다.
“수업은 무슨 요일에 해?”
“월요일하고 금요일요.”
“오늘은 수요일인데?” 현준이 전골냄비에서 버섯을 담던 자신의 그릇에서 시선을 돌려 정훈을 바라보면서 물었다.
“지난주에 엄마 돌아가셔서 대전 가느라 못했던 거 오늘 보충하기로 되어있어서요.” 정훈이 들었던 수저를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왜요?” 빤히 자신을 쳐다보는 현준을 보면서 정훈이 물었다.
“아냐, 엄마라는 말에 혹시 너 우는게 아닌가 해서.” 말을 멈추고 현준이 한번 씨익 웃었다.
친절하고 자상한 현준의 모습을 보면서 순간 연희누나가 좀 부럽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행동뿐만 아니라 외모도 볼수록 선량하게 생긴 모습이라고 정훈은 생각했다.
월요일 아침에 출근을 한 후, 현장에 들어가기 전에 전화로 불러내서 커피를 뽑아주면서 괜찮은지 걱정스레 물어보는 연희누나에게 정훈은 괜찮다는 표시를 농담으로 대신했었다.
“누나, 대전까지 둘이서 데이트는 잘 했어요? 나름 잘 생겼죠?” 조금 짓궂게 물어보는 정훈의 말에 연희누나는 한번 피식 웃었다.
“그 사람도 너 보러 간거야. 차속에서 내내 네 얘기만 물어보더라.”
“그래도, 생판 모르는 날 보러 거기까지 왔을라구요. 누나가 대전까지 온다니까 기회다 하고 따라 온거죠.” 정훈이 그녀의 얼굴을 생글거리면서 한번 보고 말을 이었다. “근데 그 사람 결혼은 안한거겠죠?”
“글쎄, 반지는 끼지 않고 있고 반지 낀 자국도 없는 거 봐서는 뭐....”
“에이, 누나도 관심 있는거구나!” 짓궂은 말투로 마치 그녀를 놀리는 듯 말하고, 정훈이 그녀를 보고 한번 큰소리로 웃었다.
“좋은 사람 같던데 누나랑 잘 됐으면 좋겠어요.”
겸연쩍은 표정을 하고 있는 그녀를 한번 흘끗 보고는 실실거리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그녀에게 손을 슬쩍 흔들어보이고 현장쪽으로 몸을 돌렸다.
“저, 형, 나이가 어떻게 돼요?” 정훈이 상위에 놓여있는 도토리묵으로 젓가락을 옮기면서 물었다.
“나이는 왜?” 겸연쩍은 표정을 지으면서 현준이 물었다.
“가만있자, 올해 서른하나 된 것 같은데?” 마치 타인의 나이를 추측하듯이 말하고는 그가 씨익 웃었다.
“결혼은 하신거예요?” 연희누나의 말을 머리에 떠올리면서 현준의 손가락을 눈여겨 보며 정훈이 물었다.
“그건 왜?” 갑작스런 예상외의 질문에 그가 정훈을 빤히 바라보았다.
“아니요. 연희누나가 올해 서른인데, 제가 보기엔 잘 어울릴거 같아서요.”
“누구? 나랑?” 현준이 씨익 웃으면서 물었다.
“일부러 엮으려고 하지 마, 나 말야, 순수하게 너 걱정돼서 대전 갔다 온거고 오늘도 순전히 ‘너 고생 했을텐데 밥 한끼 사줘야지’ 생각하고 만나자고 한거야.”
그럴 가능성이 없을 것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현준을 슬쩍슬쩍 훔쳐보면서 정훈은 자신의 삶 속에서도 현준과 같은, 그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항상 자신은 그릇이 작다고 생각해온 정훈이었다.
맏아들로서 가족을 책임질 수 있는, 그런 인물이 되지 못한다고 그는 생각했다.
엄마가 살아 있을 때 대전을 도망쳐 나온 것부터, 아빠를 원망하면서도 아빠가 두 동생을 데리고 포항으로 간다고 했을 때, 마음 한켠에서는 안도감이 느껴지지 않았던가.
동생들을 자신의 삶에 짐이 될 것으로 여겼던 것에 대한 죄의식으로 한동안 마음이 무거웠던 그였다.
또 한편으로는 포항으로 따라가지 않은 것은 그 곳에서 미래에 발생할 수도 있는 일에 대한 책임을 피하고자 한 것은 아닌가 하고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 혼자의 삶도 건사하기가 힘들다고 정당화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던가.
“과외는 몇시에 하는건데?” 멍하게 그런 생각에 잠겨 있다가 갑작스러운 현준의 질문에 정훈은 자신의 젓가락에 들고 있던 고기조각을 떨어뜨려버렸다.
“야자 때문에 11시에 시작해요.” 냅킨으로 테이블을 문지르면서 정훈이 대답했다.
“야자?”
“야간자율학습요.”
“아!” 현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도 오랜만에 들어보는 말이라서.” 말을 마치고 현준은 크게 웃었다.
“그럼 아주 늦게 끝나겠다.”
“한시에 끝나요.” 냅킨을 슬쩍 테이블 구석으로 밀어내면서 그가 대답했다.
“그럼 끝나고 집엔 어떻게 가?”
“그냥.... 걸어가요.” 정훈이 대답을 하고는 씨익 웃었다. “두 다리 멀쩡하고 건강한데요 뭐.”
그러나 현준은 그의 말에 웃지 않았다.
“과외 하는데가 어디길래?”
“푸른나무아파트 2차예요.”
정훈의 대답을 들은 현준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여전히 정훈을 빤히 바라보았다.
“새벽 한시에 거기서 공단입구에 있는 집에까지 걸어간다고?”
“네...” 현준의 반응에 오히려 정훈의 목소리가 줄어들었다.
“그럼 지난번에 내가 태워줬을때도 과외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이었고?” 여전히 놀란 표정으로 현준이 물었다.
정훈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오는 날은 어떻게 하고?”
“그래도...... 걸을 만 해요.”
“그럼 겨울에는?” 현준이 계속해서 정훈에게 물었다.
“..........”
“겨울에도 그 먼 길을 걸어 다녔어? 그 추운 새벽에?”
“그때는....” 마치 자신이 무슨 잘못을 지은 것에 심문받는 듯한 느낌을 받으면서 슬며시 고개를 숙이고 정훈이 다시 입을 열었다.
“자전거로 다녔어요.”
“그럼 그 자전거는 지금은 왜 안타고 다녀?” 이제 현준의 목소리는 훨씬 부드러워졌지만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몇달전에 팔았어요. 돈이 필요해서...”
자신의 옹색한 형편이 그에게 드러내지면서 정훈의 심기가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자신의 자존심은 이미 오래전에 저 밖의 세상 어딘가에 버렸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의 질문에 하나씩 대답을 하다보니, 자신의 처지에 슬그머니 화가 나기 시작했다.
정훈의 표정의 변화를 읽었는지 현준이 목소리를 부드럽게 해서 입을 열었다.
“아! 미안해. 너가 마치 내 동생처럼 느껴져서... 내 질문이 기분이 나빴다면 사과할게.”
그가 정훈의 그릇을 들어다가 남아있는 고기와 버섯을 담고 있을 때 현준의 핸드폰이 울렸다.
밝았던 그의 표정이 어두워지면서 그는 전화를 끊었다.
“밥 먹고 커피까지 같이 한잔 하자고 할랬더니 들어가봐야겠다.” 그가 아쉽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럼 지금 일어날까요?” 정훈이 현준을 보고는 물었다.
“아냐, 먹던 것은 다 먹고 가야지. 앉아서 편안하게 먹고 가자.”
집에 들러서 과외수업을 할 준비를 하고 윤선이네 집으로 가기 위해서 버스정거장으로 향할 때까지는 맑았던 날씨가 버스에서 내리면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정거장에서부터 부지런히 뛰어서 아파트에 들어왔지만 수업이 끝난 후에까지 비가 그치지 않을까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막상 수업이 끝나고 한시가 넘어 아파트 건물 밖으로 나왔을 때에는 가랑비는 폭우로 돌변해 있었다.
아파트 건물 입구에서 혹시나 버려진 신문이나 비닐조각이라도 있을까 하고 둘러봤지만 비를 조금이라도 막아 줄 만한 것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가방을 머리에 이고 갈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한 시간 반 동안 그렇게 갈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잠시동안 망설였지만 그가 찾아 낼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처음부터 택시를 잡는 것은 생각도 하지 않고 있는 그였다.
마침내 그는 빗속에서 초연해지기로 결심했다. 쏟아지는 빗속에서 침착한 발걸음으로 걷는 다는 것도 나름 운치있을 듯 싶었다. 어쨌든 그 방법밖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마침내 단단히 결심을 하고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아파트 단지 입구까지 왔을 때였다.
쏟아지는 빗줄기 속 어딘가에서 자동차 소리가 나더니 정훈의 옆으로 환한 라이트를 비추면서 승용차 한 대가 미끄러지듯 다가와서 그 옆에 멈췄다.
(현준)
호주로 보냈던 수출품 중에서 벌크로 보냈던 6톤 가량이 불량이라는 클레임이 들어왔다.
월요일 아침부터 아산공장으로 반송된 제품의 확인 작업에 들어가서 담당자와 함께 불량제품을 하나하나 체크해서 분류하고 그 건에 대한 책임의 확인 및 불량처리방법과 향후 개선방법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느라고 수요일 오후가 되어서야 현준은 아산에서 시흥시로 올라왔다.
클레임건을 그렇게 처리를 하고 나니 온몸이 파김치가 되어서 피곤해진 그는 회의실로 들어가서 소파에 드러누웠다. 잠시만 누웠다가 일어나서 다시 남아있던 일을 처리하고 퇴근하려고 생각하다가 정훈이 머리에 떠올라 소파에 누운채로 문자를 보냈다. 그러나 여전히 답장이 없었다.
기다리다가 궁금해진 그는 연희에게 그녀와 정훈의 안부를 묻는 문자를 보냈다.
곧 연희에게서 자신은 휴가나온 동생 때문에 함께할 수 없지만, 힘든 일 겪고 올라온 정훈에게 저녁이라도 사주셨으면 좋겠다는 문자를 받았다.
피곤에 쌓여 일찍 집으로 가려고 계획을 했던 현준은 연희의 동생의 휴가라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정훈과 둘이 편하게 대화할 수 있다는 생각에 그는 정훈에게 퇴근 후에 잊지 말고 꼭 전화를 하라는 문자를 보내고는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소파에 등을 대고 누워서 잠이 들었다.
정훈은 훨씬 야위어 보였다.
창백한 얼굴로, 자신은 괜찮다며 양 팔에 힘을 주어 근육을 보여주겠다는 그를 보면서 안쓰러운 감정이 들었다.
저녁식사 후에도 그와 좀 더 같이 있고 싶은 생각에 머릿속으로는 괜찮은 카페를 기억속에서 더듬어서 찾아보고 있었다.
하지만, 식사가 끝나갈 무렵 선애에게서 전화가 왔다.
저녁을 같이 먹자는 그녀에게 식사 중이라고 말하고는 나중에 전화하겠다고 했지만 그녀는 이미 자신이 아는 고급 레스토랑에 예약을 해 놓았기 때문에 취소할 수 없다고 고집을 부렸다. 안하무인격인 그녀는 그에게 알아서 빨리 출발하라고 재촉을 해 댔다.
정훈과 헤어진 후, 부랴부랴 도착해보니 그녀는 창가의 자리에 앉아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늦어서 미안해. 전화를 받고 부지런히 온 게 이렇네.” 그가 그녀의 눈치를 살피면서 말했다.
“좀 진작 알려줬으면 시간에 맞춰서 왔을 텐데.”
그의 말이 끝나자 그녀는 그에게서 시선을 창밖으로 돌리고 입을 열었다.
“자기 변했어.”
“내가?” 냉랭한 그녀의 목소리를 느끼면서 그가 물었다.
“전에는 내가 화나면 하루에도 수십번씩 미안하다, 잘못했다, 용서해라 하면서 문자를 보내더니 요 며칠은 뭐야?”
말을 마치고 고개를 돌려서 그를 한번 노려본 다음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혹시 누구 다른 여자 생겼어?”
“무슨.... 말이 되는 얘기를 해야지.” 그의 목소리가 방어적으로 되어 커졌다.
“그래?” 그녀가 다시 시선을 그에게 고정시켰다.
“자기 나에게 마지막 문자 보낸 게 언제인 줄 알아?”
“..........”
“언제 보냈는지 기억도 없지?” 그녀의 표정이 어두워지고 목소리가 더욱 날카로와졌다.
“지난주 수요일이야.”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그녀가 한숨을 쉬었다.
“내가 저녁같이 먹자니까 친구 어머님이 돌아가셔서 대전에 가는 길이라고 문자보내더니, 밤늦게 다시 내가 전화했더니 아주 전화를 꺼놨던데?”
“영안실이라서 일부러 꺼놨던 거야.” 그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누군 영안실 한번 가본 적 없어서 모를 줄 알아? 자기말고 누가 영안실에서 전화를 꺼?”
“영안실 들어가기 전에 예의상 꺼놓고 있다가 다시 켠다는 걸 깜빡 했던거야. 남들이 안꺼도 예의를 지킬 건 지켜야지.”
“그렇게 예의 잘 지키는 사람이 그러고 그 다음에 나에게 지금까지 전화는 커녕 문자하나도 없었어?”그녀가 말을 이으려는 순간 웨이터가 주문한 음식을 들고 다가왔다.
“이게 다가 아니니까 무식하게 배 채우지 마.” 그녀가 말을 끝내고는 포크를 들었다.
배는 이미 부른 상태였지만 아무래도 얼마만큼은 먹어야 할 듯 싶어서 그도 포크를 들었다.
어쨌든, 그녀의 말이 옳았다. 지난주 수요일에 대전에 조문을 갔다가 정훈을 본 순간부터 그는 선애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래서 오늘 저녁 정훈과 저녁을 먹다가 선애의 전화를 받는 순간, 불편함과 함께 죄책감이 그를 괴롭혔다.
포크로 음식을 찍어서 입에 대는 순간 그녀가 그를 바라보았다.
“자기 내가 먹는 거 안보여? 그 포크가 아니라 저 포크로 먹어야지!” 그녀는 손가락으로 그가 들고 있지 않은 좀 더 작은 포크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모르면 보고 따라하던가.” 그녀가 짜증을 냈다.
“미안해.” 사과를 하고는 현준은 옆에 웨이터가 따라놓은 샴페인을 집어 들었다.
그를 빤히 쳐다보던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자기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아?”
“혹시 오늘이 생일이야?” 놀란 표정의 그의 말에 그녀가 한번 피식 웃고는 입을 열었다.
“그저 모르면 만만한 게 내 생일이야? 뭐 내 생일이 일년에 너댓번은 돼?” 비웃는 표정으로 그녀가 그를 노려보았다.
“우리 만난지 딱 2년 되는 날이야. 오늘이. 자기 정말 너무하지 않아? 오늘이 무슨 날인지도 모르고 있고 말야.”
“아, 정말 미안해.” 그가 다시 사과를 했다.
“왜 그렇게 사람이 답답해? 그냥 무슨 말에나 ‘미안하다’고 말하면 다야?”
오늘 제대로 걸렸다 싶어서 최대한 얼굴에 미안한 표정을 지으면서 현준이 입을 열었다.
“선애야. 한번만 봐줘라. 내가 더 챙기고 확인 했어야 했는데... 그걸 못했다. 머리 나쁜게 좀 티가 나네.” 그가 겸연쩍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머리만 나빠?”그녀의 목소리가 더 커졌다.
“자기 진짜 웃긴다. 자기가 머리만 나빠?” 그녀가 한번 그를 보고 비웃듯이 웃은 다음에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자기 인물은 좋아? 자기 잘생겼어? 아니면 키라도 커? 180 근처도 못가지? 아니면 돈이 많아? 내 손에 명품 선물 한 번 쥐어준 적 있어?” 어이 없다는 표정으로 다시한번 그를 보고 기가막히다는 듯 웃은 후에 그녀는 다시 입을 열었다.
“아니면 박력이라도 있어? 저번에 가평에 가서 펜션에 묵을때도 내가 옆 침대에 있는데도 자기는 잠만 쿨쿨 아주 잘 자더라?”
“결혼 할 때까지는 너 지켜주고 싶어서.....”
“어머 그러셔?” 그녀의 날카로운 비웃음이 그의 말을 잘라 버렸다.
“왜 미국보니까 무슨 기독교 단체에서 결혼 할때까지 순결지키겠다고 혼전서약까지 받고 그랬다는데, 혹시 거기 들었어?” 그녀가 여전히 비웃는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하긴, 나도 자기 별로인데, 자기라고 내가 맘에 들었겠어? 나도 서른하난데? 밖에 나가면 나이 어린애들이 쌓이고 쌓였을 텐데.....”
“선애야.” 그가 그녀의 말을 끊고 조용하게 그녀를 불렀다.
“왜?”
“그럼, 너 나 왜 만나는 거야? 너, 나 사랑하는 거 아니지?” 그가 조용하게 그녀에게 물었다.
“사랑?” 그녀의 목소리가 커졌다. 그리고는 잠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는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래서 자기가 문제라는거야.”
“무슨 문제?” 현준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우리가 무슨 십대 애들이냐? 사랑타령이나 하게?” 그녀가 그를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면서 말했다.
“자기 사람이 그렇게 단순해?” ‘그렇게’ 라는 말에 강하게 강조를 하고는 말을 잠시 멈추고 그를 바라보다가 그녀가 말을 이었다.
“하긴, 그러니까 우리 부모님이 자기를 오케이 한 것이긴 하지만 말야. 우리 아빠는 자기 단순성을 아주 높이 평가하시더라. 자기 같은 멍청한 사람은 조금만 잘 대해주면 평생 맹종한다구.”
“너 정말!” 현준의 목소리가 커졌다. 눈에는 예전에는 보이지 않던 분노가 일었다.
“앗쭈! 화를 낼 줄도 아네? 완전 바보인줄 알았더니, 그런 건 아닌가봐? 하긴 완전 바보가 어떻게 대학은 나오고 회사생활은 또 어떻게 하겠어?”
“야!” 죄책감이 분노로 변해서 그의 마음속에서 터져 나오고 있었다. 그녀가 그와 사귀면서, 거의 항상 그녀는 그를 모자라는 바보 취급을 했다. 하지만 그냥 그는 참고만 있었다. ‘그래, 나 바보다.’ 하면서도 그녀에게 왜 그가 그토록 충실하게 매달렸는지 전혀 이해를 못하는 순간이 그에게 오고 말았다.
“다 필요 없으니까, 우리 헤어지자.” 그가 손에 들고 있던 포크를 내려놓았다.
그의 갑작스러운 변화에도 그녀는 콧방귀를 끼었다.
“그래! 사실, 나, 너 아직까지 왜 만나고 있었는지 진짜 모르겠다. 왜 너처럼 안하무인이면서 남들에 대한 배려는 눈씻고 봐도 없는 너를 왜 그렇게 목메고 따라다녔는지 정말 모르겠다.”
그가 분노로 몸을 한번 부르르 떨고는 벌떡 일어났다.
“그래! 너와 똑같은 새끼 만나서 어디 잘 살아봐!”
말을 끝내고 그는 벌떡 일어나서 밖으로 걸어나왔다.
뒤에서 그녀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한참이 지난 후에도 운전대를 거머쥐고는 아직도 그는 분노로 온몸을 떨고 있었다.
참을만큼 참아왔다고 생각했다. 참아주는 것이 미덕이고 참는자에게 복이있고 참음으로서 상대가 행복해진다고 생각을 해왔다. 하지만, 더 이상은 버틸수 없었다.
그녀가 자신을 바보라고 손가락질을 하면서 킬킬 거릴때에도 정말 바보처럼 같이 웃어주던 그였다.
그러나 한순간 왜 자신이 그런 대접을 받으면서 그녀와 아직까지 사귀었는지 자기 자신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동차 앞 유리창에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와이퍼를 작동해서 떨어지는 비를 씻어내면서 여전히 분노로 날뛰는 심장을 억누르지 못하고 목적지 없이 시내 이곳저곳을 미친듯이 방황하듯 운전을 하다보니 어느새 자신의 아파트 앞에 와 있었다.
차에서 내리려고 막 시동을 끄려다가 그는 시간을 보았다.
열두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차의 키로 손이 향하던 그의 머릿속에 갑자기 정훈의 모습이 떠올랐다.
우산은 가지고 과외를 하러 간 것인지 그런 와중에서도 걱정이 밀려왔다.
새벽한시에 이 비를 몽땅 맞으면서 그렇게 먼 길을 걸어가게 놔 둘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다시 아파트 단지를 한 바퀴 돌아서 이제는 폭우로 변한 빗속을 뚫고 느릿느릿 달리는 차들의 행렬 속으로 끼어들었다.
그리고 이제 간신히 진정된 그는 아파트 단지 앞에 도착하자 참았던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무의식적으로 시동을 끄자마자 쏟아지는 빗방울로 흐려진 창문을 통해서는 밖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다시 시동을 켜서 와이퍼를 작동시키고 그는 심호흡을 해서 마음을 가다듬었다.
조금 전부터 주머니 속의 휴대폰에서는 전화가 울리고 있었다. 선애임이 틀림 없었다. 반복적으로 걸려오던 전화는 이제 멈추고 문자가 왔다는 벨소리가 들렸다. 그는 그대로 멍하니 앉아서 아파트 입구만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곧, 그가 예상했던 것처럼, 정훈이 쏟아지는 비를 몽땅 맞으며 마치 자신이 무슨 부처라도 되는 양, 벌써 비에 흠뻑 젖어서 아파트 단지 밖으로 천천히 걸어 나오고 있었다.
차를 그의 옆으로 대고 창문을 열어서 그를 불렀다.
그가 열린 조수석의 창문에 머리를 들이밀고 놀란 눈으로 현준을 바라보았다.
“저 다 젖었어요. 차 시트 버려요.”
“괜찮아.”
“저 돈 없어서 시트 세탁비 못 드려요.” 정훈이 차 문을 열고 조수석으로 들어와 앉으면서 말했다.
“나중에 너 성공하면 그때 받을게.”
“그런 날이 올라나?” 혼잣말 하듯이 정훈이 차의 앞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차가 거의 없는 도로를 달려서 순식간에 공단입구에 도착했다.
“여기서 내려주세요.” 정훈이 현준을 보면서 말했다.
“너 우산 없잖아 집앞까지 가.”
“골목이 좁아서 돌아서 나오기 힘들텐데....”
“괜찮아.” 마치 혼잣말을 하듯이 현준이 중얼거렸다.
정훈이 알려주는대로 골목길을 돌다가 허름한 단독주택앞에 차가 멈췄다.
“비 오는데 일부러 와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사실 너무 막막했는데 덕분에 너무 편하게 왔어요.” 희미한 미소를 띠면서 정훈이 현준을 바라보고 한번 꾸벅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의 젖은 머리카락과 젖은 옷에서 비의 향긋한 냄새가 번졌다. 그리고 마주친 그의 눈빛은 마치 아픈 강아지의 눈망울처럼 젖어 있었다.
그가 고개를 돌려 문을 열기 위해 차의 손잡이를 잡았다.
“정훈아.” 낮은 목소리로 현준이 그를 불렀다.
“네?” 그가 고개를 돌렸다.
“나......” 긴장되고 떨리는 목소리로 현준이 입을 열었다.
“나.... 너 한번만 안아보면 안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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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님의 작품 속 주인공들이 항상 그렇더군요.
깊이 몰입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