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의 숲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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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직원의 통화하는 목소리가 마치 꿈속에서 처럼 멀리서 몽롱하게 들리고 있었다.

 

마치 눈 앞의 사무실의 모습이 신기루처럼 내 눈에 흔들거리며 비춰졌다. 고개를 숙여 내 두 손을 내려다 보였다. 나의 이 두 손은 정말로 존재하는 것인가? 아니면 내가 그냥 그렇게 믿고 있는 것 뿐일까?

 

고개를 들어 책상 한 켠에 켜져 있는 컴퓨터 모니터를 멍하게 바라보았다. 모니터 속에 푸른 초원과 그 뒤로 솟아 있는 높은 산과 그 산봉우리를 덮고 있는 흰 눈처럼, 내 앞에 있지만 내 앞에 없는 것이 얼마나 많이 있을까?

 

그리고 우리들은 또한 나의 것이 아닌 것을 나의 것이라고 얼마나 믿고 살고 있는가?

 

이대리님.”

 

우리가 우리의 것이라고 믿고 우리의 손아귀에 쥐고 있는 것은, 곧 형체 없는 물이 되어서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 버릴 것이다. 그리고 그제서야 우리는 당연히 우리의 것이라고 믿었던 것의 흔적만 발견하게 되고 그로 인해 순식간에 상실감과 공포에 빠지게 될 것이다.

 

이대리님!”

 

정현숙씨의 목소리가 몽롱하게 현실과 신기루 사이의 가장자리를 걷고 있던 나를 순식간에 현실로 소환했다.

 

?” 나의 당황한 표정을 보고는 그녀는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방해드려서 죄송해요.” 말을 멈추고 그녀가 다시 한번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웃어보였다.

 

그래도 좀 급하게 상의 드려야 할 일이라서요.”

 

뭔데?” 어깨를 펴고 다시 사무실의 대리로 돌아와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지난해 11월에 암스테르담 여섯커플 패키지 취소 되었던 것 기억하시죠?”

 

? 아 그래. 고객중에 까다로운 사람이 있다고....”

 

맞아요.” 그녀가 맞장구를 쳤다.

 

조한식씨라고 아주 까칠하고 까다로운 고객요.” 말을 멈추고 그녀가 A4 용지에 여행 계획 아웃라인을 만들어 놓은 것을 내 책상에 슬며시 올려놓았다.

 

지난해 취소했던 여행, 올해 다시 하겠다는데요. 그때와 똑같이 여섯커플이고요.” 말을 마치고 그녀는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리다가 나는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그래서?”

 

여전히 에스코트 지원자가 없어서요.” 이 말을 하고는 그녀는 하고 웃었다.

 

...” 그런 그녀의 얼굴을 보면서 난처하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래도 우리 돈벌어주겠다고 오는 손님을 안받는다고 할 수도 없고.....”

 

벌써 몇 년 째 매출로는 꽤 짭짤한 고객이니, 이렇게 힘들 때 놓칠 수도 없는 일이고요.” 그녀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래서 말인데요.” 그녀의 얼굴에 멋쩍은 듯한 미소가 흘렀다.

 

저번에 그러셨잖아요. 지원자가 없으면 대리님께서 해주시겠다고......”

 

.....” 그녀가 나를 애교 넘치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럼 어쩔 수 없네. 내가 한번 갈 수 있는 사람 알아보도록 하지, .”

 

그럼 에스코트는 대리님께 맡겨도 되죠?” 그녀가 큰 문제가 해결됐다는 기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

 

, 그건 그렇고요.” 그녀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외람되지만, 혹시라도 기분 나쁘게 생각하시지 마시고요. 뭣 좀 여쭤봐도 되나요?”

 

뭔데? 괜찮으니까 말해 봐.”

 

혹시 무슨 큰 고민이 있으신가 하고요.” 그녀가 다른 직원들을 슬며시 돌아보고는 넌지시 물었다.

 

?” 갑작스러운 그녀의 질문이 당황스러웠다.

 

마치, 실연한 사람 모습이셔서요. 요즘 대리님 모습이요.”

 

“...........”

 

오지랖이긴 하지만요.”

 

그녀가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여자는 여자가 잘 안다고 혹시 연애가 잘 안되실땐 제가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요.” 그녀가 다시한번 겸연쩍은 표정으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런 그녀를 보고 슬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여러 생각이 머릿속에 들기 시작했다.

 

남의 사생활에 신경쓰지 말라고 핀잔을 줄 껄 그랬나? 아니면 이참에 존재하지 않는 여자친구에게 차인 상처를 그럴듯하게 말해서 한참 연애로 불태울 나이의 총각을 향한 불필요하고 불쾌한 관심을 잠시동안 희석시킬 기회로 만들까?

 

 

어찌 남들이 눈치를 채지 못할 수가 있을까.

 

이미 일주일이 넘도록 나는 손에 아무것도 잡지 못하고 있었다. 사무실에서 의자를 돌려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는 일도 자주 있었고, 들릴 듯 말듯 한숨을 내쉬는 경우도 많았을 테니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모른다는 것이 오히려 더 이상할 일이었다.

 

 

 

서류가방을 챙겨서 외근을 이유로 밖으로 나왔다.

 

 

정오의 태양은 머리 위에서 이글거리고 거리는 열기로 넘쳐났다.

 

아직 한여름이 되려면 꽤 남은 7월초였지만, 때 이른 더위는 한여름의 그것을 이미 뛰어넘고 있었다.

 

 

멍하게 걷다가 정신을 차려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가 입원해있었던 병원 앞이었다. 그렇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곳으로 다시 와 버렸다.

 

김유신은 자신을 기녀에게 데리고 간 말의 목을 베었다는데, 그렇다면 나는 나도 모르게 계속 윤호의 자취를 찾게 하는 내 다리를 베어버려야 하는걸까.

 

 

그와 마주하고 앉았던 구석자리에 말라빠진 이파리처럼 구겨져서 앉았다.

 

그가 여기 있었다. 바로 내 맞은 편에... 목발은 의자 옆에 세워놓은 채로...

 

그의 슬픈 미소가 눈앞에 떠올랐다. 그의 아픈 목소리가 다시 내 귓속에 퍼졌다.

 

우리.. 같이...아무도 없는 곳으로 도망가 버릴까?” 마치 두 번째 기회라도 주는 듯, 슬픈 그의 환영이 나에게 그렇게 다시 물었다.

 

그래...” 내가 기꺼이 입을 열었다. 그리고 기쁘게 대답했다.

 

네가 그 말을 해주길 내가 얼마나 기다렸다고......” 아픈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옆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던 여성의 시선이 느껴졌다. ‘이상한 사람이다라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인가.

 

그의 모습이 눈 앞에서 흔들렸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을꺼야.’ 가슴조이는 고통을 참으면서 내 자신을 진정시키기 위해, 다시 나지막히 중얼거렸다.

 

버티다 보면 이 아픔 무뎌질꺼야. 그러면 괜찮아 질거야. 다들 겪는 아픔인데. 무슨 벼슬이라고....’ 피식하고 쓴 웃음이 나왔다.

 

시간이 지나면 다시 편해질거야. 시간이 도와줄거야.” 앞에 놓인 커피에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것은 아무런 위로의 말도 건네주지 않았다.

 

그런데.....” 가슴이 너무 아팠다.

 

하지만, 네가...... 너를 이렇게 사랑했던 이 감정이 사라지면..... 아픔이야 사라지겠지만... 서운해서 어떻게 살아.” 허무한 마음에 씁쓸한 한숨이 나왔다.

 

너가 내 안에서 나보다 더 크게 살아왔는데... 그런 너가 없는데 아픔만 사라진다는게 무슨 소용이야.“ 숨을 쉴수 없는 고통으로 가슴이 녹아내리는 듯이 느껴졌다.

 

데려다 줘.”

 

이제 얼마만큼 감정으로부터 진정되어 있었지만, 여전히 나는 현실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으레 모두 그러하듯, 현실로 돌아오고 싶지 않았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너 있는데로 데려다 줘.” 슬며시 손을 뻗어보았다. 하지만 내 앞에는 나의 손을 잡아줄 그가 없었다.

 

다시 빳빳하게 굳어진 모습으로 그렇게 다시 말라 비트러진 이파리같이 구겨져서 한참을 멍하니 윤호가 앉아있던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나이에 걸맞지 않게 마치 십대마냥 어이없는 상태에 빠져서 실연의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회식에 참석전에 일을 끝내기 위해 직원들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런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나도 컴퓨터를 끄고 자리를 정리하기 시작하다가 손을 멈추었다.

 

정현숙씨?” 목소리를 높여 이름을 불렀다.

 

?” 내 말에 바쁘게 손을 움직이던 그녀가 나를 돌아보았다.

 

이번 에스코트로 나가는 투어, 출발이 언제지?” 사무적인 투로 물었다.

 

좀 빠듯한데. 2주 후에요.” 그녀가 빤히 나를 바라보았다.

 

혹시 에스코트 갈 사람 구하신거에요?”

 

아니.” 내가 고개를 저었다.

 

내가 갈게.”

 

.” 그녀가 밝게 한번 웃고는 다시 고개를 돌리고 분주하게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집에 돌아와 옷을 갈아입지도 않고 벽에 등을 대고 방바닥에 쪼그리고 앉았다.

 

술이 꽤 올라 그렇게 앉아서 내가 내 볼을 툭툭 쳤지만, 아프다기 보다 웃음이 나왔다.


제정신으로 하기 힘든 일은 이렇게 알맞게 취해서 간이 배 밖으로 나왔을 때 해치우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휴대폰을 집어들고 화면을 밀면서 전화번호를 찾았다.

 

여보세요.”

 

. 안녕하세요. 소현씨.”

 

네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죠?” 술김에 그녀의 목소리가 명랑한건지, 화가 난 건지, 차분한 건지 잘 구분이 되지 않았다.

 

, 전 잘 지냈습니다. 고맙습니다. 소현씨도 잘 지내셨죠?”

 

, 저도 덕분에 잘 지냈어요. 그런데 술 드셨나봐요?” 아무리 차분하게 목소리를 내려고 해도 술에 취해 꼬인 혀는 어쩔 수 없는 것 같았다.

 

회식이라서요.” 꼬이는 발음을 멈추기 위해 말을 잠시 멈췄다.

 

혹시 괜찮으시면 내일 커피 한잔 사드리고 싶은데요.”

 

. .” 그녀가 잠시 말을 멈췄다.

 

내일 낮에는 다른 일이 좀 있어서요. 퇴근하시고 저녁에 뵐까요?”

 

그럼 내일 저녁에 뵙도록 할게요.” 말을 마치고 마치 그녀가 앞에 있는 양 고개를 숙여서 인사를 했다.

 

그럼 퇴근시간 맞춰서 전화 드리도록 할게요. 민환씨.” 그녀가 대답했다.

 

 

머릿속에 종현이 떠올랐다.

 

그리고 보니 벌써 일주일동안 그에게서 연락이 없었다. 또한 나도 그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다. 그의 번호가 휴대폰 화면에서 내가 통화버튼을 누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몇 번을 누르려고 했지만, 무엇인가가 그런 나의 손을 붙잡았다.

 

그의 목소리가 듣고 싶기도 했지만, 술에 취한 내가 그와 통화하면서 실수를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도대체 무슨 실수를 한다는 것인지, 연인 사이에 목소리 듣는 것이 무슨 큰일인지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정말로 내가 그의 연인이란 말을 할 자격이 있는가 하는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내 앞에 보이는 정리되지 않아 엉망이 된 방의 모습은 나의 내면의 세계를 비추는 듯 했다.

 

아니, 나의 인생이 감당이 되지 못할 정도로 훨씬 더 꼬여 있었다.

 

방은 그저 몸을 조금 움직이면 정리되겠지만, 엉망인 내 삶은 어떻게 해결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손에 들었던 휴대폰을 내려놓고는 그냥 그렇게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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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pa…
  • 작성일
경험담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사실감이 도드라진다.
나의 청춘은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에
그래서 어느 작품보다도 몰입감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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