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비스워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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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내음이 완연하게 느껴지는 3월 말이었다.


하루의 일이 끝나고 이제 퇴근 시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정신없이 바쁜 듯이 보이는 다른 선배 사원들의 눈치를 보면서 무엇인가 하는 척이라도 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슬며시 몰려와 모니터 화면에서 작업해 놓은 파일들을 다시 한번 돌려보고 있을 때였다.

“이 승우씨.”

나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네!’ 하고 크게 대답을 한 다음 고개를 돌렸다.

“뭘 열심히 하는 척하고 그래. 특별이 할 일도 없을텐데.” 선임사원인 윤대리가 나를 슬쩍 보고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그냥 어서 퇴근해. 오늘 급여일인 것은 알고 있지?” 그가 여전히 자신의 컴퓨터의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다가 그를 빤히 바라보는 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통장으로 입금 되었을 테니 확인해보고 이제 퇴근 해서 오늘은 친구도 만나고 좋은 시간 보내.” 그가 나를 보고 씨익 한번 웃어 보인 다음 자신의 모니터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서 1층 라운지를 가로질러 입구로 향하면서 나는 휴대폰으로 은행계좌를 확인 해 보았다.
역시 첫 월급이 들어와 잔액을 말해주는 황홀하게 아름다운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심장이 터질 것 같이 뛰고,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 내 온몸을 휘감았다.


출근하고 처음에는 회사생활에 걱정도 했었다.

신입사원이라면 모두 마음속에 겪는 기대감과 두려움 이외에도 갑자기 추가로 충원된 직원이 나 혼자라서 개인적으로 교육을 해 주던 인사과 직원이 한 말 때문이었다.

마치 지나가는 말투로 그는 나의 선임사원인 윤대리가 꽤 까탈스러울거라고 눈치있게 그의 비위를 맞춰보라고 했었다.

“회사생활이라는 것이 다 그렇게 쉽지가 않아요.” 
그렇게 그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건넸다.

그런 그의 말이 머릿속에서 맴돌아 처음엔 바짝 긴장을 하고 생활을 했건만 그런 나의 걱정은 기우에 지나지 않았고 친절한 윤대리를 보면서 그런 선입견을 갖고 있던 내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그렇게 나의 첫 한달 동안의 회사생활은 아주 성공적이었다.


 

건물의 회전문을 빠져 나와 계단을 내려오는 나의 어깨 뒤쪽을 누군가가 툭 하고 건드리는 것이 느껴졌다.

“아....” 고개를 돌리고 나를 보고 웃고 있는 사람을 보고 나는 깜짝 놀랬다.

“여긴...어떻게....”

“이제 생각이 났네.” 그는 여전히 웃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여의도에서 본 적이 있는 줄 알았더니... 여기였어.” 그가 말을 마치고 다시한번 피식 웃었다.

“..........”

“그런데 뭐가 그렇게 좋아요?” 그가 여전히 놀라서 멍해있는 나에게 물었다.

“아...네...뭐....” 적당한 대답을 찾지 못하고 나는 머뭇거렸다.

그런 나의 팔꿈치를 그가 슬며시 잡아 끌었다. 그리고 나의 옆에서 걷기 시작했다.

“좀 아까 생각이 났는데, 전에 여기 5층 상품관리과에서 본 것 같은데?”

그런 그의 말에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입사 후, 신입 사원 교육을 혼자서 받느라 5층의 상품관리과에 있는 작은 회의실을 교육실로 잠시 사용한 적이 있었다. 아마 그때 그가 나를 본 듯 했다.

“사실 여기에도 내가 아는 녀석이 다녀요.  그래서  가끔 명동에 올때는 들러서 얼굴을 보고가곤 하거든요.”

“아. 네...”

“근데. 이름이 뭐예요?” 그가 물었다.

“아..저...”

“내 이름은 이미 알고 있지요?” 그가 망설이는 듯한 나의 표정을 보고는 씨익 웃었다.

“예. 이 승우라고 합니다.”‘

“알고 있어요.” 그가 말을 마치고 피식 하고 웃었다.

“........”

“큼직한 신입사원 명찰을 가슴에 달고 있던데....”

“아......” 처음 일주일동안 이름이 크게 써 있는 신입 사원 명찰을 가슴에 달고 교육을 받았었다.
하지만 그래도 같은 회사도 아니고 타 회사의 직원을 만나러 온 사람이 이제 갓 입사한 신입사원의 얼굴을 기억한다는 것도 뜻밖의 일이었다.

내가 남들이 눈여겨 볼만한 외모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눈에 띄는 몸매를 소유한 것도 아니었다.  나는 그저 평범한 사람들 중에서도 극히 평범한, 특징 없이 지루한 외모의 소유자라는 것을 내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어떻게 절 알아보시고.....”

“어떤 사람은 한번 보면 그냥 기억에 남기도 하죠.” 그가 나를 보고는 슬며시 웃어보였다.



“잠깐 간단하게 커피나 같이 한잔 하고 갈까요?” 명동역 입구가 가까워지자 그가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아...그게...제가 조금... 피곤해서요....”

나의 대답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그가 발을 멈추고 나를 돌아보았다.

“우영이 때문에 그러는 건 아니예요?”

“.........”

“우영이는 그냥 내가 아는 동생일 뿐인데......”

“.........”

“그냥 간단하게 여기에서 커피만 후딱 한잔 하고 가요”  손가락으로 바로 옆에 있는 카페를 가리키면서 그가 나를 보고 상냥한 표정으로 웃어보였다.

“오래 붙잡지 않을게요.”

“..........”

“나이 들어서 혼자 카페에서 커피 마시고 앉아 있는 것이 좀 어색해서 그래요.”

“..........”

“그냥, 5분만 말동무 해줘요. 내가 카페인 중독이라...” 그가 말을 멈추고 쑥스러운 듯 웃었다. 그가 지금 하는 말이 모두 나와 같이 있고 싶은데, 부담은 안주려고 하는 핑계인 것처럼 느껴졌다.

아니... 나의 그런 추측이 맞는 것일까? 
예전에 대학교 다니던 시절, 나의 잘못된 추측으로 인해서 그린라이트인 줄로 착각하고 반응했다가 망신당했던 경험이 한두번이던가?

 

“나는 라떼 광이고. 승우씨는?”

“.......”

그가 대답없이 여전히 멍한채로 테이블에 앉아있는 나의 표정을 살폈다.

“좋다! 승우씨는 자바칩 프라푸치노.”

나를 보고 생글거리면서 그렇게 말하는 그의 표정을 보고 피식 하고 웃음이 나왔다.

 

 

 

“집은 어디예요?” 커피가 들린 트레이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자리에 앉으면서 그가 물었다.

“정릉요.”

“아.....많이 들어보긴 했는데...거기가....”

“국민대학교 뒤편에 있어요. 예전에 대학 다닐때에도 거기 원룸에 있었기 때문에...”

“아...”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커피 맛은 어때요? 내가 멋대로 시킨거라....” 그렇게 묻고는 그는 나의 표정을 살폈다.

“예. 맛있습니다.” 그를 향해 겸연쩍은 표정으로 억지로 웃어보이고 커피 잔을 들어 다시한번 맛을 보았다. 달콤했다.

그도 자신의 커피를 들고 마치 와인잔을 들고 포도주 맛을 음미하는 사람의 표정으로 눈을 지그시 감고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런 그를 보자 갑자기 마음 속에서 따뜻한 온기가 번져서 온 몸으로 퍼져나갔다.

선한 눈빛에 밝은 표정, 그리고 부드러운 목소리... 세련된 그의 외모와 잘 어울리는 고급스러워 보이는 넥타이와 정장...

내가 항상 완벽하다고 생각해왔던 우영이와 아주 잘 어울리는 커플의 모습이었다.


커피잔을 내려놓고 그는 나를 보고 환하게 웃어보였다.

그래... 이런 모습의 그는 나의 삶의 밖에 있는 사람이었다.
나 뿐만 아니라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그렇게 자상하고 친절하게 대할 것이 틀림 없는 일이었다.
이제 나도 착각에 사로잡혀 타인의 감정을 혼동하고 좌충우돌하는 나이는 지났다.
이제 독립된 삶의 길을 찾아가며 홀로서기를 시작하는 나는 예전 보다 더 현명해지고 이성적이 되어야 한다.

“승우씨하고 같이 커피를 마시니 보통때보다 훨씬 더 맛이 새로운 것 같네요.” 그가 말을 마치고는 나를 보면서 슬며시 윙크를 해 보였다.

 



그의 목소리를 다시 듣게 된 것은 4월의 둘째주 월요일이었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사무실의 밖에 설치된 커피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서 들고 내 자리로 돌아가고 있을 때 휴대폰이 울렸다.

“감사합니다. 영업관리 시스템실 이승우입니다.”
여전히 초보 신입사원으로 군기가 바짝 들어있던 나는 얼떨결에 휴대폰에다가 대고 회사에서의 전화응대의 말투가 튀어나와 버렸다.

“그래요. 이승우씨.” 상대방이 나의 말에 피식 웃었다.

“누구신지.....” 실수에 무안해져서 누구인지도 모르는 상대방에게 물었다.

“박주형이라고....”

“아.....” 그제서야 지금 귀에서 들리고 있는 목소리와 그의 모습과 일치되었다.

“그런데, 제 전화번호는......”

“저번에 물어본다고 하고 깜빡해서.... 그 회사에서 안면이 있는 녀석에게 알아봐달라고 부탁했어요.” 말을 마치고 그가 크게 웃었다.

“그런데. 무슨일로....”

“몸이 안 좋다고 하길래... 어떤가 하고 연락한거예요.”

“네?”

“저번에 승우씨도 그렇고 우영이랑 친구들 넷이 나왔었잖아요?”

“........”

“그때 내가 일 때문에 일찍 가버려서 우영이한테 다시 넷이 모이라고 한 턱 쏜다고 했는데, 다른 친구들은 다 나왔는데, 승우씨만 안나와서요.”

“............”

“우영이한테 물어보니 승우씨가 몸이 좀 안 좋아서 집에서 쉬고 싶다고 했다고.....”

“...........”

“왜.... 아니예요?”

“아뇨....그게....” 그의 말에 머릿속이 멍해져 버렸다.

“왜요? 뭔데요?”

“..........”

궁색한 변명마저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리고 동시에 왜 우영이가 나에게 연락을 하지 않고 그렇게 그에게 말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우영이가 나와 주형이 형이 나의 회사의 앞에서 만나게 되어 커피를 같이 마신 것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무것도 아닌 일 인데, 그렇다면 어떻게 된 일인지 왜 그는 나에게 묻지 않았을까?

별것도 아닌 일이건만 그렇게 도둑이 제 발저린 것처럼 그런 생각이 먼저 머릿속에 들어왔다.

아니면 그에게 내가 모르는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일까?
나에게 연락하지 않고  ‘내가 아프다’ 고 말한 이유가 무엇일까?

“예. 컨디션이 조금 좋지 않아서...”

“많이 안좋은 것은 아니죠? 얼굴 보게 될 줄 알고 내심 기대했는데. 좀 섭섭했어요.”

 

귓속으로는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나의 눈앞에는 몇 년간을 절친으로 지내왔던 우영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는 항상 내가 의지해 오고 믿는 친구였다. 그리고 그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하지만, 주형이 형의 목소리를 통해 듣게 된 우영이의 말이 마음에 걸리기 시작했다. 내가 정말 우리의 우정에 배신을 한 것일까?  하지만 나는 그럴만한 짓을 한 적이 없는데......

‘걔가 좋아하는 사람을 네가 만나고도 걔한테 말을 안했잖아.’ 어딘가에서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그런 말 조차 어이없게 느껴졌다. 

 

“그럼 우리 언제 한번 얼굴보고 커피한잔 해요.” 그의 부드러운 말투가 멍하게 있던 나의 귀 속으로 들어와 번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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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형이나 우영이로 인해 외지서 고생하는 승우 인생 꼬이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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