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피 프린스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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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


출고물량을 채우지 못해 일곱시까지 잔업을 마친 후, 저녁도 거른 채 정훈은 버스를 타고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잔업이 있을 때에는 회사 식당에서 국수 같이 간단하게 요기할 것을 준비를 해 놓지만 대전에서 올라온 후로 편하게 쉬어보지 못했던 그는 집에가서 눕고만 싶었다. 그렇지 않으면 오늘 밤 과외에서 수업중에 윤선이 앞에서 끄덕끄덕 졸까봐 두려웠다. 



예전에 한번 9시까지 잔업을 마치고 피곤한 몸으로 과외를 갔다가 윤선이에게 문제를 풀라고 시켜놓고 잠시 옆에서 지켜보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깜빡 잠이 들은 적이 있었다. 깨어보니 책상위에 커피한잔과 과자가 접시위에 놓여있었다. 안쓰럽다는 눈빛으로 이제 잠이 깬 그를 바라보던 윤선이의 눈빛을 그는 오랫동안 잊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당황해하며 무안해 하는 그에게 그녀는 빙긋 웃으면서 말했었다.


“저도 조금 피곤했는데 5분만 쉬어요, 선생님. 커피하고 과자 좀 드세요.”



그때를 생각하면 다시 낯이 뜨거워져서 몇 개월 전 일인데도 지금도 근처에 쥐구멍을 찾고 싶을 정도였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그렇게 골목길을 돌아서 막 집에 도착했을 때 정훈은 그의 집 앞에 서성대고 있는 현준을 발견했다. 


당황해서 바라보는 정훈을 향해서 그는 성큼성큼 다가왔다.


“문자 보냈는데 답 없더라?”


“잔업 있었어요.”


“알아. 연희씨한테 전화했었어. 일곱시쯤 끝날거라길래 대충 시간 맞춰서 와 본거야.”


“왜요?”


“저거 전해주려고.....”


그가 집의 담 옆의 전봇대에 기대어 있는 자전거를 손으로 가리켰다.


“왠거예요?” 자전거에 한번 눈길을 준 다음 정훈은 고개를 돌려 현준을 바라보았다.


“그냥, 너 타고 다니면 좋을 것 같아서....” 굳어진 정훈의 표정을 보면서 현준이 당황한 듯 말을 마치지 못하고 정훈의 반응을 살폈다.


“저 가난하지만, 아무 이유 없이 이런 물건 쉽고 받고 실실거리면서 좋아라하는 그런 놈 아니예요.”


“야 오정훈! 형한테 말이 조금 심한거 아냐?” 예상치 못하게 퉁명스러운 정훈의 말에 당황한 현준이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저 형 없어요. 제가 맏이예요.” 그의 시선을 피해서 옆의 골목을 바라보면서 정훈이 대답했다. 


젊은 남녀 커플 한 쌍이 지나가면서 그들을 힐끗 바라보고는 서로 귓말을 주고받은 후 그들을 다시한번 뒤돌아 보고는 골목 안쪽으로 사라졌다.


“사람들 봐요. 여기 우리동네예요.” 


아무말도 하지 않고 멀거니 정훈을 바라보던 현준이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근처 조용한데 가서 잠시 얘기 좀 하자.”


두세걸음 옮기던 그가 정훈이 따라오지 않자 정훈에게 다가가서 그의 팔을 잡았다.


“알았어요. 손 놓으세요.” 정훈이 그의 손을 슬쩍 뿌리치면서 말했다.




공단 입구 근처에 있는 작은 공원으로 그들은 걸어 나왔다.


공원이라 해봐야 손바닥 만한 잔디밭에 나무 몇그루와 앉아서 쉴 수 있는 벤치 서너개가 여기 저기 놓여있는 볼품없는 곳이었다.


쓰러지듯 정훈은 벤치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나 현준은 그 앞에 서서 그런 그를 내려다 보았다.


“내가 너한테 자전거 하나 주려고 가져온 게 그렇게 못마땅해?” 무릎 위에 두 팔을 괴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정훈을 내려다보면서 그가 물었다.


“자전거를 저에게 왜 주시는건데요?” 정훈이 고개를 돌려 그를 올려다보면서 물었다.


도전적이면서 반항적인 눈빛에 순간 현준은 당황했다. 


“새로 산 것도 아니고 내가 타고 다니던 자전거 더 이상 쓸 일 없겠다 생각해서 묵혀두다가 너 그 먼 거리를 걸어다니는 걸 보니까 정작 이게 필요한 사람은 너겠구나 생각해서 가져왔는데 그게 그렇게 기분 나쁜 일이야?” 


현준의 대답을 듣고 정훈은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형이 없다니... 너 그제도 나 보면서 형이라고 불렀다. 내가 아주 남이냐? 사람이 살면서 이렇게 알게 된 것도 인연이야.”


“부담스러워서 그래요.” 정훈이 입을 열었다. 


“형의 과도한 관심이 부담스럽다구요.” 그가 얼굴을 들어 현준을 올려다본 후에 다시 고개를 숙였다.


정훈의 말에 현준은 할 말을 잃고 그냥 그를 내려다보았다. 갑작스런 그의 말에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잠시동안 그는 고개를 숙이고 있는 정훈의 모습만 바라보았다.


“솔직하게 말해 보세요.” 정훈이 다시 고개를 들어서 현준을 올려다보았다.


“저 좋아하는 거예요?” 정훈의 눈빛과 목소리에 차가운 얼음같은 비수가 숨겨져 있는 듯해서 현준은 순간 소름이 돋았다.


“연희누나도 알아요. 형이 나를 좋아한다는 걸요” 정훈이 말을 멈추고 침을 한번 삼켰다. 낮은 한숨을 쉬고 나서 다시 정훈이 입을 열었다.


“모르면 바보죠. 그렇게 티가 나는데...”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자신을 내려다보는 현준의 시선을 느끼면서 정훈은 몸을 일으켜세웠다. 


“나, 형 좋은 사람이라는 거 알아요. 하지만 나 형 마음 받아줄 수 없어요. 형도 이해하시리라고 생각해요.” 멍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현준을 보면서 정훈이 말을 이었다.


“나도 형하고 좋은 관계 유지하고 싶어요. 그러니까....” 정훈이 말을 멈추고 다시 낮은 한숨을 쉬었다. “형의 행동과 마음에 선을 그어주세요. 그리고 자전거도...”


“자전거는,” 멍하게 있던 현준이 정훈의 말을 끊으며 입을 열었다.


“너 타고 다녀.” 그가 조용하게 말하고는 정훈의 눈을 바라보았다.


“형으로서 동생한테 주는거야.” 말을 마치고 그는 정훈의 손에 자전거 열쇠를 쥐어주었다.




예상했던 대로 현준이 놓고 간 자전거는 새것이었다.


전문가용은 아니더라도 꽤 고가의 자전거임이 틀림없었다.


자물쇠를 풀고 집안에 들여놓은 다음 그는 방안으로 들어가서 슬그머니 누웠다.


과외를 가기 전에 한두시간이라도 눈을 붙여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서 눈을 감고 가만히 누워있었지만 그는 잠이 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눈을 살며시 뜨고는 색이 바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현준은 지금 집으로 가는 버스속에 있을 터였다. 


정훈에게 건네 주겠다고 기쁜 마음에 자동차에 들어가지 않는 자전거를 타고 정훈의 집에까지 배달을 왔다가 자신의 말에 상처만 받고 돌아갈 그를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정훈은 몸을 돌려 모로 누웠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아픈 것이 둘 다를 위해서 더 나은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연희누나가 현준의 성정체성을 알고 있다는 것이 그와의 거리를 유지해야겠다고 결심한 이유이긴 했지만, 그것이 그를 밀어내려는 전부는 아니었다.


그는 현준의 존재가 형언할 수 없을 만큼 감동이었다. 자신의 삶 속으로 그와 같은 사람이 걸어 들어올 것으로 절대로 기대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또 다른 생각으로는 그와의 일방적인 관계를 그는 견딜 수 없을 듯 했다. 


만날 때마다 현준이 매번 밥을 사고, 술을 사고, 커피를 사고, 데려다주고 옷을 사주고 궁색한 그를 위해서 지갑을 열고 용돈을 건네는 그의 모습이 상상되자 비굴함에 가슴이 저려왔다. 


넥타이를 매고 세련된 모습으로 승진해서 큰 사무실의 뒤쪽으로 자리를 옮겨가는 현준의 모습과 먼지 속에서 박스 안에 비닐로 포장된 장갑을 넣고 테이핑을 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겹쳐지면서 그는 이를 악물고는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서 벽을 향해 주먹을 쥔 손을 휘둘렀다. 


지금 당장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겠지만, 자신의 초라한 모습에 항상 베풀어야만 하는 입장인 현준은 점점 지쳐갈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면서 그런 관계에 매달려 있는 자신의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견딜 수 없이 역겨웠다.


그렇게 그와의 거리를 유지해야만 하는 이유는 도처에 깔려 있었다.


“형, 미안해요.”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현준이 낮에 보냈던 문자를 멍하니 바라보면서 그가 중얼거렸다.




토요일에도 잔업으로 오후 세시까지 현장에서 일해야 했다. 


연희누나는 여전히 그에 대한 화가 풀리지 않은 듯 그가 아침에 만났을 때 인사를 하는 정훈을 못 본 척 하더니 점심시간에 식당에서도 그의 눈길을 피했다. 


작업이 끝나고 옷을 갈아입은 후 퇴근을 하면서 그는 그녀에게 문자를 보냈다.


“누나 제가 정말 잘못했어요. 원래 그런 놈은 아닌데 생각이 짧았어요. 반성하고 있어요.”




버스에서 내려서 집으로 걸어가는 동안 그는 대전에 내려갔다 올 것인지 망설이고 있었다.


부산으로 내려가는 아빠와 동생들을 보고 싶었지만 초라한 모습으로 떠나는 아빠의 뒷모습을 볼 생각을 하니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답답해졌다. 

더욱이, 이번 달 월급까지 고스란히 통장으로 부쳤고 과외비와 도현이 형이 준 돈은 엄마의 장례식동안 여기저기 들어가다보니 벌써 얼마 남지 않아버렸다. 


앞으로 20일을 버텨야 할 생각에 또 다시 슬그머니 걱정이 되고 있던 중이라 그는 그냥 나중에 전화나 한통 하기로 생각했다. 



집에 도착하자 손을 씻고 방으로 들어가 벽에 등을 대고 앉아서 멍하니 맞은편 벽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자신의 젊음이 지나가고 있구나 하고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해지고 억울했다. 


갑자기 같은 과 친구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와 비슷한 시기에 입대하고 또 제대해서 지금은 모두 복학하고 도서관에 있을 터였다. 

미래를 위해서 전공서적과 토익책에 코를 박고 도서관 책상앞에 앉아있거나 도서관 옆의 커피자판기 앞에서 커피잔을 들고 둘러서서 취업이나 시험, 연애사업등으로 대화의 꽃을 피우고 있을 그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정훈은 앉은뱅이 책상앞으로 슬며시 무릎으로 기어가서 서랍을 열고 낡은 지갑을 꺼낸 후에 그 속에서 학생증을 꺼내보았다.


사진속에서 웃고있는 남자와 자신은 더 이상 동일인물이 아닌듯 보여서 한층 더 우울해져서 그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그는 천천히 일어서서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하늘은 맑았고 더운 날씨였는데도 그래도 다행히 바람이 불어들어왔다. 언뜻 담에 기대어 세워져 있는 자전거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해맑게 웃던 현준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냥 모르는 척 하고 한번 얼굴이라도 만져볼껄.” 그가 자전거에서 시선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차안에서 안아봐도 돼냐고 할때 그때 꽉 껴안아 보기나 할껄.”

공연히 서글픈 생각이 들어서 다시 벽에 기대서 앉았다.

점점 더 자신이 쫌생이가 되어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富)와 자신감은 비례한다는 것이 맞는 말이었다. 지난 일년동안 주머니가 비어있다는 사실 때문에 외출을 하거나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조차 없었고 사람들 앞에서 당당해지지 못하고 사람들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지 못했다. 


어떤 대화에서도 목소리가 줄어들었고 자신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다 잘나고 잘 먹고 잘사는 사람들인것 같아서 바닥이 보이지 않는 열등감과 자격지심으로 그렇지 않아도 힘든 자신의 삶의 무게를 짓눌렀다.


경미한 두통이 느껴져서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르고 있을 때 핸드폰이 울렸다. 


“대전 내려가는 거 아니면 이따가 일곱시경쯤 해서 신천사거리 쪽으로 나올래?” 연희누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버스에서 내려서 주위를 둘러보는 정훈의 시야에 빙긋 웃으면서 손을 흔드는 연희누나가 들어왔다.


“누나 이 동네에서 살아요? 회사하고 반대편인데....” 


 “아냐, 집은 회사에서 가까워.” 그녀가 그의 팔을 슬쩍 잡으면서 말했다.


“제가 간단한 걸로 저녁 살게요.” 그가 그녀의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 아직도 그에게 화가 나 있는 것은 아닌지 다시 슬며시 걱정이 되었다.


“아냐.” 그녀가 그를 보고는 다시 한번 빙긋 웃더니 걸음을 멈추고 그를 보고 다시 입을 열었다.


“여기야.”



5층 건물의 1층에 있는 작은 호프집이었다.


그녀는 앞장서서 문을 열고 들어가서 맨 구석자리로 정훈을 데리고 갔다.


“여기 잠시 앉아있어. 곧 올게.” 말을 마치고 그녀는 문가의 테이블에 나이 지긋한 남자 손님들과 같이 앉아 있는 나이가 좀 들어보이는 여자에게 다가가서 귓속말을 하더니 그 호프집의 주방인 듯한 곳으로 들어가버렸다.


호프집의 내부를 훑어보면서 연희누나와 문가에 앉아있는 여자의 관계도 궁금했고 그녀가 왜 이곳에 있는지도 궁금해졌다. 홀 안에 손님도 그 한 테이블을 제외하고는 텅 비어 있었고 가끔 그 여자는 남자들과 대화하면서 웃음 짓다가 고개를 돌려 정훈을 흘끔 쳐다보기도 하였다. 


어색한 분위기에 조금 당황해진 현준앞에 마침내 연희누나가 쟁반을 들고 나타났다.



골뱅이소면과 맥주 한병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정훈의 맞은편에 앉아서 그녀는 정훈을 바라보았다.


“먹어봐. 내가 만든거야.”아무 말도 하지 않고 테이블에 놓여있는 소면과 그녀를 물끄러미 번갈아 보고 있는 정훈을 보면서 다시 그녀가 입을 열었다.


“나 여기서 일해.” 그녀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회사 끝나고 밤 아홉시부터 새벽두시까지, 주말에는 일곱시부터...” 


말을 멈추고 그녀는 나무젓가락의 포장지를 뜯어서 정훈의 손에 쥐어주었다.


“전에 말했었지? 삼년전에 회사가 안 좋을때 월급이 몇 개월 밀린 적이 있었다고...” 그녀가 또 하나의 나무 젓가락을 뜯어서 두 손으로 소면을 섞기 시작했다.


“먹고 살려고 퇴근후에 할 수 있는 또 다른 일 찾아보다가 여기 길 건너 갈비집 주방 보조로 일했었어. 그러다가 저기 앉은 사장님이 그 갈비집 오셨다가 여기 주방에서 일할 생각 없냐고 그러더라구.” 그녀가 젓가락을 내려 놓으면서 그를 한번 보고 싱긋 웃었다.


“작은 가게지만 혼자서 손님들 맞으면서 주방보기가 힘들다면서 홀에 나올필요 없이 주방일만 해주면 된다구.... 갈비집에서는 오십만원 받았는데 칠십 준다길레 오래 생각안하고 이리 왔다.” 그녀가 그의 잔에 맥주를 따르면서 희미한 쓴 웃음을 지었다.


“그럼 새벽 두시에 퇴근해서 다시 아침 여덟시까지 출근하시는거예요?” 정훈이 물었다.


“먹고 살 돈 버는건데, 그것만으로도 너무 감사한 일이지.” 쓸쓸한 미소를 띠고 그녀는 정훈을 희미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 전에는 그저 씩씩한 여장부로만 보였던 그녀가 피곤함에 지친 젊은 여성의 얼굴로 바뀌어 있었다. 


“갈비집이건 호프집이건 이렇게 회사에서 멀리 떨어진 반대방향에서 일자리를 구한 것은.....” 그녀가 말을 멈추고 손으로 정훈에게 어서 먹으라는 시늉을 해보였다.


“회사사람들의 눈이 무서워서야.” 그녀가 말을 마치고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가 다시 말을 꺼내면서 손을 내밀어 정훈의 손을 잡았다.


“너는 이렇게 살아가는 나를 이해해줄꺼지? 생존하려고 발버둥치는 나를 조각조각 재단하지는 않을거지?” 흐린 불빛 아래에서 그녀의 표정이 미소를 짓는 것인지 눈물이 글썽이는 것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나, 이렇게 무섭고 힘든 세상에서, 날 알아주는 사람 없는 곳에서, 아군이 절실하게 필요해. 무작정 나를 믿고 힘든 내 얘기도 솔직하게 들어줄 아군 말야.” 그녀가 말을 멈추고 아랫입술을 슬쩍 깨물었다.


“내 옆에서 내 아군이 되어주지 않을래?”



그녀의 말에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가냘픈 그녀의 손을 슬며시 그의 손안에 쥐었다.










 (현준)


회사일로 외근을 나온 김에 현준은 근처의 자전거 판매점을 돌아보았다.


아무래도 새 자전거를 사주면 아직은 거리감이 있는 정훈이 너무 부담스러워 할 듯 해서 중고 판매점을 돌아보았지만, 가격은 그렇게 차이가 없으면서도 그의 눈에 들어오는 쓸만한 물건이 눈에 띄지 않았다. 


빗물 속에서도 한겨울의 눈 속에서도 안정감을 줄 수 있는 것을 고르다가 그는 어쩔 수 없이 새 자전거를 골랐다.


그의 마음에 꼭 드는 물건이 있었다. 어두운 밤길에서도 뒤에서 야광빛이 밝게 빛나서 뒤따라오던 차량들이 쉽게 식별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고 몸체도 튼튼해 보였다. 



승용차의 뒷 트렁크에 넣고 끈으로 묶은 다음 조심스럽게 갈 생각을 했지만 정훈이 7시까지 잔업이라는 연희의 말에 그는 퇴근 후 차를 놓고 일부러 그 자전거를 타고 정훈의 집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흙탕물도 고의로 슬쩍 튀기면서 지나고 먼지나는 포장되지 않은 도로로 우회했다. 


정훈이 퇴근하기 전에 그의 집에 도착해서 자전거를 그의 집 앞 대문옆의 전봇대에 체인으로 자물쇠를 잠가놓고 열쇠를 주머니에 넣었다. 


자신이 타고 온 보람이 있는 듯, 방금 산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 듯했다. 만약 정훈이 부담이 되는 듯해 보이면 쓰던 것이라고 마구 우기면 믿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그런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정훈의 냉랭한 반응에 발길을 돌려서 버스에 오른 후에 당연한 일이라고, 이미 예견한 것일 뿐이라고 생각했지만 가슴속에서 저려오는 통증이 심해져서 창밖을 바라보다가 얼굴이 일그러지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차라리 잘 됐다고 생각했다. 


시간을 더 끌면 끌수록 자신이 받아야 할 상처는 더욱 더 커질 것이라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이 쯤 해서 단념하고 돌아서는 것도 자신에게 내려진 축복이라고 혼자서 자위하면서 고개를 숙였지만 그런 자신의 눈앞에 정훈의 모습이 떠올라 그를 계속 괴롭혔다.



버스에서 내려서 아파트 입구에 막 들어가려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왜?” 감정이 없는 목소리로 그가 물었다.


“어디야?” 선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집이야.” 그가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거짓말!” 그녀의 목소리가 날카로와졌다. “내가 지금 자기 집에서 자기 기다리다가 나오는 중이야.”


“아파트 입구야.” 그가 여전히 힘없이 말했다.


“아! 그렇군.” 그녀의 목소리가 변하더니 전화가 끊겼다.


현준이 고개를 들어보니 선애가 아파트 현관에서 그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저녁먹었어? 아직 전이면 같이 저녁이나 해.”


“저녁은 됐고,” 그녀의 말에 그가 고개를 슬며시 흔들었다. “어디가서 차나 한잔 하자.”




“여기 자주 왔었어?” 커피숍의 자리에 앉으면서 그녀가 그를 보면서 물었다.


“아니, 그냥 한 두 번...” 그가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서 양복 안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


“그냥 원두커피로 두 잔 주세요.” 그들 뒤를 따라와서 테이블 위에 물잔을 내려놓고 있는 웨이터에게 그녀가 말했다.


“음침하니 좋네. 칸막이 다 되어있어서 옆자리 대화도 안들리고 밖에서 안도 못들여다보고...” 


그녀가 피식 웃었다. “딴 누구하고 여기 자주 들른거 아냐?”


“그런거 아냐.” 그가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주말에 뭐해?”


그녀의 질문에 그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특별한 일 없으면 같이 백화점에 가자고. 엄마 생신 선물 사야지....” 그녀가 그의 안색을 살피는 듯한 표정으로 그를 한번 보았다.


“선물은 내가 사지만 자기가 내가 무엇을 사는지 미리 봐 놔야 나중에 엄마 앞에서도 실수를 안할 것 아니야?” 그녀가 그를 다시 빤히 보았다. “예비사위가 장모 선물 사 주고도 자기가 뭘 샀는지도 모르고 있으면 말이 안되잖아, 안 그래?”


“선애야.”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 그가 다시 담배를 한번 깊게 빨아서 들이마셨다.


“나, 너에게 할말 있어.”


“말해!” 그녀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 여자 소개시켜주려고 결심했어?”


“그런거 아냐.” 그가 그녀에게서 시선을 돌려 테이블 위에 있는 담배를 내려다보았다. 


“사실은...”


그가 입을 막 열려고 하는데 노크 소리가 나더니 문이 열리고 웨이터가 커피를 내려 놓으면서 꾸벅 인사를 했다.


“사실은 뭐?” 웨이터가 사라지고 문이 다시 닫친 후에 선애가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나 말야.....” 그가 말을 꺼낸 후 말을 잇지 못하고 담배를 쥔 손끝을 파르르 떨었다.


“얼마전에 한 녀석을 우연히 만났어. 사내놈이야.”


그녀는 표정의 변화없이 그를 여전히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나 그놈이 보고 싶어.” 그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나 그 녀석을 좋아해.”


아무말 없이 그의 말을 들은 후에 잠시 침묵을 지키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정말 가지가지 한다.” 그녀가 그를 쏘아보았다.


아무말 없이 그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았다.


“인간아. 내가 그렇게 싫어?”

 

“선애야.” 그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사실이야. 나 그녀석이 좋아. 보고싶어.”


“아예 소설을 써라 소설을 써!” 그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잠시 분을 못참겠다는 듯 양 볼에 홍조 까지 띄면서 그를 노려보던 그녀가 마침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다고 내가 자기 놔줄것 같애?”


“선애야.” 그가 사정하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사실이야.”


“사실이든 아니든!” 그녀의 목소리가 커졌다.


“그래! 싫으면 내가 혼자 가서 쇼핑할테니까 재수없는 소리 꺼내지 마.”


말을 마치고 그녀는 핸드백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서 문을 열었다.




아파트 입구로 터벅거리면서 걷다가 그는 아파트 상가 건너편의 선술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주말을 앞둔 금요일 밤이라서 홀 안은 물론이고 문 밖의 공터에 설치해 놓은 간이 테이블에도 꽤 사람들이 많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맨 구석의 빈 자리에 앉아서 그는 다른 테이블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들 모두 무슨 즐거운 일들이 많이 있는지 취한 듯한 목소리에 웃음 띈 얼굴로 인생이 행복한 듯 떠들어 대고 있었다.


앞치마를 두른 아주머니에게 소주와 간단한 안주를 시키고는 그렇게 행복한 사람들 속에 혼자 우두커니 앉아있는 자신이 낯선 이방인 처럼 느껴졌다.



그가 기억할 수 있는 한 어린 시절부터 그 스스로 할 수 있는 선택권은 거의 없었다.


고등학교 때에는 그의 아버지가 ‘너는 이과’ 라고 못 박았었다. 수학과 과학에 관심이 별로 없는 그였지만 그의 아버지는 ‘나를 닮았으면 의사는 못되더라도 IT 분야에서 주름잡을 것’ 이라는 말에 아무말도 못하고 이과를 선택했었다.



그가 고1 되면서 부모님은 시골의 논과 밭을 정리하시고 도시로 올라오셨다. 또한 그것은 그가 속한 가정의 폭군의 교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원조폭군인 아버지가 큰누나를 밀어내고 다시 제1인자로 등극하시고 누나는 밀려난 것에 대한 화를 참으면서 결혼을 해 버렸고 같은 시기에 또한 아버지를 피해서 둘째누나도 집안에서 반대하는 결혼을 감행해 버렸다. 큰누나야 그러려니 했지만 둘째누나도 자신의 결혼을 반대하는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두 눈을 똑바로 뜨고 맞서서 과거에 일어났던 일들을 하나씩 조목조목 따지면서 자신의 미래에 관여하지 말 것을, 그들이, 최소한 아버지는, 그녀의 삶에 말 한마디 들이댈 권리도 없다는 것을 명확히 했다.


집으로 배달되는 성적표를 보면서 수학과 과학에서 바닥인 점수를 보고는 ‘저 새끼는 어디서 주워온 새끼’ 라고 술이 취한 아버지는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셨다.


현준이 고3이 될 때에 아버지는 술집여자와 바람이 났다. 


그래도 부지런했고 구두쇠로 알려졌던 욕대감 할아버지 덕분에 강화도 한구석에서는 땅도 있고 돈도 있는 유지로 알려져 있던 집안이었지만 모든 경제권은 아버지가 가지고 있었고 자신의 주색잡기에만 정신이 팔려서 가족을 항상 등한시 했었다. 그래서 현준이 여전히 어렸을 때 누나들이 중학교를 입학하기 위해서 도시로 올라 왔을 때 셋방을 얻는 돈도 고스란히 어머니가 이모들과 삼촌들에게 손을 벌려서 만들었던 거였다. 


그렇게 가지고 있던 전 재산을 가지고 그의 아버지는 어머니와 이혼을 하고 그 술집여자와 사라져버렸다. 엄마에게 남은것은 강화도에서 올라오면서 사 놓은 집 한채 였다. 


그 후 현준은 고3이 되어서야 안된다는 담임 선생님을 조르고 졸라서 그의 뜻대로 다시 문과로 옮겨서 대학에 진학했었다. 



누나와 아버지가 사라진 집에서 이제 마침내 그에게 평화의 시대가 도래한 것으로 여겨지던 때에 변모한 그의 어머니가 등장했다. 아직까지 고생한 엄마의 삶을 보상받기를 원했다. 


어머니는 그가 대학 다닐 시절부터 몇시에 수업이 끝나고 아르바이트는 몇시부터 몇시에 하며 집에 귀가하는 시간은 몇시인지를 꿰뚫고 있었다. 연락 없이 늦을 경우에는 그 다음날이 하루종일 피곤하게 되는 경우가 다반사 였고 그가 있는 자리에서 큰누나에게 전화를 해서 ‘망할자식’으로부터 시작해서 ‘내가 어떻게 키웠는데 지새끼가’ 로 연결되는 몇시간짜리 메들리를 전화기를 붙들고 뽑곤 했다. 


또한 어쩌다가 새벽까지 연락 없이 집에 들어가지 않는 날이면 그의 어머니는 그의 친구들의 집에 빼놓지 않고 모두 전화를 해서 ‘우리 현준이가 집에 들어오지 않았는데 혹시 거기 갔는지, 그 집 아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와 같은 질문을 퍼붓곤 했다. 


그래서 가끔 그는 홀어머니에 외아들은 다 이렇게 살아가는 것인지 궁금하기까지 했다.



소주 세병을 혼자서 다 비우면서 그는 앞으로의 그의 삶이 갑갑해 옴을 느꼈다. 숨을 쉴 공간조차 그에게는 허락이 되지 않는 듯했다. 초등학생 때부터 집에서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은 서른하나가 된 지금에도 똑같은 심정이었다. 



한밤중, 테이블이 하나씩 비어가면서 그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의식적으로 핸드폰을 열어보았다. 열두시가 지나고 새벽 한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조금 있으면 정훈이 과외를 마치고 나와서 자신이 준 자전거를 타고 귀가 할것이라는 생각에 조금은 마음이 편안해 지면서도 이제 마음놓고 그에게 문자를 보내거나 전화를 걸어 목소리를 듣는것도 불가능해졌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 온 세상의 비극이 자신에게 던져진 양 서글퍼졌다. 


지지리 복도 없는 사람은 그의 어머니가 아닌 자신으로 느껴졌다.


‘세계에서 최고로 박복한 사람 을 뽑는다면 나도 기네스북의 랭킹에 들것’ 이라고 생각을 하면서 그는 휘청거리는 다리로 그의 집으로 돌아왔다.


“이제오니? 


그의 어머니가 거실에서 티비를 켜놓은 채 소파에 앉아 계셨다.


“네, 좀 늦었어요.”


 “술마셨구나?” 그의 어머니가 그의 얼굴을 한번 빤히 바라본 다음에 말을 이었다.


“아까 저녁때 선애 왔다갔다.”


“집 앞에서 만났어요.”


“아, 그럼 지금까지 같이 있던거야?”


“그건 아니구요.” 


말을 마치고 그는 방으로 들어가서 양복 윗저고리를 벗고는 넥타이를 풀렀다.


“얘, 선애말야. 예전에는 그렇게 안봤는데, 싹싹하고 괜찮더라.” 그의 어머니가 방안으로 따라 들어와서 그의 등뒤에 대고 말했다.


“옷 한벌도 사왔어. 나 입으라고. 참 곱더라.” 그는 여전히 뒤돌아 보지 않고 와이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렀다.


“다음주 금요일에 사부인 생일이라던데 그 옷 입고 가야겠다.” 


그가 단추를 풀르던 손을 멈추고 어깨너머로 그의 어머니를 돌아보면서 입을 열었다.


“그러실 필요 없어요. 저 선애하고 결혼 안할거예요. 금요일에도 가지 않을 거구요.”


“그게 무슨 말이야?” 그의 어머니 입에서 비명같이 큰 소리가 나왔다.


“아니 도대체 왜?” 


그는 침대에 걸터 앉아 양말을 벗었다.


“그 애 성질이 좀 그래서 그렇지, 그만한 집이 또 어디 있다고! 니 주제에 그런 집 딸하고 결혼한다니까 과분해서 니가 정신 못차리고 있구나!”


그가 양복바지는 입은채로 그냥 침대위에 벽을 바라보고 누웠다. 술기운이 완전히 올라서 정신이 없었고 두통으로 머리는 지끈 거렸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산속에서 메아리 치는듯 혹은 확성기로 떠들어대는듯 혼란스럽게 들려왔다.


“저, 선애 좋아하지 않아요. 어머니. 이제 그만 나가세요. 저 피곤해요.” 그가 눈을 감고 중얼거렸다.



방안이 조용해졌다. 


갑자기 설움이 복받쳐서 눈물이 솟구쳐 나왔다.


“저 정훈이가 좋아요. 정훈이가 보고 싶어요.” 그가 손으로 눈을 가리며 중얼거렸다.


“누구?”


나가신 줄 알았던 어머니가 그의 말에 양말과 넥타이를 들어올리다 말고 몸을 세워서 그를 돌아다 보았다.


“너 지금 뭐라고 그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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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pa…
  • 작성일
동병상련.
....
...
..
.
네글자를 써놓고 한동안 멍하니 하늘을 보았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그겨울'님의 작품을 읽으면서 이쪽 세계에 대한
그리고 사람에 대한 고민을 더욱 진지하게 한다.
그 고민이 괴로운 것이 아니라 행복해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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