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의 숲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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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많이 바빠?”
“그러게. 좀 많이 바쁘다.” 종현의 피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벌써 4주째 주말도, 쉬는 날도 없이 강행군이네.” 걱정스러운 투로 내가 말했다.
“한참 오더가 있을 때 바짝 벌어놔야 하는 일이라....”
벌써 오랫동안 종현은 몰려든 주문 때문에 일에서 손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 주말동안 혹시라도 내가 내려가서 얼굴이라도 보고 올라올까 하고 생각했지만, 그는 그런 나를 만류했다. 혼자서 지내는 것도 아니고 가족과 다른 직원들도 함께 하는 일이라 그렇게 편하게 혼자서 빠져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근데 민환아.” 그가 나지막히 불렀다.
“왜?” 그에 대해서 불길한 느낌만 계속 가지고 있던 터여서 그가 그렇게 나의 이름을 부르자 덜컥 겁부터 나기 시작했다.
“그게.....” 말을 잇지 못하고 그는 잠시동안 침묵을 지켰다.
자신은 눈코뜰새 없이 바쁘고 또 나도 연락이 뜸해지자 혹시라도, 설마, 우리 관계를 다시 생각해보자거나, 시간을 두자는 말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사실은...” 말을 잇기 전에 그가 잠시 머뭇거렸다.
“청주 시내에 내가 아는 사람이 여행사를 하는데.... 능력있는 경력 사원이 필요하대서....”
그거 어렵게 말을 꺼내고는 나의 대답을 기다렸다.
“아.....” 예상 밖의 그의 말에 안도의 한숨이 슬며시 빠져나왔다.
“근데, 어쩌지? 지금 내가 맡아서 진행하는 일도 있고.......”
“당장 오라는 것은 아니고...”
“........”
“여유 좀 있으니까.... 천천히 생각 좀 해줄 수 있을 까 해서...”
“그래. 알았어 생각 좀 해 보고...”
전화를 끊고 자리에 누웠다.
벌써 거의 한달 동안 하루도 못 쉬고 일하면서도 아는 사람들을 통해서 내가 청주로 내려올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었다는 것이 놀랍기도 하고 고마웠다.
하지만 아직까지 지내온 터전을 뒤로 하고 낯선 도시로 떠난 다는 것은 여전히 상당한 부담으로 나에게 작용하고 있었다.
아니 정말 그것이 유일한 장애물이었을까. 혹시라도 상황이 악화된 윤호와 소현이의 사이에 어떻게든 다시 끼어들어 보겠다는 그런 얄팍하고 이기적인 생각이 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래서 그렇게 나밖에 모르고 나만을 바라보는 종현에게 등을 돌리고 다시 윤호와 어떻게 다시 시작하겠다는 의도가 추호도 없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몸을 돌려 모로 누워서 눈을 뜨고 어두운 방안을 초점없이 바라보았다.
사실, 그런 바램이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와 내가 애초에 헤어진 이유인 그의 부모님은 여전히 그와 나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것이고, 어쩔 수 없이 그와의 관계는 불가능 한 것이었다.
떠오르는 상념을 간신히 떨치고 막 잠이 들려고 하는 순간 다시 휴대폰이 울렸다.
머리맡에 있는 휴대폰을 들어 누군지 확인을 했다. 모르는 번호였다. 잠시 동안 받을까 말까 망설였다. 하지만, 이미 손이 통화버튼을 무의식적으로 눌러버렸다.
“여보세요?”
“나야. 자는 거 아니지?” 윤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 자는 건 아닌데 어쩐 일이야?‘ 놀래서 상체를 일으켰다.
“별건 아니고, 나 곧 퇴원 해.”
“아. 그래.” 몸을 기울여 벽에 기댔다.
“다행이다.”
“그래서 퇴원하기 전에 내일 좀 보고 싶은데. 시간 괜찮아?” 그가 넌지시 물었다.
“점심 먹고 병원 앞으로 한시경에 갈까?”
“그래 그럼. 병원 건너편에 브리츠카페 라고 있는 데 혹시 알아?”
“가본 적 있어.” 어둠속에서 귀에 울리는 그의 목소리에 조용히 대답했다.
“그럼 내일 한시에 그리고 와. 자고 있는 목소리 같던데, 어서 자.” 여전히 그도 조용하게 말했다.
“그래, 알았어. 내일 봐.”
다시 몸을 눕혔지만, 잠은 다시 사라져 버렸다.
그렇지 않아도 그가 퇴원할 날짜가 다가왔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기 전에, 나의 감정도 정리한 후, 그에게 말을 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늦게 그가 나에게 만나자고 전화를 했다는 것은 그도 마찬가지로 어떤 식으로든 이미 마음의 정리를 했다는 의미일 듯 했다.
초여름의 따가운 햇살이 내리 쬐었다.
이제 조금 더 있으면 한여름의 태양은 독수리의 발톱이 되어 목덜미를 공격하게 될 것이다.
여느 때 같으면 가로수 그늘만 찾아 시냇물에 놓인 바윗돌 밟고 건너기하듯 했겠지만, 무거운 걸음을 힘들게 걷는 나의 머릿속에는 그런 초여름의 가시바늘 같은 햇볕의 따가움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게 걷기를 10여분, 드디어 윤호를 만나기로 한 카페에 도착했다.
그는 창가 구석 자리에 앉아서 내가 걸어오는 것을 얼굴에 웃음이 가득한 채 바라보고 있었다.
선글라스를 낀 채로 얼굴을 가린다고 해도, 나는 그 검은 선글라스 안에서 눈웃음 짓고 있는 그를 언제나 볼수 있었다.
“왔어?” 그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목발 짚고 다니기 불편하지?” 그의 의자 옆에 놓여있는 엘보 클러치에 시선을 주면서 자리에 앉았다.
“그래도 걸어다니는 것만 해도 얼만데.” 그가 선글라스를 벗고 나를 보고 크게 한번 웃어보였다.
“이렇게 밖에 나와 앉아있는 거 보니, 넘 좋다.” 그를 보고 나도 미소를 지어보였다.
“커피는 니가 사라.” 그가 씨익 웃었다. “ 나 다리 불편해서 카운터까지도 걷기 힘들어.”
“날씨 더워져서 이제 너 무지 고생하겠다.” 음료수의 뚜껑을 연 후, 그 안의 얼음알갱이를 손가락으로 꺼내는 나를 보면서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게, 여름동안 어디 알래스카나 그런데로 가서 파견근무하고 싶다.” 꺼낸 얼음조각을 입안에 넣었다.
“우리.....” 그가 슬며시 자세를 고쳐 앉았다.
“핀란드나 스웨덴 같은데로 가서 살까?” 그가 말을 끝내고 씁쓸한 표정으로 웃었다. 슬픔이 묻어나왔다.
“..........”
“여름도 짧고, 너 좋아하는 겨울도 아주 길고......” 그가 커피잔을 들어 빨대를 입에 가져다 댔다.
대답을 하지 않고 나는 그의 얼굴만 빤히 바라보았다.
“나 못 믿어?” 그가 표정을 진지한 척 바꾸면서 물었다.
“아냐. 믿어.” 내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도 사실....” 그를 보고 겸연쩍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너하고 아무도 모르는 데로 가서 살고 싶다.” 말을 멈추고 그의 눈을 피해 커피잔을 내려다 보았다.
“진짜로... 우리 그렇게 할까?” 그가 물었다. 답답하고 힘든 목소리였다.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 안에 고통이 서려있었다. 그렇게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두고 마치 모든 것을 내 대답에 맡기겠다는 눈빛이었다.
나는 슬며시 고개를 저었다.
“왜?” 그가 물었다.
잠시동안 나는 입을 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창밖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시선을 두었다.
“주변에 사람들 많이 괴롭히고 내 행복만 찾아서 간다는 게.....”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나, 그동안에도 내 주변 사람들에게 상처만 주면서도 너무 무책임했는데.....”
슬며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또 다 버리고 나만 행복하겠다고, 그렇게 한다는 게...”
내 말에 그의 표정이 더 어두워졌다. 손을 뻗어서 그의 손을 슬며시 잡았다.
“너도, 나 좋아하는 만큼, 네 주변 사람들에 대한 네 역할... 그거 버릴 수 없잖아.”
“그래도 네가 원하면...” 그의 낮고 거친 목소리가 입 밖으로 나왔다. 일그러진 얼굴에 고통이 배어났다.
“알고 있어.” 내가 그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너, 나밖에 없다는 거....나 위해서 뭐든지 할 거라는 거...” 상처받고 지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던 그가 시선을 창 밖으로 돌렸다.
“그래도, 너는 여기 있어야 할 것 같다.”
“..........”
“너와 행복하다고 해도, 뒤에 두고 온 사람들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평생 괴로울 것 같애. 너도 평생 그들의 환영에 시달릴테고...” 그가 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표정이 더 일그러졌다.
“그래도 너와 얼마나 행복했는데....”
“........”
“너가 어디에 있든 상관없이, 너와 있었던 추억 때문에 나는 여전히 행복할테고....” 흔해빠진 진부한 말이었지만 그게 내가 느끼는 사실이었다. 가슴 저 아래에서 슬픔과 고통이 덩어리 되어 목구멍을 타고 올라왔다. 목은 막히고, 가슴은 답답했다.
“그동안 너한테 해 준건 없으면서 상처만 줘서 정말 미안해.”
일그러진 그의 볼을 타고 눈물이 흘렀다.
힘들게 다리에 힘을 주고 일어나 그에게 발을 옮겨 그를 내려다 보았다.
그가 내 배에 얼굴을 묻고 두 팔을 돌려 내 허리를 감았다. 그리고 그렇게 꼼짝않고 나를 붙잡고 있었다.
놀란 나는 주위를 돌아보면서 그를 떼어내려고 했지만 그는 나를 꽉 끌어안고 그렇게 있었다.
“저기서 잠시만 앉았다 갈까?” 그가 목발로 병원 옆의 잔디밭에 있는 벤치를 가리켰다.
“잠시만... 응? 제발..” 그가 나의 표정을 살폈다.
어쩌다 이런 사람이 내 곁으로 와 나를 사랑해 줄 수가 있었을까? 어떻게 나와 같은 부족한 존재가 그의 사랑을 그렇게 독차지하며 누릴 수가 있었을까. 어떻게 끝끝내 이 사람은 나를 이렇게까지 사랑할 수 있을까? 어떻게 운명은 이런 그를 나에게 주었다가 다시 뺏어갈 수 있을까? 어떻게 운명은 그렇게 끔찍하게 잔인할까.
“소현이 왔다 갔어.” 벤치에 나란히 앉아서 잠시 침묵이 흐른 뒤, 그가 입을 열었다.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너 만났다고 하더라.”
“그래. 얼마전에....” 그에게서 시선을 앞으로 돌리면서 내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너가 충고한 대로....” 그가 잠시 말을 멈추고 내쪽으로 얼굴을 향했다. 나도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나랑 헤어지겠대.” 그가 다시 나에게서 고개를 돌려 앞쪽에 있는 병원건물을 바라보았다.
“내가 헤어지자고 할 때에는... 잠시 시간을 두고 서로 다시 생각해보자고 하더니...” 그가 말을 멈추고 한번 기침을 했다.
“너 만나서 대화하더니 그렇게 결심했더라구.” 그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뭐라고 한거야?” 그가 물었다.
“그냥, 흔하고 뻔한 얘기 였는데...”
“.......”
“그냥 소현씨가 가족이라고 생각하고 한번 해 본 말이었어.” 말을 잇기 전 슬며시 한숨을 내 쉬었다.
“‘부, 명예 다 가지고 있다고 해도 사랑이 없는 인생을 사는 것이 얼마나 불행할까’ 라고만...”
내 말을 듣고 그가 피식하고 웃었다.
“너라서 다행이라고 하더라. 소현이가.....” 잠시 서로 병원 정문을 들어가는 사람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뭐가 나라서 다행이야?”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해서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내가 자기 만나기 전에 사랑했던 남자가 너라서......”
“...........”
“왜? 몰랐어?” 그가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나를 바라보았다.
“전혀....”
“소현이가 내가 보관하던 노트 너 줬다던데...” 그런 나를 바라보면서 그도 당황한 듯 보였다.
“노트에 내 이름 있었어?”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거의 맨 뒤편에 네 이름 있었어.”
“.........”
“안 읽어봤던 거야?” 그가 손을 내밀어 내 팔꿈치를 한번 만졌다.
“중간에 첫 페이지에 세진이라는 이름으로 네가 썼길레...”
“아...” 그가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하고 관계 마무리 짓기 전에 너 다시 한번 보고 싶다고 하던데..”
“..........”
그렇지 않아도 그녀를 한번 만나 볼 생각이었다.
그리고 혹시라도 가능하다면, 그녀에게 고백을 하고 싶었다. 내가 윤호의 ‘그’ 였다 고. 그리고 그녀에게 사과를 하고 싶었다. 속이려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내 자신을 변명이라도 말 해 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녀의 원망의 표현을 모두 받아주고 싶었다. 내가 그녀에게 준 상처를 아물게 해 줄수는 없지만, 최소한 그녀의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화풀이 상대는 되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녀가 나의 존재를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이 나의 마음을 오히려 편안하게 해 준건지, 아니면 그녀를 마주하는 것이 더 힘들게 만드는 것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슬며시 몸을 일으키는 나의 손을 잡고 그가 나를 잡아당겼다 . 그리고 주위를 한번 둘러본 후, 나를 끌어안았다. 가슴에서 느껴지는 심장박동 소리가 나의 것인지 아니면 그의 것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그저 잠시만, 세상이 그리고 질투의 신이 우리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아주 잠깐이나마 이렇게 내버려 두기만을 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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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반가웠다.
내 삶의 반경을 두르고 있는 공간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소설의 서사가 맘에 든다.
유치해 보이는, 그러나 순수함을 농밀하게 그려내고 있는
이 소설에 나는 오늘도 빠져들어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