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피 프린스 9
작성자 정보
- 작성
- 작성일
본문
(정훈)
숨도 제대로 쉴 수없이 사람들로 꽉 찼던 버스에서 간신히 내려 몇 걸음 옮겼을 때였다.
“정훈아 같이 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걸음을 멈추고 정훈은 뒤를 돌아다보았다.
종종걸음으로 그의 뒤를 따라온 그녀가 그의 옆에 다가와 슬며시 그의 팔에 팔짱을 끼었다.
“동생하고 맛있는 거 많이 드셨어요?” 얼굴에 미소를 띠고 정훈이 그런 그녀를 바라보았다.
“맛있는 거는 무슨... 그냥 집에서 먹던 대로 먹었어.” 겸연쩍은 표정으로 씁쓸한 웃음을 지어보이고는 그녀는 옆에서 나란히 걷고 있는 정훈을 올려다보았다.
“남자들은 군대를 가면 조금씩 다 변한다는 말을 들은 것 같은데 어째 그 녀석은 변하질 않냐. 그냥 껄렁껄렁하고....”
속상하다는 표정으로 그녀는 불평하듯 중얼거렸다.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면서 정훈은 한번 씨익 웃었다.
"좀 더 있으면 나아지겠죠 뭐. 저도 제대하고 집안이 힘들어진 것 알게 될 때까지 저만 알고 그랬어요.“
“참, 아버님하고 동생들은?” 회사로 들어가는 골목에 접어들면서 그녀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그에게 물었다.
“정리라고 할 것도 없지만.. 여튼, 대충 정리하고 이번 주말에 부산으로 내려가요.”
“그럼 너도 주말에 내려 가봐야 하는 거 아냐?”
“모르겠어요.” 심란하다는 듯 어두워진 표정을 짓던 그가 다시 그녀를 보고 씨익 웃었다.
“아! 그건 그렇고.” 다시 밝아진 표정으로 그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대전까지 먼 길 오시기까지 했는데, 제가 간단하게 저녁이라도 대접 할께요.”
그의 말에 그녀가 미소를 띠고 그를 바라보았다.
“자장면이나 냉면정도는 저도 대접해 드릴 수 있어요.”
“삼각김밥 하나 사준다고 해도 너무 고마워.” 그녀가 다시 밝은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럼 말이 나온 김에 오늘 퇴근하고 볼까? 너 시간 괜찮으면?”
“동생은요? 휴가 끝나서 벌써 복귀했어요?”
“아냐, 오늘은 못 만난 친구들 만나서 놀다가 늦을 거라고 그랬어. 술 먹고 못 들어 올수도 있다고 당당하게 용돈까지 받아갔다.” 어이없다는 듯 그녀가 피식 하고 웃어 보이고는 그녀는 정훈에게 손을 한번 흔들어 보이고 사무실 건물로 들어갔다.
그런 그녀의 뒷모습에 한번 시선을 준 다음 정훈도 탈의실로 향했다.
공단 먹거리 골목 입구에 먼저 도착한 정훈은 주변을 서성거리면서 연희를 기다렸다.
항상 그랬듯이 주머니가 넉넉하진 않았지만 누군가에게 자신이 대접을 한다는 것이 거짓말 같았다. 바로 얼마전까지만 하더라도 다음날 먹을 것을 걱정하던 자신이었다.
그런 자신이 드디어 최악은 벗어난 듯 싶어 마음속에 희망이 피어오르는 듯 했지만, 한켠에서는 이렇게 주머니에서 돈이 나가도 되는지 회의적인 목소리도 들려오는 듯 했다.
하지만 가장 힘들었던 시간에 함께 해 준 그녀였다. 한끼의 돈으로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내가 늦었지?”
그녀의 목소리에 그가 고개를 돌렸다.
“뭘 그렇게 곰곰이 생각해?” 환한 웃음을 보이면서 그녀가 물었다.
“아, 아니예요.” 씨익 웃으면서 정훈이 손을 한번 저었다.
“피자나 먹을까?” 정훈을 바라보면서 그녀가 웃으며 말을 바꿨다.
“네, 피자요?” 갑작스런 그녀의 말에 정훈은 자신도 모르게 순간 당황해졌다.
그러지 않으려고 했지만, 무의식적으로 벌써 그의 머리에 피자가격을 떠올리고 있었다.
유명 프랜차이즈가 아니라 동네 피자집에서 먹는다고 해도 콜라까지 마신다면 만 오천원은 있어야 할 듯 했다. 그는 무의식중에 청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 안에 있던 돈을 만져보았다.
한순간, 그녀를 위해서 저녁을 사겠다고 말을 해놓고 그렇게 계산을 해본 자신이 어이없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생존과 싸워오는 자신이었다. 그렇게 되어버린 자신의 처지가 어이없게 느껴져서 슬며시 우울한 감정이 들었다.
“내가 살게.” 그의 그런 생각을 눈치챘는지 웃으면서 그녀가 그의 팔꿈치를 잡았다.
“저번에 내가 소주 사려고 했었는데, 그날 현준씨가 돈을 냈잖아. 그거 오늘 내가 다시 사는거야.” 그녀가 웃으면서 피자집의 위치를 아는 듯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유명 피자집이 아닌데도 2층까지 테이블이 세팅이 되어있는 널찍한 피자집의 2층 창가 구석자리에 그들은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들의 뒤를 따라 올라온 아르바이트생에게 주문을 한 후에, 여전히 주변을 돌아보고 있는 정훈을 바라보면서 그녀가 입을 열었다.
“참, 어제 그 사람에게서 문자가 왔었는데.”
“.......”
“난 동생이 휴가를 와서 너만이라도 저녁이나 좀 사주시면 어떻냐고 내가 문자를 했었거든...”
“아...네...”
“근데 그 사람 정말 괜찮아 보이지 않아? 인상도 좋고 선해 보이고....”
“그런거 같애요.” 그도 고개를 한번 끄덕거린 후에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았다.
“누나랑 잘 어울릴거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말을 마치지 못하고 입가에 미소를 지으면서 정훈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뭐?” 정훈의 말에 어이가 없다는 듯 그녀가 웃어보였다.
“그 사람 나한테 관심 없어. 나도 그렇고.”
“그럴리가요, 누나만큼 괜찮은 사람이 또 어디 있다고.. 그리고 누나도 그 사람 관심 있었잖아요. 손가락에 반지 없는 것 까지 확인하시고선....” 그가 그녀의 말에 당황한 듯 해 보였다.
그녀가 아무 말 없이 얼굴에 미소를 지은 채 잠시 정훈을 바라보았다.
“정훈아.” 잠시동안의 침묵 후에 그녀가 입을 열었다.
대답 대신 정훈은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나 말야. 사람 좀 볼 줄 안다고 생각해.”
말을 잇기 전, 그녀는 겸연쩍은 표정으로 한번 웃어보였다.
“물론 내가 잘못 보고 있는 것 일수도 있어., 그래도 나 아직 어리지만 눈치로 사회생활 한 지 10년이야. 작은 회사라 사무실 직원들 수시로 입사하고 퇴사하고 들락거리면서 어떤때는 영업일도 봐주고 거래처도 다니고 자재에 관련된 일이며, 급할 때에는 현장일도 해보고 회사 트럭 몰고 거래처 납품까지 하면서 이런저런 사람들 많이 만나봤어. 게다가 여자의 육감이라는 것도 있구말야.”
직원이 피자와 콜라를 들고 와서 테이블 위에 놓는 걸 바라보면서 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 정훈은 갑작스러운 그녀의 엉뚱한 얘기에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몰라서 멍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대전으로 내려가는 차 안에서....” 아래층으로 향하는 직원의 뒷모습을 보면서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사람이 운전을 하면서 너에 관해서 이것저것 물어보더라.” 피자 위에 치즈가루 뿌린 후 그녀가 다시 정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처음엔,” 그녀가 말을 꺼냈다가 멈추고 콜라잔을 들어서 한 모금 마시고는 피자 조각을 떼어내어 정훈의 접시위에 올려놓고는 또 한조각을 들어 그녀의 접시위로 가져갔다.
“여기 피자, 유명한 피자집은 아닌데, 그래도 맛은 괜찮아. 얼른 먹어 봐.” 그녀가 정훈을 바라보면서 빙그레 웃었다.
“그래, 그 현준이란 사람 괜찮은 사람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놓치면 후회할 정도로...”
“.......”
“차 안에서 운전하는 그 남자 옆모습 좀 훔쳐봤어. 그래 니 말대로 잘 생겼더라. 솔직히 마음 한구석에 흑심이 품어지더라구. 많이 배운 것 처럼 보이고 성실하고 겸손해 보이고.., 혼자서 그 남자 여기저기 따져보면서 점수 매기고 있다가 나중에 내 멋대로 판단을 한 것이긴 하지만....”
그녀가 말을 멈추고 한번 헛기침을 한 후에 다시 콜라잔을 들어서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는 다시 말을 잇기 전에 낮은 한숨을 쉬었다.
“그가 너에 대해서 많이 궁금해 하길래 그의 질문에 너에 대해서 이것저것 대답 하면서 그를 보고 있었는데, 네 얘기를 들으면서 그가 미소를 짓는데 그 미소에 처음 보는 타인이 봐도 정말 따뜻한 감정이 묻어나더라.” 그녀가 말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안쓰럽고 안타까운 복잡 미묘한 표정이었다.
"누굴 좋아하게 되면 조심한다고 해도 남들에게 자기 감정 감추기가 사실 좀 어렵잖아."
그녀가 다시 나이프와 포크를 들어서 자신의 접시 위에 놓인 피자의 한귀퉁이를 잘라냈다.
"대전에서 올라올 때 다시 그 현준씨 눈여겨 봤는데, 네 얘기만 나오면 얼굴에 화색이 돌면서 내 눈치를 보면서도 입이 귀에 걸려 있는 게, 내 생각이 맞다 는 것이 거의 확신이 들더라.“
“무슨 말인지.....” 당황한 표정으로 그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여튼, 그 남자 나 좋아하는 거 아니라고!” 그녀가 또박또박 그 말을 한 후에 다시 나이프로 피자를 잘게 썰어서 포크로 찍었다.
“반지는 뭐... 상대방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으면 자연스럽게 눈이 가게 되는 것이고 말야.”
그 말을 듣고 정훈은 어젯밤 일이 떠올랐다.
‘나 너 한번만 안아보면 안 될까?’ 그가 차의 문을 열려고 할 때 현준이 그렇게 말을 했었다.
정훈이 그런 그를 돌아보았다. 어두운 차속에서도 그는 현준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상처받고 슬프고 고독한 표정이었다.
그런 그의 눈에 비친 자신이 보이는 듯 했다.
비에 흠뻑 젖은 자신의 모습이 그에게 얼마나 동정과 연민을 느끼게 한 것일까 하고 생각해 버렸다.
그가 없었더라면 한 시간 반을 폭우 속에서 걸어야 했을 자신이 얼마나 가엾게 보였으면 그렇게 안타까움을 자극한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제가 다 젖어서요” 정훈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혀 끝에 매달렸다 사라진 말은 ‘저 괜찮습니다.’ 였다.
“괜찮아.” 그는 몸을 기울여서 정훈을 슬며시 끌어안았다.
자신을 안아주면서 괜찮다는 말을 해 줄 사람을 얼마나 바랬었던가. 혼자 그렇게 버려진 채로 울퉁불퉁한 미로를 힘들게 맴돌고 있을 때 자신에게 그렇게 말해 줄 사람을 얼마나 그가 기다려왔던가.
“뭘 그렇게 생각해?” 무엇인가 골똘하게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는 정훈을 바라보던 그녀가 이제 언뜻 정신을 차린듯한 그를 바라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비어있는 그의 접시에 피자 한조각을 떼어 주는 것을 보면서 정훈이 입을 열었다.
“설마, 현준형이 저....를요?” 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좋은 사람처럼 보이던데....” 그가 말을 멈추고 그녀의 시선을 피해 자신의 접시위에 놓인 피자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가 자신을 좋아 하는 것 같다는 그 사실보다, 그녀가 현준이 게이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눈치를 채고 있었다는 것이 더 놀라웠다. 아니 순간 두려움이 몰려와 등이 서늘해졌다. 혹시 그녀가 자신도 그렇다는 것을 이미 눈치를 채고 있는 것은 아닌지 순간 공포가 몰려왔다.
다른 것은 모두 차후의 일이었다.
자신이 먹고 살아야 하는 일이 그녀의 입에 달린 듯 느껴지기 시작했다.
당장은 이 회사에서 붙어있어야만 했다. 생존을 위해서는 어떻게든 남아서 일을 해야만 했다. 한사람이 눈치를 채고 있다면 더 이상 비밀이 될 수없을 것이라는 두려움이 번졌다. 곧, 회사 전체로 소문이 퍼질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몰려왔다.
그녀가 타인에게 그런 비밀을 누설할 것이라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여전히 누군가 자신을 안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었다. 특히 거친 남자들이 가득한 공장의 현장은 더욱 그랬다.
그에게 시비를 걸거나 혹은 그를 조롱하는 직원들의 눈빛이 그의 눈 앞에 마치 현실인 듯 클로즈 업 되었다. 그를 향해서 실실 비웃고, 또는 그의 뒤에서 손가락질을 하는 직원들의 모습이 호러영화의 한 장면처럼 그의 눈앞에서 스쳐갔다. 등골이 오싹해졌다.
더 가까워지고 싶었던 현준이 가능한 그가 멀리 해야만 하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좋은 사람하고 그거하고 무슨 상관인데?” 그녀가 그를 보면서 입을 열었다.
“..........”
“너는 성격이 바르고 배웠고 또 깨어있다고 생각해서 내가 한 말인데...” 그녀가 말을 멈추고 여전히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무엇인가 후회하는, 원망하는 눈빛처럼 보였다.
“성경에도 그렇고, 상식적으로도.....” 그가 그녀의 시선을 피하면서 두려운 생각에 자기 자신을 감추기 위해서 의도하지 않았던 자기방어의 말이 툭 튀어나왔다.
“그놈의 얼어죽을 성경!” 갑작스런 그녀의 큰 소리에 그가 순간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안 봤는데, 너 정말 웃긴다.” 그녀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혹시 너 교회다녀?” 그녀의 냉랭한 목소리의 질문에 그는 당황한 채로 고개를 저었다.
“교회도 안다니면서, 평상시에는 개독교니 뭐니 하다가 자기가 싫어하는 사람 공격하려고 성경 들먹이는 사람이 더 혐오스러워!” 그녀의 갑작스러운 말에 그는 더 당황스러워졌다.
“우리 이모가 모태신앙 기독교인이야.” 잠시 시간이 흐른 뒤에 목소리를 가다듬고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지 아들은 전교에서 바닥에서 놀면서도 돈 쳐발라서 고등학교 졸업하고 외국으로 보내놓고는 툭하면 공부 잘해서 유학 갔다고 거짓말하면서 아들 자랑하는것도 가증스러웠는데....” 그녀가 목이 메이는 듯, 말을 멈추고 콜라잔을 들어서 한 모금 마셨다.
“한 삼년 전에 회사가 사정이 안 좋아서 몇 개월 급여가 밀린 적이 있었어. 남아있는 돈 아끼고 아껴도 나중엔 정말 수중에 한푼도 없더라. 꼭 그럴때면 쌀도 떨어지고 세금 고지서 나오고 다른 돈 써야할 곳 생기고......” 그녀가 그를 다시 바라보았다. “너도 아마 그런 내 사정 이해할거야.”
다시 한번 헛기침을 한 후에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한참을 망설이다가 죽지못해 이모한테 전화하고 찾아갔다. 이모네가 꽤 잘살았어. 항상 부자인 것 자랑하고 다녔으니까. 월급 나오면 나중에 이자까지 쳐서 꼭 갚겠다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돈 봉투 건네주면서 나한테 그러더라 ‘니 동생은 대학 못 갔으면 공장가든지 아무일이나 할 것이지 가난한게 재수한다고 자빠져 노냐’ 고, 그 말 듣고 울컥했는데 한마디 더 하더라 ‘늬 엄마는 책임도 못질 애들 퍼질러 놔서 남 고생시킨다’ 고....”
“........”
“그때 성질 같아서는 다 뒤집어 엎어놓고 싶더라. 그런데 그 더러운 돈이 뭔지. 그래도 살겠다고 그 더러운 돈 봉투 손에 쥐고 아무말도 못하고 뛰쳐나왔다.” 말을 끝내고는 그녀가 한숨을 쉬었다.
정훈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 마스카라가 젖어서 눈 아래가 검게 얼룩져 있었다. 그녀가 냅킨을 들고 거울을 꺼내 보면서 닦아냈다.
손거울을 내려놓고 다시 그를 바라보는 그녀에게 그가 중얼거렸다.
“기독교인 중에 그런 분도 있겠지만. 착한 사람도.....”
“착한 사람은 자기 죄 지은거 걱정하지 남들을 성경가지고 죄지었느니 하면서 들먹거리진 않겠지!” 그는 그 말에 그냥 고개를 숙이고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상식도 그래.” 그녀가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상식이 누구상식인데? 가난한 사람의 상식이야 부자의 상식이야? 내 상식으로는 누구는 굶어죽는데 대기업 사장이라는 것들 돈지랄 하는건 말도 안되는거야. 내 상식으로는 걔네들이 지옥 가야 하는거라구. 걔네들 눈에는 굶어 죽는 사람이 안보인대냐? 걔네눈은 우리눈이랑 차원이 다르대? 아님 걔네들은 우리가 보는거하고 다른것만 보인대?” 그녀가 들고있던 포크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어느 상식이 옳은거야? 우리나라 상식이니 아님 미국 상식이니 아님 네덜란드 상식이니?”
“미안해요. 제가 말을 잘못했어요.” 그가 고개를 힘들게 들어서 그녀를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
“내가 겨우 상고졸이고 못 배워서 내가 한말이 너는 틀렸다고 말할지 몰라.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해.”
“아니예요.” 정훈이 간신히 입을 열고 그녀를 보고 중얼거렸다.
“나, 혼자서 그 사람 보면서 너랑 잘 지내겠다 생각했다. 그래, 너는 게이가 아닌데 내 맘대로 그렇게 생각해서 미안해. 하지만 그랬어. 나 혼자 공연히 너 그렇게 힘들게 사는데 그런 사람이 옆에 있으면 힘도 되고 좋겠다고 생각해보고...꼭 둘이 사귀라는 뜻이 아니라...” 말을 멈추고 침을 한번 삼키고는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지금 보니 그 사람이 너무 아깝다. 너 오늘 너무 실망이야.”
말을 마치고 그녀는 자신의 손가방을 챙겼다.
“다 먹었으면 이제 일어나자.”
(현준)
거울 앞에서 양복 저고리를 벗으려다가 손을 들어 다시 한번 가슴께를 슬며시 만져보았다.
정훈의 가슴이 닿았던 부분이 촉촉하게 젖어있었다. 아직도 그의 느낌이 그곳에 남아 있는 듯해서 그는 애틋한 느낌으로 다시 한번 슬쩍 문질러보고는 옷을 벗었다.
자신이 용기를 내어서 안아보자고 말을 건넸다는 것도 큰 일이었다. 평상시에는 생각도 못할 말이었는데 어떻게 그런 용기가 솟아나왔는지 지금 생각해도 자신이 놀라웠다.
못이기는 척 그는 현준의 품에 안겨왔지만, 이내 그를 밀어냈다. 한순간 ‘혹시 그도 나를’ 이라는 생각을 했지만, 그럴 가능성은 너무 희박했고 자신의 착각이었다고 생각했다.
이쯤해서 마음을 접어야 한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더 마음을 준다면 나중에 고통을 고스란히 받아야 할 사람은 현준 자신이었다. 그는 그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가능하지도 않은 일이란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정훈에 대한 마음을 그렇게 접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시작도 못해보고 끝내야만 하는 자신의 마음속에서 생겨난 이 애틋한 감정이 애달프고 서러워서 거울속에 비친 자신이 불쌍해졌다.
침대에 누워서 눈을 감고 있는 사이에 다시 핸드폰이 울렸다.
누운채로 손을 뻗어서 침대 옆 테이블위에 놓인 휴대폰을 들었다. 선애였다.
그는 잠시 망설였지만 어짜피 부딪혀야 하는 일이라며 핸드폰을 귀에 갖다 댔다.
“왜?” 그가 무뚝뚝하게 물었다.
“자기 정말 너무한거 알아? 어떻게 그렇게 가버릴수가 있어?”
여전히 그녀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그의 귀에 박혔다.
“선애야.” 그가 조용하게 말했다.
“말해.”
“나, 너와 헤어지고 싶어.” 엄지와 검지로 슬며시 미간을 누르면서 그가 조용히 말했다.
“미안하다, 정말.”
“웃겨 진짜.” 전화속의 그녀가 대꾸했다. “ 자기 지금 누구맘대로 헤어진다는거니?”
“미안해.” 그가 다시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그렇게 못해.”
“미안해.” 그가 다시 반복했다.
“뭐가 미안해? 못헤어진다는데? 내가 그렇게 우습게 보여? 내가 2년동안이나 사귄다음에 그렇게 차버려도 되는 그런 정도로 밖에 안보여? 누가 누구를 차? 내가 찬다면 몰라도!” 그녀가 숨도 쉬지 않고 재빠르게 따가운 목소리로 그의 귓속으로 몰아붙였다.
“그럼 너가 차” 그가 힘없이 말했다.
“싫어.”
“.........”
“다른 여자 있는 거지? 그렇지?”
“........”
“내가 그럴 줄 알았어. 나 절대 자기하고 못 헤어져. 나 어려서부터 내꺼 남에게 뺏긴적이 없는 사람이야. 그런 내가 자기를 보낼 것 같애?”
“나는 끝났어. 더 이상은 안될 것 같다. 미안해.”
자신의 말이 끝나고 전화를 일방적으로 끊어버린 후 그는 핸드폰을 침대위의 발치께로 던져 버리고 돌아누웠다. 전화벨이 다시 울리고 있었다. 그는 꼼짝도 하지 않고 그대로 누운채로 가만히 있었다.
“정대리님 전화왔어요.”
현준이 고개를 들어보니 사무실 창가에 앉아있는 정소정씨가 수화기를 들고 슬쩍 한번 흔들어보이고는 전화를 돌렸다.
“애인 목소리 예쁘네요.” 그녀가 그를 바라보면서 빙긋 웃고는 책상위의 모니터로 고개를 돌렸다.
“여보세요?”
“나야”
“알아”
“만나서 얘기 좀 해.” 그녀의 목소리는 이제 차분해 보였다.
“난 할 얘기 없어.” 그가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하게 말했다.
“난 할 말 있어. 끝내더라도 나하고 얘기하고 끝내. 남자가 치사하게 자기말만 하고 일방적으로 그만둔다고 하지 말고.”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 날카로와졌다.
“그럼 지금 전화로 해.” 그가 조용히 대꾸했다.
“싫어. 이따가 만나서 할게. 퇴근시간 맞춰서 회사 앞으로 가서 기다릴게.” 말을 마친후 그녀가 전화를 끊었다.
수화기를 내려놓으면서 현준은 한숨을 쉬었다. 그때 서류를 들고 지나가던 부장이 현준을 바라보면서 한마디 했다.
“왜 애인하고 잘 안 돼? 연애도 능력 있는 사람들이 잘하더라고.” 비웃음으로 가득한 말투로 툭 내뱉고는 그는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퇴근시간에 정확하게 그는 사무실을 나섰다.
“데이트 잘하세요.”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정소정씨가 웃어보였다.
아마 낮에 선애에게 온 전화를 받아서 돌려주고는 평상시와 달리 칼같이 퇴근 하는 그가 애인 만나러 가는 줄 알고 있는 듯 했다.
그녀에게 미소를 한번 지어주고는 계단을 뛰어내려갔다.
그녀가 퇴근시간에 맞춰서 회사 건물 앞으로 올 것이라고 예상하지는 않았다. 약속시간을 항상 최소한 30분 이상을 넘기는 것이 여성의 기본 자세라고 생각하는 그녀였기에 설마 오늘도, 하면서 회사 건물을 나섰다.
하지만 몇 발자국 계단을 내려가기도 전에, 그의 시야에 건물의 계단 아래에서 그를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들어왔다.
“설마 도망치려고 한건 아니지?” 그녀가 얼굴에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천천히 걸어오면서 말했다.
“끊었던 담배도 펴?” 그녀가 담배 한 개피를 꺼내 무는 그를 바라보면서 조소가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나 때문이야?”
대답없이 그는 깊히 담배연기를 들이마신 다음 그녀를 바라보았다.
“할말이 뭐야?”
“커피나 마시면서!” 그녀가 커피숍의 주방쪽을 한번 바라보고는 말했다.
아무말도 하지 않고 허공을 바라보면서 그는 천천히 끝까지 담배를 피웠다.
마침내 그들의 앞의 테이블에 커피가 놓였고 그녀는 잔을 들고 다시 그를 바라보았다.
“누구야?”
“누가?” 그가 그녀를 바라보면서 물었다.
“새로 생긴 그 여자, 누구냐구.”
“알아서 뭐할건데?” 그가 남의 말 하듯 건성으로 벽에 걸린 그림을 한번 훑어보면서 말했다.
“내 남자 뺏어간 여자인데 누구인지 궁금한건 당연한거 아냐?” 그녀는 의외로 조용하게 물었다.
“그냥 보통여자야.” 그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내가 한번 만날게.”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조용했다.
“만나면? 만나서 뭐 할건데?”
“자기 하고 헤어지란 말 하진 않을테니까 그냥 만나게 해줘. 어떻게 생긴지 궁금한 것 뿐이니까.” 여전히 낮은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싫어.”
“그럼!” 그의 대답에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우린 못 헤어져.”
그녀의 대답에 그가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다음주 금요일이 우리 엄마 생신이야. 싸구려 옷 사서 들고 올 생각 하지 마. 내가 미리 준비해서 자기가 한 선물이라고 엄마한테 줄 테니까. 그냥 자긴 몸만 와.”
그녀가 말을 멈추고 자신을 빤히 보는 그를 노려보았다.
“아, 그리고 혹시 안 오면 자기 집으로 데리러 갈게. 어머님도 같이 모시고 우리 집으로 가던지. 자기가 알아서 결정해.”
말을 마치고 그녀는 커피잔을 들었다.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천천히 계단을 올라온 다음 현준은 집 쪽이 아니라 반대편으로 걸음을 옮겼다. 반대편의 아파트 건물만 지나고 나면 그래도 보기좋은 공원이 있었다.
더운 여름 날이라 많은 사람들이 공원에 나와서 더위를 피하고 있었다.
아이의 손을 잡은 현준의 나이 또래의 남자도 보였고 돗자리를 펴고 간식을 먹는 가족도 보였다. 그의 어머니는 그가 빨리 결혼해서 손자를 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집에선 언제 결혼하자는 얘기 없니?” 가끔씩 그의 어머니가 그에게 묻곤 했다.
“엄마, 결혼하기도 전에 벌써부터 그렇게 며느리될 사람을 질투하면서 엄만 내가 빨리 결혼해서 며느리 들왔으면 좋겠어요?” 가끔씩 엄마의 잔소리가 심해지면 그렇게 그는 대답하곤 했다.
“내가 언제?” 말을 마치곤 고개를 돌리시고는 “걱정마, 너 결혼하면 나 집하나 얻어서 따로 나가 살거야.”
“어떻게 엄마보고 집하나 얻어서 나가시라고 그래요? 우리가 나가서 살께요.”
엄마의 말에 뜻없이 한 대답이었지만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엄마는 현준을 노려보셨다.
“그래서 이 자식아. 이 에미 놔두고 나가서 산다구? 그래라 이 나쁜 놈”
엄마의 말을 기억하면서 다시 어이없는 웃음을 한번 짓고는 공원의 길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머리가 복잡해졌다. 산다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니었다.
남들은 정말 평범하게 그냥 그 평범한 삶의 코스를 따라서 흘러가건만, 그러지 못하는 자신의 상황이 다시한번 막막한 느낌이었다.
선애의 얼굴이 떠올랐다.
자기 자신도 스스로를 이해 못하는 부분이었다.
그는 무감각하게 모두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삶이 다 그런 길을 따라가는 것이라면서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정훈이 그의 삶 속으로 뛰어들어 온 후, 마치 깊은 잠을 자고 있던 그가 한순간 눈을 뜨고 깨어버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와의 2년간의 관계를 전혀 아무 생각없이 그렇게 생활하던 그는 순간 그가 잘못된 길을 걷고 있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한번 사는 인생, 정말 그가 원하는 사람과 살아보고 싶은 욕망이 그가 밟고 있는 발바닥 끝에서 번져 올라왔다.
마치 어느 순간 자기 자신이 누군가 타인의 구두를 신고 있다는 것을 느낀 듯 했다.
물집이 잡히고 발목에 상처가 생기고 발가락에 통증이 있어도 그 구두가 유일한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렇게 신고 살아가다 보면, 어느 날엔가 자신의 발이 신발에 익숙해 질 것이라는 생각을 해 왔다.
하지만 사실은 그것의 반대가 아니던가.
자신의 발이 아닌 자신이 신고 있는 구두가 자신의 발에 적당하게 길들여지는 것이라는 그런 단순한 사실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절대로 자신에 맞춰지지 않을 구두를 벗어버리기로 결심 한 후, 더 이상은 결코 그런 고통을 견뎌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를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어머니 말대로 평생을 ‘개같이 맞으며’ 고생해서 살아온 어머니였다. 그만큼 그에게 목을 메고 살아온 어머니였다. 자신이 어떻게 이 상황에서 행동하고 결정하고 살아가야 할지 막막한 기분을 이기지 못하고 그는 공원 한구석에 있는 나무아래에 쪼그리고 앉았다.
어느 집에서 온 것인지 애완견 마르치스 한 마리가 그에게 쪼르르 달려와서 그의 손을 핥아댔다.
관련자료
-
이전
-
다음
<span class="sv_wrap"> <a href="https://ivancity.com/bbs/profile.php?mb_id=daehan23" data-toggle="dropdown" title="영락 자기소개" target="_blank" rel="nofollow" onclick="return false;"> 영락</a> <ul class="sv dropdown-menu" role="menu"> <li><a href="ht님의 댓글
- <spa…
- 작성일
절대로 자신에 맞춰지지 않을 구두를 벗어버리기로 결심 한 후, 더 이상은 결코 그런 고통을 견뎌내고 싶지 않았다"
위 귀절 전후 어떻게 생각하고 쓰셨는지요.
작품속에서 모든 문장의 표현들이 기가 막히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