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의 숲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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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일 바쁘다면서 평일에 어떻게 올라왔어?” 종현의 표정을 살피면서 조심스레 넌지시 물었다.
"너, 어디 몸이라도 안좋은 줄 알고 허겁지겁 달려왔지.” 그가 씨익 웃었다. 그 또한 나의 표정에 신경을 쓰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회의중이라 전화를 못 받았다고 했잖아.” 여전히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혹시라도 그가 다른 생각이라도 하게 될까 싶어서 태연한 척 말했다.
“그것 때문에 올라온 거 아냐?” 말을 마치고 나는 나의 시선을 슬그머니 그로부터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부천역의 2층에 있는 커피숍에서 내려다보는 야경은 호젓하게 느껴졌다. 광장을 가로지르는 사람들의 모습이 드문드문 보였다.
나는 다시 시선을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커피잔으로 돌렸다.
“너, 오늘 월차라고 했잖아.” 그가 피식하고 웃었다.
순간 아차 싶었다. 이래서 거짓말도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던가.
들통난 것이 멋쩍고 두려워서 그 순간 그의 눈을 마주본다는 것이 부담스러웠지만, 그의 표정이 궁금해져서 고개를 들었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하지만 그의 표정에는 핀잔이나, 어떠한 비난의 느낌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저 해맑은 표정에 애인을 걱정하는 그런 그의 어쩔수 없이 착한 본성이 배어나오고 있었다.
“......”
그에게 어떤 말을 꺼내야 할 지 전혀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없어서 그저 입을 다물었다.
그런 그에게 진실을 말하지 못하고 윤호를 만나러 갔었다는 것을 비밀에 붙였던 내 자신에게 화가 났다.
“말해 봐. 무슨일인데?” 잠시의 침묵이 흐른 뒤, 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
아무말도 못하고 나는 그저 커피잔의 끝 부분을 손끝으로 문질렀다.
“뭔데? 말 못할게 뭐가 있어? 은행이라도 털었냐?”
그의 말에 고개를 들어서 그를 흘끗 본 후에 다시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사실......그게...”
밖의 어둠으로 인해서 유리창에 그와 나의 모습이 흐릿하게 비치고 있었다. 그런 유리창에 비쳐진 그의 모습을 보았다. 조용한 모습으로 여전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윤호... 만나러 갔었어.”
그리고 그가 다시 무슨 말을 꺼내기 전에 얼른 다시 입을 열었다.
“교통사고 당했대. 다리를 많이 다쳤는데 철사를 다리에 박고 누워있대서... 서너달이나 병원에 꼼짝말고 있어야 한다고 하더라구.”
“아....” 그가 입을 열었다.
“저런... 어쩌다 그랬대?”
“운전부주의...였겠지. 뭐.”
“그랬구나.”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다고 말해도 나 다 이해할텐데. 뭐하러 숨겼어. 그 정도도 내가 이해 못하고 화낼거라고 생각했던거야?” 그가 나를 보고는 씨익 웃어보였다.
“오늘 내려갈거야? 아니면 늦었는데 자고 아침에 일찍 갈래?" 할말을 잃은 나는 궁색하게 말을 돌렸다.
“아침에 가지 뭐.” 그가 다시한번 피식 하고 웃어보였다.
“그리고 말야" 뜬금없이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면서 말을 꺼냈다.
나의 말에 잠자코 누워 있던 그가 고개를 나에게 돌렸다.
“윤호... 소현씨하고 별거중이래.” 나의 말에 그가 나의 이마를 만지던 손가락을 멈췄다.
“설마.....” 그가 말을 멈추었다.
“헤어질건 아니겠지?”
“그렇진 않겠지.” 조용히 그의 말에 대답했다.
“말이 그렇지. 이혼이라는게 그리 쉬운가?” 창문의 틈새로 들어오는 희미한 빛에 마치 공중에 부유한 듯이 보이는 방의 천장을 올려다 보면서 내가 말했다.
“하긴.... 그런데 왜?”
“소현씨가 눈치챘나봐. 윤호가 게이..... 란거.” 말을 끝내고 느리게 한숨을 쉬었다.
“저런. 어쩌다가?” 그가 상체를 들고 일어나 앉아서 나를 내려다 보았다.
“글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잠시 망설였다.
“여자들은 특히 그런데 촉이 있잖아. 그냥 지나갈 만한 일에도 뭔가 찜찜한 걸 느끼고 꼭 확인해보는 그런거 말야.”
그가 여전히 움직이지 않고 나를 빤히 보았다.
“윤호한테 사람붙였었나봐.” 그에게서 시선을 돌려 다시 멍하게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앞일이 쉽지 않겠네.”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충격이 크겠지만, 사랑에 올인하고 앞뒤 안보고 달려들 그런 사람은 아닐 듯 싶어.” 대답을 하면서도 아무 느낌이 들지 않는 다는 것을 순간 깨달았다. 마치 나와 전혀 상관 없는 아침드라마의 내용을 얘기하는 듯했다.
“처음엔 받아들이기 힘들겠지만, 윤호가 뭐 성격이 못됬다거나 그런걸로 속썩이는 것도 아니고, 소현씨도 이제 서른 넘었고.....” 잠시 말을 멈추고 손을 뻗어 그의 손등을 어루만졌다.
“소현씨 부모님도 꽤 이름있는 분들이던데 사회적으로 이혼녀 타이틀을 붙이고 산다는게 그리 쉽지도 않을테고...” 입안이 건조해져서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얼마만큼 상처 딛고 일어서면 어느정도는 체념하고 다시 주어진 현실에 적응하면서 살아가는거지 뭐.”
말을 멈추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왜?” 그가 자신의 손을 놓는 나에게 물었다.
“물한잔 마시려고....” 방을 가로질러 발을 옮겨 냉장고를 열고 물병을 꺼내서 옆에 있던 종이컵에 물을 조금 따랐다.
“소현씨 힘들겠네.”
“그렇겠지.” 내가 어둠속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뭐, 사람들 조금씩은 다 그렇게 인생의 속임수에 적응해나가는게 아닐까 싶어.” 물 한잔을 다 마시고 나서 컵을 내려놓았다.
“윤호가 헤어지자는 것도 아니고, 시부모 잘 살겠다. 슬쩍 눈한번 질끈 감고 인생에서 할 수 있는 것하고 즐길 수 있는 쪽으로 시선 돌리면 그리 나쁜게 아닐지도 모르지. 남편이 무능력하거나, 폭력이 있다거나, 자신을 우습게 보거나, 시부모와 갈등이 심하거나.. 별별 많은 일을 겪어도 참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으니 말야. 그런것에 비하면 훨씬 낫다고 생각이 들수도 있고 말야.”
계속 그런식으로 말을 하다보니, 내 입을 통해서 나오는 말이 그에게 그를 만나야 했던 일에 대한 변명거리가 아니고 내 자신에게 현실을 직시하라고 타이르는 듯한 말로 느껴졌다.
“윤호는?” 잠시동안의 침묵 후에 그가 물었다.
“윤호가 뭐?”
“지금처럼 그렇게 살려고 할지 말야.”
“좋든 싫든....” 몸을 돌려 다시 침대쪽으로 향하면서 입을 열었다.
“지금 이 대로 살아가는 것 밖에는 다른 대안이 없지.” 말을 마치고 슬그머니 이불속으로 기어들어갔다.
“그녀랑 헤어진다고 해도 집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또 부모에게 들볶이느니 이미 자신을 알게 된 그녀와 타협해서 살아가는 것이 최선일 듯 싶어.”
“그렇게 할거래?” 그가 물었다.
“아니. 내 생각이긴 하지만. 윤호 입장에서도 다른 대안은 찾기 힘들지.... 둘이 잘 해결되고 잘 살거야.”
나의 말에 그가 안도의 한숨을 크게 쉬었다.
“왜?” 다시 눕는 그를 바라보면서 내가 물었다.
“아니...... 사실....”
그가 말을 잇기전 잠시 망설였다.
“이런말을 너에게 한다는게 너무 바보 같은 짓인줄 알지만.......”
“뭔데?”
“지난해 겨울, 너네 회사 앞에서 너 기다릴 때, 윤호 본것 같다고 했었잖아.”
"아 그거? 잘못 봤을지도 모른다면서...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그거 윤호였어.” 그가 담담하게 말했다.
“.........”
“또.....”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전에 호텔라운지에서 너랑 같이 있을 때, 내가 화장실 갔다 올 때, 윤호랑 마주친 적 있었어.”
“.........”
“카페 입구쪽에서 너 앉아있는 뒷모습 보고 있더라구.”
그의 말에 내가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그러다가 내가 다가가니까 나와 눈이 마주치고는 당황해서 돌아서서 가더라고.”
“.........”
“외국 바이어 만나러 왔다가 우연히 너 보게 된건가봐. 외국인 둘하고 명함 교환하고 곧 나갔으니까.”
“뭐.. 세상 좁으니까.” 내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대답했다. 하지만 그 순간 내표정이 어땠을지 자신이 없었다.
“그래. 네 말대로 이제 모두 과거 일이니까.” 그가 팔을 뻗어 나의 어깨를 안았다.
“그래. 내 곁엔 네가 있으니까.” 그렇게 그의 가슴속에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심술궂은 운명이란 놈이 더 이상 자신의 손에 나를 올려놓고 잔인하게 웃음짓지 않기를 바랬다. 이 세상에는 나 말도고 그것이 가지고 놀 수 있는 인간의 숫자가 너무 많기에 이제 나로부터 시선을 돌리기를 바랬다.
소현의 전화를 받은 것은 윤호를 병원에서 다시 보게 된 후, 두주 정도 지난 화요일 오후였다.
날씨는 이제 본격적으로 초여름의 햇살이 내리 쬐고 출근을 하고 나면 옷에서 땀냄새가 배어 나기 시작한 때였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사무실로 향하는 도중에 그녀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오랜만이네요.” 불편하지만 겉으로는 반가운 듯한 척, 목소리를 내려고 노력했다.
그녀와 그가 어떻게든 그 둘의 사이에 있는 문제를 끌어안고 봉합하기를 내심 바라고 있었다.
그들의 문제가 나의 삶에 영향을 끼쳐 내가 감당하기 힘든 상황으로 다시한번 나를 몰아가지 않기를 바라기만 하고 있었다.
“민환씨도 잘 지내셨죠?” 그녀가 물었다.
“예. 저야 뭐. 그냥.... 그런데 그 서류를 아직 윤호에게 전달을 못했네요. 죄송합니다. 제가 요즈음 너무 바빴거든요.” 그녀가 묻기 전에 내가 미리 선수를 치듯 서류 얘기를 꺼냈다. 아무래도 그녀의 전화는 서류의 전달을 물어보기 위한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 예....” 그녀가 나의 말에 잠시 머뭇거렸다.
“그런데 민환씨.” 그녀가 큰 소리로 나의 이름을 불렀다.
“네?”
“혹시 그 서류 보셨나요?” 그녀가 물었다.
“예. 봤다기 보다는.. 사진 몇 장 들어있었고. 노트는 회사일 같던데요....” 내가 말 끝을 흐렸다.
“민환씨에게 부탁이 좀 있는데요.” 그녀가 나의 말을 자르듯이 물었다.
“.......”
“그 사진속에 남자요. 런던에서 윤호씨와 같이 있던 남자요. 혹시 그 남자 아시는 분인가요?”
그녀가 물었다.
“아뇨. 아는 사람은........”
“그럼 혹시 보신적은 있나요?” 그녀가 다시 물었다.
“글쎄요. 본적이 있는지........” 호텔 로비에서 마주쳤던 현준이라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 틀림 없었다. 하지만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당황스러웠다.
“민환씨.” 그녀가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고 내 이름을 불렀다.
“예?” 더 당황해진 나는 목소리가 떨렸다.
“윤호씨가 사귄 사람이 있어요. 세진이라고...... 잘 모르겠는데, 아마 그 사진속의 남자가 세진이란 사람 같아요.”
“..........”
“윤호씨랑 어떻게 되든. 우선 먼저 그 세진이란 사람을 만나보고 싶어요. 꼭 좀요. 다르게 수소문 해서 찾아볼까 하다가, 그래도 민환씨는 알고 있을 것 같아서요.”
“..........”
휴대폰을 들고 있는 손바닥과 등뒤로 땀이 배어나기 시작했다.
“제가 민환씨 얼마나 믿고 의지하는 지 잘 아시죠? 꼭 좀 그 사람 좀 찾아서 알려주세요. 그 사람과 대화를 먼저 해보고 윤호씨와의 관계를 생각해 봐야할 것 같아요.
"꼭 좀 부탁드려요.“ 그녀의 목소리가 마치 선인장의 가시처럼 내 귓속으로 들어와 박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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