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비스워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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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사한 통유리로 외벽이 되어있는 최신 스타일의 멋진 신축 건물의 4층에 내가 근무할 사무실이 있었다.

그 곳의 한쪽에 있는 내 자리에 앉아서, 나는 팀장이 준 자료를 정리하고 있었다.
   
분주하게 돌아가는 사무실에서  키보드에 손을 얹고 손가락을 움직이다가도, 감격에 겨워서 나에게 주어진 신형 노트북을 슬며시 어루만지곤 했다.
좌절의 구덩이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나에게, 이렇게 주어진 행운속에서 나는 행복에 겨워서 가슴이 벅차는 감동이 끓어올라 가끔씩 꿈을 꾸고 있는 듯한 착각을 할 정도였다.
   
이것이 꿈이라면, 죽을 때까지 절대로 깨어나서는 안 되는 그런 소중한 꿈이었다.
   
   
출근을 시작한 지 며칠이 지난 금요일 저녁이었다.

퇴근시간이 훨씬 지난 후에도 사무실의 다른 직원들의 눈치를 보다가 마침내 직속 선임사원의 퇴근하라는 말을 듣고는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날 때 휴대폰이 울렸다.  우영이였다.

“퇴근 한거지?”

“아!  이제 퇴근하려고 일어나는 중이다.”

“그래?  난 퇴근한 줄 알고...  문자를 보낼 걸 그랬네. 아직 전화통화하는 것도 눈치보일텐데.....” 

“아냐. 괜찮아.”  그렇게 미안해 하는 그에게 마치 그가 내 앞에 있는 듯이, 슬며시 밝게 웃어보였다.

“시간 괜찮으면 오늘 함 볼래?”  그가 다시 환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다른 애들도 몇 온다는데..... 오랜만에 종로에서 함 뭉쳐 봐야지?”

“글쎄....” 하루 종일 눈치로 시간을 보내다보니 피곤함이 몰려와 집에가서 그냥 쉬고 싶은 생각을 하고 있던 중이였기에 그의 말에 잠시 망설여졌다.

“너한테 소개시켜 주고 싶은 사람도 있고....... 급한 일 없으면 얼굴 좀 보자.”

“누군데?  혹시 애인이라도 생긴거야?”

“뭐.... 그런...걸..까?  그렇겠지?  아마도?...” 그가 묘한 말투로 빙긋거리는 웃음을 띤 목소리로 말했다.
   
   
   
“야! 진짜 오랜만이다.” 

나를 보자마자 우영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테이블을 돌아나와 나의 손을 덥썩 잡았다.
그렇게 그는 환한 얼굴로 나를 반겼다.

그런 그의 얼굴을 보자,  예전에 자타공인한 절친이라던 내가 피곤하다는 것을 핑계로 이렇게 그를 만나는 것을 미루려고 했다는 것에 슬며시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그는 여전히 같은 동갑내기 친구들 중에서 가장 빛나고 있었다.
변호사인 아버지와 대학교수인 어머니 사이에서 부유하게 모자람 없이 성장한 그가 나를 ‘절친’이라고 생각해주는 것을 나는 나도 모르게 고마워하고 있었다.

어두운 구석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환하고 밝은 얼굴,  많이 배우고 똑똑하다는 것이 느껴지는 또랑또랑한 눈, 보는 이들까지 기분 좋게 만들어주는 매력적인 눈웃음,  보는 이들을 설레게 하는 볼에 슬며시 패이는 보조개와, 항상 대화 상대를 경청하는 듯 보이는 그의 신중한 모습, 아나운서 지망생이라고 해도 믿어줄만한 듣기좋고 정확한 말투의 목소리는 그의 주위에 사람들을 모이게 하는 신기한 매력을 풍겼다.
   
그래서 예전부터 그렇게 완벽하게 보이는 그에게 애인이 없다는 것이 왜일까 하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지만, 그렇게 모든 것을 갖춘 그가 한 사람에게 정착하지를 원하지 않을 것 같다는 추측도 하고 있었다.

   
나중에 도착한 다른 친구 둘까지  모두 넷이서 세 병째 소주의 뚜껑을 딸 무렵, 한 친구가 느긋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래. 네가 소개시켜준다는 그 사람은 언제 오는거야?”

“아... 일 때문에 지방에 내려갔다가 올라오느라고 조금 늦는댔어.  그래도 조금 있으면 올거야.”  밝은 얼굴에 홍조를 띠고 우영이 대답했다.

“사귄지는 얼마나 됐는데?”  그 옆에 있던 친구가 물었다.

“그게...그러니까....으음...” 우영이 대답을 못하고 잠시 머뭇거리더니 다시 예의 그 환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사실.. 사귀는 사이라기보다는....”

“섹파냐?” 친구가 우영의 말을 끊고는 웃으면서 물었다.

“아냐!”  그의 말에 우영이 펄쩍 뛰었다.

“이제 진지하게 좀 만나보려고....그래서 너네들이 그 사람을 보고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 좀 해달라고...”  그가 말을 멈추고 배시시 웃었다.

“아, 그럼 썸남이구나?” 친구가 물었다.

“뭐...그런 셈이지...” 우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뭘 그렇게 뜸을 들여. 그냥 ‘썸 타고 있다’라고 말하면 되지.” 그 친구가 ‘큭’하고 웃었다.

“그래도.... 이렇게 진지하게 생각하는 관계가 처음이라서...”  멋쩍은 웃음을 지으면서 우영이 손을 들어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우영이 말한 상대는 삼십대 중반 정도 보이는 소위 말하는 ‘젠틀맨’이었다.
   
세련된 정장의 모습으로 따뜻한 눈빛을 발산하는 그의 등장에 그가 소주집의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부터 테이블에 앉아 있던 수많은 게이들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그리고 여전히 그가 우리가 앉은 테이블로 성큼성큼 걸어와 자리에 앉은 후에도 주위의 몇몇 사람들은 그를 흘끔거렸다.
   
“소개할게.”  그가 자리에 앉자 우영이 그를 손바닥을 펴고 가리키면서 입을 열었다.

“여기 이 형이....내가 말한 주형이 형이야.”  우영이의 말에 그가 멋쩍은 웃음을 보이면서 슬며시 고개를 끄덕 해 보였다.

“저.... 초면에 이런거 여쭤봐도 되는 지 모르겠지만....” 내 옆에 앉아있던 친구녀석이 그를 보고 입을 열었다.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소주병을 들고 그의 빈잔에 술을 따르면서 친구 녀석이 물었다.
“마흔하나예요.” 그가 멋쩍게 웃었다.

“정말요? 그렇게 안보이시는데요.” 다른 녀석이 놀란 표정으로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뭐, 관리를 안했다면 거짓말이겠지요?‘ 그가 그 녀석을 보고 씨익 웃었다.

“모두 우영이하고 동갑내기 친구들이신가봐요?” 우리 모두를 그가 한번 둘러보았다.

“이 친구는 어디서 본 것 같은데....”  그의 시선이 나에게서 잠시 머물렀다.

“네? 전...잘....” 당황한 나는 그런 그를 유심히 보았다.  하지만 그의 모습을 본 기억이 없었다.

“회사가 혹시 여의도 증권거래소 근처 아니예요?”  그가 다시 희미한 미소를 지으면서 물었다.

“아닌데요.  제가 워낙 특징 없는 흔한 얼굴이라....”

“왜요.  매력 있으신데요.”  그가 멋쩍어하는 표정의 나를 보고는 슬며시 윙크를 했다.

“우영이하고 사귄지는 얼마나 되신거예요?” 친구 녀석이 그를 보고 물었다.

“네?” 갑작스러운 질문에 그가 당황한 듯한 표정으로 그 친구 녀석에게서 우영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사귀는거 아니라니까....” 우영이가 슬며시 그 친구를 보고 인상을 써 보였다.

“아직은.....”

“우리는 그냥....”  여전히 당황한 표정으로 그가 우영이에게서 그 친구 녀석에게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냥, 거국적으로 한잔 해요.” 그의 말을 가로막으며 우영이가 얼른 소주병을 들고 비어있는 술잔들을 찾아서 채웠다.

“오늘은 정말 기분 좋은 날이거든요. 제 절친도 마침내 다시 서울로 입성해서 직장인들의 치열한 전투속에 뛰어들었네요.”  우영이 시선을 돌려서 나를 보고 빙긋 웃었다.

“아, 그래요? 축하해요.” 그가 나를 보고는 빙긋 웃었다.
   

술잔을 비우자 마자 주형이 형의 휴대폰이 울렸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휴대폰을 들고 부지런히 술집의 문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저 형 진짜 괜찮다.”  한 녀석이 우영이를 보고 미소를 지으며 은근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근데, 저 형, 너하고 정말 썸 타는 거 맞아?” 다른 친구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면서 물었다.

“너하고 저 형... 아무리 봐도 대화나 분위기에서 아무 케미도 느껴지질 않는데?”

“사실.....” 그런 그 녀석의 말에 당황해진 우영이가 씁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직은... 아무 사이도 아니긴 하지... 난 좋아하는데, 저 형은 그냥 날 동생으로만...”

말을 멈추고 우영이 자신의 잔을 들고 한입에 들이켰다.

“아직까지는....”

“그래?” 그 말을 듣고 옆에 앉아있던 녀석의 얼굴에 희색이 만면했다.

“그럼...” 그가 슬며시 우영이의 눈치를 보았다.

“너랑 잘 안되면, 내가 대시 한번 해봐도 돼?”  그렇게 말을 하고 녀석은 큭하고 웃었다.

“뭐.....그럼.  당연하지.” 우영이 그 녀석을 보고는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아직은 아무 사이도 아닌데. 내가 뭐라고 할 자격도 없지 뭐.” 말을 멈추고 우영이 나를 보고는 빈 소주잔을 내밀었다.  나는 말 없이 손을 뻗어 소주병을 들고는 그의 잔을 채웠다.

“근데, 만약에 그렇게 하고 싶다면 말야.”  우영이 다시 소주잔을 들어 한입에 털어 부었다.

“날 두 번 다시 친구로 볼 생각은 마라.”  그렇게 말하는 녀석은 계속 싱글 거리고 있었고  말투도 농담처럼 들리긴 했다.  하지만 녀석의 웃는 눈동자 속에 마치 얼음장 같은 차가운 기운이 느껴져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통화를 끝낸 그가 술집의 문을 열고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아... 정말 미안한데....” 그가 휴대폰을 바지 주머니에 넣으면서 아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오늘 불금이라 늦게까지 같이 하려고 했는데, 집에 일이 좀 생겨서 가봐야 할 것 같다.” 그가 우리 모두를 둘러보았다.

“정말, 미안하다.  다음에 만나면 내가 거나하게 한 번 크게 쏠게.  알았지?”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나는 우리들을 둘러본 후, 그는 우영이에게 손을 한번 흔들어 보이고는 등을 보이고 소주방의 문을 열고 밖으로 사라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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