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의 숲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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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등포 타임 스퀘어의 한쪽 귀퉁이에 있는 프랜차이즈 도너스 가게의 밖에 있는 야외의자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5월의 미지근한 바람이 불어왔다. 깊은 산골의 숲속은 아니라 하더라도 눈을 감고, 가슴을 펴고 일부러 크게 긴 호흡을 해 보았다.

 

다시 눈을 뜨고 테이블 위로 시선을 돌렸다.

 

노란 봉투가 눈에 들어왔다.

 

마치 주인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겠다는 앙칼진 의지를 가지고 따라다니고 있는 충견처럼, 아니 오히려 죄인의 손에 채워진 수갑처럼 그것은 나에게서 떨어지지 않고 그렇게 내 발목을 잡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 주위를 다시 한번 돌아보았다.

 

얼굴에 밝은 웃음을 띄고 걷고 있는 다정한 젊은 연인들과,   앞으로 졸망스럽게 뛰어 가고 있는 아이에게 조심해 넘어져!” 라고 외치고 있는 아기 엄마와 그런 그 둘 뒤를 느릿느릿 따라가는 남편인 듯한 남자도 눈에 들어왔다.

 

나를 제외한 그 곳의 모든 사람들이 행복해 보였다.

 

강한 바람이 불어와 내 머리를 날렸다.

손으로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넘기면서 테이블위의 봉투로 눈길을 돌렸다.

 

다시한번 크게 심호흡을 한번 한 다음 나는 손을 뻗어 그 봉투를 내 앞으로 끌어 당겼다.

돌돌 말아감은 끈을 느릿한 손동작으로 풀었다. 마침내 봉투의 입을 막고 있던 끈이 풀리고 그 봉투의 노랗고 긴 입이 벌어졌다.

 

떨리는 손으로 그 봉투 속으로 손을 집어 넣었다. 두툼한 노트 한권과 사진 몇장이 나왔다.

 

예상외로 그 사진 속에서는 나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오히려 그가 런던에서 생활했을 때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그가 잘생긴 한 남자와 다정하게 함께 트라팔가스퀘어라는 곳에서 찍은 사진이 나왔다. 어디서 본 듯한 남자 였다. 누구였더라. 그래, 그랬다. 예전에 호텔 커피숍에서 본적이 있었다. 현준이라는 남자가 틀림없었다. 윤호가 나에게 그랬었다. 런던에서 있을 때 만난 형이라고.... 나이어린 애인도 있다고..... 자기에겐 나밖에 없다고.....

 

그 다음 사진속에서 그가 티셔츠를 들고 밝게 웃고 있었다. 그것을 보자 순간 눈가에 눈물이 스며나오기 시작했다. 어깨부터 가슴으로 내려가는 핑크색 사선이 그려져 있는 셔츠와 그의 환한 웃음이 나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누가 이런 나를 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주변을 돌아보았다.

 

노트의 첫장을 펼쳤다.

 

첫 페이지에는 내가 읽어도 무엇인지 모르는 내용이 가득했다. 그의 일에 관련하여 그가 자신만의 노하우를 적어 놓은 듯이 보이기도 했고, 무슨 암호문을 받아놓은 듯 이해하지 못할 내용이 가득했다.

 

페이지를 넘겨도 비슷한 내용이었다. 어느 장소의 약도도 보이고, 건물의 청사진인 듯한 것이 페이지 사이에 끼어있기도 했다. 누구와의 비즈니스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해야할 일의 순서도 적어놓은 것이 보였다.

 

손을 부지런히 놀려서 페이지를 넘겨 보았다.

 

그렇게 노트의 반 정도 넘겼을 때 나의 눈을 끄는 글이 있었다.

 

사랑하는 세진이...”

 

큼지막하게 쓰여 있는 그의 글씨체. 슬며서 손끝으로 그의 글씨체를 어루만져 보았다.

 

그리고 나는 조용히 노트를 덮었다. 그 다음에 써 있을 내용들을 더 읽을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늘어져 있는 사진을 모아서 다시 노트와 함께 봉투 속에 넣었다.

 

 

소현이 그의 글 속의 상대방이 나라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는 것이 확실해졌다.

 

 

그를 처음 만나게 된 술 자리에서 모두 자신을 닉네임으로 소개한 적이 있었다.

 

그전까지 아무 생각 없이 있던 나는 갑자기 머릿속에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아 당황한 채로 있었다. 이런 저런 이름을 곰곰이 따져보고 있을 때 마침내 내 차례가 되어버렸다.

순간 준비도 안된 상태에서 나는 될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그저 입에서 튀어나오는 대로 입을 놀렸다.

 

, 제 닉네임은 힘이세진입니다.

 

내 말을 들은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냥 줄여서 세진이라고 불러주세요.”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와 처음 만나 서로를 알게 되면서 인연을 쌓기 시작한 때부터, 그에 관해서 거의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아니 알고 있었다고 해도 마찬가지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을 것이다.

 

그와 나 사이에 벌어진 일 들은, 어짜피, 나의 의지로는 바뀔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었을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처음 그와 내가 만난 순간부터 이렇게 이미 미리 운명지어진 것일뿐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마치 빗방울이 떨어져 그것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개울을 지나 계곡 사이를 흘러, 뱀이 기어 가는 듯이 굽이치는 냇물과 강을 따라. 유속이 빨라지는 좁은 수로를 지나, 강렬한 물살과 하나가 되어 강한 폭포를 온몸을 부딪쳐 떨어져야 하는 것처럼...

 

그런 내 자신은 그저 그렇게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하늘에서 떨어져서 주변의 상황에 의해 운명이 결정지어지는 것 뿐이다.

 

 

그렇게 내가 나의 앞에 벌어질 미래를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과 달리, 윤호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어떤 루트에 접어들었는지, 앞에 어떤 장애물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인지... 느릿한 호수와 같은 잔잔한 시간 속에서도 그는 앞의 길이 급속도로 돌변할지를 예측하며 초조해하고, 또 언제 우리가 폭포에 다다를지를 이미 예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폭포에서 떨어지는 순간 자신은 수만개의 물보라로 흩어졌지만, 그는 그 순간 나를 앞쪽 웅덩이로 던졌을 것이다. 안전하도록.... 최소한 자신처럼 그렇게 산산조각 나지 않도록...

 

 

 

그래도, 이제 그도 괜찮을 것이다라고 내 자신의 무지를 합리화 시키기 시작했다.

 

이제는 그도 느릿하고 잔잔하게 흐르는 강 하류를 따라 흘러가고 있을 것이다. 깨어진 상처도 나처럼 아물어가고 주변에 익숙해지고, 잃은 것으로부터 눈을 돌려 그가 손에 쥐고 있는 것들, 또한 나를 놓아야 했기 때문에 다시 되찾을 수 있는 것들도 보고 있을 것이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했다.

그와 내가 떨어져 있는 그 시간 동안, 그는 그의 현실에 적응 했을 것이었다.

 

익숙해지고, 그의 앞을 내다보고 자신의 인생을 다시 계획하고, 넉넉한 삶을 준비하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오로지 그의 몫이었다. 지금 내가 가고 있는 길이 완전히 내 자신의 몫인 것처럼....

 

이제 자신의 삶속에서 천천히 침전해가는 그의 마음속에 더 이상 나의 공간은 존재하지 않을 듯 했다.

 

이제는 그렇게 나를 사랑했던 그에게, 상처만 남기고 떠났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저 상대의 깊은 마음도 모르고 그렇게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해서 그의 가슴을 할퀴고 떠나버렸던 이기적인 들고양이 같았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런 상처를 준 것에 대해 사과하고 자신의 길을 가도록 편안하게 보내주는 것일 뿐이었다.

 

 

 

그를 찾아 그의 병원을 방문하기 위해 월차를 썼던 그 날도 아침부터 화창했다.

 

병원까지 용기를 내어서 찾아왔지만, 병원 건물 앞의 벤치에서 나는 한참을 망설였다. 마음속에 형체모를 두려움이 내 발목을 잡았다.

그 두려움의 대상이, 그 인지, 그의 어머니인지, 아니면 내 자신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곳까지 와서 다시 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어깨에 멘 가방 속에는 그에게 돌려줄 봉투가 들어있었다. 인사말 한두마디와 그것을 건네주면 끝나는 일이었다. 기껏해야 오분 십분이면 되는 일이었다. 그만한 일에 용기도 못내는 것은 정말로 최악의 비겁한 일이었다.

 

 

5층에서 엘리베이터가 열렸다. 밖으로 발을 옮겨 오른쪽으로 돌아서 그가 있는 병실로 향했다.

 

문 옆에 붙어있는 환자의 이름을 확인했다.

그의 이름이 다른 한 환자의 이름과 나란히 붙어 있었다.

긴장된 마음으로 그의 병실 문을 열려고 문에 손을 대려는 순간 문이 화들짝 열렸다.

 

흰색을 입은 간호원이 제일 먼저 밖으로 나왔다.

 

잠시만요그녀가 나를 옆으로 비키라는 손짓을 했다.

 

그녀는 뒤에 한 노인이 누워있는 스트레쳐카를 당기고 있었다. 그 뒤에는 또 한명의 남자 간호사와 환자의 보호자인 듯한 사람이 얼굴에 수심이 가득한 채로 밖으로 나왔다. 아마 검사를 가는 듯 했다.

 

그들이 지나 간 후, 다시 닫혀버린 문에 슬며서 손을 대어서 밀어보았다.

 

열려진 틈을 통해서 그의 모습이 보였다.

 

침대 양쪽으로 설치된 철제 장치로 왼쪽 다리가 허공에 들려서 묶인채로 그는 벽쪽으로 얼굴을 향하고 누워있었다.

 

심장이 쿵쿵거리면서 뛰기 시작했다.

 

혹시 다른 사람이 있는 지 슬며서 문을 더 밀어 보았다. 그 주위에는 그 밖에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슬며시 방안으로 들어섰다.

 

긴장으로 입안이 마르고 가슴은 오그러들어서 통증이 느껴졌다. 심장 박동이 너무 크게 뛰어서 그에게 들릴것 같았다.

 

그에게 천천히 발을 옮겼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그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나와 눈이 마주쳤다.

 

놀랬는지, 반가운지, 불편한지, 좋은지, 나쁜지... 아무런 표정없이 그는 나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나도 잠시동안 그렇게 누워있는 그를 바라보았다.

 

....찮아?” 한참의 침묵을 깨고 내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가 슬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를 보면서 슬며시 나지막히 한숨이 나왔다.

 

오랜만이네.”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안죽는다. 걱정마.“

 

그의 말에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던 내 입으로 하고 웃음이 나왔다.

 

그러자 그의 표정이 천천히 변하기 시작했다. 굳어져있던 그의 얼굴이 점차 펴졌다.

 

손을 뻗어 그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는 슬며시 그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잘 지내지?” 그가 간신히 들릴만한 작은 소리로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해.” 담담하게 말하려고 그렇게 노력했건만 울먹이는 듯한 소리가 나와버렸다.

 

내가 미안해. 내가...” 그가 나와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

 

.... 잘못한 것 아무것도 없어.” 그가 느릿하게 힘을 주면서 말했다.

 

“.......”

 

그리고....”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자 그가 내 말을 막았다.

 

우리 이제 다른 길 가고 있잖아.” 말을 마치고 그가 슬며시 내 손을 놓았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서로의 얼굴만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잠시동안의 침묵이 흘렀다.

이제 돌아가. 좀 있으면 간병인하고 아는 사람들 몰려올거야.”

 

말을 마치고 내 얼굴을 외면하고 다시 벽쪽으로 얼굴을 향하면서 그가 눈을 감았다. 나는 그대로 잠시 서서 그런 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슬며시 돌아섰다.

 

 

엘리베이터를 향해 걷다가 나는 중간에 있는 라운지로 무심코 시선을 주었다.

 

커피 자동판매기 옆의 의자에 앉아서 서현이 커피를 마시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한번 고개를 끄덕해보였지만, 그는 곧 시선을 나에게서 벽에 켜 있는 티비로 돌려벼렸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에 내려서 몇걸음 걸음을 옮긴 다음에야 나는 그에게 봉투를 건네주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잠시동안 망설였다.

하지만 또 다시 봉투를 건네주러 온다는 것은 큰 부담이었다. 천천히 나는 걸음을 엘리베이터 쪽으로 돌렸다.

 

 

병실문 앞에서 또 다시 나는 망설였다.

 

그 짧은 사이에도 혹시 누군가가 그를 찾아와서 그와 함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슬며시 문을 조금 열고 안의 인기척을 확인하려고 했지만, 알 수 없었다.

 

문을 받치고 있는 손에 좀 더 힘을 주었다.

 

이제 열린 틈 사이로 그의 모습이 보였다.

 

그런건 아니야. 내 잘못이지....” 서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사이에 서현이 돌아와서 둘이서 어떤 대화를 하는 듯 싶었다.

 

형 잘못 아니야.” 나지막히 윤호가 대답했다.

 

그리고 그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들어가서 봉투만 건네주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문을 받치고 있는 손에 힘을 주려는 순간, 다시 윤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고... 민환이.... 안되겠지?” 그의 울먹이는 목소리는 차라리 호소하는 듯 들렸다.

 

안되지.” 서현이 대답했다.

 

그 대답에 윤호가 천천히 고개를 서현이에게서 돌려 벽을 향했다. 그의 어깨가 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지막히 그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비상계단을 몇 걸음 걸어 내려오다가 더 이상 걷지 못하고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앞이 노랗고 뿌옇게 되어서 보이지 않았다. 손에서는 식은 땀이 나고 가슴에 느껴지는 통증으로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숨이 막혀서 쉬어지질 않았다.

 

계단의 한 중간에서 벽을 기대고 쪼그리고 앉아서 가슴을 쥐고는 고개를 숙였다.

 

참으려고 했지만, 가슴에서 쥐어짜는 듯 꼭 감은 눈에 눈물이 배어나오기 시작했다. 필사적으로 눈을 꼭 감고 입을 악물었다.

 

귓속에서 윤호의 흐느끼던 목소리가 울리는 듯했다.

 

나를 버리고 배신했다고 그렇게 믿고 미워했었던 그가... 그렇게 오랫동안 내가 저주했던 그가.. 이미 한참 전부터 나는 다른 사람 만나고 있다는 것을 들었을 그가 여전히 그런 나를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으으으으...” 마침내 감정이 북받쳐 올라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울음이 터져 버렸다.

 

미안해.....” 손으로 나의 머리를 감싸고, 마치 그가 내 앞에 서있기라도 하듯 그렇게 늦은 사과를 했다.

 

정말. 미안해....” 머리를 감싸안은 두손을 들썩이다가 주먹을 쥐고 벽을 향해 한번 휘둘렀다.

 

너 혼자 그렇게 힘들게 해서 미안해.... 내가 비겁해서 미안해...”

 

주머니에 들어있던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종현이가 틀림 없었다. 하지만 그 벨소리는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는 듯 했다. 한참을 울리다가 마침내 조용해졌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그렇게 움직이지 못하고 주저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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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n class="sv_wrap"> <a href="https://ivancity.com/bbs/profile.php?mb_id=formylife" data-toggle="dropdown" title="그리고함께 자기소개" target="_blank" rel="nofollow" onclick="return false;"> 그리고함께</a> <ul class="sv dropdown-menu" role="menu"> <li><a h님의 댓글

  • <s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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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다, 재미있다를 기본으로
울림이 잔잔하게 커지는 작품이라는 것.

창작의 고통이 희열이 되기를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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